B027 –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 ~ 188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자연 선택설로 다시 한번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책. 다원이 진화론에서 주장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갈턴(Francis Galton) 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영향을 미쳐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다윈이 젊은 시절 비글호 항해기간 동안 지질학, 생물학 연구를 통해 얻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는 것이 흥미있으며, 생물학에 있어서의 뉴턴을 표방했던 그의 과학방법론도 엿볼 수 있다.


a.생애

 자연선택설로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영국의 진화론자. 그의 조부도 진화론의 선구자인 그는 작은 도시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애든버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결국 박물학자가 되었다. 졸업 해인 1831년부터 5년간 해군의 측량함인 비글호에 승선하여 과학탐험을 위한 세계여행에 나선 것이 다윈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남아메리카,남태평양의 섬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면서 동식물과 지질을 조사하여 진화론의 기초가 된 자료를 수집했다.

 귀국 후 지질학회의 라이엘과 가까이했다. 그는 라이엘의 저서인 <지질학원리>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특히 <인구론>에서는 그는 식량보다 더 많은 인구가 생기는 현상을 자연계 전체에 적용시킬 경우 약한 자가 식량을 위한 투쟁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윈은 그후 20년간의 용의주도하고 광범한 연구를 통해서 1859년에 마침내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그에 앞서 1858년에 당시 말레이 반도에 있던 영국의 박물학자인 월리스부터 다윈의 주장과 똑같은 내용의 진화설의 원고를 받고 미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즉, 우선권을 다투는 불쾌한 싸움이 될 것 같은 곤란한 사태로 번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논문으로 <자연도태, 생존경쟁에 있어서 적자가 존속하는 것에 의한 종의 진화에 관하여>를 린네학회에 발표했다.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재미있게도 다음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초판 1,250부가 당일 매진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이어 1871년 <인간의 유래>가 출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b.다윈 이전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

 생명의 진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의 단계>에서 엿보여지고 있으나 현대의 진화론과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고, 18세기 중엽까지는 우주만물은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했고 생물의 종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어서 진화의 개념은 대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프랑스의 뷔퐁, 영국의 에라스무스 다윈 등에 의해 진화가 새롭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물진화론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표한 첫번째 학자는 프랑스의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동물철학>(1809)에서 동물은 생활환경이 변하면 습성도 변하고 그 결과 새로운 습성에 따라서 많이 사용하는 기관은 더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이른바  용불용설 (제1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얻은 획득형질의 유전 (제2가설)을 인정한 그의 생각은 오늘날의 유전학 지식에는 맞지 않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되나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종은 모두 다산이며 생존 가능한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자식을 만든다. 그래서 개체 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일어난다. 이때 같은 어버이로부터 출생한 개체 간에도 조금씩 변이가 보이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즉 가장 잘 적응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는다. 이러한 자연선택이 몇 대에 걸쳐서 계속된다면 새로운 종이 형성되고 그 유리한 변이성이 누적되어 종의 다양화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즉, 생물의 변이-생존경쟁-적자생존-자연선택의 과정이다는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이다.


c.<종의 기원>의 내용

 풍부한 실증적 사실에 의거하여 진화론을 전개하고 결국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상을 일반에게 인식시킨 것은 영국의 다윈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 자체가 충분한 설득력도 있었지만, 그의 자연도태설이 산업자본주의 시기의 자유경쟁의 이념과 일치되었고, 종교와 모순되는 학설일지라도 그것이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종의 기원>의 완전한 제목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내지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이다.

 서론에서는 본서가 저자 학설의 요약임을 밝히고 이어 각 장의 구성의 의미를 논한 다음, 자연선택이 종의 변화의 유일하지는 않으나 가장 중요한 방도 라고 확신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사육할 때의 변이>에서 사육에 의해 생물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인위선택이 주제가 되어 있다.

 제2장에서는 자연계의 종이 변종과 구별하기 어려운 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속중의 종의 위치를 분석하고, 종의 변종에서 생성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생존투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존투쟁은 생물과 물리적 환경조건과의 사이, 이종의 생물 사이, 동종의 생물 사이 등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데 모두 생물의 격렬한 증식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이다. 가장 격렬한 생존투쟁은 동종의 개체 간 또는 변종 간에 보이며, 이것이 자연선택의 기초를 이룬다. 다윈은 생물에 있어서 생물끼리의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4장 <자연선택 또는 최적자의 생존>은 앞장에 이어 조금이라도 유리한 변이를 갖는 개체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을 기회를 더 많이 갖는다고 말하고, 이 생존, 즉 최적자의 생존(스펜서의 표현)을 자연선택 이라고 부른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최초의 2장과 다소 중복되는 점도 있지만 변이의 기본적인 성질이 정리되어 있다. 모든 변이 간의 상관성이 강조되고 기관의 용. 불용의 영향도 인정되고 있다. 변이는 원칙적으로 유전한다는 것이 다윈 이론의 전제로 되어 있다.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5장으로 끝나고 그뒤 부분은 대체로 보론이라 할 수 있다.

 제6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미비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자연선택설에 대한 주요한 이론에 대해 자연선택이란 유용한 구조의 발달단계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바이바트의 의견이다. 이에 대해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광범위하게 원용하고 있다.

 제8장 <본능>에서는 꿀벌. 개미 등의 고도한 본능이 어떻게 발달해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9장 <잡종>에서 잡종의 생식 불능성은 종의 창조에 있어 특별히 부여된 것이 아니라 변종으로부터 종이 생성한다는 의견을 막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서술하고 있다.

 제10장과 11장은 지질학상의 문제, 제12장 및 13장은 생물지리학상의 문제, 제14장은 형태학상의 문제인데, 그러한 학문상의 모든 사실이 자연도태설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 책의 일관된 흐름은 진화요인론이라 볼 수 있다.

 그는 5년간의 항해 동안 원시종족을 방문하기도 하고 엄청난 수의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동식물의 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질시대사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아직 진화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거기서 문제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경쟁을 통해서 자연선택(생존 경쟁과 적자생존)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다윈은 두번째로 중요한 저술인 <인간의 유래>에서 더욱 충격적인 결론을 발표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선조가 오랑우탄. 침팬치. 고릴라 등의 선조와 관계가 있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이라는 결론이었다.


d.진화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

 근대과학의 발달에 있어 그 중 물리학에 있어서는 갈릴레이와 뉴턴의 시대인 17세기, 화학의 경우에는 라부아지에와 돌턴이 활약한 18세기 후반을 그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근대생물학의 전환점을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우나 다윈과 멘델의 시기인 19세기 중엽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위에서 본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래 또 한번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진화론을 모르고서는 19세기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의 발달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윈 학설의 수정

 다윈의 진화론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진화의 증거를 굳힌 점과 다른 하나는 자연도태설에 집중되고 있는데, 다윈도 자연선택설에서 라마르크처럼 개체변이에 의한 획득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전지식으로는 개체변이는 유전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1870년대에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세포는 전혀 다르다는 세포설에 입각하여 전자의 변화가 후자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후천적 성격은 단지 체세포에서만 얻어지고 부모의 생식세포 안에 있는 성격만이 유전되기 때문에 후천적 성격의 유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성직자 멘델은 완두콩의 교배를 바탕으로 결정적인 유전법칙을 공식화했고, 폴란드의 식물학자 드 브레스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입각한 돌연변이설을 발표했다. 그는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진화란 사소한 변이로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했다. 돌연변이가 환경에 알맞을 때는 돌연변이를 한 개체가 생존경쟁에 이기며 그 후손이 그 인자를 유전받게 된다. 그의 학설은 다윈 이론의 약점을 보완하여 진화론은 다윈이 제시한 것보다 완전한 것이 되었다. 

 그는 유전이 신체적인 면에서와 같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문명사회의 경우는 열악하게 태어난 자도 인도주의에 의해 생존해갈 수 있는데, 이는 자연도태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우수한 유전형질을 소유한 자만이 생존, 번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종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이 우생학은 과거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배척운동의 일환인 이민제한법과 단종법, 그리고 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이 행한 유대인 배척,

대량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1972년부터 우생학이 사회생물학으로 다시 부활되어 현재 그 존재양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참여한 정자은행 문제는 이 사상의 한 예로 나타난 것이다.


   2. 종교계의 반응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진화론은 크리스트교의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미국에서는 최근까지도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공립학교도 있으며, 진화론과 창조론 양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법정논쟁이 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논쟁은 1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3. 사회적 다위니즘

 사회적 진화론이란 다윈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원칙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스펜서, 헉슬리, 헤켈 등이 주장했으나 후에 인종주의와 전쟁찬미론을 야기시키고 약육강식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반동적 사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즉,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하고 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앵글로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인 자부심을 갖게 되고 러시아 민족은 범슬라브주의를 제창하며, 튜턴 계통의 독일민족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웠다.

 생물학과 인류학에 혁명을 가져오고 이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다윈의 명저 <종의 기원>의 힘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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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유산, 우생학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이 남긴 인종차별 사상 

(Eugenics … death of the defenceless.

The legacy of Darwin’s cousin Galton)

Russell Grigg

    지난 120년 동안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경의 생각만큼 인류에 해악을 끼친 사상은 거의 없다. 그는 우생학(eugenics)이라는 진화론적 유사과학을 수립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인종 청소, ‘결함이 있는’ 태아를 제거하기 위한 낙태 시술, 영아 살해, 안락사, 연구 목적을 위한 태아 수집 등 이 모든 일들은 우생학의 적자생존 이론에 공통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골턴(갤튼)은 누구이며, 우생학은 무엇이며, 우생학이 인간에게 어떻게 해를 끼쳤는가?


프란시스 골턴 (Francis Galton)



.프란시스 골턴(위 합성 사진에서 오른쪽)은 1882년에 영국 버밍햄의 퀘이커(Quaker) 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모계 쪽으로 에라스무스 다윈의 손자이며, 찰스 다윈(위 사진에서 왼쪽)의 사촌인 그는 장성한 후 일생 동안 다윈주의적(진화론적) 불가지론의 신봉자였으며 반기독교주의자였다.


그는 생후 18개월에 알파벳을 배웠고, 30개월(2살 반)에 책을 읽었으며, 5편의 시를 외우고, 여섯 살에 일리아드를 읽고 토론한 천재였다.[1] 1840년에는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의학과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인해 1844년 1월 졸업 당시에는 평범한 학사 학위 졸업생에 불과했다[2]. 그러나 대학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했다.


남는 것이 시간이었던 청년 거부 골턴은 레저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남서 아프리카 대륙 탐험 후 발표한 보고서로 1853년에는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 Society) 회원이 되었으며, 3년 후에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 해, 골턴은 루이자 버틀러(Louisa Butler)와 결혼했으며, 그의 장인은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해로우 스쿨의 교장을 역임했었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찬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그는 14권의 저서와 200편 이상의 논문을 집필했다.[3] 그가 발명한 것 중에는 ‘소리나지 않는’ 개 호르라기(역주: 개를 부르는 호각), 텔레타이프 프린터, 인간의 지능과 신체 기관을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와 기법 등이 있으며, 날씨 지도를 발명하고, 고기압대의 존재를 발견했다.



찰스 다윈과의 교류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은 골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869년에 다윈에게 쓴 편지에서 ”사촌이 쓴 종의 기원의 출현으로 내 인생은 진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책으로 인해 나를 오래 동안 사로잡았던 악몽과 같은 미신을 떨쳐버리게 되었으며, 그 책이야말로 나에게 사고의 자유를 알게 한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4]라고 쓰고 있었다.     




.소위 인류의 진화에 대한 유사과학적 삽화. 침팬지와의 유사성을 제시하여 흑인이 백인보다 덜 진화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1868년에 ‘과학의’ 이름으로 나타난 삽화. 침팬지 두개골을 과도하게 확대하고 ‘검둥이(역주: 원문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negro라고 표현하고 있음)’ 턱을 과도하게 늘려 ‘검둥이들’이 원숭이보다 훨씬 더 열등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저명한 진화론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조차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가 인종주의자나 ‘변두리’ 문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대의 주요 과학 저서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오늘날의 호전적인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손쉽게 외면하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출처 : J. C. Nott와 G. R. Gliddon의 지구의 토착 인종, J.B. Libbincott 출판사, 필라델피아, 미국, 1868년.


골턴은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5] 그에 생각에 의하면 재능, 성격, 지능 등의 특징들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유전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처한 환경의 불행한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극빈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특징들이 환경, 즉 개인에 대한 양육법과 양육 환경에 따른다는 주류 과학의 견해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동물들처럼 선택적으로 번식할 수 있고 번식해야한다고 골턴은 믿었다.[6] 1883년에, 그가 인류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들을 향상시키는 방법들을 연구하기 위해 ‘우생학(eugenics)‘이라는 용어[각각 ‘건강한, 좋은’을, ‘종류’나 ‘자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εύ (eu)와 γένος (genos)]를 처음 사용했다.


골턴의 견해는 인간 영혼의 존재,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신의 은총, 남과 다르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 또는 개인의 존엄성 등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1865년에 이를 주제로 그가 처음 기고한 기사에서, ”그는 사람의 추리력이 신으로부터 받은 재능임을 ...... 부인했으며, 아담과 이브 이후 인류가 죄의 저주를 받았음을 부인했다.” 그리고 종교적 감정을 '인간 종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진화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8] 


원죄 의식에 관해서, 그는 ”[이것은] 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높은 땅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낮은 땅에서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세월의 야만시대를 거친 연후에 우리 인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문명과 종교를 갖게 되었다’라고 썼다.”[9]


'세습 천재(Hereditary Genius, 1869)'에서, 골턴은 이러한 개념들을 확장해 머리 좋은 남자와 부자 여자 사이의 중매결혼 제도가 궁극적으로 우수한 인종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제의했다. 찰스 다윈은 이 책을 읽고, 골턴에게 쓴 편지에서, ”사람은 바보들을 빼고, 지능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열정과 근면에서만 차이가 있었다고 항상 주장했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너는 어떤 의미에서 반대자 한 명을 개종시키게 된 것이지...”라고 쓰고 있었다.[5] 확실히 다윈은 골턴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진화 이론을 사람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골턴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1871년 저서 '인간의 계보(Descent of Man)'에서 11번이나 골턴에 대해 언급했다.


3차례의 국제 우생학 학회(International Eugenics Congresses)가 1912년, 1921년, 1932년에 개최되었으며, 영국,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인도, 일본, 모리셔스,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온 우생학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 사상을 지지했던 명사들 중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SF 작가였던 웰스(H.G. Wells)[10], 미국 대통령인 테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가 있었다. 골턴은 1901년에 인류학 연구소로부터 헉슬리 메달(Huxley Medal)을, 1902년에 왕립 협회로부터 다윈 메달(Darwin Medal)을, 린네 협회로부터 다윈-월레스 메달(Darwin–Wallace Medal)을,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09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한 명예들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골턴은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최상의 옹호자는 되지 못했다. 그는 매우 오래 동안 질병을 앓았으며, 그와 그의 아내의 우수한 지능의 혈통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그의 이름과 유산을 상속할 자식을 낳지 못했다. 1911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대로 런던대학교의 우생학과 골턴 우생학 연구소의 기금을 후원하도록 하였다.



작동된 우생학


인류의 신체적 및 정신적 특성들을 향상시킨다는 개념은 일견 경탄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달성하는 방법은 선택된 부모에 의한 ‘적합한 자손(fit)’의 출생률을 증가시키는 것(‘긍정적 우생학’)뿐 아니라, 향상을 손상시키는 사람들, 즉 ‘부적합한 자손(unfit)’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11]


예를 들면, 1913년 무렵, 미국 주의 3분의 1(1920년대부터는 반 이상)은 ‘부적합한’ 자로 간주된 보호수용자들의 강제 단종(sterilization, 불임)을 허용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었다.[12] 이와 같은 강제 단종을 통해 약 7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자들에는 범죄자, 정신박약자, 약물 중독자, 극빈자, 맹인, 청각 장애자 등과 간질, 결핵, 매독 등에 걸린 환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 시에서만 8천 건 이상의 강제 단종이 실시되었으며[13],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도 많았다.[14, 15]


1935년과 1976년 사이에, 약 6만 명의 스웨덴 시민들에게 유사한 일이 일어났으며, 노르웨이와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자행되었다.[16]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 정부는 수감 중이거나 보호시설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장애를 지닌 모든 독일 시민들에 대해 강제 단종을 명령했다. 이 조치는 인종간 혼인으로 인해 히틀러가 바라는 ‘우월한 독일 인종’이 ‘오염’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우생학 협회 로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그러한 쓸모없는 ‘밥 벌레’들에 대한 외과적 치료가 보다 포괄적인 방법으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대량 학살(genocide)이었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하로써 살 가치가 없는 자들로 간주된 1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공식 판결문에 기록되어있다. 학살당한 자들은 유대인, 복음주의 기독교도[17], 흑인, 집시,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사지절단자, 정신병자 등이었다.


이는 당시 만연됐던 다윈주의(Darwinism)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건으로서, 자신들을 ‘적자/우성 인종’으로 여긴 학살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부적자/열성 인종’으로 낙인을 찍은 수백만 인류를 학살한 사건이었다.


다윈주의의 핵심 사상은 자연선택이다.[18] 나치는 독인 민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선택 절차를 자신들이 직접 관장해야 한다고 믿었다.[19] 그로 인해, 우생학적 유토피아(eugenics utopia)에 대한 골턴의 순진한 비전이 인종 청소라는 희대의 나치 악몽의 돌연변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슬프게도, 인종적 우월성과 우생학의 개념은 히틀러 정권과 같이 죽지 않았다. 미국의 악명 높은 반흑인 및 반유대 인종주의자인 데이비드 듀크(David Duke)는 골턴, 웰스(H.G. Wells), 아더 키스(Arthur Keith) 등과 같은 우생학자들의 저서들과 하버드 대학의 윌슨(E.O. Wilson)과 같은 근대 사회생물학자들의 초기 저서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다.[20]



21세기의 우생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생학이라는 말은 ‘혐오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이제 우생학자들은 스스로를 ‘인구학자’, ‘인간 유전학자’, ‘가족 정치인’ 등으로 불렀다. 학술지의 이름도 바꾸었다. 우생학 연보(Annals of Eugenics)는 인간 유전학 연보(Annals of Human Genetics)로 바뀌었으며, 우생학 분기 보고서(Eugenics Quarterly)는 사회생물학 저널(Journal of Social Biology)로 변경되었다.[21] 그러나 홀로코스트 후 약 60년이 지난 오늘날, 골턴의 우생학이 낳은 살인적인 개념이 다시 살아나 번성하고 있으며, 의학적 존중의 상징인 실험실 가운을 덧입고 있다. 


오늘날 의사들은 태아/배아 줄기세포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창 1:26)된 인간을 일상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가. 낙태


영국의 저명 신문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발 기형 또는 언청이나 입천장 파열과 같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기형 태아에 대한 낙태 시술이 점증하고 있으며, 보다 많은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해당하고 있다”고 한다.[22]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제클린 레잉(Jacqueline Laing) 박사는 ”이러한 모습들은 기형아를 없애는데 광분한 소비주의 사회의 우생학적 추세를 나타내는 증세입니다”라고 논평한바 있다. ”이는 노골적인 우생학의 행태입니다”라고 영국 라이프 트러스티의 뉴알라 스캐리스브릭(Nuala Scarisbrick)은 말했다. ”그들은 장애인들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끔찍할 뿐만 아니라 혐오스러운 일이지요.”[22]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5천만 건의 낙태가 시술되고 있다. 신생아 3명 당 1명에 해당하며, 세계 평균으로 볼 때, 자궁 내 태아는 4분의 1 확률로 고의살해 위험에 처해있다.[23]


나. 유아 살해


중국은 가구 당 1 자녀라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구는 아들을 원하며,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을 수도 있다. 가끔씩 그와 같은 소름끼치는 법칙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나마 다행이라면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태아의 성감별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낙태의 대부분은 여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권신장론자(feminist)들이 낙태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23]


장애아들 역시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 ‘윤리주의자’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라는 사람은 일정한 나이까지의 유아 살해를 합법화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장애아를 죽이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까지 쓰고 있다.[24]


다. 안락사


2001년 5월,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안락사(euthanasia)가 합법화됐으며, 그 법은 2002년 1월부터 발효되었다. 벨기에에서는 안락사가 묵인되다가, 2002년 5월에 합법화됐으며, 스위스, 노르웨이, 콜럼비아 등에서는 묵인되고 있다.[23]



결론


물론 모든 진화론자들이 살인자는 아니다. 프랜시스 골턴도 자신의 이론이 방어능력이 없는 미출생 아이들에 대한 학살은 차치하고,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살인 행위는 전적으로 진화론의 가르침, 즉 가장 약한 자가 도태된다는 적자생존의 법칙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다. 예수는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7–18)라고 말씀하셨다.


우생학이라는 죽음의 철학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기시에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살인, 즉 무죄한 자에 대한 고의적인 살인을 명시적으로 금하셨다(출 20:13).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며(요 3:16–17), 우리가 그를 믿을 때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변화되게 하셨다(롬 8:29, 고후 3:18).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히 2:14), 마지막 아담이 되었으며(고전 15:45), 그리하여 첫 번째 사람인 아담 혈족의 구속자(Redeemer, 이사야 59:20)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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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과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 (Scopes Monkey Trial) [1]



.스코프스 재판에서 대결했던 진화론 측의 클라렌스 데로우(Clarence Darrow, 왼쪽)와 창조론 측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스코프스(Scopes)가 가르친 진화론 교과서였던 조지 헌터(George Hunter)의 '시민생물학(Civic Biology)'과[2] 실험 부교재는[3] 노골적일 만큼 우생학적이고 무례할 만큼 인종차별적이었다. 헌터는 인류를 다섯 인종으로 나누고, ‘에티오피아계 혹은 흑인계’로부터 유럽과 미국의 문명화된 백인 거주민로 대변되는 가장 높은 등급의 백인계까지 각 인종별로 진화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4] '시민생물학'은 범죄와 부도덕은 가계 내에서 유전되어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가계들은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그 사람들이 하등동물이라면, 그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해 그들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류가 이를 허락하지는 않겠지만, 보호시설 또는 다른 장소에서 성적으로 격리하거나, 그러한 열등하고 퇴화된 인종이 혼인하여 영속화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4]


이것이 당시의 진화론자들이 스코프스가 가르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책이다! 이 모든 것은 데이비드 멘튼(David Menton) 박사가 만든 DVD인 Inherently Wind: a Hollywood History of the Scopes Trial (right)에 기록되어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The 1925 trial in Dayton, Tennessee, USA, of high-school teacher John T. Scopes, charged with violating state law by teaching the theory of evolution. 

2. Hunter, G., A Civic Biology Presented in Problems, American Book Co., New York, USA, pp. 195–196, 1914. 

3. Hunter, G., Laboratory Problems in Civic Biology, American Book Co., New York, USA, 1916. 

4. Ref. 2, pp. 26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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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gment at Nuremberg




Perhaps the most frequently asked question concerning the eugenics-inspired genocide of the Holocaust is: ‘How could it have happened?’ In the 1961 MGM film Judgment at Nuremberg, about the trial of four Nazi war criminals, judges who had enforced Nazi decrees,1 one of the defendants (Judge Ernst Janning, played by Burt Lancaster) cries out to Chief Judge Dan Haywood (played by Spencer Tracy): ‘Those people—those millions of people—I never knew it would come to that. You must believe it!’ Haywood’s response was eloquent: ‘It came to that the first time you sentenced a man to death you knew to be innocent.’


Likewise today, eugenic killing of innocent preborn babies because they are thought to be less than perfect began the first time a doctor consented to kill a handicapped child in the womb. The rest is history.


[1].Based on the third Nuremberg Trial (1947), also called the ‘Judges’ Trial’ because it tried Nazi judges and prosecutors for imposing the Nazi ‘racial purity’ programme through the eugenic and racial laws. There were a total of 13 Nuremberg Trials.


The photograph (above right) comes from the first Nuremberg Trial (1945–6), the most famous and significant of them because it tried the main German leaders.

Front row (left-to-right): Hermann Göring, Rudolf Hess, Joachim von Ribbentrop, Wilhelm Keitel;

Back row: Karl Dönitz, Erich Raeder, Baldur von Schirach, Fritz Sauckel. (Courtesy Wikipedia)

 




B026 –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고전경제학의 창시자인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개인의 이익추구와 국부증진의 조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분석한 경제학의 고전이다. 이 책에서 그는 각종 관세와 규제조치 등을 강조하던 중상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필연적 승리를 예언했다. 그리고 시장기구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분권화되고 경제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사회질서가 정착되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경제현상을 역사. 문화. 정치. 사회의 측면에서 고찰하여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방면의 교양도 얻게 하고 있다.


a.생애

 영국의 사회과학자,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스코틀란드의 커콜디에서 세관관리의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사상적으로 진보한 글래스고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도덕철학자 해치슨의 자유주의 사상과 망드빌로부터 사익과 공익의 자연조화 사상을, 흄으로부터 무역평형론을 비판적으로 배웠다. 1751년 모교 글래스고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여 해치슨 교수의 후임으로 도덕철학 강의를 맡은 그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자를 펴내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쳤다. 여기서 그는 인간행위의 타당성을 제3자적 존재인 관찰자 에 의한 동감 여부로 고찰하려 했다.

 1764년 청년공작 버클루의 개인교사로서 3년간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의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인 데이비드 흄, 달랑베르, 튀르고, 콩디악, 케네, 볼테르 등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의 사상의 폭을 넓혔다. 그리하여 귀국 후에 고향에서 <국부론> 집필에 전념하여 10년 만인 미국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6년에 발표했다. 87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에 선임되고,90년 죽음에 가까워진 것을 안 그는 죽기 전 미완성 원고가 후세에 잘못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초고를 소각시키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삶을 마감했다. 두툼한 입술, 큼직한 매부리코, 불완정한 걸음걸이 등 외견상 지성적인 풍모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저서는 2권뿐이고 소장했던 장서는 대부분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이며, 근대의 인문. 사회. 자연 등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으나 경제학에 관한 장서는 매우 적은 것 또한 흥미롭다. 3천 여 권에 달하는 그의 장서는 대부분 에든버러 대학에 보관되어 있고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은 에든버러의 집은 오늘날까지 애덤 스미스의 집 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b.사상의 성립

 그의 사상의 근대의 대표적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고전의 인문학 소양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또 그로티우스, 홉스, 로크, 흄, 루소 등에게서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을 배우면서 <도덕감정론>을 통해 독자적인 동감이론을 전개했다. 즉, 어떤 행위나 감정은 그것을 보고 있는 관찰자의 동감의 받음으로써 시인된다. 행위자는 관찰자의 동감을 얻고자 하는 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관찰자로부터 동감을 얻지 못하는 행위는 자기규제하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의 관계가 공평하게 시작된다면 자연히 부정이 자기규제되고 또 정의가 지켜지게 되어 국가의 강제력이 필요없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자연법학을 전개하려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법과 통치의 양식이 편의의 세계인 경제의 양상에 크게 좌우될 수 있다고 보고 분업론을 기초로 한 경제분석에 착수했다.

 <국부론>은 이 법학강의의 후반부분을 따로 떼어 자세하게 보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케네로부터 배운 재생산. 자본축적의 관점을 보완하고 또 미국독립전쟁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타개책을 제시했다. 이처럼 국부론은 자연법학의 일환으로서 보다 세련된 법과 통치와 국제관계의 행태를 논증한 저술이다. 사람들의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맡겨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히 균형이 유지된다는 시장기구에 대한 신뢰감도 개방된 인간관계 속에서 원활하게 작용한다는 앞서의 동감이론을 의해서 뒷받침된 견해였다.

 말년의 그는 <도덕감정론>을 대폭 증보개정하여 동감이론에 입각한 자기규제론의 완성을 보았으나, 자연법칙의 체계적 저술은 <국부론>을 제외하고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다.


c.<국부론>의 내용

 하버드 대학의 갤브레이드 교수(<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에 의해 <성경> 및 <자본론>과 더불어 인류가 언제나 인용할 수 있는 3대 참고서적 중의 하나로 평가된 <국부론>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상식의 보고로 교양을 넓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국부론>은 <여러 나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고찰>의 약칭이다. 그는 국부론의 첫머리에서 부는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부의 크기는 그 나라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중상주의(관세와 규제조치 등 각종 법률과 규제를 통해 소비자를 희생시키고 상인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줌)를 근본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오직 농업만이 부를 생산한다는 중농주의 학파의 오류를 지적하고, 자유방임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필연적 승리를 예언했다. 전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편에서는 <노동생산력 개선의 원인들과 그 노동생산물이 모든 계급에게 상이한 계급들 사이에 자연법칙에 따라 분배되는 질서>라는 제목 아래, 분업론. 가치 및 가격론, 생산과 분배론을 밝히고 있다. 제2편에서 자본의 성질. 축적. 사용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 제3편에서는 각국의 국부의 증진과정을 설명하고, 제4편에서는 정치경제학의 학설체계라는 제목으로 중상주의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중농학파에 대한 호의적 비판을 다루고 있으며, 제5편에서는 왕 또는 국가의 세입, 즉 국가재정에 관해 말하고 있다.

 제1편과 2편에서는 그의 경제이론을 밝히고 있는데 그는 국부론의 서문에서 모든 국민이 해마다 하는 노동은 모든 생활의 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자원인데, 이들 필수품과 편의품은 국민의 노동의 직접적 생산물이든가 아니면 그 생산물로써 타국에서 구입한 재화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스미스는 국부(국민소득)의 원천은 국민의 노동에 있다는 노동가치설의 입장에서 국민소득의 개념을 파악하고, #2 국민소득은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등 실물형태의 최종소비재에 의해 구성된다고 봄으로써 국민소득의 개념을 유통과정에서 찾으려 했던 중상주의 경제사상을 배격하고 있다.

 그런데 국부인 생활필수품과 생활편의품을 증가시키는 길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라 보고 이를 위해 노동의 분업문제(제1편 1장-3장)로 그의 관심을 옮겨간다. 그 예로서 핀 제조업을 들고 있다. 당시 영국에서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 1개 내지 20개의 핀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제조공정을 18단계로 나누어 분업하면 1인당 하루 평균 4,800개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분업에 의한 교환의 발달,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성립(제1편 4장)과 거기서 관찰되는 상품의 교환가치 법칙의 문제(제1편 5-7장)로 시선을 돌린다.

 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었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물은 교환가치가 전혀 없고 사용가치가 별로 없는 다이아몬드는 큰 교환가치를 지닌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물과 다이아몬드에 관한 스미스의 이율배반론이라 한다. 학설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스미스의 이율배반론 가운데 사용가치(효용)를 중요시하여 상품의 가치문제를 체계적으로 규정한 학파는 후에 한계효용학파가 되었고, 반면에 사용가치를 경제학의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고 주로 교환가치를 궁극적으로 규제하는 객관적 실체가 무엇인가를 추구한 학파는 후에 노동가치설 내지는 생산비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날 한계효용학설과 노동가치설로 분기하게 된 경제학의 흐름에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스미스 자신은 노동가치설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교환가치의 척도에 대해 스미스는 서로 다른 2가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재화의 교환가치는

그 재화가 구매, 또는 지배하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한다는 지배노동가치설과 재화의 진정한 가격은 그 상품에 투하된 노동량의 크기라고 주장하는 투하노동가치설이 그것이다. 스미스는 이 양 자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으나 후에 리카도가 투하노동가치설로서 정리했다.  

 한편 스미스는 가치론에서 가격을 자연가격 (임금. 이윤. 지대의 합)과 시장 내에서 재화의 수급에 의해 변동되는 시장가격으로 나누고, 이 시장가격이 일정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 배후에 자연가격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적 가격통제가 언제나 최고의 독점가격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국민대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 반해 자유경쟁에 의한 자연가격은 최저가격이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같이 자유경쟁은 그의 이론과 실천 면이 동시에 전제되고 있다.  또한 자연가격을 임금. 이윤 . 지대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고 임금. 이윤. 지대의 자연율을 밝히는 것이 그의 분배론이다. 

 제1편 8장에서는 노동의 임금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임금은 먼저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계약에 의해 그 수준이 결정된다. 많이 받으려는 노동자와 적게 주려는 자본가 사이에 때로는 분쟁이 일어나 자본가는 여러 강점에 의해 노동자보다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선다. 그러나 임금에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저한계가 있어 이를 임금의 자연율 이라 한다. 임금의 자연율은 노동자 자신 및 그 가족의 생활유지비에 의해 결정되며 보통 인도에 벗어나지 않는 최저율이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의 임금은 자연율이상으로 올라간다. 임금의 등귀로 노동자생활이 윤택해지면 노동인구가 증가 하여 노동공급이 노동수요를 초과하므로 임금은 다시 자연율로 하락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스미스 이후 리카도와 라살에 의해 발전된 소위 임금철칙의 근본명제다.

 제9장에서는 자본가의 이윤에 관해 논한다. 이윤은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한 가치 라고 보아 착취설을 취하는 듯하지만, 원료 및 임금을 선불한 대가로 기업가가 당연히 얻는 가치부분으로 보았다. 현실의 이윤은 자본의 수급에 의해 결정되므로 어떤 나라에 있어서도 자본이 증대함에 따라 자본의 투하에서 얻어지는 이윤은 필수적으로 감소한다고 보고, 그 원인을 스미스는 임금의 증대와 자본가 간의 경쟁에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스미스는 이윤을 가치의 분해부분으로 보지만, 다른 면에서는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즉, 실제로 높은 이윤은 높은 임금보다도 생산물의 가치를 현저하게 높이는 경향도 있다고.

 제11장에서는 토지의 지대에 관해 지대는 토지경작에 소비된 노동생산물로부터 최초의 공제분 이라는 노동가치설적 지대론을 전개하기도 하고, 지대는 가격의 변동을 가져온다는 생산비설적 지대론을 펴기도 한다. 또 한편 스미스는 한 국가의 지대가 전부 사유화되자 지주는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밭 갈지 않는 곳에서 거두어들이려 하고 천연의 산물에까지 지대를 요구한다고 하여 절대지대설의 근본사상을 주장하기도 하고,  특수한 생산물, 예를 들면 농산물 중 식물은 공급이 수요에 비해 항상 부족하므로 일종의 독점가격이 형성되고 따라서 실제생산비를 제외한 나머지가 지대가 된다 는 식으로 통설적 차액지대설과 독점가격설 중 수요초과설을 절충한 차액지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7-10장에서 스미스는 분배설을 설명하고 세 소득간의 대립을 간단히 논급하고 있다.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농산물의 실질가격은 등귀하나 공산물의 실질가격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주는 2중의 이득을 보고 노동자는 그의 임금이 높아지며 구매하는 재화가격의 일부가 하락되어 이득을 얻는 반면, 상인 및 공장주는 이윤율이 저하되어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득을 싸고도는 계급의 이해대립에 대한 스미스의 문제는 리카도와 마르크스에 의해 더욱 명확해진다. 제2편에는 자본의 성질. 축적. 사용에 관한 그의 경제이론이 서술되어 있다. 자본이란 이윤을 목적으로 투하되는 재화 이며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구분된다. 고정자본은 노동요구. 건물. 토지 등으로 소유자의 손을 떠나지 않고 이윤을 올리는 자본이고 유동자본은 그 반대다. 다음에 스미스는 사회구성원의 노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생산적 노동이란 소비자의 전 가치를 하나의 이윤을 붙여서 재생산하는 노동,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노동이 끝난 후 적어도 어느 시간까지 존속하는 특정대상물 또는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이라 규정하고, 군주. 관리. 군인 등의 지배계급을 비생산 계급이라 규정했다.

 제3편은 각국의 경제사로서 각국의 국부증진 과정이라는 제목 아래 제1장에서 국부증진의 자연적인 진행과정, 제2장에서는 로마제국 멸망 후 유럽의 낡은 체제에 의한 농업의 억압, 제3장에서는 로마제국 몰락 후 크고 작은 도시의 발흥과 발전, 제4장에서는 도시의 상업은 농촌의 개량에 어떻게 공헌했는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4편과 5편에서 그의 경제정책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경제발전의 순서에는 사물의 자연적 과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경제정책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경제적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중상주의적 통제 및 독점에 반대의 화살을 던진다. #1 도제법 및 거주법의 철폐와 노동이동 #2 토지소유권을 제한하는 상속한정법. 장자상속법의 철폐 #3 지방 관세장벽의 철폐와 국내산업의 자유 #4 관세 및 장려금의 철폐와 무역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제한과 속박을 철폐하면 각 개인은 정의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제심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과 자본을 자유 경쟁하게 되고 사회전체의 후생을 촉진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의 경제생활에 간섭하지 말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위해 각종 공공사업이나 국방 및 치안만을 담당할 것을 주장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가 <국부론>에서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은 부(국민총생산)의 원천이 무엇이며, 부의 증대를 가져오기 위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있다. 결국 부의 원천은 모든 국민의 해마다의 노동과 분업에 의한 노동생산력의 증대로 보고 이를 위해 정부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d.사상적 영향

 그의 이론은 독창적이기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학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방법론상의 특징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깊이 파고드는 과학적 태도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실제 참여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자의 눈에 비친 것을 그대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비과학적 태도가 병립되어 있다. 상품경제에 있어서 화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등 이론상의 혼란도 가끔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스미스의 사상적 영향은 지대하다. 이를 요약해보면, #1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개인의 이익추구와 국부증진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제창과, #2 최초로 경제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켰고 그 후 부르주아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 역할을 한 점, #3 그의 사상이 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분제도에 근거를 둔 낡아빠진 관습이나 중앙정부의 계획 없이도 자유방임 시장에서는 개인의 이기적 욕망추구와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공동선이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에 의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일관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스미스의 생각에 따르면 정부는 작은 정부를 이상적으로 보고, 정부는  단순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치안담당 등 최소한의 임무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영국의 사회상황은 소수만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공정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이에 대해 그는 자유방임 시장이 당장 모든 사람은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해낼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애덤 스미스가 중상주의의 어둠을 헤치고 발견한 훌륭한 신세계는 결점없는 파라다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주의 정부의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전횡에 맞서 합리성과 질서의 필연적인 승리를 예언하는 세계관의 일대전진이었다. 이기심과 경쟁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스미스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시장이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키는가를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나라의 부와 대중의 생활을 발전적으로 촉진시키는 이론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애덤 스미스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인류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조화로운 세계관을 정립하고서도 조화롭지 않은 현실 사회의 계급투쟁을 직시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적대적인 두 갈래의 사상으로 분열되었다. 모두 애덤 스미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두 진영의 사상가들은 스승의 사상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배격했다. 즉,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 계승하면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발전한다. 반면 그의 제자들은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완전히 배격하고  모든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용을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을 근거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일에 열중한 주류 경제학자들(마셜, 케인스, 프리드만)이 그들이다. 경제사상의 역사는 이 두 진영 사이의 사상적 대결의 역사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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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


최근 수정 시각: 2017-06-21 17:34:00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a/Wealth_of_Nations.jpg


《국부론》은 좋은 책이 아니다. 위대한 책이다.

토드 부크홀츠



1. 개요

2. 시대상

3. 주요내용

3.1. 분업

3.2. 이기심의 긍정

3.3. 보이지 않는 손

4. 국부론 원서

4.1. 번역

5.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감정론"보다 후세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책.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1776년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9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7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 쓴 책이다.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경제학이란 새로운 학문의 탄생[1] [2]과 기초를 닦은 것과 동시에, 고전 경제학의 시발점,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한 번은 읽어 볼 만한 명저다[3] 적어도 경제학을 접하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이 책을 모르고 경제학을 아예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2. 시대상[편집]


《국부론》이 나오던 당시, 전통적으로 우수한 토지를 바탕으로 중농주의를 채택한 프랑스나, 신대륙을 바탕으로 넘쳐나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을 중점으로 한 상업 즉, 중상주의를 밀어붙인 에스파냐가 아닌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영국이 세계적 부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부의 원천은 토지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중세는 토지가 많을수록 부자이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은 그간 땅만 있으면 돈이 굴러오던 경제와는 다른 새로운 경제, 즉 무역업이란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유럽 지방 중에서도 기름진 땅을 독차지하는 프랑스도, 가장 먼저 신대륙을 발견해 독점무역을 해오던 에스파냐도 아닌 듣보잡 섬나라에 불과하던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 이 두 나라를 제치고 부국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돈이 움직이는 현상을 설명해야 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3. 주요내용[편집]


3.1. 분업[편집]



현대에 와서 분업을 하지 않는 공장을 찾는게 더 어려울 정도로 대부분의 공장은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데 여러가지의 공정을 거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BC4세기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Xenophon)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에서 이미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지적한 바 있다. 근대에 들어서 윌리엄 페티 경(Sir William Petty)이 네덜란드 조선소의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견문하여 분업의 이점을 재발견하여 이후 분업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분석한 결과, 3가지의 특징을 알아냈다.


생산성 향상

하나의 예시를 들어서 핀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고 치자. 이곳에서 일하는 공돌이A는 하루에 핀 20개를 만들 수 있다. A랑 똑같은 수준의 공돌이가 10명이 있다고 하면, 공돌이를 갈면 모르지만 이 핀 공장은 하루에 200개 이상의 핀은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이 핀 공장이 공정을 18개로 나누어 공돌이 10명에게 작업을 시켰더니(10명을 어떻게 18가지의 공정으로 나눌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말자) [4]하루에 약 48,000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분업 하나만으로 생산성이 무려 240배로 뛰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분업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1) 전문화된 노동자들이 숙련도가 향상되기 때문이고, 2)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전환할 때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3)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이 작업능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구나 기계류를 고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화폐의 사용

분업을 일으키는 것은 한 물품을 다른 물품과 거래하고 교환하는 인간의 기질이므로, 교환 경제가 확장됨에 따라 분업의 수준 또한 높아진다. 그러나 물물 교환 시대에는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 다른 사람이 잉여로 가진 물품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양조업자가 육류를 필요로 하면서, 도축업자가 맥주를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는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아무도 교환을 거절하지 않을 특정 상품을 갖고 거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가축, 소금, 조개 껍데기 등이 이용되었으나[5] 결국 내구성이 높아 장기간 보존이 용이하고 가치의 손실없이 분할할 수 있는 금속이 선호되었다.


처음에는 금은동철이 아무런 표시도 없는 덩어리째로 사용되었으나 거래할 때마다 중량을 재고 금속의 순도를 매번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할 필요성에서 중량이 일정하고 순도가 표시된 금속 화폐인 주화가 등장하였다. 주화는 중량을 재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그 개수를 세어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물물교환이 사라지고 화폐가 사용되면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화폐로 평가하게 되었다. 즉 화폐는 그 자체로는 사회의 수입이 아니지만, 자본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 구매할 수 있는 재화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점차 화폐가 상업의 보편적인 매개체가 되고 모든 종류의 재화가 매매되거나 교환되면서 시장이 형성될 기초를 형성했다.


규모의 경제 및 시장 사회의 형성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 사회에서는 한 마을이 제공하는 수요의 규모는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에, 하나의 마을에서 독립된 직종으로서 대장장이, 석공, 목수, 도축업자, 양조업자 등을 유지할 수 없었고, 각각의 농장 혹은 가족 내에서 자체적으로 모든 일을 몸소 해내야 했다. 예를 들면 스미스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외진 고지 내륙 지역에서는 못 제조업자와 같은 직업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하루 1천 개의 못을 제조하는 제조업자는 1년 300일을 일하면 30만 개의 못을 제조할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단 하루치인 1천 개의 못도 판매할 수 없었다.


수상 수송이 발달하면서 대량의 화물이 저렴한 비용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당시 마부2명이 모는 말8필의 광궤 4륜마차는 런던과 에든버러 사이를 4톤의 화물을 싣고 6주일만에 왕복하는 반면, 화물 200톤을 적재한 선박은 불과 6~8명의 선원만 필요로 하면서도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200톤의 화물을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운송하려면, 육로로는 100명의 생계비와 말400필, 마차50대의 유지비가 소요되는 반면, 수로로 옮길 때는 불과 6~8명의 생계비와 200톤급 선박1척의 유지비만 소요된다.


수운의 발달로 수송비용이 폭락하면서 하천과 연안을 낀 도시들에서부터 분업이 확립되고 상업 사회가 형성되었다. 더 이상 이웃 농촌에서만 원자재를 공급받을 필요가 없게 된 도시들은 멀리 떨어진 지방 및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몇몇의 한정된 촌락을 벗어난 더 넓은 범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바탕으로 성장한 도시들은 대량의 수요를 요구하는 전문적인 제조업 업종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또한 농촌의 잉여 생산물을 위해 대규모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농촌의 경작과 개량에 자극을 주기까지 했다.


한편 그 자체가 상거래의 안전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도시의 상업과 제조업은 농촌에 질서와 선정,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도입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외국 무역과 제조업이 도입되기 전, 대지주는 소유지의 잉여 생산물을 교환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수의 가신, 식객을 부양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잉여 생산물의 소비자가 대지주와 그 부하들로 한정된 상태에서는 농노나 소작인들도 대지주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외국 무역에 의한 제조업이 확립되자, 대지주들은 특히 사치품을 구매하기 위한 소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점차 가신과 필요없는 소작인을 해고했으며, 동시에 보유한 토지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나머지 소작인들에게 토지 개량을 위한 장기 차지계약을 인정하게 되었다. 소작인은 장기간 토지 차용권을 보유하고, 잉여 생산물을 소비할 시장이라는 대안이 존재함으로써 지주로부터 독립했고, 해고된 가신들은 대지주가 농촌을 폭력과 권력으로 지배하는데 더 이상 이용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일상의 정치를 교란할 권세가들이 사라져 가고 농민이 종속에서 해방되면서 도시와 같이 사법과 행정이 확립되었다.


산업 혁명에 따른 대량생산으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확증을 얻게 되었다.

과거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공업의 대부분은 가내수공업이 주류를 이루웠고, 그나마 복잡한 공정도 동네 대장간에서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렇기때문에 모든 공산품의 가격이 상당히 고가를 형성하여 대부분의 공산품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심지어 같은 물건이라도 그날 공돌이의 컨디션에 따라 품질에 차이가 났기 때문에 분명 같은 상품이라도 퀄리티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경우가 상당히 흔했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여러 공정으로 쪼개진 공장은, 수작업보다 퀄리티가 높은 공산품을 일정한 품질로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당장 위의 핀만해도 분업만으로 240배가 뛰었는데, 증기기관으로 자동화까지 되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된 저품질&높은가격의 공산품을 빠른속도로 대체했으며, 과거 특권층의 전유물이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도 더욱 양질의 제품을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즉 그만큼 공산품 시장이 확대되고 시장이 활성화되며, 규모가 팽창하게 되어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게되는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의 시초이기도 하다.


3.2. 이기심의 긍정[편집]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발전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흔히 이기심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국부론의 관점에서는 이기심이 없으면 경제발전도 없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국부론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한다.

이익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더 많은 이익을 얻기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한정적인 자원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기위해 노력한다.

자원은 한정돼있기 때문에, 이를 가지기 위한 경쟁이 생기게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방보다 더 좋은 방법을 끝없이 연구한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3.3. 보이지 않는 손[편집]


But the annual revenue of every society is always precisely equal to the exchangeable value of the whole annual produce of its industry, or rather is precisely the same thing with that exchangeable value. As every individual, therefore, endeavours as much as he can both to employ his capital in the support of domestic industry, and so to direct that industry that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every individual necessarily labours to render the annual revenue of the society as great as he can. He generally, indeed, neither intends to promote the public interest, nor knows how much he is promoting it. By preferring the support of domestic to that of foreign industry, he intends only his own security; and by directing that industry in such a manner as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he intends only his own gain, and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 Nor is it always the worse for the society that it was no part of it. By pursuing his own interest he frequently promotes that of the society more effectually than when he really intends to promote it. I have never known much good done by those who affected to trade for the public good. It is an affectation, indeed, not very common among merchants, and very few words need be employed in dissuading them from it.

그러나 모든 사회의 연간 수입은 언제나 그 사회의 산업에서 생산하는 연간 총 생산량의 교환 가치와 정확히 같다. 또는 차라리 교환 가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또 그 산업에서 최대의 이윤을 산출하고자 한다면, 모든 개인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연간 수입을 만들려 노력하게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개인은 공공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고 하지는 않으며,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외국 산업보다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안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산업을 운영하는 것도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 할 때 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은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 나는 공공 이익을 위해 거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크게 이익이 되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상인들 사이에선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6]

- <The Wealth of Nations> book 4, chapter 2, page 2

파일:Gm5vhp1.jpg

[7]


국부론 내용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내용. 흔히 알고있는 내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에 작용하여, 시장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로 알고있다.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며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된다고 보았다. 각 경제 주체들은 가격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절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익을 위해 최대한으로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즉, 말 그대로 시장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가격에 의해 모든 생산주체와 소비주체는 조절되며, 어떠한 제품의 가격에 따라 그 제품의 공급과 수요가 형성되고, 조절된다는 말이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으로 하여금 모든 시장 참가자가 열심히 일하고, 자원이 효율적으로 거래되는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이 소수가 아닌 시장 참가자 전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시장이었다. 이렇게되면 생산자는 최적의 가격으로 최적의 이윤을, 소비자는 최적의 가격으로 최대의 만족을 이루는 서로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지게 되며, 이를 유지하는 힘이 바로 시장 속의 가격 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았다.


스미스가 가장 부정적으로 생각한 "보이는 손"은 정부와 같은 특정의 집단 혹은 소수의 이익집단이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들의 의지대로 가격이 임의로 조절되거나, 독점현상으로 자원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아, 시장의 순기능을 막아버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미스는, 정부는 국방, 사법, 공공 토목사업 같이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나 개인이 하려고 하지 않을 일만을 해야 하며, 길드같은 특정 집단이 법을 등에 업고 자원을 독점하여(chartered monopoly) 시장 유통을 통제하는 일이 발생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경제학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오직 선동을 위해 혹세무민에 여념이 없는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신자유주의의 원흉으로 중상모략을 당하는 애덤 스미스는 이 책 내용대로면 소위 지식인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것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손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기업들의 담합과 독점을 내팽겨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보면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독점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독점은 중상주의에 의한 독점이었으므로 국가의 개입은 오히려 독점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개념의 초보적인 형태는 사마천이 2000년 전에 주장한 바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연지험(自然之驗)사상을 주장하며 “물건이 싸면 비싸질 징후고, 비싸면 싸질 징후라서 각기 제 업을 좋아하고 제 일을 즐거워한다. 이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밤낮 쉴 새가 없고,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오고, 구하지 않아도 백성이 만들어낸다”고 하였으며, 월나라의 사례를 들며 개인의 영리추구와 이기심이 부국강병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또 장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은 단 한 번밖에 안 나온다.[8] 국부론의 주된 논지는 '귀족들과 대상인들의 창고에 쌓여있는 금의 양이 아닌, 사회 각계각층, 중심지 및 지방에 얼마나 재화가 확산되어 있는가가 진정한 국부의 척도이다'라는 것이며, 자유로운 다원적 시장경제가 이러한 의미의 국부 창출에 핵심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재화가 사회특권층의 금고가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어야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총생산(=국부)이 늘어난다는 것.. 오늘날에야 당연한 소리같지만,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취급되어 칭송받았다.



B025 – 프린키피아, Principia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 뉴턴(Isaac Newton, 1642 - 1727)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로 이어지는 고전물리학의 완성자 뉴턴의 역학체계를 기술한 책. 이 책은 뉴턴의 3대 발견, 즉 중력법칙, 미적분, 빛의 입자설 중 중력법칙에 관한 것으로 어려운 기하학 법칙을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만유인력(보편중력)을 가정하고 세 개의 운동법칙을 바탕하여 수학적인 추론을 통해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당시 유럽 사상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a.생애

 뉴턴과 동시대의 시인인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는 뉴턴을 두고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밤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는데 신이 말하기를  뉴턴이여! 거둘지어다 하니 만사가 광명 속에 드러났다 고 격찬했다. 인류역사상 경이로운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사망한 1642년 영국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허약한 상태로 태어났다(그뒤 꼭 300년 만인 1942년에는 20세기 후반의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태어남). 중학교 때부터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케임브리지 재학시절 뉴턴은 염세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해외무역과 상업이 성해지고 대학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적인 학내인사가 횡행하고, 퇴폐적인 생활에 빠진 교사와 학생이 적지 않아 부패한 대학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항과도 같았다.

 1665년 말 케임브리지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고향인 울즈소프로 내려가 이 당시가 나의 발명을 위한 인생의 봄이었기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수학과 철학에 몰두했다고 그가 훗날 회고했듯이 고향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고향에 머문 1년 반 동안  사과나무에서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라는 의문 속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등 주요구상이 형성된다. 69년 스승인 베로의 루카스 교수직(석좌교수)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하고 이어 반사망원경을 제작했으며, 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어 두문불출, 연구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오랜 노력의 결과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86년 국왕이 대학의 규정을 침해하고 베네딕트 파의 신부 프란시스에게 학위를 주어 케임브리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자 이에 저항하는 대학전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 결국 왕을 패배시켰다. 88년 프란시스 사건에서 보여준 굳은 자세를 인정받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그때 로크, 페피스 등 정부고관들을 알게 되고 그후 행정직을 구하려 했지만, 토리 당의 시대였기 때문에 휘그당이었던 그에게는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명예혁명의 와중이던 1689년 케임브리지 하원으로 선출되고 96년에는 조폐국장,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2년 뒤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기사작위를 받고 1710년 그리니치 천문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1727년에 죽은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b.<프린키피아>의 성립 배경

 17세기 중엽의 천문학 및 역학의 중요문제는 갈릴레이의 낙하운동에 관한 연구를 일반화한 역학의 근본원리를 확립하고, 동시에 천체 간에 작용하는 힘의 성질을 구해 행성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3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를 해결한 것이 본서라 할 수 있다.

 뉴턴의 3대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만유인력, 미적분, 빛의 입자설로서 이것들은 모두 천체의 운동과 관련한 연구성과이다. 예컨대 스펙트럼의 연구도 렌즈의 빛깔을 없애고 망원경을 완전하게 하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발견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가 천문학 및 중력의 문제에 진지하게 매달린 것은 1679년 이후로 보인다. 이보다 앞선 66년에 후크는 중력이 지면으로부터 높이에 따라서 변하며 그 크기는 진자를 사용하여 잴 수 있다고 말하고 행성의 운동도 이와 같은 구심력에 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74년 별의 시차에 관한 논문에서는 만유인력의 존재를 주장하고 역2승 법칙을 제출했다.  또 이탈리아의 보렐리는 혹성과 위성의 운동을 실 끝에 돌을 매서 돌리는 운동과 비교하여 원심력. 구심력의 관련을 제시했으며, 호이겐스는 전자시계 에서 구심력을 수식으로 나타냈다.  

 79년에 뉴턴은 후크의 편지에 대한 답장 속에서,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는 실험으로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물체를 떨어뜨리면 물체는 직하로 떨어지지 않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치는데, 그 값은 예컨대 100피트 높이에서 떨어뜨릴 때 런던에서 1/11인치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84년 1월에 렌, 후크, 핼리 세 사람이 로열소사이어티에서 천체 문제에 대한 공동회합을 갖고 케플러의 3법칙과 호이겐스가 발견한 구심력의 값으로부터 중심력은 거리의 2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면 어떠한 궤도를 그리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핼리는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에게 찾아와 이 문제를 물었다.  뉴턴은 그 자리에서 단지 원이라고 대답하고 이것은 이미 1679년에 계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계산기록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나중에 다시 계산해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뉴턴은 역학 및 만유인력 문제에 힘을 기울여 연구한 후 10월 신학기 때에 그 결과를 <물체의 운동>이라고 제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뒤 이 내용이 확장되어 1686년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 제1부가 로열소사이어티에 제출되었다.  핼리의

경비부담으로 1687년에 3부까지 모두 500쪽 정도로 출판되었다.  


c.<프린키피아>의 내용

 이 책은 <서언>에서 물리학상 곤란은 모두 운동의 현상으로부터 자연계의 힘을 탐구하고, 그 다음에 이 힘에 의해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다고 논술하고 있다.  

 다음 <정의>에서 질량. 운동량. 힘 등을 정의하고, 이어서 절대시간과 상대시간,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질량에 관해선 밀도와 체적의 적이라 정의하고(뉴턴은 물체를 동종의 입자, 즉 원자의 집적이라 생각하여, 여기서의 밀도라는 것은 단위체적 내의 원자 수를 뜻한다고 한다), 절대시간에 관해선 절대적이고 참되고 수학적인 시간은 그 자체로서 그 본성에 의해 다른 대상에 관계없이 똑같이 흘러간다 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절대운동과 상대운동의 구별을 논하여, 양자는 원운동에 있어서 원심력에 따라 구별되는데, 그것은 단지 외관적인 원운동엔 원심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다음에 <운동의 기본정리 또는 법칙>에서는 유명한 운동의 3법칙을 논술한다. 

 본론에 들어가 제1권은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극한의 개념과 정적분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각종 정리를 기하학적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심력으로 인한 운동에 있어서 면적과속도 일정의 증명이나 주기가 반경의 3/2승에 비례하고 동시에 속도가 반경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증명, 그리고 그 역의 증명, 이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역비례하는 힘으로 인한 운동은 힘의 중심을 초점으로 하는 하나의 원추곡선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 역의 증명 등이 들어 있다. 또한 타원진동 및 단진동, 2체문제, 3체문제, 구형물체 간의 인력, 그밖의 인력운동의 유비로서 빛의 반사 . 굴절의 문제 등도 논하고 있다.

 제2권도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같은 제목으로 유체내의 물체의 운동, 부력, 에테르에 의한 저항의 유무, 토리첼리의 정리, 파동의 전파, 수면파, 탄성파, 음향의 전파, 유체의 원운동 등을 논하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와동설(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에테르가 회전하고 행성들은 이 와동에 의해 마치 가벼운 물질이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리듯이 태양 쪽으로 끌리면서 회전한다고 하는 설)을 부정하고 있다.

 제3권 <우주의 조직에 대해서>에서는 전 2권의 수학적 원리를 물리학에 응용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 통속적인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자연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규칙으로서,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 동조의 작용은 동일한 원인으로 귀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자연은 언제나 단순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실험적 자연과학에서의 귀납법의 의의를 논한 뒤, 천체현상의 여러 가지 관측치에서 여러 별의 거리와 질량을 정하고 질량이 무게에 비례함을 논한다. 또한 지구상의 각 점에서의 중력 가속도의 차이나 밀물. 썰물이 달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수량적으로 말한다.

 마지막으로 초월적인 신에 대하여 말하고, 태양. 행성 및 혜성의 배열은 단 하나인 전지전능한 존재자의 결의 및 지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신의 일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철학의 임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중력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가설을 내놓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d.과학상 업적 및 평가

 자연법 사상, 합리주의, 진보관, 인도주의 등으로 특징되는 17세기의 지적 혁명, 특히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관찰과 수학적 계산에 의해 우주의 합리적 법칙을 설명하여 세계관의 대변화까지 초래한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이의 결함을 수학적으로 보완한 독일의 케플러, 망원경을 발명하여 관찰을 통해 지동설을 확신했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등의 개별적 발견들을 종합적인 원리로 통일하여 우주 내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했던 뉴턴에 와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는 24세경까지 그의 3대발견 이라 불리는 #1 역학분야에서의 중력의 법칙(만유인력) #2 수학분야에 있어서의 미적분의 발견 #3 광학분야에서의 빛의 입자설을 이미 발견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중력법칙의 수학적 설명은 1685년에 와서야 가능했으며 2년 후에 그의 획기적 내용을 <프린키아>에 담았는데, 이 저술에 의해 여러 천문학자들의 수많은 선행업적들이 하나의 우주원리로 종합되고 특히 그것은 간결한 수학공식으로 표현되었다. 중력법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우주 안의 모든 입자는 상호간에 잡아다니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상호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질량에 정비례한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전통과 권위에 맞서 싸우던 1세기 반의 과학혁명은 완성된다.


   1. 뉴턴 방법의 중요성  

 사실상 뉴턴의 업적이 기여한 것은 과거의 많은 선행연구를 간단명료한 수학적 공식으로 종합했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과학적 사고의 진행절차와 사고방식이었다.  뉴턴의 데카르트적인 연역법을 새로운 실험적 방법과 조화시킴으로써 과학적 절차에 적절한 방법을 제시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방법적회의를 활용하면서도 일차적으로는 경험과 사실에 의존했다. 뉴턴은 그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우선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따라 여러 사실로부터 기본원리를 끌어내 전개했으며,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예상되는 결과가 사실상 일어나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유사한 증거를 경험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추상적 이론과 경험적 증거를 다 함께 만족시키는 그의 방법은 그 이후의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타당한 설명의 절차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중력의 법칙을 예로 든다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경우 뉴턴은 중력의 원인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질량에 비례할 것이라고 추리했으며, 그런 까닭에 전 우주를 통해 중력이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논리를 타당하다고 가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논리적 가설을 지구를 도는 달의 운동에 맞는가 테스트해보고 그밖의 행성운동 내지 지구상의 물체들의 경우까지 적용시켜 옳다는 것을 밝혔다.


   2. 비판적 평가

 뉴턴에 의해 한층 발전된 과학적 사고의 혁명은 당시 일어난 정치적 혁명보다도 인류역사에 더 광범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때 이루어진 과학적 발견은 한층 더 발전되고 응용되어서 현대인에게 자연정복의 길을 터놓았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후 400여 년 동안 현대문명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는 여러 자연철학자들, 특히 베이컨, 데카르트의 주장들을 뉴턴이 종합한 것이다. 베이컨은 관찰자와 대상물을 분리하여 객관적 지식을 얻으려는 과학적 방법을 제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객관적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지배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향한 문을 열기 시작하자 수학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데카르트가 새로운 기틀을 잡고 나섰다. 곧이어 뉴턴이 데카르트를 뒤따랐다고 뉴턴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라는 만물상을 여는데 소용되는 모든 도구들이 갖추어지게 된다. 과학문명의 발전이 인류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파괴와 공해 등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류의 일반적인 복지를 지향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탈피하여 자연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계관(일명 유기체적 세계관 )을 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했던 이론들도 19세기 말 맥스웰의 전자기학,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등에 의해 수정받게 되고, 이 모두를 종합하려는 시도가 뉴턴의 300년 후배이며,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교수직의 후배이기도 한 스티븐 호킹에 의해 초끈이론으로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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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법칙

[-法則, Kepler’s law ]

제1법칙: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상을 운동한다. 제2법칙: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이 단위 시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면적은 행성의 위치에 관계없이 항상 일정하다. 제3법칙: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타원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이것을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이라한다. 케플러는 궤도상에서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2법칙을 1609년에 발견하였다. 


태양과 행성을 잇는 선분이 단위 시간을 스치고 지나가는 면적을 면적속도라 한다. 그래서 제2법칙을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이라 한다. 이것을 발견한 뒤 곧이어 제1법칙을 발견하였다. 제3법칙은 공전주기 T와 타원궤도의 긴 반지름 R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기의 법칙이라 한다. 


제1법칙은 타원궤도(楕圓軌道, elliptical orbit)법칙이다.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며, 그 초점 중 하나에 태양이 위치한다.


행성이 만드는 궤도의 모양은 타원이다

S 태양, P 행성, F, F’

제2법칙은 면적속도(面積速度, areal velocity)일정의 법칙이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선이 같은 시간 동안 움직여 만드는 부채꼴 면적은 언제나 같다(즉, 행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울 때 가장 빠르게 움직인다).


같은 시간 동안 1→2로 가면서 만든 면적의 크기는 3→4로 가면서 만든 면적의 크기와 같다

A. 면적, S. 태양, P.

제3법칙은 조화의 법칙이다. 행성의 궤도운동 주기의 제곱은 행성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태양 주위의 행성들에 대해, 주기(P)를 년, 거리(A)를 천문단위로 나타내면 이 관계는 P2=A3으로 나타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케플러 법칙 [-法則, Kepler’s law] (지구과학사전, 2009. 8. 30., 북스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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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Alfonso Borelli ]

요약

이탈리아의 생리학자ㆍ물리학자. 그의 사망 후 1680∼1681년에 출판된 주요 저서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로 인체의 기능을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물리의학파’의 기초를 쌓았으며, 지렛대의 원리로 운동 때의 뼈와 부착근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출생-사망 1608.1.28 ~ 1679.12.31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과학

출생지 이탈리아 나폴리 피사

주요저서《동물의 운동에 관하여》(1680∼1681)

나폴리 출생. 피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갈릴레이의 영향을 받아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640년경 메시나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1656년 피사대학의 수학교수로 전임되면서, M.말피기(1628∼1694)와 알게 되었다. 12년 후 메시나로 돌아갔으나, 시칠리아섬에 대한 에스파냐 통치에 위험을 느껴 로마로 피하였다. 그의 사망 후 1680∼1681년에 출판된 주요 저서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animalium》로, 인체의 기능을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물리의학파(物理醫學派)’의 기초를 쌓았으며, 거기서 지렛대의 원리로 운동 때의 뼈와 부착근(附着筋)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반니 보렐리 [Giovanni Alfonso Borelli]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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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ricelli's theorem ]

요약

1643년 E.토리첼리가 발견한 것으로 용기 벽에 뚫은 작은 구멍에서 내부의 액체가 유출하는 속도에 관한 법칙을 말한다. 이 법칙이 성립되는 것은 액체의 점성이 작고, 그 영향이 무시될 경우에 한한다.

E.토리첼리가 1643년 발견했다. 용기의 횡단면이 구멍에 비해 충분히 크고 액체의 유출에 따른 액면의 강하가 극히 작을 때, 액체의 유출속도 v는 v=√2gh (g는 중력가속도, h는 구멍의 액면으로부터의 깊이)로 주어진다. 즉 질점(質點)이 중력의 작용으로 높이 h인 곳에서 자유낙하할 때 얻는 속도와 같다. 단 이 법칙이 성립되는 것은 액체의 점성이 작고, 그 영향이 무시될 경우에 한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리첼리의 정리 [Torricelli's theorem]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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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ng theory ]

끈 이론(string theory)은 이론의 기본 요소가 점이 아니라 길이가 있는 끈인 경우를 다루는 물리학 이론이다. 끈이 시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며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기술한다. 넓은 의미로는 M 이론(M-theory)을 포함하여 끈을 기본 요소 중의 하나로 연구하는 이론적인 틀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림 1. 끈 이론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궁극적으로 매우 작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거시적인 물질, ② 분자, ③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구성된 원자, ④ 전자, ⑤ 쿼크로 구성된 양성자와 중성자, ⑥ 끈.(출처: ⇒ )

끈 이론은 1970년대 초반에 강한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이론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우주의 가장 궁극적인 물질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유력한 후보로 각광을 받고 있다(그림 1). 특히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양자중력 이론이기도 하다. 초대칭성(supersymmetry)이라는 대칭성을 가지고 있는 끈 이론을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고 하며, 이때의 끈을 초끈(superstring)이라고 한다. 초끈 이론에는 보손과 페르미온이 초대칭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보손만 있는 보손 끈 이론도 있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끈 이론과 초끈 이론은 구분해야 하지만, 보통은 끈 이론이라고만 해도 초끈 이론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도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초끈 이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끈 이론의 기본 요소인 끈을 아주 먼 거리에서 보면 점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극한에서 끈 이론은 입자를 다루는 보통의 장론이 된다. 이때 입자는 끈이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 질량이나 전하 등의 특성이 달라진다. 즉, 하나의 끈으로 다양한 입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끈 이론은 장론에 비해 실험으로 정해줘야 할 상수가 매우 적다. 또한 끈 이론은 장론에 비해 무한대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목차


1.역사 및 개요2.끈 이론에 대한 비판

역사 및 개요

1960년대에는 강한 상호작용의 산란에 대해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런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1968년 베네치아노(G. Veneziano, 1942- )는 수학의 감마 함수를 사용한 특정 형태의 산란 진폭 공식을 제안하였다. 이것을 이중 공명 모형(dual resonance model)이라고 하는데 이 공식은 당시 알려진 보통의 이론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 결과가 보여주는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후속 연구가 이어졌다. 1969년에 남부(Y. Nambu, 1921- ), 닐센(H. B. Nielsen, 1941- ), 서스킨트(L. Susskind, 1940- )는 이 공식을 끈들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로써 끈 이론이 물리학에 처음으로 도입되게 되었다. 1970년에는 라몽(P. Ramond, 1943- )과 슈워츠((J. Schwarz, 1941- ), 느뵈(A. Neveu, 1946- )가 페르미온을 도입하여 초끈 이론(이 이후는 줄여서 끈 이론)을 제안하였다.


1973년에 강한 상호작용의 근본 이론인 양자색역학이 완성됨에 따라 끈 이론은 대부분의 물리학자에게 외면을 받고 소수만이 연구를 이어갔다. 강한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이론으로서의 효용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 이론은 곧 다른 용도가 발견되었다. 1974년에 요네야(T. Yoneya, 1947- )와 슈워츠, 세르크(J. Scherk, 1946-1980)는 끈 이론과 중력의 관련성을 밝혔다. 즉, 질량이 없고 스핀이 2이며 중력자와 성질이 같은 입자가 끈 이론에 있음을 보인 것이다. 이는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하는 양자중력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1984년에는 소위 '1차 초끈 혁명'이 일어난다. 이전에는 초끈 이론의 내부에 수학적 모순이 있어서 올바른 중력 이론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84년에 그린(M.Green, 1946- )과 슈워츠가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는 끈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10여 명에 불과했으나, 이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는 수백 명의 학자가 끈 이론 연구를 시작했다. 끈 이론이 모든 상호작용을 하나로 통일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론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끈 이론에는 수학적으로 다섯 개의 가능성만 남는다. 이들은 모두 10차원 시공간에서만 모순이 없는 이론이 될 수 있는데, 이들을 각각 I종(Type I), IIA종(Type IIA), IIB종(Type IIB), E8×E8 이종(Heterotic E8×E8), SO(32) 이종(Heterotic SO(32))이라고 부른다.


1차 초끈 혁명 이후 10여 년에 걸친 집중 연구에도 불구하고 끈 이론은 여러 난관에 부딪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폴친스키(J. Polchinski, 1954- )는 끈 이론에 끈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이나 혹은 더 높은 차원의 대상인 D-막(D-brane)이 존재함을 밝혔다. 1995년에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위튼(E. Witten, 1951- )이 소위 '2차 초끈 혁명'을 일으킨다. 10차원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끈 이론이 사실은 11차원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위튼은 이 이론을 'M-이론(M-theory)'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림 2). M은 magic, mistery, membrane 등을 뜻한다고 한다.



그림 2. 모든 초끈 이론을 통합하는 M-이론(출처: ⇒ )

1997년에는 말다세나(H. Maldacena, 1968- )가 소위 'AdS/CFT 대응성'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이에 의하면 반 더 시터르(anti-de Sitter; AdS) 공간을 남기고 축소화(compactification)한 끈 이론과 AdS 공간의 경계에서 정의되는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이 동등하다. AdS 공간의 경계는 AdS 공간보다 한 차원 낮은 공간이므로 이 대응성은 다른 차원의 이론이 동등하다는 주장이다. 어떤 공간의 경계에 대한 정보만으로 공간 내부의 성질을 모두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홀로그래피 원리'라고 하는데 AdS/CFT 대응성은 초끈 이론에서 이 대응성을 정량적으로 명확하게 구현한 것이다. 이 대응성은 결합 상수가 강한 게이지 이론을 결합 상수가 약한 끈 이론이나 초중력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어서 끈 이론을 넘어서 양자색역학이나 강하게 결합된 응집물질물리학 등 다른 많은 분야에 현재 활발히 응용되고 있다.


끈 이론에 대한 비판

끈 이론은 아직 실험적 증거가 전혀 없다. 매우 작은 크기(대략 10-33 cm)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에 대한 이론이므로 앞으로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입자기속기로는 이런 작은 크기를 실험적으로 연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이것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아직 완전히 만족스러운 이론적 정의가 없고 많은 부분이 가설에 의존하고 있다. 끈 이론이 예측하는 우주의 모습도 한 가지가 아니라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다양성이 있어서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 우주를 기술하는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끈 이론 [String theory] (물리학백과, 한국물리학회)


B024 – 리바이던, Leviathan (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 /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근대 자연법 사상을 대표하는 홉스가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집필하여 영국(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왕당파로부터 크롬웰을 위해 쓴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인간의 불가침의 자연권에서 정치권력의 절대성을 이끌어내어 종교도 정치권력에 종속시키려 했다. 절대주의 국가가 근대적 시민국가로 이행할 무렵에 씌어진 이 책은 자연상태 속에서 개인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극복하고 모두의 생명보존을 위한 평화상태를 창출하기 위해 국가를 성립시킨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 홉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이성적 판단 속에서 그들 모두로부터 분리된 근대적 국가성립의 원인을 찾고 있는 사회계약론적인 국가이론을 최초로 제시하고 있다.

 

 a.생애

 영국의 철학자이며 법학자인 토머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가 되므로 서로 계약을 맺어 국가를 이루고 전 권력을 주권자에게 일임해야 한다 고 주장하여 사회계약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홉스는 1588년 스페인 함대가 영국해안에 출몰하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상성격을 지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 함대의 침공소식에 놀란 그의 어머니는 그를 조산했고 그의 아버지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결별하고 유복한 숙부 아래서 자라다가 15세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스콜라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어느 백작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자유스러운 연구와 수차례의 외국여행 기회를 얻어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이, 케플러 등과 사귀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홉스는 처녀작 <법학요론>을 쓰고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하여 왕당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그후 국왕의 부당한 대권지배를 비난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청교도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오랜 프랑스 망명생활 도중 <리바이어던>이 완성되었다. 이 저술은 전제군주제를 이상적인 국가로 하는 홉스 정치철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그해 크롬웰이 정권을 잡자 귀국하여 1655년 <물체론>, 1658년 <인간론>을 출판하여 <시민론>과 함께 그의 철학의 3부작을 완성했다. 1666년 왕정복고가 이뤄지자 찰스 2세는 그에게 연금을 주고 궁정출입을 허용했다. 그러나 무신론자로서 영국 국교회의 비난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서 <리바이어던>을 금서로 규정, 불태우는 등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서 1675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영역을 마쳤다.

  평생 독신으로 있으면서 가정교사와 저술활동에 전념했으나, 그의 저술은 당시의 크리스트 교회와 왕당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는 91세로 죽을 때까지 인간의 평등을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사상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그의 근본원리의 근대성이 이해되었다. <철학강요>,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 등의 저서가 있다.


b.시대적 배경 및 홉스의 사상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쓰게 된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실로 파란 많은 시대였다. 17세기는 투쟁과 갈등, 내란과 변혁으로 잠시도 조용하지 못했다. 영국에서도 1649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철기군을 이끄는 청교도 크롬웰 중심의 의회파가 왕당파를 물리쳐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제를 성립시킨다. 이 혁명으로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이어 파리로 망명해온 황태자(후에 찰스 2세)의 왕당파로부터 위험 사상가로 지목되자 이번에는 크롬웰 정권 하의 런던으로 도망친다. 이때의 영국상황은 크롬웰의 독재정치 초기였다. 그리하여 시대적 상황은 대립과 반목으로 지극히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안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이론 체계를 제시한 것이 바로 <리바이어던>이다.

 그의 사상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신을 소화시킨 모습으로 그의 저술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철학적으로는 물질론과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절대 군주제를 찬성했다. 그의 정치이론은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사회계약에 의한 정부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정치권력이 없는 자연상태에 있어서 인간은 외롭고 가난하고 더럽고 동물적이고 단명한 존재에 불과하며, 서로 상대방과 싸우는 전쟁의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은 무정부, 공포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정부에 의한 질서를 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의 자유를 지배자의 수중에 맡기기 위한 일종의 합의 내지 계약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지배자에게 무제한의 절대적 권력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사회는 또 다시 만인과 만인의 투쟁인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정부의 행위를 의문시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위험하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홉스는 자신의 견해를 1651년에 출판된 <리바이어던>에서 자세하게 피력했다.

 로크, 루소와 함께 근대 자연법 사상을 대표하는 홉스의 정치사상은 #1 국가주권의 강화 #2 개인의 해방 #3 국민국가의 합리적 재구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종교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키고, 윤리로부터 정치를 분리시키며, 개인을 주권 이외의 모든 중간단체에서 해방시킨 데 그 의의가 있다.


c.<리바이어던>의 내용

 리바이어던이란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수중동물로 리바이어던에 국가를 비유하여 설명한 책이 <리바이어던>이다. <종교적. 시민적 국가공동체의 재료. 형태 및 권력>이라는 부제가 붙고 책의 내용으로 보아 <국가론>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나, 리바이어던이라는 가공동물이 지상 최강의 존재를 상징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리바이어던으로 국가권력 또는 주권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면 홉스는 왜 <리바이어던>을 썼을까? 홉스는 갈릴레이를 방문한 후 큰 감명을 받았고, 갈릴레이가 자연과학에서 이룩한 학문적 업적을 인문과학에서 이루어보려 했다. 그는 자연학 연구의 원리와 방법을 인간행동과 관계의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정확성을 갖는 사회과학을 창시해보고자 했다. 또한 이 글이 씌어진 시대는 홉스가 파리로 망명해 있을 때로서, 데카르트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냉대를 받고 또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의 박해와 천대를 받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바랄 수 있었던 것은 영국에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어 그가 안식처로 찾아 돌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신생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서 융성하는 것을 보고 혁명정권하의 영국에서 이 책을 출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귀국하게 되었고 왕당파로부터 크롬웰을 위해 쓴 것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서론. 결론 외에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인간론, 제2부는 국가론, 제3부는 크리스트교 국가론, 제4부는 암흑의 세계론으로, 제3, 4부는 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1. <서설>

 그는 국가란 인간의 기술에 의해, 인간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이 자연을 지배하며 인간을 지배한다. 국가는 자연에 의해 인간을 본떠 만들어진 인조인간이다. 그래서 국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연구해야 한다. 


   2. 제1부 <인간론>

 국가의 소재요, 창조자이기도 한 인간을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인간은 그 능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 같은 희망과 욕구를 가지는 경항을 보인다. 그러므로 동일한 희망의 추구는 경쟁적 관계가 되게 한다. 경쟁적 관계의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상태가 있게 마련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보증되지 않으면 안된다. 상호간의 권리포기가 계약되어도 이 계약은 모든 사람에게 우월하는 절대권력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권력의 절대성이 오히려 국민 내부의 평등성을 확보하고 특권의 존재를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계약이 주권자와 인민과의 사이의 복종계약이기보다는 인민 서로의 결합계약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그렇다면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특권을 키워 나가고 더 공고히 하는 인간들은 뭘까? 홉스가 말하는 국가권력(또는 정부)라는 것은 만인의 계약 또는 약속 위에 성립된 가장 중립적이고 공평한 이상 정부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국가라는 것이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한 방편인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공평한 권력인지를 다시금 그 근저부터 생각케 한다.)

 

   3. 제2부 <국가론>

 국가권력의 절대성이 여러 각도에서 고찰되어 예컨대 종교와 학문이 평화유지의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에 종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만일 공명정대한 국가권력이라면 이에 반하는 부패에 맞서야 되는 것은 맞는 말이라 생각된다.) 자연법에 의해 맺어진 계약을 준수하고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권력이 있어야 한다. 공권력은 인민들이 그들의 권한을 양도함으로써 생긴다. 공권력을 갖는 자가 주권자로서 주권을 갖는다. 모든 국민은 주권자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비난할 수 없다.(공명정대한 공권력의 경우)

사유재산권도 국가권력에는 대항할 수 없고, 역으로 각자에게 생활수단으로서의 재산을 할당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고 한다. 국가에는 군주정치. 귀족정치. 민주정치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이 타락하면 폭군정치. 과두정치. 무정부주의로 바뀔 우려가 있다. 이 모든 형태 중에서 군주정치 가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고 있으며(제대로 된 군주의 경우) 제15장에서는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국가가 건립되었다고 하고 있다. 인민은 이러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신법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신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신법은 자연이성의 명령. 계시 그리고 예언자를 통해서 사람에게 계시된다고 밝히고 있다. 


    4. 제3부 <크리스트교 국가관> 

 크리스트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고 교회권력의 국가권력에의 간섭을 배제한 다음 교회권력과 종교의 분석을 전개했다. 


    5. 제4장 <암흑의 세계론> 

 성서의 오해. 철학. 편견에 의한 정신적 암흑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오해와 기만으로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를 따진 것은 <리바이어던>에서도 돋보이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홉스에게 있어 지배권력은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분립이나 혼합 정부형태의 정당성은 철저히 부인되고 있다. 개인들로 구성된 시민은 계약을 어길 수 없는 존재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국민의 반항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부정한 통치자의 처벌은 오직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여기서 최악의 억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만,… 동양철학에서는 오히려 부정한 통치자는 백성이 죽일수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더 현질적이지 않나 싶다 ). 

 또한 홉스는 교회세력의 성장을 경계하고 있다. 이유로는 정부의 교체는 곧 국가의 해체라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지속을 위해 국민의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한다. 홉스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정부의 모든 통치행위가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d.사상적 가치

 18세기까지 전통적으로 대립한 두 정치철학인 절대주의 이론과 입헌주의는 17세기에 이르러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설득력을 갖기 위해 자연법 관념에 입각해서 합리성을 찾으려 했다. 절대주의 이론을 17세기의 과학적 정신과 자연법에 따라 밝히려는 정치철학자가 홉스였던 반면,대의제를 통한 입헌주의를 대변한 사람은 로크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리바이어던>은 기존질서의 동요 가운데 급변한 17세기 전반의 서구적 상황에서 평화와 안전의 희구에 집착하고 있던 고독한 홉스의 정치철학의 총결산으로 당시 영국사회의 시비의 대상이었으며, 그 뒤 오랜 역사를 두고 이 유명한 저서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적의와 회의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홉스의 생애처럼 그의 사상과 이론은 어느 세력에게도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홉스는 군주제를 최선의 정부형태로 본 탓에 절대군주체제의 이론적 강화에 공헌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그의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이론적 성향이 군주제의 도의적 측면에서 신비화하려는 보수적 절대왕정주의자들의 구미에 맞을 리 없었다. 종교적 보수분자들도 교회와 신학을 철학의 하위에 종속시키는

홉스의 이론적 태도에 날카로운 비판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근본적으로 의회주의의 정당성과 실용성을 부정하는 정치철학으로 일관한 홉스의 사상이 의회주의자들로부터 냉대와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너무도 당연하거니와, 정치권력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이 절대군주제의 옹호자들에게까지 비판을 받아야 했던 사실부터가 이 저서가 갖고 있는 문제성을 시사해준다.

 그의 사상은 민주적 전통이 확고한 영 미의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나, 권위주위적 전통을 가진 국가, 그리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등장한 전체주의 국가에 끼친 영향은 두드러지게 눈에 뛴다. 그리고 <리바이어던>에 표현된 정치철학이 국가기원에 관해 계약론적 접근이고, 그 목적설정에 있어서 행복추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그 성격에 있어서 반신비주의적인 점에서 전체주의에 배치되지만, 서구적 지식의 총체 속에 뿌리박고 있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홉스 류의 절대주의적 토대에서 성장해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본성에 대한 홉스의 성악설적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으며, 야만상태에서의 인간의 원시적 본능이 어떻게 분별있는 이성에로 전환되는가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저서는 이론적 결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B023 – 방법서설(方法序說, Discours de la méthode) / 데까르트(René Descartes, 1596 ~ 165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 제1철학의 원리가 실려 있는 저서. 서양사상사에 있어 인권선언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갈릴레이의 단죄사건으로 오랫동안 고심해 쓴 <우주론>의 간행을 유보해오다 사람들의 요구가 있어 자연학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분을 견본형태로 1637년 <이성의 올바른 인도를 위한 방법서설> 및 그 방법의 3시론인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이라는 표제로 출판했다. 이 책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인간의 이성이 독자적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신의 우산 아래서 벗어난 계몽된 근대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a.생애

 프랑스의 대철학자이며 수학자. 자연과학자인 데카르트는 기하학의 창시자이며 근세철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귀족출신의 법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법학공부를 하여 20세 때 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 법학지식을 실제로 사용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30년전쟁이 일어나자 구교군에 입대해서 돌아온 후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을 여행한다. 33세 때부터는 학문개혁의 결심을 굳히고 지적 자유가 있던 네덜란드로 가서 모든 자연학을 포함하는 우주론의 구상을 발전시켜나간다. 마침내 이것이 완성되어 인쇄하려 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갈릴레이가 유죄판결을 받자 지동설을 주요내용으로 한 <우주론>의 간행을 포기하고 대신에 1637년 <방법서설> 및 <굴절광학> <기하학> 등 3시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41년에는 형이상학의 주요저서인 <성찰>, 44년에는 <철학의 원리>, 49년에는 <정념론>등을 간행했다. 이 무렵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해 여러가지 논쟁에 휘말린다. 그가  자유의 나라 라고 생각했던 네덜란드에서도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 바로 그때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이 있어 그녀의 개인교사 생활을 하다가 5개월도 안돼 폐렴에 걸려 5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생을 미혼으로 지냈다.


b.데카르트의 사상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사상적으로 전환기였다. 중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근대적인 세계관이 싹튼 과도기였다. 사상계의 권위로서 전승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자연학에 대해 반발과 개혁의 분위기가 생겨났다. 데카르트는 이 혼란한 시기에 확실한 진리를 찾는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근대과학의 초석을 놓았다.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수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한 데카르트는 수학을 모든 과학의 왕이라고 생각했다.


   1. 과학연구방법

 데카르트는 과학적 연구방법으로 합리적 이성 중시와 연역법을 채택했다. 데카르트는 당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3단논법)을 비판하고 학문의 수학적 증명을 시도했다. 그는 3단논법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우리의 추리에 도움은 주지만 아직 모르는 것을 연구하는 데는 소용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인식의 근원을 이성에 두고 방법적으로는 기하학이 사용하는 연역법을 내세웠다.


   2. 형이상학

 (1) 방법적 회의와 사유의 제1원리: 그는 학문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종교와 도덕을 제외한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물론, 신이나 나의 존재까지도)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학문에서 다 빼버리고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어떤 것을 바탕으로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어떤 기본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해가는 철학적 사유방법을 방법적 회의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의심해보았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었다. 이러한 회의의 과정을 통해서 회의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고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을 사유의 제1원리(철학의 제1원리)라 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확실성의 기초 위에서  진리의 궁전 을 세우려 했다. 단, 여기서 사유와 존재는 선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아닌 동시관계(사유=존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그러므로를 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2) 자아의 문제: 사유에 의해 주어진 자아는 사유다. 사유는 의식에 의해 직접 내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사유=의식 이다. 또한 사유하는 실체는 그에게는 곧 정신이다. 여기서 정신이란 육체보다 먼저 인식되어지고 더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이다.

 (3) 신관: 그의 저서 <성찰>에서 신과 인간의 본성을 중심문제로 다루고 있다. 의심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를 의미하는데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생각해낼 수 있겠다. 여기서 그는 신을 생각해냈다. 완전에서 불완전이, 불완전에서 완전이 나올 수는 없어서 완전한 것의 관념의 원인은 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완전은 사유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존재해야 한다. 완전한 존재의 신은 관념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서도 존재한다. 데카르트에 있어 신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연원인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생각도 형이상학적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존재론적 증명으로 신의 문제를 보았다. 즉, 그는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계적인 자연계와는 별도로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3. 과학이론

 그의 물리학은 연역법으로 전개된다. 물질계의 일반원리는 신으로부터 연역된다. 신은 우주를 운동과 정지의 규율에 의해 창조했기 때문에 사물들은 인위적으로 작용을 가하지 않는 한 정지상태를 유지한다.


   4. 심리학

 데카르트의 심리학은 정신과 육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심신 2원론 을 고수한다. 육체는 전적으로 물리학의 대상이고 정신은 순수사유로서 오성과 의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한 인간에 2개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 벽을 느끼고 만년에는 정신인 동시에 신체이기도 한 불가사의한 존재인 인간을 논하면서 <정념>을 집필했다.


   5. 윤리관

 <정념론> 에서 정념과 도덕적 과오를 이야기한다. 신체적 자극으로 생겨난 정념(육욕. 질투. 야심 등)이 이성을 방해해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가 힘들고, 이로 인해 도덕과 과오를 범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적 의지로 정념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단호한 판단을 내리는  고매한 마음 이라고 했다.


c.<방법서설>의 내용

  이성의 올바른 인도를 위한 방법서설 이라는 긴 제목의 이책은 흔히 <방법서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책의 서론에 해당하며 데카르트 사상의 형성과정과 핵심이 자서전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총 6부 중 제1부 양식은 이 세상에서 만인에게 공통된 것 이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여 그가 당시에 학교에서 배웠던 학문하는 방법을 비판한다. 그토록 학교에서 배운 결과가 오류와 의혹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불확실한 지식에 그치는 책에 의존한 학문을 지양한다.

 제2부에서는 수학적인 확실성을 규범으로 하는 자신의 철학방법을 4가지 규칙으로 정리했다.

 (1) 모든 진리를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한 후에 명백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면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

 (2) 복잡한 문제는 단순한 것으로 분류하라.

 (3) 사상은 가장 단순한 것부터 가장 복잡한 것의 순서로 배열하라.

 (4) 추리의 연쇄에 틈이 나 그릇된 연결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추리의 연쇄를 다시 반복하라.

 이상의 원리가 엄격하게 시행된다면 누구나 명확치 않는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가 이 규칙을 정한 다음 불과 몇 달 사이에 많은 문제들이 속속 풀렸으나, 아직 풀리지 않는 동안에도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학문연구를 위해서도 실생활의 방침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제3부에서 이것들을 서술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기 이전에 지켜야 할 도덕준칙이 세 가지로 기술되어 있다. 그것이 유명한 임시적 도덕 인데, #1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법률과 종교를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의견을 피하면서 온건한 중도를 지킬 것, #2 그러면서도 자기의 결단을 분명히 할 것, #3 운명에 불평하지 말고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각한 것같이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 자신의 사고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 것.

 이와 같이 학문과 생활의 방침을 독일의 한 여관에서 정한 데카르트는 현실세계에서의 경험을 먼저 쌓기로 결심하고 9년간 여행한 다음, 드디어 체계적인 연구에 돌입하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네덜란드에 이주하여 고독하게 묻혀 살았다.

 제4부에서는 네덜란드에 이주하여 처음으로 정리한 형이상학을 서술하고 있다. 모든 것을 회의한 후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하는 원리를 찾아내어 이것을 철학의 제1원리로 삼고 있다. 즉 회의, 코기토, 신의 존재증명에 이르는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이 처음으로 제시된다.

 제5부에서는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자연학의 개략이 기술되어 있고 그 중에도 심장의 작용과 동물기계론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제6부에서는 <방법서설>과 <3개의 시론>의 집필 경위와 향후 연구포부가 제시되어 있으며, 그의 철학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자로 만드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가 구상한 <자연학>은 기계기술이나 의술에 응용할 수 있어 인류의 행복에 공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갈릴레이 사건도 있고 또 이해성이 없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여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향후 연구를 진행시키는 동안 시간을 보호해주었으면 한다고 밝히고, 이제부터 자신의 최대과제는 의학의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저서는 저자의 3가지 국면, 즉 #1 학원을 나와 책을 멀리할 정도의 저자의 상황이고(제1부), #2 독일의 여인숙에서 학문과 생활의 방침을 확립하는 장면이며(제2-3부), #3 네덜란드에 이주한 8년간의 저자의 사색(제4-6부)을 그린 것인데, 근대사상을 개척한 철학자의 사상과 그 형성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 기념비같은 작품이다.


d.비판적 평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데카르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1 근대과학적 세계관의 기초 #2 대륙론의 창시자 #3 과학적 성찰에 대한 적극적 태도 #4 과학에서 수학의 적용 #5 최초의 방법적 회의주의 #6 인식론적 사고 #7 해석기하학의 발명과 운동량 보존 개념의 도입 등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의 역사는 서양철학사와 혼동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17세기 이후 현재까지 서양세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합리론과 기계론 이었다.

   1. 합리론

 그러나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프랑스는 정복했으나 영국이나 독일은 정복하지는 못했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 그리고 영국에서는 헨리 모어를 비롯한 케임브리지의 플라톤 학파가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베이컨의 실험과학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정신에 의한 합리주의의 발현자 데카르트의 연역적 환원주의는 베이컨의 귀납적 경험주의 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은 위의 두 방법이 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하다. 실험위주의 결과를 중시하는 것과 관념위주의 우주구성을 고집하는 것 역시 근거가 미흡하다. 양자의 결합만이 현실적이며 진정한 과학탐구 방법이다.

   2. 기계론

 자연과 우주를 시계바늘처럼 정확히 운행하는 거대한 기계로 본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후 뉴턴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이후 현재까지 인류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계관으로 군림해왔다. 이러한 그의 연역적 환원주의 사상은 이후의 거의 모든 학문에 깊이 영향을 미쳐서 생의학의 경우 환자를 고장난 시계, 의사를 시계수리공, 질병은 고장난 부품으로 보는 현대의학적 사고를 만연시켰다. 이런 곳에서는 질병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그의 과학적 사고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나아가 환경문제 등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일고 있는 신과학운동의 핵심 인물인 버클리 대학의 카프라 박사는 그의 저서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과학기술의 한계와 문명의 위기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의 도교적 세계관의 수용을 모색하고 있다.



귀납법·연역법

[induction·deduction ]

귀납법은 개개의 사실이나 명제에서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법인 반면, 연역법은 보편 명제에서 특수 명제를 이끌어내는 추론법이다.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어느 한쪽이 더 부각되곤 했다. 영국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연역법을 비판하고 귀납법에 매달리다가 그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배척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지만, 오늘날에도 영국·미국 지식인은 귀납법, 독일·프랑스 지식인은 연역법에 의해 추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게흐트 호프스테드(Geert Hofstede)는 세계 53개국을 대상으로 불확실성의 회피와 수용 정도를 조사했다.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란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불확실한 상황이나 미지의 상황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는 정도를 의미한다. 호프스테드는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위대한 이론들은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약한 문화보다 강한 문화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더 높은데, 이는 진리의 탐구가 철학자를 기질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사르트르 등과 같은 이름들이 말해주듯이, 독일과 프랑스가 영국과 스웨덴보다 위대한 철학자를 더 많이 배출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약한 문화에서는 뉴턴, 린네, 다윈 등의 경우처럼 위대한 경험주의자, 즉 명상보다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이 더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호프스테드는 자신의 학술 논문 심사 경험을 근거로 독일과 프랑스의 저자들이 쓴 원고에서는 자료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결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흔하고, 영국과 미국의 저자들이 쓴 원고는 대개 광범위한 자료 분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도 결론은 몇 가지 제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호프스테드는 더 나아가 과학적 논쟁의 이면에는 때로 문화적 가정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그의 덴마크 동료인 보어(Niels Bohr, 1885~1962) 간의 논쟁은 원자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이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무선적인 것이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음직하고, 보어라면 신이 주사위를 던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보어가 옳고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덴마크는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아주 낮은 나라이다.”


개혁 접근법에도 연역적 방식과 귀납적 방식이 있을 법하다. 개혁의 대명제를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각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이 연역적 개혁이라면, 대중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아래서 위로 개혁 명제를 세우는 방식을 귀납적 개혁이라 할 수 있겠다. 연역적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고 개혁 주체의 개혁성을 널리 홍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간과하기 쉽고 개혁에 대한 반발·염증·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귀납적 개혁의 장단점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납법·연역법 [induction·deduction] (선샤인 논술사전, 2007. 12. 17., 인물과사상사)



B022 – 두 우주 구조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no// Dialogue over the two largest systems in the world, Ptolemaic and Copernican) / 갈릴레이(Galileo Galilei, 564-164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관찰과 실험을 통한 근대 과학적 연구방법론의 문을 연 갈릴레이의 필생의 역작으로 이 저작 때문에 교회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와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의 장단점을 토론하는 대화형식의 책. 두 우주구조가 모두 가설적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코페르니쿠스 구조의 장점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급기야 갈릴레이 자신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교회당국의 탄압이 노골화 되었다.


a.생애

 기울어져가는 피사 탑에서의 물체 낙하실험을 하고, 피사 대성당의 청동램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으며, 종교재판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갈릴레이.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근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갈릴레이는 피사에서 출생했다. 1575년에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81년에 피사대학의 기예학부에 입학하여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여 맥박계에 응용했다. 83년 이후 수학연구를 시작하여 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도가 되고, 85년에 피사대학을 중퇴한후 피렌체에서 수학연구를 계속했다. 89년에 피사대학의 수학강사, 후에 베네치아 공화국(북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동안 축성술. 기계공작 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연구하다가 동력학의 연구로 진출했는데, 우선 낙체의 문제를 추구하기 위해 진공 속에서의 낙체에 관해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추론을 더했다. 또 그 결과를 사면상의 실험으로 실증함과 동시에 그 극한의 경우로서 수평면상에서는 일정한 속도를 가진 물체는 그 속도를 잃다는 등속직선운동을 추리하여 이른바 관성의 법칙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진공 중의 탄도운동은 연직선상의 등가속도 운동과 수평선상의 등속운동의 합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명백히 함과 동시에, 그 궤도는 그 양선을 포함하는 면에서 포물선이 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한편 1609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배율을 높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사용, 목성의 위성을 비롯한 여러 별을 발견함으로써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던 지동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10년에는 피렌체 공국의 구주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소속의 제일 수학자가 되었는데 형식상으로는 피사대학 교수도 겸했다. 이때부터 지동설을 둘러싸고 낡은 아리스토텔리스 학파, 로마 교황청 당국자 등과 타협을 보지 못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는 수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후 갈릴레이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오르바누스 8세가 즉위하자 다시 새 학설을 담은 책을 낼 것을 결심하고, 수년 동안 집필한 것을 당국의 검열을 마쳐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라는 제명으로 32년 출간했다. 그런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 의 승리를 구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이 옮음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표면상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생애는 엄중한 감시하에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이 동안 파도바 시대의 성과를 집대성한 <역학대화>를 완성하여 감시의 눈을 피해서 38년에 네덜란드의 한 서점에서 간행했다. 이 무렵 실명하게 되어 감시도 다소 완화되고 죽기 직전에는 토리첼리도 제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죽은 후 공식으로 장사를 지내는 일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가 금서목록에서 풀린 것은 1835년이 되어서였다.


b.저술배경

 본서의 정확한 표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거기에서는 4일간의 회합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 체계에 대해 논의되었으며 어느 쪽에서나 똑같이 철학적. 자연학적 근거가 제시된다>고 되어 있다. 원서는 4절판, 458쪽의 대작이다. 

 저자가 본서의 저술계획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1610년으로 코지모 2세의 수상 빈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완성하고자 하는 주요저작은 우주의 체계 또는 구성에 대해 2권...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그보다 수십 년 전 1597년경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해 8월 4일에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 설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가설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자연적 결과의 원인을 찾아내고 있다. 나는 이에 찬성, 또는 반대되는 각각 많은 근거와 논증을 썼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거의 35년의 장기간에 걸친 관측.사색.실험의 결과가 특히 망원경제작(1609) 이후의 업적이 본서에 가득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저자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기기 위해 넘어야 했던 수많은 스콜라학 체계의 장벽이 어떠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가 이것을 어떻게 돌파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1616년 드디어 로마 교황청은 저자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문책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까닭으로 본서에는 그 주장을 완화하기 위한 숱한 배려가 기울여졌다. 그러나 완성된 형태로서는 이 주장을 감출 수 없었다.


c.<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의 내용

 저자가 봉직하고 있던 궁정의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2세에의 헌사, 독자에 대한 서문으로 시작하여 본문은 4일 간에 걸쳐서 세 사람이 교환하는 대화형식으로 전개된다. 갈릴레이를 대변하는 살비아치는 실재했던 피렌체 인이며 그의 제자였다. 양식있는 평범인을 대표하는 사글레드는 역시 실재했던 베네치아의 세력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지키는 심플리치오는 저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의 이름을 빌린 것이며 페리파토스 학도이다.

 저자 자신의 생각은 살비아치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공통적인 친구, 린체이 학사원 회원 의견이라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4일이라는 구분은 테마별로 되어 있다. 즉 <독자에 대한 서문>에 의하면 세 가지 주요문제가 논의될 것입니다. 첫째로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경험...둘째로 천계의 제현상... 셋째로 바다의 만조 인데, 이들 세 문제가 각각 제2, 3, 4일의 대화의 주요 토론주제다.

 제1일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페리파토스 학도의 학설일반의 추진력 그 자체의 검토라는 예비적 단계로서,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형태로 시작하여 단순물체와 합성물체, 단순운동과 합성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불충분함을 폭로하고, 교묘하게 운동일반에 대한 갈릴레이의 생각을 도입시킨다. 이어서 천체와 대지와의 유사성. 부등성의 문제로 옮아가서 천체 중에서 가장 가까운 달이 비교의 상대로 선택된다. 이렇게 하여서 스콜라 학도의 추론의 근거가 박약함을 밝힌 다음, 제2일 대화는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으로 옮아간다.

 이를테면 배의 마스트 위에서 떨어진 돌은 배가 움직이거나 정지함과 상관없이 동일장소에 떨어지는 사실에 추론하여, 가령 대지가 움직이고 있다 해도 탑 꼭대기에서 떨어진 돌은 정지하고 있을  때와 똑같은 장소에 도달함을 논증,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일상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증명함으로써 지동설이 천동설과 같은 가능성을 지님을 명시한다. 그밖에 만약 대지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항상 격심한 바람을 맞을 것이라는 등 당시의 페리파토스 학도들의 상식적 견지에서 본 반론과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에서 나온 자연철학적인 반론이 몇번이나 심플리치오의 입을 빌어 되풀이 서술하고, 이것이 다시 살비아치의 입을 통해 명쾌하게 차례차례 해결되어 간다. 그 사이마다에 스콜라 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경묘한 유머로 심플리치오에게 퍼부어진다.

 그리고 본서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재미있는 대화가 계속되는 2일의 말미는 동시대의 스콜라 철학자의 전형인 로헤르의 <천문학상의 논쟁과 새로운 일에 대한 수학적 논고> 및 키아라몬티의 <반티코>의 반지동설적 논증에 대한 일대 격파인데, 그들의 논증과 살비아치의 응수는 연극처럼 생생하며 우스꽝스럽고 스콜라 말기의 자연철학자들의 자기 모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제2일의 대화에서 지동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저자는 제3일에 들어서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개연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는 상술한 키아라몬티의 또 한 권의 저서 <3신성에 대하여>를 들고 나와 키아라몬티가 1579, 1600, 1604년 나타난 신성이 모두 월하계의 영역, 즉 스콜라 학설에서 달의 천구보다 아래쪽에 있었음을 여러 가지 계산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불변이라 말하며 천상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음을 논증하려 한 데 대해 공격을 가하고, 저자 스스로 계산하여 키아라몬티의 계산이 틀림을 폭로, 이들 신성은 모두 항성천, 즉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천계에 있었음을 증명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의 주요명제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스스로 망원경으로 관측한 목성의 위성, 빛의 광침작용 등에 의거하면서 모든 행성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배치에 대해 스콜라 학도를 대변하는 심플리치오의 입으로  용감히  말하게 한다.

 제3일의 대화에는 망원경에 의한 관측에 의거하면서 지동설의 개연성을 밝힌 다음, 마지막 제4일에는 마침내 그 필연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 필연성의 논거는 조석현상에서 취하고 있다. 즉 용기를 정지시켜 두고서는 물(바다)에서 결코 조석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석현상이야말로 지동설을 논증하는 필연적 근거라는 것이다. 본래 이것은 저자의 잘못이었으나 아직 만유인력설이 성립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조석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이러한 저자의 설이 그 당시에는 가장 유력한 이론이었을 것이다.


d.갈릴레이의 공헌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운동과 지상물체의 운동은 별개의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했고 낙하물체도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실험을 통해 공기마찰에 따라 어느 정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제외하면 무게에 관계없이 동일속도로 떨어진다는 자유낙하에 대한 법칙을 발견했고, 이는 1971년 공기가 없는 달표면에서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후에 뉴턴의 운동 제1법칙으로 확립된 관성의 법칙이고 그 외에도 진자의 등시성발견. 망원경발명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험을 통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의심조차 금기시되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을 옹호한 점일 것이다.

 그는 진정한 과학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수학적 결합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신념 하에 2천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신봉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론을 철저한 실험과 관찰로 검증을 계속하여 그의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그의 이러한 실험 중심의 연구자세는 현대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두 우주구주에 관한 대화>가 출판된 직후에 그는 많은 논란에 휩싸여 그의 옛 친구이던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나타내고 마침내 1633년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결국 자신의 신념을 형식상으로 철회하고 천동설이 옳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과학의 불양립성을 인식시켰으며 중세의 카톨릭 세계관 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재촉했다. 비록 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은 받았지만 그는 크리스트 교의 권위를 내세운 불합리한 독단조차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후세에 독단론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또는 사상의 자유를 말살하려고 하는 지배집단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갈릴레이는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다.


B021 – 국가, The Republic / 플라톤(Plato, BC 429?~347?)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쇠퇴해가는 조국 아테네를 어떻게 회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훌륭하게) 사는 것인가라는 실천적 주제의식 아래 기원전 5세기를 무대로 플라톤에 의해 씌어진 이 책은 정치공동체에서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위해 기본적인 조건들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행복   정의 선의 이데아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 또는 철인왕에 의해 통치되는 이상사회 가 그려지는 이 책에서 우리는 이후 서구학문들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 기본개념들과 생각들이 생생한 대화를 통해 형성되고 있는 현장을 만나볼 수 있다.


a.생애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넓은 어깨라는 뜻)은 아테네의 명문의 집안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음악. 그림. 시. 희곡. 운동 등 다방면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대화>편들 속에 자주 대화의 상대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짤막하게 두 번,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임종에 참석치 못한 자신의 이름을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갔었으나 정작 플라톤은 병이 나서 참석을 못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어쩌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스승의 최후를 차마 지켜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밖에 플라톤이 자신에 관해 언급한 글들은 그의 <대화>편들 속에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남긴 것으로 간주되는 <제7서한>속에서 우리는 그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에 접하게 된다. 분량이 36쪽인 이 편지에는 그의 철학에 관한 중요한 시사와 함께 청년기의 정치적 환멸과 3차에 걸친 시라쿠사 방문에 얽힌 사연들이 적혀 있다. 이 서한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404년과 401년에 각기 수립된 3인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에 대한 환멸 때문에 장래가 촉망되는 보통의 젊은이들처럼 그 또한 한때 가졌던 정치참여에 대한 관심을 차츰 버리게 된다.

 게다가 기원전 399년 민주파의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당대에 가장 현명하고 정의로운 사람 이라고 존경하던 스승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자, 충격을 받고 정치에 염증을 느껴 친구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그 후로는 현실을 초월한 철학적 지혜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40살이 되었을 때 남이탈리아와 첫번째 시라쿠사 여행을 한다. 2-3년 동안 머물고 아테네로 돌아와서 영웅  아카데모스 를 모신 교외의 숲 속에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 라는 학원을 세웠다. 그의 초기 대화편들이 저술된 것은 이 여행 이전이었고, 이른바 그의 중기 대화편들은 이 여행 이후 두번째의 시라쿠사 여행 때까지에 걸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번째 여행은 367년에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사망으로 역시 새로운 참주가 된 디오니시오스 2세의 초빙으로 이루어진다. 이 초빙은 2세 참주와의 숙질 지간이요 플라톤 철학에 감화를 받은 디온의 권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60세의 플라톤이 이 초청에 응한 것은 이 참주에게 그의 철인정치의 꿈을 실현해보려 함이었으나 그의 과두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희망을 버린다. 플라톤이 참주를 비난하자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디온은 추방되고 플라톤은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다.

 이후 그의 후기 대화편들이 저술되기 시작했고, 6-7년 뒤 여행을 하게 되나 그들의 관계는 더 한층 나빠질 뿐이었고 플라톤은 고생 끝에 귀국한다. 2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40여 년 동안 진리를 추구하며 일생을 미혼으로 지내다가 80세에 생을 마쳤다. 27편의 대화록 중 주요저서는 다음과 같다.


 초기대화편(40세 이전):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이온>

 중기대화편(40-60세): <메논> <파이돈> <국가> <향연> <파이드로스>

 후기대화편(61-80세):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정치가> <티마이오스>


b.철학사상

 플라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앞시대와 동시대의 철학사상에 대한 비판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데, 그가 특히 정면대결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의 대표격인 프로타고라스는 프로타고라스 명제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즉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진리의 상대적 성격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를 논박하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이들에게 걸려들어 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정한 원칙이 없는 혼란한 아테네의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탈옥의 자유도 물리치고 원칙을 고집하여 독배를 들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이러한 긴박한 아테네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혁신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우선 이론이기에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논의의 이론적 근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1. 진리관

 플라톤의 진리관은 이데아론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보았고, 현상의 세계는 감각적. 일시적. 가변적 세계로 보았다. 각 사물의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데아 중에서도 최고의 이데아를 선의 이데아로 보고, 선의 이데아야말로 우주 일체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본체라고 보았다. 이처럼 플라톤의 철학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이데아와 현상계가 대립하는  이원론 이다. 


   2. 인간관

 그의 인간관은 인간의 영혼과 에로스. 영혼 3분설(이성, 기개, 욕망). 4주덕(지혜, 용기, 절제,정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으나 육체속에 갇혀 버린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자기의 고향인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정열을 가지는데 이 정열을, 에로스 라 한다. 그리고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이성에 의해 지혜, 기개에 의해 용기, 욕망에 의해 절제의 덕이 생긴다고 보고 이성, 기개, 욕망의 조화상태에서 정의의 덕이 생긴다고 보았다. 이상의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주덕은 이후 서양

윤리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3. 국가관

 플라톤의 국가관의 핵심은 이상국가론과 철인정치론 인데 <국가>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국가>의 내용

 플라톤의 저술들은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27편의 대화편 중 그의 철학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이<국가>와 <티마이오스>다.

 루소가  인간교육에 있어서 세계최대의 논문 이라고 평한 바 있는 이 저서는 플라톤의 27종이나 되는 대화록 중 하나로 여기서도 주인공은 소크라테스고 플라톤 자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벤디스 여신제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폴레마르코스를 만나 그의 권유로 그의 아버지 댁을 방문, 그곳의 손님들과 합석하게 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노부 케팔로스에게 인생항로의 경험을 들려줄 것을 요청한다. 케팔로스는 노령이란 연애나 식욕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자유와 행복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시작되어 행복과 정의의 관계가 논의된다. 정의는 사적 입장에서보다는 공적 입장에서 다루어져야 하므로 국가란 무엇이고 가장 좋은  이상국가 란 어떤 것인가가 다음과 같이 논의된다.

 인간의 영혼 3분설처럼 국가도 통치계급, 수호계급, 산업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에 대응하는 덕목으로 지혜. 용기. 절제의 셋을 들고, 세 계급이 각각 맡은 바 직분을 다함으로써 국가가 전체적으로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로써 국가는 도덕적인 조직체가 되고 선의 이데아가 현실세계에 실현되어 가장 이상적인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철학자가 통치계급을 담당해야 한다는 유명한 철인정치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일 모든 도시국가에서 철학자들이 왕이 된다든지, 권력자가 철학정신을 갖지 않을 때 국가와 인류에 있어서 불행은 그칠 새가 없다. 플라톤은 그 이유를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들어 설명한다. 즉, 어렸을 적에는 상상력을 길러주기 위해 신화를 가르치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는 시작과 음악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기 시작할 때 수학을 통해 정신적 수련을 쌓는다. 18세가 되면 체력단련을 위해 군사교육을 시켜서 심신이 조화된 한 인격체를 배출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선발시험을 거쳐 적성에 따라 15년간의 고등교육을 받고 재선발시험을 치러 엘리트를 선발한다. 또 이들에게 실무교육과 변증론을 터득시켜 50세가 되면 이들 중에서 선의 이데아를 간파한 자가 철인과 정치가로 추앙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국가>에서

구상한 이상국가론과 철인정치론은 현실에 실현되지 못했다.


c.플라톤 철학의 의의

 우선 철학사적 평가를 보면, 플라톤은 철학이요, 철학은 플라톤이다. 색슨족도 로마족도 플라톤의 범주에 어떤 이념도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은 인류의 영광인 동시에 치욕이다라고 애머슨은 말했고, 화이트헤드 역시 서양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고 말한 점, <유토피아>를 지은 토머스 모어나, <에밀>로 유명한 루소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드리운 그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이념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의 추구로 흐르고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실증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논리적 실증주의, 유용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실용주의나 관념의 뿌리는 물질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  등 모두가 본질보다는 실제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본질 없는 실존이나 개념 없는 낱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현대인류의 불행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인 관찰을 하는데 있는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 사람들은 엉거주춤하다가 되돌아서고 만다. 그러나 철학은 사유의 막다른 길에서 본모습으로의 길 을 제시한다. 이 본모습으로의 길 을 열어준 사람이 플라톤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감각의 사슬에 얽매어 있지만 플라톤은 우리를 동굴 밖의 세계로 인도하여(동굴의 비유) 본모습에 영적 눈을 뜨게 한다. 아무튼 그의 철학은 서양관념론적 이상론의 비조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 쌍벽을 이루며, 아카데미아학파,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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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플라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가》 또는 《정체》(政體,그리스어: πολιτεία 폴리테이아[*], 영어: The Republic)는 플라톤의 철학과 정치학에 관한 주저로, 기원전 380년경[1] 에 소크라테스 주도의 대화체로 쓰여졌다. 이 저서는 철학과 정치 이론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며, 플라톤의 저작 중 가장 잘 알려진 책이기도 하다..[2][3] 플라톤의 허구적 대화[출처 필요]에서 주인공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다양한 아테네인과 외국인들은 올바름(正義)의 정의(定意)에 대해서 논하고, 철인(哲人) 왕과 수호자들이 다스리는 이상 사회를 그리며 정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지 따진다. 또 이 저서는 철학자의 역할, 이데아론, 시가(詩歌)의 위상,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4]


목차  [숨기기] 

1 제목

2 설정과 등장인물

3 목차

4 내용

4.1 올바름의 뜻

4.2 정부의 형태

5 참조

6 각주

제목[편집]

제목의 기원이 된 폴리스는, 현재의 '도시'나 '도시국가'에 해당하는데, 이 때문에 번역본의 제목이 주로 '국가'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폴리스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삶의 방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모여 살아가는가'하는 의미가 되겠다. 작품 안에서 플라톤은 '폴리테이아'를 '정부의 형태(政體)'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의미로 번역본의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보통 없다.[5]


설정과 등장인물[편집]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 토론의 주인공이다.

케팔로스, 늙은 무기제조공으로[6],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트라시마코스, 칼케돈의 소피스트.

글라우콘, 아리스톤의 아들.

아데이만토스, 아리스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케팔로스의 아들.

클레이토폰, 아리스토니모스의 아들.

카르만티데스, 파이아니아 사람.

뤼시아스, 케팔로스의 아들.

에우티데모스, 케팔로스의 아들.

니케라토스, 니키아스의 아들.

아테네와 긴 성벽 회랑으로 연결된 외항(外港) 피라이에우스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이들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대화가 있었던 날의 다음날 그 내용을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목차[편집]

제1권

정의에 대한 정의

제2권

정의의 본질과 기원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

제3권

수호자들을 위한 교육법 : 시가, 음악, 체육

통치자의 자격

제4권

수호자의 행복

수호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 : 부, 가난 / 중시해야 할 것 : 교육, 양육, 입법

훌륭한 국가에 필요한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정의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

제5권

남녀 평등에 대해서 논의

아내, 자식 공유의 문제

이상 국가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제6권

철학자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

선의 이데아 (태양의 비유로 선의 이데아의 개념을 설명)

제7권

선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로 선의 이데아를 설명)

동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요한 학문 : 수학, 기하학, 천문학, 변증론

수호자의 선발과 교육방법

제8권

잘못된 국가 체제 : 명예체제, 과두체제, 민주체제, 참주체제

제9권

참주의 성향과 불행한 인간인 참주

가장 행복한 인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쾌락

제10권

모방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영혼 불멸설

내용[편집]

플라톤은 정의의 본질을 생각함에 있어 그 방법으로 먼저 사상 위에서 국가를 성립시키고, 어떠한 국가가 정의의 덕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런 연후에 그 국가에서 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의의 덕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살기 위하여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4-5인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갖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국가가 형성되면 국내의 통치나 외적의 방어에 종사하는 계급이 생겨난다. 그 결과 국가는 세 계급으로 성립된다. 맨 아래에 서민 계급으로서 농공상인, 그 위에 수비(守備) 계급으로서 군인, 최고의 자리에 통치자로서 철인(哲人)이 있어 국가통치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통치자는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계급에 각자가 목표하는 여러 덕이 있어야 한다. 서민계급에는 절제의 덕, 군인 계급에는 용기의 덕, 통치자의 그것은 지혜의 덕이며, 각각의 계급이 제각기 덕을 보존하여 자기 일을 실천할 때에 국가 전체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이 국가에서는 서민 계급은 사유 재산도 가정생활도 할 수 있으나 다른 두 계급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고 국법에 의하여 우생학적인 결혼이 이루어지며, 출생하는 아이도 출생과 동시에 모친의 품에서 떨어져 공동 육아소에 보내져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 아이들 가운데서 우수한 자는 교육을 더 받아 국가통치 계급에 들어간다. 이러한 세 계급의 덕은 개인의 정신 속에서도 발견될 수가 있어서 서민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정욕적(情欲的) 부분, 군인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기개적(氣槪的) 부분, 통치자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이성적(理性的) 부분이라 하여 그는 각각 절제·용기·지혜의 덕을 목표로 두었다. 이 세 부분이 영혼 중에서 이성적 부분을 통치자로 하여 지배·복종의 관계를 조화적으로 유지할 때에 사람은 정의의 덕을 지닐 수가 있고, 이러한 국가 밑에서 처음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철학사》에서, 러셀은 이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I-V권: 유토피아 부분. '올바름'의 정의를 시도하면서 이상 사회를 그린다.

VI-VII권: 철학자가 이상 사회의 지도자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철학자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동굴의 비유'가 논의된다.

VIII-X권: 몇 가지 정부의 형태와, 각각의 장단점을 논의한다.

올바름의 뜻[편집]

이 책은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며 시작된다. 폴레마르코스의 답은 이렇다. 선한 자를 이롭게 하고 악한 자를 해롭게 하는 것이 올바름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일인가. 대상이 악한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과연 그를 올바름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가.


트라시마코스는 소피스트답게, '올바름'은 다스리는 자(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다스리는 자가 옳다고 정한 법을 통치받는 자들이 따르면 결국 그것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스림의 본질이란 다스림 받는 자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기술이며,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은 다스림에 따르는 추가적인 것은 될지언정, 올바른 다스림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글라우콘이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이어서, '올바름(正義)'이란 사회계약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면, "서로간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을 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글라우콘의 형제인 아데이만토스는,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올바르지 못함'이 별다른 효용이 없는 '올바름'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주장은 '올바름'이나 '올바르지 못함'의 결과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소크라테스에게 "그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서, 즉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또는 그렇게 되지 않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줄 것을 요청한다.이에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기 위해, 국가에서의 올바름을 밝힌 다음 개인의 올바름을 따져보기로 한다.


정부의 형태[편집]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논하는 정부의 형태는 크게 5가지로 다음과 같다.


Aristocracy : 철인정치

Timocracy : 명예정치

Oligarchy : 과두정치

Democracy : 민주정치

Tyranny : 참주정치

철인국가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며, 계급 간의 관계가 타락함에 따라 점차 정부 형태도 타락해간다고 보았다. 이 과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타락으로 설명된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좋지 않은 정체이며, 최악의 정체인 참주정에 이르면 참주를 제외한 모든 피지배자는 참주에게 억압받고 참주는 다수의 피지배자에 의한 보복의 공포에 휩싸이며 사회는 무절제가 만연하게 된다.


B020 – 대동서(大同書) /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가 서구적 이상 세계라면, <대동서>는 중국고전에 기술된 <유가의 이상세계>를 서구식 근대사상으로 재해석하여 모든 차별에서 해방된 동양적 이상세계를 그린 책이다. 즉, 무술개헉운동으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강유위가 공자의 <춘추>등 6경에 나타난 공자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 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a.생애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무술변법운동(1898)의 중심인물로 중국전통사상의 마지막 보루이자 새로운 사상을 상징하는 첫인물.1858년 광동성 남해 출신으로 일찍이 유학경전과 불경.사서 및 서양서적을 널리 읽어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후에 그는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 서양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스스로 사상적 전환을 체험했다.

 1889년 그는 한낱 서생의 신분으로 처음 조정에 복궐상서하여 변법자강을 건의했다가 조롱만 당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그는 만본초당을 장흥리에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때 양계초도 제자로서 수학했고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저술했다. 그후 그는 거인.진사 등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직후인 1895년부터 그는 4년간에 걸쳐 7차의 상서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다가, 1898년 드디어 덕종의 부름을 받아 2시간 이상의 밀담을 갖고 변법책의 대계를 도모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누설로 당시의 전권자였던 서태후에게 전해지자 그 계획은 이른바 <백일유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강유위는 홍콩으로 피신했고 담사동.광인 등을 비롯한 동지들은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무술정변>이라 한다.

 강유위는 망명길에서 일본.타이.인도 등지를 둘어보고 캐나다 등지에서는 보황회를 조직하여 어느 변법을 수용하려 한 광서제를 지켜주기 위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는 황제제도를 인정하는 봉건적 정치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혁사상을 버린 것일까? 어쨌든 강유위는 운동이 실패한 뒤 진보진영에서 사회개혁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한 것 같다.

 그가 중국에 돌아온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로, 1916년 원세개에게 제재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1917년 장훈과 결탁하여 복벽운동을 추진하는 등 1927년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상에서나 정치에서 노골적인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저서로는 <대동서> 이외에도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맹자미언> <춘추삼세의> <춘추공양전주> 등 방대한 양을 남겼다.


b.중국의 근대화운동과 강유위


 중국의 근대화운동은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청조는 아편전쟁과 애로 호 사건,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운동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여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운동을 추진했는데, 제1단계가 양무운동(洋務運動)이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 中體西用>은 중국의 정신에 기초를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특히 군수시설을 도입하여 자강을 도모하려는 부국강병운동이었으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로 끝났으며, 반면 동시에 추진했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성공을 거두었다.

 서태후와 이홍장이 추진했던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그 반대편에 있던 광서재 (덕종).장지동 등 황재파의 발언권이 커지고,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강유위.양계초 등이 있었다. 

 무술개혁을 주도한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제1차 상서이다. 이에 앞서 강유위는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를 지어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의 사상을 비판, 재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사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말을 빌어왔다. 강유위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1868)이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강유위는 서양의 기술의 도입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개혁(변법) 해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로 맺어진 시노모세키 조약 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무술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강유위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등 등에 의해 호남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은 학회.신문.잡지를 통해 입헌정치제, 자본주의 체제,유럽의 학술과 사상의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고 특히 강유위의 <대동사상>과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대동서>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사회의 대동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로 민권론과 평등론을 내세웠다. 한편 <공자개제고>는 성인으로 모셔지던 공자의 위상을 바꾸어 공자야말로 춘추시대의 난세를 개혁하고자 한 한 사람의 개혁자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가해 변법개혁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개핵정책을 모색했다.

 변법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교주만 점령으로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이 임박한 후였는데, 강유위는 광서제에게 5번째 상서를 올려 변법개혁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관리들도 온전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고취시켜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에 광서제는 1898년 제도의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칙을 내리면서 소위 무술 백일개혁의 막은 올랐다. 이를 <변법자강운동> 또는 무술년에 있었다고 하여 <무술개혁>이라고 한다. 그해 강유위.양계초.담사동.황준헌 등이 광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광서제는 이러한 개혁세력 등에 의해 구상된 정책들을 정리하여 100여 항목이 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중 중심적인 개혁내용은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신문.잡지발행,인재등용,농공산업 진흥,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이홍장 등 고위관리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서태후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광서제의 과감한 군사력을 가진 원세개는 개혁파를 배신하고 모든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되었다. 수구파의 정변으로 광서제가 연금되는 가운데 담사동 등 <무술6군자>들은 처형당하고 강유위.양계초 등 몇명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남으로써 <무술개혁>은 백일천하로 좌절되었다.

 강유위가 주도한 무술개혁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부르주아 세력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 전통사회에서 혁신적인 지식계층에 의해 추진된 민족주의적 구국운동으로, 대중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완강한 보수세력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c.<대동서>의 내용


 강유위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역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중국과 서양,전통과 근대, 보수와 진보 등 여러 가치개념들이 충돌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당시 사상가들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강유위의 사상도 그중 하나인데, <대동서>는 그의 사상적 특징을 말해주는 저작임과 동시에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동서>가 말하려는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고거구락은 인간본성의 기본욕구이며 최고의 인도 법칙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부인권 사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지닌 근대사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고거구락을 위해서 괴로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인데, <대동서>에서는 세상의 고뇌의 원인이 국가.계급.인종.남녀.가족.사유재산 등 9가지 구속적 존재에 있고, 이것들을 점차 제거해서 제도와 문화를 동일하고 평등하게 하는 세계정부를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신선학.불학.천유학이 성해져서 모든 정신적 고뇌에서 해방된 뒤에 얻어진다고 했다.

 이 책은 10부로 나뉘어지는데, <갑부>는 <세계에 들어가 중고를 보다>란 제목 아래 현실세계의 고뇌--인생의 괴로움, 천재의 괴로움,인도의 괴로움 등이 제시된다. 그에 의하면 이 모든 괴로움은 전부 <구계>에 의해 생긴다. 따라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구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하 9부에서는 9계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 논술되어있다. 그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1. 국계를 떠나서 대지를 합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의 경계를 없애고 전세계를 유일한 공정부에 의해서 통할한다. 

 제2. 급계를 떠나 민족을 공평케 한다. 즉, 모든 계급을 없애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

 제3. 종계를 없애고 인류를 같게 만든다. 즉, 인종을 개량하여 전인류를 우량인종으로 만든다.

 제4. 형계를 없애고 독립을 지킨다. 즉, 완전한 남녀동등권을 실시한다.

 제5. 가계를 없애고 천민이 된다. 즉, 가족제도를 파기하여 필요한 시설은 전부 공영으로 한다.

 제6. 산계를 없애고 생업을 공으로 한다. 즉, 생산분배의 기구를 공영으로 하고 사유재산에 기초를 둔 불합리한 점을 제거한다.

 제7. 난계를 없애고 태평을 다스린다. 즉, 앞에 든 6계를 없애고 태평한 세상에 이른다.

 제8. 유계를 없애고 중생을 사랑한다. 즉, 인류평등이란 이상이 달성된 후에는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전 생물계에 자비를 베푼다.

 제9. 고계를 없애고 극락에 이른다. 즉, 앞에든 온갖 고뇌를 제거하여 이 땅 위에 극락세계를 출현시킨다.

 이상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꿈꾼 사회는 말하자면 일종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고 하겠다. 거기에는 세계정부가 이루어져서 국가가 없어지며 정부는 모든 인민의 선거로 구성되고 국가가 없어지며 가족 또한 인정되지 않는다. 아동양육과 노인의 보양은 모두 정부가 하고, 성년은 정부의 지도명령에 의해 농.공 등의 생산사업을 분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극락세계가 출현한 후에는 <<인경을 떠나 선불의 경에 들어간다는 말로써 본서는 맺어져 있다.


d.사상적 평가


 전체적으로 보아 <대동서>를 구성하는 사상적 요소는 <공양삼세설> <예운편의 대동소강설> <불교의 자비평등설> <루소의 천부인권설> <기독교의 자유평등설> <유럽의 사회주의학설> 엄복에 의해 소개된 <진화론>등이다. 여기서 대동설이란 원래 유교의 고전에서 그리는 이상사회이고, 공양삼세설이란 역사가 혼탁한 거란세, 안정이 된는 승평세, 안정이 성숙되는 태평세의 평태로 발전해간다는 사상이다. 이중 승평세는 <예기>의 <예운편>에 나오는 <소강>과,태평세는 <대동>과 같다고 보았다.

 이같이 <대동서>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대동사상과 공양삼세의 뼈대 위에 근대적인 것을 전통적인 것 안에 포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유재산제의 해악을 지적함으로써 생 시몽, 오언,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어쨌든 강유위의 대동사상은 근대적인 것을 섭취하고 이것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재조직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서구문명의 충격에 중국사람들이 반응한 여러가지 형태에는 전통에 완전히 집착하려는 보수파, 그와 정반대로 서구화를 주장하는 급진파,부분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파, 세계주의화를 주장하는 파 등이 있다. <대동서>만을 기준으로 보면 강유위는 세계의화를 주장하는 소수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유위의 본질적으로 왕조체제를 근대적으로 수정함으로써 그 존속이나 강화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입헌군주제와 민권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하려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외쳤던 그가 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국수주의 군주정체를 옹호하고 공화제와 혁명을 반대하는 등 보수적 전통주의자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또한 <대동서>의 내용이 차분히 읽어보면, 어떤 일정한 주제를 두고 쓴 저술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그냥 열거한 느낌도 없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앞에서 말한 세계가 인류진화의 궁극이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당시 중국사상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이런 면에서 <대동서>는 강유위가 젊은 나이에 쓴 습작 정도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그때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낙관적인 신념과 전망을 제시하여 계몽적 진보적 작용을 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대동서> 속에 나오는 여성해방.인권문제 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봉건구습에 반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동서>에 나타난 강유위 사상의 특징은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이라는 문제를 남겨놓긴 하지만, 현실대응을 위해 몇 천 년간 내려온 유교자체를 과감히 수정하고 다시 해석해낸 데 있다.그리고 그의 사상은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 사상으로서

유교자체의 존재근거를 뿌리째 흔들 만큼 이후 전개되는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철학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중국학에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 관해서도 알고 싶다면 양쪽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 강유위의 사상은 반드시 건너야 할 산이다. <대동서>가 필독서가 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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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法自彊運動 

(출처 https://namu.wiki/w/%EB%B3%80%EB%B2%95%EC%9E%90%EA%B0%95%EC%9A%B4%EB%8F%99)


1. 개요[편집]



1898년 중국 청나라에서 광서제의 주도아래 일으킨 근대화(자강) 운동. 무술변법(戊戌變法), 100일 유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배경[편집]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양무운동의 상징이었던 이홍장이 정계에서 물려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7년 독일의 교주만 점령사건이 벌어지고 열강의 청나라 분할이 가속화되어 중앙에서도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3. 전개[편집]


캉유웨이는 1888년부터 꾸준히 조정에 상서를 올렸는데 다섯 번째로 올린 상서가 당시 위기를 느끼고 있던 광서제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1898년 4월 23일 광서제는 변법을 선언하고 캉유웨이 등이 중앙정계를 장악하며 100가지가 넘는 개혁안을 내게 된다. 개혁안의 주 내용으로는 제도국 개설,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 신문 · 잡지 발행, 인재등용, 농공상업 진흥, 우편사업,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었다.


7월 19일 광서제는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대신을 서태후의 재가 없이 숙청시켰는데 이것으로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서제는 이토 히로부미 (!!!)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으려고하자 반발한 보수파들은 서태후의 원조 아래 반발을 일으켰고 이에 광서제는 독일식 훈련을 받는 신건육군을 담당하는 위안스카이에게 보수파의 제거를 맡기려고 했는데 위안스카이가 변법파를 배신하여 서태후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고, 7월 20일 서태후에 의해 광서제가 연금당하고 7월 22일 서태후의 섭정령이 내려지면서 변법은 103일만에 대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무술정변이 실패하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무술육군자로 불리게 되는 담사동 등 6명의 개혁가는 처형당한다.


4. 총론[편집]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청나라 내부에서의 개혁세력이 상당수 숙청당하거나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이러한 점으로 인해 청나라를 타도해야 한다는 혁명파가 대두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갑신정변과의 공통점[편집]


변법자강운동은 14년전 조선에서 있었던 갑신정변과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


우선 변법자강운동과 갑신정변 모두 젊은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변법자강운동 당시의 캉유웨이는 갓 40대에 진입했으며, 량치차오는 20대 중반이었다. 갑신정변 당시의 김옥균은 30대 초반, 박영효는 2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당시 군주의 지지(광서제와 고종)를 받았으며 중체서용, 동도서기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근대화 운동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며 메이지 유신을 표방하며 일본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적극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짧은 기간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실패를 주도했던 사람으로 당시 군주의 뒤에서 섭정하고 있던 보수파 여인들(서태후와 명성황후)이었다는 점. 그리고 실패 이후 주도 인물들이 모두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변법자강운동 갑신정변 공히 위안스카이가 실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안스카이는 변법자강운동에서는 원래 변법파 손을 들어주다가 배신을 때렸고, 갑신정변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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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維新 (めいじいしん) (출처:나무위키)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서구식으로 완전히 뒤바꿔 놓은 개혁


19세기말 일본의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 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 된 1868년으로 본다.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그냥 유신이라 하기도 한다. [2]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쓰이는 역사 용어[3]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고잇신)' 등으로 불리었다.[4]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5] 


분명히 당초 목표는 존왕양이를 하면서 문자 그대로 막부를 타도하고 고메이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사쓰마의 코마츠 타테와키의 삿쵸 동맹 → 삿토 맹약 →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직후에 전면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츠마와 조슈 두 번인데,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파로 잔류하고 있었던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6]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였다.(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만으로의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다.)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 존왕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웠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판단이 옳았다.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청나라와 조선은 모두 개혁에 실패하였는데 그로 인해 청은 반 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도 정한론 무산 결과와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로의 일본 열도의 마지막 내전)이다. 


2. 한국에 미친 영향[편집]


이 때 국서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얻어 맞고 있었다. 중국은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에선 '천황'이라는 호칭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 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고, 그 이후 조선침략이 본격화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일 뿐, 이미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급격한 중앙집권화로 인한 몰락 사무라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해외 식민지 건설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게 대세였던 듯.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인 10월 유신의 유신을 메이지 유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편집]


21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분명한 명분과 방향을 가지고 과감하고 모든 범위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여 이를 단기간에 성공시켰느냐(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아니면 오히려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가(대원군 치하 조선) 뒤늦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설픈 개혁을 시도했느냐(개항~을사늑약까지의 조선)여부가 양국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탈을 가속화시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던 막부를 사쓰마, 조슈 등의 네 개 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다. 이들은 그 대안으로 덴노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러면서도 신격화는 시켰지만 정작 권력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신정부의 실력자들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력을 이용해 총체적인 서구화라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바꿔나갔고 이에 대한 저항도 거의 없었다. 보수적 인물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정도의 입장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가문들은 외부 상황에 별 관심도 대책도 없었고, 대원군은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으며, 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을 위시한 조정은 반강제로 개화의 삽을 떴지만 그 의지나 방향도 명확치 않았고 전개도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스스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나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 같은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아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기술을 도입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비록 쇄국을 했으나 유일하게 교류가 허락된 네덜란드로부터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세계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7]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수준이 넘사벽이었던 것이, 사츠마같은 일개 '지방'[8]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양무호와 광제호가 전부였다(...).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를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대충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덤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수도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서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9]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10][11]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12]->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결국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 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13]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14]도 명백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무시했지만, 일본의 총 국력은 아무리 늦어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엄연히 조선의 그것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 차이는 4:1에 이르렀다. 애초에 인구도 일본이 조선의 1.5~2배나 되었고, 영토의 차도 대략 그 정도였는데다가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15].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도시화율도 더 높았고,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더 활발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른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 재정 규모를 볼 경우, 일본은 통상 35%[16], 조선은 10%[17][18]을 좀 넘기는 바 정부재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은 대단히 빠듯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잉여재정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는 급작스러운 외부의 위협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부가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한다는건 농민들에겐 더 좋았겠지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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