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oh column: Brewing coffee inside moka pot is a finicky art

(originated from : http://www.sctimes.com/story/life/food/2014/09/03/teoh-column-brewing-coffee-inside-moka-pot-finicky-art/15004337/)


Moka pots, sometimes called a stovetop espresso maker, isn't really an espresso maker. It's a small (or large) steel pot, broken into three primary compartments: the lower compartment for water, a small filter and holder for the coffee grounds, and the top where the pressured brew is squeezed through and kept.


It's my most infuriating method of brewing right now, as it's really simple to execute but nightmarishly hard to brew a good cup of coffee.


The idea of the moka pot is to have heated water pushed up a small pipe due to pressure, through coffee grounds, upward into the container that then holds the brew.


In some ways it's similar to a vacuum pot in that both have relatively consistent heat and pressure, but where the vacuum pot has the grinds seeping in heated water, the moka pot has a short extraction period as the water is pushed past the coffee grinds rapidly with pressure.


While it's called the stovetop espresso machine or maker, it doesn't provide anywhere close to the same amount of pressure that espresso machines do. You're unlikely to get the creamy foamy layer known as crema from a moka pot, and it ordinarily has a lighter body than actual espresso.


The tricky thing about moka pots is that not only are there many different polarized recipes and approaches, each small variation is amplified in taste. I've even heard that moka pot recipes are sometimes considered family secrets in Italy. I'm not entirely convinced that's untrue.


Many recipes called for preheated water on low heat to brew the coffee. At the same time, other brewers swear by using cold water, with medium-high heat. I've found that this often heats up the coffee grounds as well and draws out the burnt taste more.



Some recipes ask for the coffee to be as coarse as they would be for a Chemex coffeemaker, while others recommend slightly coarser than an espresso grind. But the aftereffect of a coarser grind is a watery brew, while a fine grind might leak through the filter.


Most caution against tamping the grinds down, as that could create too much resistance during the brewing process. But tamping the grinds down also provide a longer extraction process, bringing more flavors out.


There are recipes that suggest keeping the lid closed; others ask to have it open. Numerous say to remove the pot from heat once gurgling from the water chamber is heard, while countless others say to keep it on low heat up until the brew starts looking light yellow.


Unlike a French press, a vacuum pot, or even an Aeropress where you can brew for a varying number of people, moka pots can only brew for the number of people it's sized for.


You can't buy a 3-cup moka pot and use it to brew less than three cups, as it requires the entire coffee grind holder to be filled in order to work properly.


In short, the moka pot is a rigid, finicky and frequently maddening method of brewing coffee.


I'm nearly convinced that I could tarnish and spoil a moka brew just by accidentally sneezing while standing by it.


But all the complaining and ranting aside, I've not had such great fun brewing coffee in recent memory. It feels like playing Sudoku with coffee, where every little change affects numerous other instances.


I predict it'll be many more columns before I find the recipe that suits my taste, and I'll stick with my tried-and-true brewing tools until then, but if you're a moka pot user and you have suggestions to send my way, message me on Twitter @jkteoh or email me at jteoh@stcloudtimes.com.


Until I figure it out though, I'm sticking to the Aeropress for my morning brews.

B040 – 두보시선 (杜甫詩選) / 두보 (杜甫, 712 ~ 77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이백이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온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립한 반면, 두보는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구축함으로써 당나라를 중국 시문화의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두보는 초월적 자세로 삶을 파악하려는 이백과 달리 삶 자체를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 진실로 보며 이러한 삶 가운데 나타나는 각종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사회적 모순이야말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이 또한 삶의 일부라는 인식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지성인이 느끼는 삶에 대한 고뇌가 훌륭한 시적 기교를 통해 시화되고 있다.


a.생애와 작품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으로 불린다. 이백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이두, 당나라 말기의 두목에 견줄 때는 노두, 대두 라고 불린다. 자는 자미, 호는 소릉.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 남쪽 근교, 이름이 같은 지역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유교를 받들고 벼슬을 한 소관료의 집안에서 출생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두보가 생존했던 시기도 당제국의 번영과 몰락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현종의 지배기에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모인 인종 전시장과 같았으며, 당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양귀비에게 빠진 현종은 안녹산의 난을 당해 실각하고 국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는 못했다. 20대 전반은 강소절강에서,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하남산동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 고적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에게 부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병사의 노래) (미인의 노래)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등 사실주의적 시가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44세 때 안녹산의 난을 만나 적군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뒤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이 있던 장안 서쪽의 봉상으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지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의 죄를 변호하다 속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에 (봄날에) (북녘으로 가면서) (관리에 대한 시 세 편(삼사:석호사, 신안사, 동관사)) (이별에 대한 시 세 편(삼별:신혼별, 수로별,무가별)) 등을 썼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주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감숙의 진주로 갔다. 진주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다 다시 남쪽의 동곡으로 옮기고, 그해 말 사천의 성도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회의 언저리에 완화초당 을 짓고 살았다. 지바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사천의 재주낭주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인 절도사 엄무의 지극한 천거로 공부원외랑이라는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 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양자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양서와 동둔에서 관전을 비려 농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자강에 배를 띄워 3협을 따라가면서 2년 동안 호북호남 등의 물 위를 떠돌아다닌 후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쇠고기와 술에 의한 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신빙성이 낮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동정호에서 숨졌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두보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사회계급적 모순을 보고 그 해결책을 강구해보려고 탐구의 길을 걸으며 고뇌 속에서 한 평생을 보냈다.


b.두보의 작품세계

두보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미 소년시절에 1천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30세 이후에 쓴 1400여 편의 시와 몇몇 산문뿐이다. 30세 이후의 시는 뚜렷한 시풍의 변화성장에 따라 4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44세까지로, 이 시기의 두보는 외부세계로 눈을 돌려 대상의 충실한 묘사와 여러 가지 사회악의 고발에 충실했다.

제2기는 48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안녹산의 난 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으로 종래의 외부세계로 향하던 눈길을 안으로 돌려 마음속의 우수를 노래함과 동시에 자신의 우수를 다른 사람들의 우수와 일치시켜 다루었다.

제3기는 54세까지 성도에 살던 시기로 또 한번의 전환을 이룬다. 이때 그의 시선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선의로 향해진다.

제4기는 죽기 전인 59세까지의 시기로서 특히 양서와 둔동에 머문 2년 동안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많이 썼다. (추홍팔수) (영회고적5수) 등 칠언율시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많은 모순을 포함하면서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새로운 철학을 확립한 진지함과 따스함이 있다.

두보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실성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성실해야만 된다는 중국문학 정신은 두보의 시속에서도 아주 활발히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실이 만들어낸 우수를 근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재를 취해 인간의 생활상과 심리,자연풍경 속에서 그때까지 다른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널리 발굴하여 자유자재로 읊었으며 표현에 정성을 기울였다.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달적의 영회, 5백자) (북녘으로 가면서(북정))의 2대 걸작을 포함한 장편 고체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해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단시가 정형인 금체에서는 특히 율시를 잘 지어, 엄격한 형식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이어 시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6조, 당초기의 시가 정신을 상실한 장식으로 떨어지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비해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되찾으면서도 그것은 성숙한 기교로 표현해 중국 시사상 한 획을 그었다.


c.주요 작품내용

두보가 산 시대는 안녹산의 난(755)을 중심으로 당나라가 번영에서 쇠망으로 향하던 시기이며, 두보의 생애 역시 고난에 찬 것이었다. 그러나 두보시의 주제는 그 괴로운 인생 속에서도 그것을 참아내는 의지와 성실을 추구하는 데 있다. 두보의 시와 같이 우수를 노래하면서도 전대의 시처럼 절망에 빠지는 일 없이 읽는 사람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며 고무하는 힘을 가진 것도 그와 같은 두보의 적극적인 인생관과 도덕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의 용어에는 독특한 구성법이 있으며 장중한 언어로 민중의 고뇌를 호소한 힘은 비할 데가 없다. 특히 자유운율의 5언7언의 고시에 있어 생생한 묘사로써 시대의 고통과 민중의 고뇌를 여실하게 노래한 것이 많으며 후세의 비평가들이 시사 라 불러 높이 평가했다.

대표작으로 (병사의 노래) (미인의 노래)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 (북녘으로 가면서) (애강두) (애왕손) (석호의 관리) (신혼부부의 이별) (초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고금의 걸작으로 알려진 것은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 (북정)이다.

전자는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장안에서 봉선현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돌아가는 도중에 여산을 지날 때, 현종이 귀비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산에 있는 화청궁에서 주연을 베풀며 춤추고 노래부르며 태평스럽게 세월을 보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두보의 뇌리에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고달픈 삶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장안 사거리에 굶고 얼어죽은 시체를 떠올리면서 지배계급들의 방탕함을 준열히 지적하고 있다.


  봉선현으로 가면서

더운 김 무럭무럭 피는 온천에 / 금군들의 창검이 절겅거리네

임금 신하 여기 와서 즐겨 노는데 / 풍악소리 하늘 가에 울려퍼지네

온천욕은 고관께만 하사하셨고 / 연회에는 서민이 하나도 없네

중당에선 신선들이 춤을 추는가 / 향연기 피는 속에 미인이 보이네

손님들은 돈피가죽옷 따뜻히 입고 / 피리와 거문고 소리 흥겹게 듣네

손님에겐 낙타족탕 드시라 권하고 / 쟁반에 유자 향귤 쌓여 있구나

궁궐에서 나눠주는 그 비단필은 / 가난한 여인들이 짠 것이건만

그 집 남편 붙잡아다 곤장치며 / 긁어모아 대궐에 바치라 하네

부자집엔 술 고기 썩어나는데 /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 널렸네

부귀귀천 지척 두고 판이하거니 / 너무나 슬픈 이 마음을 더 쓸수 없어라


두보는 이와 같이 노동인민들이 생산한 물질재부가 봉건 통치배들을 먹여 살린다고 보았다. 봉건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계급모순과 대립을 이처럼 신랄하게 폭로한 그는 전란과 봉건적 수탈로 말미암아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노동인민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시했다. 그들을 구제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시인의 모습은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려준다.

(북정)은 난이 일어나 임시로 설치한 숙종의 처소가 있는 봉상에서 고향의 처자에게로 귀성했을 때 쓴 작품이다. 장중한 말로 여행의 목적을 말하고, 경쾌한 표현으로 도중의 광경을 서술하는 한편, 진정이 넘치는 말로써 처자와의 재회를 그리는 한편 다양한 언어로 시국을 논하는 700여 자에 달하는 웅편이다.

그의 작품 중 (관리에 대한 시 세편(삼사:석호사, 신안사, 동관사)) (이별에 대한 시 세 편(삼별:신혼별, 수로별, 무가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잔악하고 암흑같은 병역제도에 대해 비판,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나라를 위하는 노동인민들의 애국주의 정신을 열렬히 노래했다. 그는 (석호의 관리)에서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두 아들은 이미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횡포무도한 관리에게 끌려 병역에 나가는 처참한 광경을 묘사했다.


  석호의 관리

저녁녘에 석호촌에 머물렀더니 / 벼슬아치 밤을 타서 사람 붙잡네

아범은 담 넘어 도망가고 / 할멈은 문을 열고 내다보누나

벼슬아치 고함소리 몹시 사납고 / 할멈의 흐느낌 가슴 아파라

앞에 나선 할멈의 하소연 소리 /  아들 셋 업성에 수자리갔소

한 아들이 편지에서 전해온 소식 / 두 아들은 근자에 전사했다오

산 사람 이럭저럭 살아가지만 / 죽은 이는 못 올 길을 영영 떠났소

집안에 병역나갈 사람이 없고 / 젖먹는 손자애가 있을 뿐이오

손자 있어 며늘아기 갈 수 없지만 / 나들이 치마 한벌 없는 신세요

이내 몸 늙어서 원기 약하나 / 나리님 따라가 밤새워 가면

하양의 싸움터에 가닿게 되고 / 병사들 아침밥을 지을 수 있소 

밤깊어 말소리 끊어졌으나 / 흐느낌 소리 귓가에 들려오는 듯

날밝아 노정에 발길 옮길 때 / 홀로 남은 어멈과 작별했다네


두보는 이와 같은 장편 고시 외에도 짧은 5언7언율시에도 장기가 있었다. 한정된 숫자와 엄격한 규칙 속에서 다른 어떤 시인도 흉내낼 수 없는 내용을 담았으며, 종래의 상투적인 반복에 불과했던 대구표현을 유기적인 대비 혹은 결합으로 일변시켜서 처음으로 이 시형에다 높은 예술성을 부여했다. 그 역량에는 놀라움이 앞선다. 대표작으로는 (진주잡시20수) (영회고적5수) (춘여8수) 등의 연작을 비롯, (달밤(월야)) (봄밤에 내리는 단비(춘야춘우)) (누각에 올라(등고)) (악양루에 올라)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또 가장 짧은 시형인 5언7언 절구에도 140수 정도의 시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절구만홍9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와 같이 널리 애송되는 작품들이 많다.


d.이백과 두보

일반적으로 중국문학사를 논할 때 한대의 부(산문), 남북조의 운문, 당의 시, 송의 사, 원의 곡(잡극), 명의 백화소설(구어체 소설)을 시대적 특징으로 꼽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당 시대에는 현종의 개원천보시대(712--755)에 해당하는데, 문화의 전성기와 맞물려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시성 두보와 시선 이백 왕유 맹호연 등이 뛰어났다. 특히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있다. 이백이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이 침잠하여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두보가 이백을  한 말 술을 마시면 곧 백 편의 시(주일두 시백편) 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백은 즉흥적이고 천재적인, 그러면서도 인생과 자연의 불가사의를 즐겁게 노래하는  도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던 데 반해, 두보는  티끌만한 유감도 날릴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 엄정함을 지닌  유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다.

 달과 술과 노래로 지칭되는 이백의 삶은 사람들에게 그가 받아온 사랑만큼이나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겼다.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그의 사망에 대한 전설을 그의 이러한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두보는 조국의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전략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탁월한 시어와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와 함께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이백은 구비문학과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 온 낭만주의의 흐름을 급격히 고조시켜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힙했고, 두보는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장하여 사실주의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당나라를 중국시문학의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e.문학사적 위치

두보는 그의 시 가운데서 천추만세의 이름은 죽은 다음의 일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당나라 중기의 시인들인데, 한유는 두보에 문장이 있으니 광염이 만장이나 길으리 라 했고, 원진은 시인이 있어온 이래 아직 두보와 같은 이는 없어라고 말했다.

백거이는 두보의 시가 가진 사회성을 의식적으로 발전시켜 현실비판적인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보의 시가 중국최고의 시로서 평가받는 것은 11세기 북송의 시인인 왕안석 소식 등이 칭찬을 한 데서 비롯된다. 왕안석은 말하기를 내가 예전의 시를 생각해볼 때 두보의 시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고 소식은 고금에 시인은 많으나 두보를 앞설 사람은 없다 고 말하며 두보의 시를 적극 배우기에 힘썼다고 한다. 두보를 시성 이라고 일컬은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이후 송, 원, 명, 청을 거쳐 중화민국 초년(1917)의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중국의 완전한 시의 전형으로 조술 (성인의 설을 본받아 씀) 되어왔다. 문화 혁명에 이르러 그의 시의 직접적인 조술도 뜸했으나 오늘날에는 다시 부활되었다. 사실주의 시가발전사에서 두보는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문학전통은 후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조조왕찬진림조식 등 건안시기(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시대로 중국문학사상 황금기였음) 작가들은 그 전통을 계승하여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시들을 썼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특히 진조와 남북조 시기의 송조에 이르러 진부한 시풍이 범람하기 시작하여 소위 도술을 깨치는 현언시와 궁정체시까지 뛰쳐나와 시단을 어지럽혔다.

당대에 들어와서 비록 진자앙이 당시 시풍을 일소하고 건안시기의 꿋꿋한 풍격을 내세웠지만 창작 실천이 따르지 못했다. 그후 고적이 현실을 반영한 시들을 썼지만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이백도 사실주의적인 시편을 썼으나 그의 주요한 성과는 낭만주의였다. 두보만이 시가 백성의 질고를 알려주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그 시대의 전란과 암흑스런 통치 및 인민의 질고를 반영했다. 이렇게 하여 두보는 중국 사실주의적 시가창작의 전통을 성숙된 발전단계로 이끌어올렸는데, 시가창작이 사회변모를 반영하는 역할을 하게 했고 인민의 생활에 얼굴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두보는 시가 형태 면에서도 기여가 크다. 그는 앞선 시기 작가들이 창조한 모든 시 형태를 능숙하게 파악하여 시가체제의 영역을 확대했다. 그는 시형식을 빌어 유람기도 썼고 서정도 토로했으며, 전기와 우화도 함께 썼다. 심지어 문예평론,시사상주문편지까지 시로 쓰는 등 시가형태의 여러가지 기능을 충분히 활용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예술적 실천으로 율시의 형상수준을 높였는데, 율시를 보다 정연하고 함축성이 있으며 세련되고 음악적 율조가 선명한 정형시가 되게 했다. 두보의 애국주의적 사상은 후기 작가들과 애국지사들에게 사악한 세력과 침략자에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도록 고무해주었다. 예를 들면 문천상과 육유는 모두 송대의 정치가이며 문인들로서

두보의 애국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송의 민족영웅 종택은 임종 때에 두보가 쓴 (촉상(촉한의 재상))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니 영웅의 옷자락 눈물에 흠뻑 젖네 라는 시구를 읊었다. 한마디로 평가하여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은 사라졌으나 중국최고의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문화대혁명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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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행(麗人行)-두보(杜甫;712-770) 미인들을 노래함

(출처: http://www.thinkpool.com/MiniBbs/ViewPost.do?action=read&hid=papa21&cid=mini&ctg=4&viewType=1&sn=1475706)


三月三日天氣新,(삼월삼일천기신),삼월 삼짇날 날씨도 맑아

長安水邊多麗人.(장안수변다려인).장안 물가에는 미인도 많다

態濃意遠淑且眞,(태농의원숙차진),자태는 농염하고 뜻은 멀고 마음은 맑고 진실한데

肌理細膩骨肉勻.(기리세니골육균).피부 결은 섬세하고 기름지며 뼈와 살이 적당하다

繡羅衣裳照暮春,(수나의상조모춘),수 놓은 비단 옷 저문 봄 빛 비치면

蹙金孔雀銀麒麟.(축금공작은기린).금시로 공작새를, 은실로 기린을 수놓았네

頭上何所有?(두상하소유)? 머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翠微盍葉垂鬢唇.(취미합섭수빈진).비취색 머리 장식 귀밑까지 드리웠네

背后何所見?(배후하소견)? 등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珠壓腰衱穩稱身.(주압요겁온칭신).진주 박힌 허리띠에 온몸이 어울린다

就中雲幕椒房親,(취중운막초방친),궁중 휘장 안 황후의 친척에 나아가면

賜名大國虢與秦.(사명대국괵여진).대국 괵부인, 진부인의 명칭 내렸네

紫駝之峰出翠釜,(자타지봉출취부),자타지봉 팔진미 요리는 푸른 솥에서 나오고

水精之盤行素鱗.(수정지반항소린).수정 쟁반에는 흰 물고기 기어 다니네

犀箸饜飫久未下,(서저염어구미하),무소 젓가락 음식에 물려 오래도록 내리지 못하고

鸞刀縷切空紛綸.(난도누절공분륜).부엌칼은 잘게 자르는 데에 공연히 바쁘다

黃門飛鞚不動塵,(황문비공부동진),태감은 먼지도 일으키지 않고 황문에서 날듯이 달려가고御廚絡繹送八珍.(어주락역송팔진).임금님 주방에선 끝없이 팔진미를 보내오네

簫鼓哀吟感鬼神,(소고애음감귀신),퉁소소리, 북소리 애달프게 울리면 귀신도 감동하고

賓從雜沓實要津.(빈종잡답실요진).손님이 많이 와도 실로 귀한 손님이라

后來鞍馬何逡巡,(후내안마하준순),황후가 타고 오는 말은 어찌 그리 느릿느릿

當軒下馬入錦茵.(당헌하마입금인).집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려 비단 요에 든다

楊花雪落覆白蘋,(양화설낙복백빈),버들꽃 눈같이 떨어져 흰 부평초에 덮이고

靑鳥飛去銜紅巾.(청조비거함홍건).소식 전하는 푸른 새, 붉은 수건 물고 날아간다

炙手可熱勢絶倫,(자수가열세절륜),자수가열 권세가 대단하니

愼莫近前丞相嗔!(신막근전승상진)!조심하여 가까이 말라, 승상께서 화내실라


B039 – 이백시선 (李白詩選) / 도연명 (李白, 701 ~ 76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중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의 시집이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이 있음에도 현실에 의해 좌절되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 한 이백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삶을 일상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초월적 의지의 실현의 장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인간사회 질서의 상당부분이 인간을 속박하는 실체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로부터의 초월만이 진실한 자유라는 주제가 제시된다. 그의 시는 기교 면에서도 중국 시의 한 전기를 이루고 있다.


a.생애와 작품

 술과 달의 시인 이백, 그는 과연 천재인가, 광인인가? 이백은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두보와 함께 이두로 일컬어진다. 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 왕유는 시불 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조상들은 대대로 농서 성기에 살았으나 이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출생했다. 이백은 당의 현종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현종은 전반기(개원연대)에는 측천무후의 횡포로 어지러운 나라를 중흥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중였다. 그러나 후반기(천보연대)에는 정사를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넘기고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이 시대에 바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전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우고,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일찍 검술을 닦았으며 도교에 심취하여 선계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재성을 발휘한다. 한편 26세 때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멀리 고향을 떠나...  대장부의 뜻을 펴고자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재주를 떨쳐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 는 정치를 포부를 펴고자 동정호를 거쳐 여산금릉양주 등 한바탕 각지를 돌고 안육에 와서는 재상을 지냈던 허어사의 손녀딸을 아내로 맞고 10년 정도 정착했다. 그후 산동에서 공소부 등 5명과 조래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는데, 이들을 죽계육일 이라 한다. 그후 다시 10년간을 방랑하다가 절강에서 도사 오균을 알게 되었는데, 오균이 먼저 현종의 부름을 받았고 이백은 그의 천거로 42세 때 현종의 부름을 받는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남릉별아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현종은 그를 정중히 맞이했으나 한림이라는 높지 않은 벼슬을 주었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자질, 그리고 고매한 이상을 가지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의 궁중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음흉하고 간악한 소인배들이 가득했으므로 청명하고 방탕한 이백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간의 궁중생활에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오직 구토와 비분만을 느끼며 폭음을 일삼았다. 마침내는 궁중에서의 전권자인 환관 고력사에게 술취한 이백이 자기의 신발을 벗기게 하는 물의를 일으키고 마침내 궁중을 떠난다.

두보가 (음중 8선가)에서 당시의 이백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백은 한 말의 술에 백 편의 시를 짓고 장안거리 술집에 쓰러져 자며 천자가 불러도 배 타고 갈 생각 않고 자기는  주정뱅이 시선 이라고 자칭한다.  그의 생에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관직생활은 이렇게 2,3년 만에 끝난다. 3년간 한림생활을 하면서 봉건상류계층의 부패한 생활과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장안을 만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이백은 낙양에서 11살 아래의 두보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불후의 우정의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타락무능부패에 시들던 당은 안녹산의 난으로 내부의 모순과 파탄이 노출되고 무고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숙종이 즉위했다. 이에 그의 정치 참여 욕구는 더욱 강해져, 이때 숙종의 동생 영왕이 반란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이백을 부르자 애국적 정열로 충만했던 그는 쾌히 수락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왕인 형인 숙종의 임금자리를 노렸다는 반역죄로 몰리게 되자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벼락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낙관적이던 이백도 58세에 이러한 혹독한 벌이 떨어지자 귀양가던 도중 한 평생 눈에 눈물 보인 적이 없건만 이곳에서 하염없이 흐느끼게 되누나 라고 슬퍼했다. 말년에는 강남을 주유하다가 친척집에서 죽었다.

이백의 일생을 결산하면 평생 술을 마셨고 방탕했으며 오직 시문만을 남긴 시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게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의 이상과 포부는 충국애민 경세제민을 위해 자기의 학식과 자질과 호방한 성품을 마음껏 펴고 은퇴하는 것이었다.


b.이백의 사상

천재와 광인을 가름하는 선을 긋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본래 초나라의 미치광이 라고 자칭한 이백은 너무나 비범한 천재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참모습을 한마디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방한 낭만주의와 격렬한 현실주의를 동시에 지녔으며 탈속적인 도가사상 과 아울러 경세제민의  유가사상 에 투철했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를 품었으며 또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을 지니고 열렬하게 현실참여를 희구했음에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하고자 은퇴한 이백이었다. 예술창작에서도 대담하게 초월하고 부정하고 기발한 창조세계를 펼친 그는 늘 나라를 편안케 하고(안사직) 백성을 구한다(제창생)고 염원하면서도 항상 통음고가한 데카당스에 묻혔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과 같이 그의 시도 걷잡을 수 없이 다난하고 모순과 광기에 차 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온통 모순과 광기에 찼으니 자기도 광인으로 광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백은 우리 나라 동요에도 있듯이 암흑의 밤하늘에서도 청명한 달에서 놀기를 사랑했고 온 세상에 청신한 기운이 소생하고 이에 따라 대아의 서풍이 넘치기를 갈구했으며, 자기가 바로 그 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백은 (고풍)에서 대아의 문학사상이 오래 진작되지 않았거늘 나마저 시들면 누가 펴리오 하고 읊기도 했다.

이백의 사상의 바탕은 유가와 도가였다. 한 마디로 써주면 나가서 일하고 안 써주면 물러나 숨는다(용행사장)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의 본뜻이나 이상은 용행인 유가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입공보국 안사직 제창생(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안녕케 한다) 하고 싶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미혹한 군주와 혼탁한 사회는 그를 알아 써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몰아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포부를 가진 내가 특별나게 용안을 우러러 모시게 되었거늘 흰 구슬을 쉬파리가 더럽힘으로써 홀연 황제와 신하가 갈라서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몰아낸 타락한 간신배들을 쉬파리에 자기를 흰 구슬에 비유했다. 흰 구슬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오로지 쉬파리가 원죄를 씌운 것이다. 충정과 정의가 간사와 사악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에 방탕하고 정열적인 이백은 사장 탈속구도의 도가 쪽으로 기울었다. 현실적으로 유가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오직 실의와 비분에 차 술로 수심을 달랬으므로 그의 시 속에는 도가적 또는 낭만적 일면이 더 잘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 속에 있는 그의 유가적 이상을 잘 찾아야 한다.

이백의 예술은 사상감정이 탁월한 학식과 세련된 표현으로 승화된 주옥이라 하겠다. 그는 육조시, 특히 도연명사영운강엄포조 등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위에 대담하고 기발한 자기 세계를 창조했다. 이백의 격앙된 낭만주의는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으나, 단 그것을 굴원에게는 없는 도가적 탈속입경의 경지로 잘 다듬었으며 또 무위자연을 따라 청진한 시풍과 운치를 넘치게 했음이 특색이다. 속세와 소인배에 대해 실망한 그는 자연과 산천을, 특히  밤의 달을 사랑했으며, 자질구레한 협잡과 간교에 진절머리를 낸 그의 표현에서도 호방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 전하는 이백의 시문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청의 왕기가 여러 가지 책을 모아서 집주한 (이태백문집주) 30권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c.이백의 작품세계와 (이백시선)

문학이나 음악미술 등 모든 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됨으로써 완성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내용인 사상만이 강하고 형식인 표현이 빈약해도 안되지만, 반대로 표현형식이 사상 내용을 위축시켜도 안된다. 건안 이후 중국의 시문학은 대체로 형식미에만 흘렀다. 시상이나 기골 있는 정신은 위축되고 겉으로만 화려하고 잔재주로 꾸며진 시가가 판을 쳤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기골 있는 문장정신과 사상을 담은 글을 되찾기 시작했다. 즉, 고문운동이다. 한유와 유종원이 산문에서 형식적인 큰 성과를 거두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시문단에서도 초당 이후 점차로 속이 빈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기풍이 짙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진자양은 이론과 작품 면에서 시를 뜬구름 잡기에서 끌어내려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올려놓고자 진력했다.

이백의 문학관도 그와 같았다.  건안 이래의 기미염려한 시는 진중할 바 못된다. 나의 뜻도 공자가 시 3백 편을 산출했듯이 대아 같은 정도의 시를 지어 천년 길게 빛을 남기고자 한다.  이백이 말하는 대아 같은 정도의 시란 다름이 아니라 사상과 기골이 있고 현실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즉, 안사직 제창생 하는데 적극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대도의 시문학을 말한다. 이백은 적어도 사내 대장부가 하는 문학활동이거늘 쓸데없는 허튼 소리나 자질구레한 말재주는 문학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백의 시는 위대한 사상이나 정치적 포부나 고매한 이상이 용솟음치는 정열을 담아내기 위해 대자연 원시림에다가 큰 도끼로 덤썩덤썩 찍어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케일이 크고 다이내믹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될 수가 있었으며, 거대하고 청신한 그의 사상과 생명이 때묻지 않고 영겁의 생명을 지닌 자연 속에 안심하고 깃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백은 시문학에 있어 획기적인 표현과 예술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혁신과 창작은 물론 올바른 전통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백의 적극적인 낭만주의에 가장 영향을 준 선배는 역시 굴원이었다. 굴원은 뛰어난 재능과 고매한 정치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현실적으로는 불운했고, 제 눈으로 자기의 조국이 간악한 무리들 손에 빠진 채 쇠망의 구렁으로 전락해가는 참상을 보고 분개하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백은 굴원의 낭만정신, 조국애, 부패한 통치자들에 대한 반항정신과 불만에 공감했고, 따라서 그의 표현상의 수법도 많이 배우고 계승했다. 특히 굴원이 민간의 시가를 잘 따서 높이 쓴 태도나 신화전설 등을 활용하고 낭만의 환상적인 세계를 마냥 펼쳤던 수법을 이백은 착실히 배웠으며, 그의 기상천외한 도가적 상상력을 시에서 잘 살리는 데 성공했다. 즉, 현실과 이상을 자유자재로 내왕하는 수법은 굴원의 (초사)와 낭만주의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크고 청신한 자연에서 자기에 맞는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외에도 이백은 자연 속에서 간악하고 음흉하고 옹졸한 인간사회의 추악을 말끔히 씻고 해탈함으로써 참된 삶 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는 조국의 웅장하고 수려한 명산대천을 찾아 사랑했고, 청진하고 소박한 자연의 풍물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즉 이백은 자연을 인격화하고 그 속에서 감정과 영기를 느낀다.


새들은 높이 날아 간 곳이 없고

조각구름은 홀로 사라질세 

오로지 경정산 너만이 싫다 않고

마주 보아 주노나 


경정산만이 자기의 고독과 적막을 이해해주고 또한 자기를 지켜보아주고 있었다. 

이백에게 있어 청명한 달은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나라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른 달과 이태백, 그는 달을 청진의 상징으로 믿었으리라.


날 저물어 푸른 산에서 내려오니

산의 달이 나를 따라 돌아오더라


암흑이 덮인 인간사회에 달이라도 있으니 구원을 받는다는 심정이 나타난 듯하다. 자연을 정관하고 섬세하게 느끼며 대화를 나누던 이백은

일면 산을 밀어젖히고 바다를 뒤엎는 듯한 과장된 표현수법을 잘 썼다.


백발 삼천장 씨름따라 이렇듯 길던가!

부귀공명이 길다면 한수의 물이 응당 서북으로 흐르리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구나.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욱 험난하구나!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그의 자유분방한 낭만정신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러한 과장되고 격렬한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그의 강렬한 사상과 감정의 열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특히 선과 악을 얼버무리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부패한 무리들에 대한 반항과, 몽롱한 인간들의 잠을 깨우고 제정신이 들게 하기 위한 기발한 수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다.

이백은 형식적인 구속을 싫어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약 1천여 수의 시 가운데서 형식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율시는 80여 수이고, 대부분은 고체시가행악부시같이 형식적 구속이 적은 것들이며 민간의 시가를 잘 흡수한 평이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150여 수에 달하는 악부시는 평이하면서도 영묘하게 언어를 구사하여 참신한 뜻과 시정을 담아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현실과 이상, 전통과 독창, 고매한 낭만정신과 초탈한 선도사상으로 승화시킨다. 이백의 시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몇 수를 들어본다.


  산중문답

어째서 푸른 산중에 사느냐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 빙그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화꽃 흘러 물 따라 묘연히 갈세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 있네


  자야오가

장안 하늘에는 허허 달빛이 마냥 퍼지고

거리 집집마다 밤새 다듬이소리 요란해

소슬한 가을바람 불어 멈추지 않으니

모두가 옥문관 넘나드는 애타는 정이리!

어느날 북쪽 오랑캐 평정하고

그리운 임 싸움터에서 돌아오리!


  월하독작 1수

꽃 속에 술단지 마주 놓고

짝없이 혼자 술잔 드네

밝은 달님 잔 속에 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

달님은 본시 술 못하고

그림자 건성 떠돌지만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동반하고 

모름지기 봄철 한때나 즐기고서

내가 노래하면 달님은 서성대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흔들어대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놀고

취해서는 각자 흩어져 가네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d.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이백은 문학사상 앞선 시기의 낭만주의 시가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최고봉을 이룩했다. 그는 시가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민중들의 구비문학에 의해 창간된 신화전설에서 싹을 틔운 낭만주의 문학형태는 전국시대 굴원의 시가 창작에서 집대성되었다. 물론 장자의 산문에 나타난 환상적인 우화가 낭만주의 문학사조에 미친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대시기와 위진남북조 시기에 창작된 악부민요, 예를 들면 (목란의 노래) 등에서 낭만주의 시가는 거족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도연명과 같은 문인들과 남북조 시기 수이전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문학사조가 전승되어오다가 이백 때에 이르러 낭만주의 시가의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나타난 필연적 결과로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반항정신과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백의 시가는 당대 전성기의 낙관적 창조정신과 봉건질서에 불만스러워하는 민중들의 정서가 반영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나타내기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이백은 낭만주의적 표현수법을 풍부하게 했으며 시가의 형상수준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이백이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는 훌륭한 증좌가 된다. 이백은 당시의 시가를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진자앙의 시가혁신론을 계승하고 또한 실천을 통해 당대의 시가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옛사람의 글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식주의적 문풍과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제량의 궁정체 시풍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이백이 후세사람들과 후기문학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이름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의 시집이 거의 집집마다 있었다고 한다. 한유 등 시인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흡수하여 독창적 시풍격을 창조했다. 이하의 낭만주의적 시풍은 이백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송대의 소식과 신기질을 중심으로 하는 호방과는 이백의 시 풍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청대시인들을 놓고 말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를 열망하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며 호방한 풍격을 이룩한 시인은 역사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은 그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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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中問答 

 산중문답 

          李白(이백) 

問余何意棲碧山  자네에 묻네, 어찌 푸른 산 속에 사는고? 

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며 대답은 않으나 마음은 저절로 한가하네 

桃花流水요然去  복숭아꽃, 흘러가는 강물,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別有天地非人間  이 속세와 다른 천지가 따로 있겠지



哭晁卿衡           칠언절구 

 곡조경형(조형을 동곡함)  李白(이백) 

日本晁卿辭帝都  일본의 조형이 장안을 떠나 

征帆一片요蓬壺  가는 배의 돛은 하나 일본땅을 돌아서 간다 

明月不歸碧海沈  명월은 돌아오지 않고 푸른 바다로 사라져 

白雲愁色滿蒼梧  흰 구름 속에는 걱정의 빛깔이 창오 땅에 가득찬다


月下獨酌  

달 아래서 혼자 술마시다

花間一壺酒 꽃 사이에 술 한 동이 

獨酌無相親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잔 들어 밝을 달을 초대하고

對影成三人 그림자 마주하니 세 사람이 되었구나 

月旣不解飮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헛되이 나를 따라다니네 

暫伴月將影 잠시 달과 벗하고 그림자 거느리고

行樂須及春 즐거움 누림은 모름지기 봄에 이르러야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도 왔다갔다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도 덩실덩실 

醒時同交歡 정신있을 때에는 함께 기쁨을 나누고

醉后各分散 취한 뒤에는 각자 흩어지리라 

永結無情游 영원히 정에 매이지 않는 사귐을 맺어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세


[歸去來辭 ]

작가

도연명(陶淵明)

출생 - 사망

365년 ~ 427년

목차

작가 소개작품 설명작품 내용

작가 소개


동진(東晉) 시대 심양(潯陽) 채상(柴桑) 출신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다. 유송(劉宋)으로 왕조가 바뀐 뒤에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고 스스로 호를 지어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에 몇 차례 군부의 말직을 역임하다가 41세에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원생활을 바탕으로 평담하면서도 뜻이 깊은 시를 지어 전원시(田園詩)의 창시자가 되었다.


작품 설명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온 뒤에, 돌아오게 된 배경과 당시의 심경, 깨달음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서술한 글로,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인격을 고상하게 했던 도연명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는 이 글에 대하여,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에는 문장이 없는데, 다행히 이 한 편이 있을 뿐이다.(兩晉無文章, 幸獨有此篇耳.)”라고 극찬하였다.


작품 내용

A.

歸去來兮여. 田園將蕪하니 胡不歸리오. 旣自以心爲形役이나 奚惆悵而獨悲리오. 悟已往之不諫하고 知來者之可追로다. 實迷途其未遠하니 覺今是而昨非로다. 舟搖搖以輕颺하고 風飄飄而吹衣로다. 問征夫以前路하고 恨晨光之熹微로다.


(귀거래혜 전원장무 호불귀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미)


돌아가리라. 전원(田園)이 장차 거칠어져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체에 부림 받게 하였으나, 어찌 근심하며 홀로 슬퍼만 하겠는가. 이미 지나간 것은 따질 것 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올 일은 제대로 따를 만함을 알겠다. 진실로 길을 잃은 것이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떠가고 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분다. 길가는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으면서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兮 어조사 혜 1. 어조사(語助辭) 2. 감탄사(感歎詞) [부수]八(여덟팔)

蕪 거칠 무  1. 거칠다 2. 어지럽다 3. 달아나다 4. 순무(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 5. 황무지(荒蕪地) [부수]艹(초두머리)

胡 되 호,오랑캐 이름 호,수염 호 1. 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2. 오랑캐의 이름 3. 수염, 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4. 턱밑살 5. 풀 6. 성(姓)의 하나 7. 어찌 8. 오래 살다 9. 장수하다(長壽--)... [부수]月(육달월)

奚 어찌 해  1. 어찌, 왜 2. 무슨, 어떤 3. 어디, 어디에서 4. 무엇 5. 어느 곳 6. 종, 하인(下人) 7. 종족(種族)의 이름 [부수]大(큰대)

惆 실심할 추  1. 실심하다(失心--: 근심 걱정으로 맥이 빠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다) 2. 섭섭하다 3. 한탄하다(恨歎ㆍ恨嘆--), 개탄하다(慨歎ㆍ慨嘆--) 4. 실망하다 5. 슬퍼하다 6. 실망하는 모양 [부수]忄(심방변)

悵 원망할 창  1. 원망하다(怨望--) 2. 한탄하다(恨歎ㆍ恨嘆--) 3. 희망(希望)을 잃다 4. 슬퍼하다, 마음을 아파하다 [부수]忄(심방변)

諫 간할 간  1. 간하다(諫--: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 2. 헐뜯다 3. 간하는 말 [부수]言(말씀언)

途 길 도  1. 길 2. 도로(道路) [부수]辶(책받침)

舟 배 주  1. 배, 선박(船舶) 2. 반(제기(祭器)인 준을 받쳐놓는 그릇) 3. 성(姓)의 하나 4. (몸에)띠다 5. 배 타고 건너다 6. 싣다 [부수]舟(배주)

搖 흔들 요  1. 흔들다 2. 흔들리다 3. 움직이다 4. 오르다, 올라가다 5. 멀다, 요원하다(遙遠ㆍ遼遠--) 6. 어지럽히다 7. 빠르다 8. 새매(수릿과의 새) 9. (머리나 상투에 꽂는)장식품(裝飾品) [부수]扌(재방변)

輕 가벼울 경  1. 가볍다 2. 가벼이 여기다 3. 가벼이 하다 4. 업신여기다 5. 천하다(賤--) 6. 빠르다 7. 성(姓)의 하나 8. 가벼이 [부수]車(수레거)

颺 날릴 양  1. (바람에)날리다, 날다 2. 일다 3. 버리다 4. 풍채(風采)가 빼어나다 5. 높이다 6. 나타나다 7. 큰소리로 말하다 8. 배가 천천히 가는 모양 [부수]風(바람풍)

飄 나부낄 표  1. 나부끼다 2. 빠르다 3. 방랑하다(放浪--) 4. 떨어지다 5. 회오리바람 6. 질풍(疾風) 7. 바람 부는 모양 [부수]風(바람풍)

晨 새벽 신  1. 새벽 2. 때, 시일(時日) 3. 진시(辰時) 4. 별의 이름 5. 새벽을 알리다 [부수]日(날일)

熹 빛날 희  1. 빛나다 2. (날이)밝다, 환하다 3.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4. 동이 트다 5. 밝게 비추다 6. (빛이)희미하다(稀微--) 7. (불이)세차게 타다 8. 굽다, 불에 쬐다 [부수]灬(연화발)

微 작을 미 1. 작다, 자질구레하다 2. 정교하다(精巧--), 정묘하다(淨妙--), 자세하고 꼼꼼하다 3. 적다, 많지 않다 4. 없다 5. 어렴풋하다, 또렷하지 아니하다 6. 어둡다, 밝지 아니하다 7. 쇠하다(衰--), 쇠미하다(衰微--:... [부수]彳(두인변)



B.

乃瞻衡宇하고 載欣載奔하니 僮僕歡迎하고 稚子候門이라. 三徑1)就荒이나 松菊有存이라. 携幼入室하니 有酒盈罇이로다. 引壺觴以自酌하고 眄庭柯以怡顔이라. 倚南窓以寄傲하니 審容膝之易安이라. 園日涉以成趣하니 門雖設而常關이라. 策扶老2)以流憩라가 時矯首而遐觀이라. 雲無心以出岫하고 鳥倦飛而知還이라. 景翳翳以將入하니 撫孤松而盤桓이라.


(내첨형우 재흔재분 동복환영 치자후문 삼경취황 송국유존 휴유입실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책부로이류게 시교수이하관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마침내 일자대문 집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달려가니, 종 아이는 반갑게 맞이하고 어린 자식들은 문에서 기다린다. 세 갈래 길은 거칠어져 갔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남아있다. 어린것들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니, 술이 항아리에 가득하다. 술병과 잔을 당겨 혼자서 따라 마시고 정원의 나뭇가지를 돌아보며 얼굴을 편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의기양양해 하니, 무릎을 넣을 만한 좁은 곳이 편안하기에 쉬움을 알겠다. 정원은 날마다 거닐어 취미가 되었으니, 대문은 비록 세워져 있으나 항상 닫혀 있다.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다 쉬면서 때때로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의 바위틈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햇볕이 어둑어둑하면서 장차 지려 하니,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거린다.


乃 이에 내,노 젓는 소리 애  1. 이에, 곧 2. 그래서 3. 더구나 4. 도리어 5. 비로소 6. 의외로, 뜻밖에 7. 또 8. 다만 9. 만일(萬一) 10. 겨우 11. 어찌 12. 이전에 13. 너, 당신(當身), 그대 14. 이와 같다 a. 노 젓는 소리 (애)... [부수]丿(삐침별)

瞻 볼 첨  1. 보다, 쳐다보다 2. 바라보다 3. 우러러보다 4. 비추어 보다 5. 살피다, 관찰하다(觀察--) [부수]目(눈목)

衡 저울대 형,가로 횡  1. 저울대, 저울 2. (수레의)가로장 3.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4. 뿔막이나무, 쇠코뚜레 5. 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6. 권병(權柄:... [부수]行(다닐행)

欣 기쁠 흔  1. 기쁘다 2.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3. 받들다 4. 흠모하다(欽慕--) 5. 기쁨, 즐거움 [부수]欠(하품흠)

載 실을 재,떠받들 대  1. 싣다 2. (머리에)이다(물건을 머리 위에 얹다)(=戴) 3. 오르다, 올라 타다 4. 행하다(行--), 시행하다(施行--) 5. 비롯하다, 개시하다(開始--) 6. 맡다 7. 진설하다(陳設--: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 [부수]車(수레거)

奔 달릴 분  1. 달리다 2. 급(急)히 가다 3. 빠르다 4. 향해 가다, 급(急)히 향해 가다 5. 달아나다, 도망쳐 내닫다, 패주하다(敗走--) 6. 도망가다(逃亡--) 7.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다(婚姻--) 8. 야합하다(野合--),... [부수]大(큰대)

僕 종 복  1. (사내)종(남의 집에서 대대로 천한 일을 하던 사람) 2. 마부(馬夫), 거마(車馬)를 모는 사람 3. 저(자기의 겸칭) 4.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벗 5.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부수]亻(사람인변)

稚 어릴 치  1. 어리다 2. 유치하다(幼稚--) 3. 작다 4. 늦다 5. 더디다 6. 오만하다(傲慢--) 7. 어린 벼 8. 작은 벼 9. 만생종(晩生種) 10. 치자(稚子: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 [부수]禾(벼화)

候 기후 후  1. 기후(氣候), 계절(季節) 2. 철, 때 3. 5일, 닷새 4. 상황(狀況), 상태(狀態) 5. 조짐(兆朕), 증상(症狀), 징후(徵候) 6. 염탐꾼(廉探-), 망꾼(望-) 7. 살피다, 망보다(望--) 8. 염탐하다(廉探--) 9.... [부수]亻(사람인변)

荒 거칠 황,공허할 강  1. 거칠다 2. 흉년(凶年)이 들다 3. 덮다 4. 버리다, 폐기하다(廢棄--) 5. 멸망시키다(滅亡---) 6. 차지하다 7. 넓히다 8. 허황하다(虛荒--), 황당무계하다(荒唐無稽--) 9. (주색에)빠지다 10. 모자라다... [부수]艹(초두머리)

徑 지름길 경,길 경  1. 지름길, 질러가는 길 2. 길, 논두렁길 3. 지름, 직경 4. 마침내 5. 곧바로, 바로 6. 가다, 길을 가다 7. 건너다, 건너서 가다 8. 지나다, 지나가다 9. 곧다, 바르다, 정직하다(正直--) 10. 빠르다,... [부수]彳(두인변)

携 이끌 휴  1. 이끌다 2. 끌다 3. 가지다 4. 들다, 휴대하다(携帶--) 5. 잇다, 연하다(連--: 잇닿아 있다) 6. 떨어지다 7. 흩어지다 [부수]扌(재방변)

幼 어릴 유,그윽할 요  1. 어리다, 미숙하다(未熟--) 2. 작다, 조그마하다 3. 사랑하다 4. (누에가)잠을 자다 5. 어린아이 6. 누에의 잠 a. 그윽하다 (요) b. 깊다 (요) c. 심원하다(深遠--), 오묘하다(奧妙--) (요) d. 아름답다... [부수]幺(작을요)

盈 찰 영  1. 차다 2. 가득하다 3. 충만하다(充滿--), 피둥피둥하다 4. 남다, 여유(餘裕)가 있다 5. 불어나다, 증가하다(增加--) 6. 채우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7. 교만하다(驕慢--)... [부수]皿(그릇명)

罇 술두루미 준  1. 술두루미(술을 담는 두루미) 2. 술 단지(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 3. 술잔(-盞) 4. 술 그릇 [부수]缶(장군부)

壺 병 호  1. 병(甁) 2. 술병(-甁) 3. 박 4. 단지(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 5. 투호 6. 물시계 7. 주전자 8. 예의 [부수]士(선비사)

觴 잔 상  1. 잔(盞) 2. 잔을 내다 [부수]角(뿔각)

酌 술 부을 작,잔질할 작  1. 술을 붓다, (술을)따르다 2. 잔질하다(盞---: 잔에 술을 따르다) 3. (술을)마시다 4. 퍼내다, 푸다 5. 가리다, 선택하다(選擇--) 6. 짐작하다(斟酌--) 7. 참작하다(參酌--), 헤아리다 8. 양치질하다... [부수]酉(닭유)

以 써 이  1. ~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2. ~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3. ~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4. ~부터 5. ~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6. ~을 ~로 하다 7. ~에게 ~을 주다 8. ~라 여기다 9. 말다 10. 거느리다 11. 닮다 12. 이유(理由), 까닭 13. (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한계(限界)를 나타냄  [부수]人(사람인)

眄 곁눈질할 면,곁눈질할 묜  1. 곁눈질하다 2. 돌보다 3. 흘기다 4. 노려보다 5. 바라보다 a. 곁눈질하다 (묜) b. 돌보다 (묜) c. 흘기다 (묜) d. 노려보다 (묜) e. 바라보다 (묜) [부수]目(눈목)

柯 가지 가  1. 가지 2. 줄기 3. 자루(끝에 달린 손잡이) 4. 모밀잣밤나무 5. 주발(周鉢: 놋쇠로 만든 밥그릇) [부수]木(나무목)

怡 기쁠 이  1. 기쁘다 2.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3. 기쁘게 하다 4. 온화하다(溫和--) [부수]忄(심방변)

倚 의지할 의,기이할 기  1. 의지하다(依支--) 2. 기대다 3. 치우치다 4. 기울다 5. 맡기다 6. 믿다 7. 인하다(因--: 어떤 사실로 말미암다) 8. 맞추다 9. 곁 a. 기이하다(奇異--) (기) b. 불구 (기) [부수]亻(사람인변)

寄 부칠 기  1. 부치다, 보내다 2.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3. 맡기다, 위임하다(委任--) 4. 기대다, 의지하다(依支--) 5. 붙여 살다, 임시로 얹혀 살다 6. 빌리다 7. 위임(委任), 부탁(付託)... [부수]宀(갓머리)

傲 거만할 오  1. 거만하다(倨慢--) 2. 오만하다(傲慢--) 3. 교만하다(驕慢--) 4. 날뛰다 5. 업신여기다 6. 멸시하다(蔑視--) 7. 나가서 놀다 [부수]亻(사람인변)

蔑 업신여길 멸 부수艹 (초두머리) 1. 업신여기다 2. 욕되게 하다 3. 모독하다(冒瀆--) 4. 더럽히다 5. 멸하다(滅--)(=滅) 6. 코피를 흘리다 7. 깎다 8. 버리다 9. 없다 10. 잘다 11. 속이다 12. (사리에)어둡다 13. 더러운 피  衊(멸)의 간체자(簡體字).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伐(벌→멸)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審 살필 심,빙빙 돌 반  1. 살피다, 주의하여 보다 2. 자세(仔細ㆍ子細)히 밝히다 3. 깨닫다 4. 듣다, 잘 들어 두다 5. 환히 알다, 밝게 알다 6. 조사하다(調査--) 7. 묶다 8. 바루다, 바르게 하다 9. 정하다(定--), 안정시키... [부수]宀(갓머리)

涉 건널 섭,피 흐르는 모양 첩  1. 건너다 2. 지나다, 거치다 3. 겪다 4. 거닐다 5. (걸어서)돌아다니다 6. (길을)떠나다 7. 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8. 간섭하다(干涉--),... [부수]氵(삼수변)

關 관계할 관,당길 완  1. 관계하다(關係--) 2. 닫다 3. 끄다 4. 가두다 5. 감금하다(監禁--) 6. 주다, 받다 7. 관문(關門) 8. 세관(稅關) 9. 기관(機關) 10. 빗장 11. 난관(難關) a. (시위를)당기다 (완) [부수]門(문문)

憩 쉴 게  1. 쉬다 2. 휴식하다(休息--) [부수]心(마음심)

矯 바로잡을 교  1. 바로잡다 2. 굳세다, 씩씩하다 3. 억제하다(抑制--) 4. 속이다 5. 거스르다, 위배하다(違背--) 6. 칭탁하다(稱託--: 사정이 어떠하다고 핑계를 대다) 7. 들다, 쳐들다 8. 날다 9. 거짓 10. 핑계 11.... [부수]矢(화살시)

遐 멀 하  1. 멀다 2. 어찌 [부수]辶(책받침)

岫 산굴 수  1. 산굴(山窟: 산속에 있는 굴) 2. 암혈(巖穴: 석굴) 3. 산봉우리 4. 산꼭대기 [부수]山(뫼산)

倦 게으를 권  1. 게으르다 2. 진력나다(盡力--) 3. 고달프다 4. 걸터앉다 [부수]亻(사람인변)

翳 깃 일산 예  1. 깃 일산(日傘: 자루가 굽은 부채의 일종(一種)으로 의장(儀仗)의 한 가지) 2. 그늘 3. 방패(防牌ㆍ旁牌) 4. 가리다 5. 물리치다 6. 숨다 7. 가로 막다 8. 멸하다(滅--) 9. 말라 죽다(말라서 죽다) 10.... [부수]羽(깃우)

撫 어루만질 무  1. 어루만지다 2. (손으로)누르다 3. (손에)쥐다 4. 치다, 두드리다 5. 위로하다(慰勞--) 6. 기대다 7. 사랑하다 8. 좇다, 따르다 9. 덮다 10. 돌다, 순찰하다(巡察--) [부수]扌(재방변)

孤 외로울 고  1. 외롭다, 의지(依支)할 데가 없다 2. 떨어지다, 멀다 3. (고아로)만들다 4. (불쌍히 여겨)돌보다, 염려하다(念慮--) 5. 버리다, 벌하다(罰--) 6. 저버리다, 배반하다(背反ㆍ背叛--) 7. 작다 8. 고루(固陋)하고... [부수]子(아들자)

盤 소반 반  1. 소반 2. 쟁반 3. 받침 4. 바탕 5. 대야(둥글넓적한 그릇) 6. 넓고 큰 모양 7. 큰 돌 8. 굽다 9. 돌다 10. 돌다 11. 서리다 [부수]皿(그릇명)

桓 굳셀 환  1. 굳세다 2. 크다 3. 머뭇거리다 4. 푯말(標-: 어떤 것을 표지하기 위하여 세우는 말뚝) 5. 하관(下棺)할 때 쓰는 나무틀 6. 무환자나무(無患子--: 무환자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 7. 위풍당당(威風堂堂)한... [부수]木(나무목)



C.

歸去來兮여. 請息交以絶游호리라. 世與我而相違하니 復駕言兮焉求리오. 悅親戚之情話하고 樂琴書以消憂로다. 農人이 告余以春及하면 將有事于西疇로다. 或命巾車하고 或棹孤舟하여 旣窈窕3)以尋壑하고 亦崎嶇4)而經丘라. 木欣欣5)以向榮하고 泉涓涓6)而始流로다. 羨萬物之得時하고 感吾生之行休로다.


(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 열친척지정화 락금서이소우 농인 고여이춘급 장유사우서주 혹명건차 혹도고주 기요조이심학 역기구이경구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류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돌아가리라. 교제를 그만두고 어울림을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는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메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리면, 장차 서쪽 밭에서 농사일을 해야겠다. 혹은 천을 두른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이미 깊숙하게 물골을 찾아들기도 하고 또한 울퉁불퉁한 길로 언덕을 지난다. 나무들은 생기를 머금은 채 무성해져가고 샘물은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한다. 만물이 제때를 얻은 것이 부럽고 나의 삶은 장차 끝나 감을 느낀다.


游 헤엄칠 유,깃발 류,깃발 유  1. 헤엄치다 2. 유동하다(流動--), 뜨다 3. 떠내려가다 4. 어슬렁거리다 5. 놀다 6. 걷다, 여행하다(旅行--) 7. 사신(使臣)으로 가다 8. 사귀다, 교제하다(交際--) 9. 허황되다(虛荒--) 10. 경작하다(耕作--)... [부수]氵(삼수변)

焉 어찌 언,오랑캐 이  1. 어찌, 어떻게 2. 어디, 어디에 3. 보다, ~보다 더 4. 이에, 그래서 5. 이(지시 대명사) 6. ~느냐? 7. ~도다! 8. 그러하다, ~와 같다 a. 오랑캐 (이) [부수]灬(연화발)

消 사라질 소  1. 사라지다 2. 삭이다 3. 없애다, 소멸시키다(消滅---) 4. 녹이다 5. (쇠하여)줄어들다 6. 소모하다(消耗--), (시간을)보내다 7. 거닐다, 배회하다(徘徊--) 8. 물러서다 9. (남몰래)행하다(行--) 10.... [부수]氵(삼수변)

憂 근심 우  1. 근심, 걱정 2. 병(病), 질병(疾病) 3. 고통(苦痛), 괴로움, 환난(患難) 4. 친상, 상중(喪中) 5.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걱정하다, 애태우다 6. 고생하다, 괴로워하다 7. 두려워하다 8.... [부수]心(마음심)

消憂 근심을 없애 버림

余 나 여,남을 여  1. 나 2. 나머지(=餘) 3. 나머지 시간(時間) 4. 여가(餘暇) 5. 여분 6. 정식 이외의 7. 다른 8. 남다 9. 남기다 [부수]人(사람인)

及 미칠 급  1.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2. 미치게 하다, 끼치게 하다 3.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4. 함께 하다, 더불어 하다 5. 함께, 더불어 6. 및, 와... [부수]又(또우)

疇 이랑 주,누구 주  1. 이랑(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밭, 삼밭 3. 떼,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4. 북(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돋우다(도드라지거나 높아지게 하다) 5. 짝 6.... [부수]田(밭전)

棹 노 도,책상 탁  1. 노(배를 젓는 막대기) 2. 배 3. 노를 젖다 a. 책상(冊床) (탁) b. 나무의 이름 (탁) [부수]木(나무목)

窈 고요할 요  1. 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2. 그윽하다, 심원하다(甚遠--) 3. 얌전하다 4. 어둡다, 희미하다(稀微--) 5. 구석지다 6. 아름답다, 아리땁다 7. 고상하다(高尙--) 8. 누긋하다(성질이나 태도가 좀 부드럽고... [부수]穴(구멍혈)

窕 으늑할 조,예쁠 요  1. 으늑하다(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이 있다) 2. 조용하다 3. 틈이 나다 4. 한가하다(閑暇--) 5. 깊숙하다 6. 아리땁다 7. 놀리다, 집적거리다 8. 가늘다 9. 가볍다, 경솔하다(輕率--) 10. 미색(美色) a.... [부수]穴(구멍혈)

窈窕 부녀(婦女)의 행동(行動)이 얌전하고 정숙(貞淑)함

尋 찾을 심  1. 찾다, 캐묻다 2. 탐구하다(探求--), 연구하다(硏究--) 3. 쓰다, 사용하다 4. 치다, 토벌하다(討伐--) 5. 잇다, 계승하다(繼承--) 6. 첨가하다, 거듭하다 7. 생각하다 8. 높다 9. 길다 10. 깊다 11.... [부수]寸(마디촌)

壑 골 학  1. 골, 산골짜기(山---) 2. 도랑(매우 좁고 작은 개울), 개천(-川: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 3. 구렁(움쑥하게 팬 땅) 4. 해자(垓子) 5. 석굴(石窟), 암굴(巖窟)

[부수]土(흙토)

崎嶇 ①산이 가파르고 험하다는 뜻  ②(삶이)순조(順調)롭지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는 상태(狀態)에 있음  ③기험(崎險)함

崎 험할 기  1. (산세가)험하다(險--) 2. (인심이)사납다 3. 어려움을 겪다 4. 비스듬한 모양 5. 불안(不安)한 모양 [부수]山(뫼산)

嶇 험할 구  1. 험하다(險--) 2. 가파르다 3. 괴로워하다 4. 험난하다(險難--) 5. 산길(山-)이 평탄(平坦)하지 아니하다 6. 산꼭대기 [부수]山(뫼산)

向 향할 향,성씨 상  1. 향하다(向--) 2. 나아가다 3. 길잡다 4. 바라보다 5. 대하다(對--) 6. 대접(待接)을 받다 7. 누리다 8. 권하다(勸--) 9. 흠향하다(歆饗--) 10. 메아리치다 11. 제사(祭祀)를 지내다 12. 방향(方向)... [부수]口(입구)

榮 영화 영,꽃 영  1. 영화(榮華) 2. 영예(榮譽) 3. 영광(榮光) 4. 명예(名譽) 5. 피, 혈액 6. 꽃 7. 영광스럽다(榮光---) 8. 영예롭다(榮譽--) 9.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10. 무성하다(茂盛--) 11.... [부수]木(나무목)

涓 시내 연,우는 모양 현  1. 시내, 실개천(--川: 폭이 매우 좁고 작은 개천) 2. 작은 흐름 3. 가리다, 고르다 4. 깨끗하다 5. 흐르다 a. 우는 모양 (현) b. 눈물이 흐르는 모양 (현) [부수]氵(삼수변)

羨 부러워할 선,무덤길 연  1. 부러워하다 2. 탐내다(貪--) 3. 사모하다(思慕--) 4. 넉넉해지다, 풍요롭다(豐饒--) 5. 넘치다, 범람하다(汎濫ㆍ氾濫--) 6. 비뚤어지다, 사특하다(邪慝--: 요사스럽고 간특하다) 7. 잃다, 그르치다... [부수]羊(양양)



D.

已矣乎라. 寓形宇內復幾時오 曷不委心任去留하고 胡爲乎遑遑欲何之오. 富貴는 非吾願이요 帝鄕7)은 不可期라. 懷良辰以孤往하고 或植杖而耘耔하며 登東皐以舒嘯하고 臨淸流而賦詩리라. 聊乘化以歸盡하니 樂夫天命復奚疑리오.


(이의호 우형우내복기시 갈불왜심임거류 호위호황황욕하지 부귀 비오원 제향 불가기 회양진이고주 혹식장이운자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료승화이귀진 락부천명복해의) 


그만두자. 세상에 몸을 의탁해 사는 것이 또한 얼마나 된다고, 어찌 마음에 맡겨, 가고 머묾을 임의대로 하지 않겠으며, 무엇 때문에 허둥대며 어디를 가려고 하겠는가. 부귀(富貴)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신선 세계는 기약할 수 없다. 좋은 시절을 생각해 두고 있다가 홀로 나서고 혹은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매고 북돋워줄 것이며, 동쪽 언덕에 올라 시를 읊조리고 맑은 물에 이르러 시를 지으리라. 그저 변화를 따라 죽음으로 돌아가리니, 천명(天命)을 즐김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遑 급할 황  1. 급하다(急--) 2. 허둥거리다 3. 한가하다(閑暇--), 여유롭다(餘裕--) 4. 두려워하다 5. 어찌 [부수]辶(책받침)

耘耔 김매고 북을 돋움

耘 김맬 운  1. 김매다(논밭의 잡풀을 뽑아내다) 2. 없애다, 제거하다(除去--) 3. 북(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돋우다(도드라지거나 높아지게 하다) [부수]耒(가래뢰)

耔 북을 돋울 자  1. 북(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돋우다(도드라지거나 높아지게 하다) 2. 돋우어 가꾸다 [부수]耒(가래뢰)

皐 언덕 고,못 고,부를 호  1. 언덕 2. 못(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늪 3.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4. 논 5. 오월(五月) 6. 후미(물가나 산길이 휘어서 굽어진 곳) 7. 성(姓)의 하나 8. 고복(鼓腹)하는... [부수]白(흰백)

舒 펼 서  1. 펴다, 신장시키다(伸張--) 2. 퍼지다 3. 흩다(한데 모였던 것을 따로따로 떨어지게 하다), 흩어지다 4. 느리다 5. 게으르다, 태만하다(怠慢--) 6. 천천하다 7. 편안하다(便安--) 8. 나타내다, 드러내다... [부수]舌(혀설)

嘯 휘파람 불 소,꾸짖을 질  1. 휘파람을 불다 2. 읊조리다 3. 울부짖다 4. 휘파람 5. 이명(耳鳴: 몸 밖에 음원(音源)이 없는데도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 a. 꾸짖다 (질) [부수]口(입구)

賦 부세 부  1. 부세(賦稅: 세금을 매겨서 부과하는 일) 2. 군비(軍費) 3. 문채(文彩: 문장의 멋)의 이름 4. 군사(軍士) 5. 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6. 구실(온갖 세납을 통틀어 이르던... [부수]貝(조개패)

聊 애오라지 료,애오라지 요  1. 애오라지(부족하나마 그대로) 2. 어조사(語助辭) 3. 귀가 울다(이명나다) 4. 힘입다 5. 편안하다(便安--) 6. 즐기다 [부수]耳(귀이)



각주


1삼경(三徑)

한대(漢代)의 장후(蔣詡)가 은거(隱居)하면서 집 앞의 대나무밭에 세 갈래의 길을 만들고, 은사(隱士)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교류한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2부로(扶老)

지팡이를 가리킨다.

3요조(窈窕)

깊숙한 모양이다.

4기구(崎嶇)

울퉁불퉁한 모양이다.

5흔흔(欣欣)

생기 있는 모양이다.

6연연(涓涓)

졸졸 흐르는 모양이다.

7제향(帝鄕)

선경(仙境)을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거래사 [歸去來辭] (중국의 명문장 감상, 2011. 9. 18., 한국학술정보(주))


B038 – 도연명시선 (陶淵明詩選) / 도연명 (陶淵明, 365 ~ 427)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귀거래사>로 잘 알려진 중국 진대의 도연명이 쓴 중국 최초의 전원시집. 중국 최초의 전원시인으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이 직접 전원생활을 하면서 일상적인 전원생활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단순히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도시인적 사고방식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전원생활의 진솔한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얼핏 현실도피자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리한 관찰로 적극적으로 인생의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이라는 것을 그 작품은 잘 나타내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전원생활의 진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모습을 찾는다.


a.생애와 작품

 중국 북위. 송나라 때 시인. 이름은 잠이고 연명은 자. 강서성 심양현 시상에서 태어났다.(자(字)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동진왕조의 초창기에 큰 공을 세운 증조부 도간은 대사마란 큰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조부와 부친도 태수를 지냈다. 모친도 장군 집안의 혈통으로, 그의 고상한 인격과 품격은 혈통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도연명의 생애는 대략 소년, 출임, 은일의 3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소년기란 그가 출생하여 다음 2기의 출사하기 전까지를 말하며, 다음 2기의 준비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뿐, 지적할 만한 중요한 사적은 없다. 다만 그의 깊고 고요한 인품, 고매한 취지,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웅대한 포부, 출세에의 갈망 등이 이 시기에 발아하여 성장하고 있었음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출임기는 그가 관계에 첫발을 내딛던 무렵부터 은퇴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그가 출사를 택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소년기에 품었던 이상과 웅지를 펴기 위해서요, 또 하나는 호구지책을 위해서였다. 하급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어서부터 면학에 힘써 입신의 뜻을 품었으나, 29세에 처음으로 주좨주가 되고 뒤이어 몇가지 벼슬을 거치는 동안 그가 접한 현실은 그에게 실의와 번민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의 정신적 추구는 물질생활 속에 추락했고 그의 이상은 현실 속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팽택현령을 80일간 지내다가 사임하여 13년에 걸친 관료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때 나이 41세였다.

  <<내 어찌 5두미(당시 현령의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대할 소냐>> 하고 물러났다. 현을 사찰나온 군의 말직에게 굽신거릴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전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 그 유명한 <귀거래사>다. 관직을 내놓고 은일생활을 하겠다는 선언의 뜻이 담겨 있다.

  은일기는 그가 관직에서 은퇴하고 전원에 귀의하여 타게할 때까지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로 불후의 대작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하는 그가 현실을 외면하고 찾아든 전원의 보금자리는 어떠했는가? 물론 경제적인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는 그 속에서 속박 대신 해방을, 번민 대신 열락을 누릴 수 있었다.

  직접 농민과 접촉하며 농업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순박한 인품과 감정을 알게 되고 그것을 찬양했다. 그들과의 우의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생활과 염원을 반영했다. 열광적으로 자신에 주어진 운명을 포용하는 속에 그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화미한 종막을 드리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 시기에 있어서 초탈과 해방의 희열을 구가한 것이 많다. 그는 끝내 문벌사족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살다가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b.시대적 배경

 어느 문인이나 작가로 모두가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듯이 도연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사회적 배경이요, 하나는 사상종교적 배경이다.

  후한 말엽부터 동요되기 시작한 중국의 정국은 3국, 서진을 거치는 동안 혼란이 계속되어 동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듯하다가 다시 난이 잇따랐다. 이렇듯 200여 년간이나 꼬리를 문 전쟁과 당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도륙되는 등 혼란하고 비참한 사회상이 빚어지는 가운데, 한대에 그렇게도 극성한 양상을 보이던 유학도 점차 쇠해져 사회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하기보다는 한낱 몇몇 선비들이 부귀를 구하는 도구로 변질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백성들의 경제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일반지식층 인사들은 되도록 현실을 피해 안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 노장철학과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의식 면에 있어서는 현실에 대한 반항과 불만이 자못 적극적이고 강렬했지만, 행동면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현실을 도피했다.

  중국문학의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 위진시대는 분명 하나의 분명한 특색을 지닌 시대로 설명될 수 있다. 문학의 형식적인 면에선 비록 이렇다 할 창조가 없었다 해도 문학의 정신 면과 창작활동 면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실용면의 사회적 사명을 이탈하여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었고, 그 결과로 문학이 공용학문에서 개인적인 언지문학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발전은 점차로 독립적인 예술을 형성하여 어떠한 외적인 여건이나 구속도 받아들이지 않는 뚜렷한 현상을 조성했다.

<전원문학>의 비조로 그 이름을 창사에 드리운 도연명도 그와 같은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았고 그의 작품들도 이 시대환경의 산물이다.


c.<도연명시선>과 작품세계

 도연명의 시는 오늘날 4언시 9수, 5언시 12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시가 외에도 사부와 산문도 썼다. 내용은 전원에 사는 은사의 생활을 노래한 것, 유유자적한 심경을 토로한 것, 주현의 관리들과의 증답시 영사 의고시 등이 주가 된다. 한가한 정취 가운데서도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어 있어 송나라 소동파는 이것을 평해 <<그의 시는 질(순박)하나 실제는 기하며(아름다움), 구(파리함)하나 실제는 유(살찜)하다>>고 했다.

  스스로 농사짓는 생활 속에서 그 전원생활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썼다. 술과 국화에 얽힌 에피소드로 자칫하면 현실도피자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리한 관찰로 적극적으로 인생의 진리를 추구해간 시인이라는 것을 그 작품은 잘 나타내고 있다.

  도연명은 동진과 송나라가 교체되는 암흑 같은 사회적 현실에 대해 증오하면서도 완곡하게 비판, 폭로했다. 그는 고대신화와 전설 중의 영웅을 노래하고, 정직하고 재능있는 역사적 인물을 찬미하는 것을 통해 당시 정권찬탈의 참극과 포악무도한 정치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사기를 일고 9장을 쓰노라>의 첫수에서 백이숙제를 노래했는데, 이는 주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했기에 주나라의 음식을 먹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숙제의 이야기를 빌어 유유가 동진정권을 찬탈하고 송나라를 세운 데 대한 비판한 것으로, 송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절개를 표현하고 있다. 제6수는 굴원과 가의를 노래했는데, 굴원의 애국사상과 가의의 재능에 대한 찬미를 통해 정권찬탈의 불의를 비판했다. 또한 도연명은 은퇴하여 직접 노동에 종사하고 농민과 접촉하기는 했지만 정치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이상적 사회를 추구했다. <도화원시와 기>는 바로 시인의 정치적 이상을 나타낸 작품으로 시인의 사상과 예술성의 최고봉이다. <도화원>은 진왕조 때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곳으로 인간세상과 격리된 낙원이다. 

  토지는 평탄하고 가옥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비옥한 밭,

  좋은 못이 있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다

  두렁같은 가로세로 뻗어 있고 개짖는 소리와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거기로 사람들은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남자와 부녀자들의 옷차림은 모두 밖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란 없다

  늙은이와 어린 것들은 모두 걱정 없이 즐거이 지낸다

  시인은 이렇게 <도화원>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또 그는 천성이 술을 좋아해서 그의 시는 <<편편 술이 있다>>고 할 정도다. 그중에도 가을밤의 지루함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마구 썼다고 하는 <음주>라고 제목 붙인 20수의 연작은 도연명의 독특한 시경을 남김없이 전한다. 그중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다섯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려를 맺어 인경에 있고 / 더구나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고

  그대에게 묻노니 무엇이 능하뇨 / 마음 머니 땅 또한 편벽되다

  국화꽃 동쪽 울 밑에서 꺾고 / 유연히 남산을 보누나

  산기운 낮밤으로 좋고 / 나는 새 서로 더불어 돌아간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나 /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었다

  처음 4구의 서언에서는 자문자답형으로 <<은일생활은 산중에 살 필요 없이 마음가짐 하나로도 사회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고 했다. 중간 4구는 인생의 참뜻을 가을 황혼의 경치 속에 묘사한 것이다. 국화꽃을 꺾으면서 바라본 남산의 황혼 녘 경치는 깊은 맛이 감돌아 시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다. 그는 은사의 처세를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뭐니뭐니해도 도연명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귀거래사>다. <귀거래사>는 전문 240여 자, 4장으로 구성되었다. 그 전반부에서는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려냈고, 후반부에서는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서 묘사했다.

  제1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흐르는 걸작이다.

    귀거래사

  돌아가련다

  이제 정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갈까나

  사귐을 그만두고 교유를 끊으리

  세상과 나는 서로 잊으리니

  다시 수레를 타고 여기에 무엇을 구하랴

  친척의 정다운 이야기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으로 시름을 잊으리라


d.문학사적 의의 및 그 영향

 도연명은 자기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켰다. 그의 형상은 통치계급과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고 완곡하게 투쟁을 견지했으며, 전원에 돌아와 직접 농업 노동에 참가하고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불우한 여건 속에서 투지를 얻었고 담력을 키웠으며 또 진실한 인생을 추구했다.

  그리고 진실한 천부의 성격은 관계 아닌 자연을 무대로 함으로써 한껏 자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대도, 그의 환경도, 그의 지위도 모두 우연일 수만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전원시인이며 낭만시인인 도연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요건들이 아닐 수 없다. 시대가 그를 분만했고 사회가 그를 길렀으며 자연이 그와 교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펴낸 산문과 사부, 시 모두가 주옥 같은 명편들일 수 있었고, 그의 작품 속에 불어넣은 명료한 개성, 순정한 사상, 고결한 인품 등은 중국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작품은 후세의 문인 및 그들의 문예활동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비록 당대에는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문학 내지 예술의 분야에서 그를 숭배하고 그의 작품을 탐구하고 그의 작품을 배우려 들었다. 도연명이 <시경> <초사> 그리고 건안 이래의 우수한 사실주의적 전통을 총화한 끝에 창조한 그의 특이하고 소박한 스케치의 풍격은 당대의 맹호연이나 왕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도연명의 전원을 제재로 하기도 하고 <유연>한 정신을 따라 배워 <전원시파>를 형성했다.

  이백이 권세가들에 대해 가졌던 경멸과 반항도 도연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백거이의 통속적이고 소박한 스케치의 풍격은 도연명의 스케치적 표현방법의 발전이다. 송대의 소식도 <유연>한 정신을 따랐고, 육유신기질도 그의 전투정신을 본받았으며, <유연>의 요소를 없애지를 못했다. 

  후세의 많은 문인학자가 그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 작품집을 인쇄, 오늘날 전하는 판본이 수십 종에 달하며, 시인들은 그의 자연시와 소박한 기법에 심취하여 모방을 시도했다. 평론가들은 그들의 시화를 통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화가들은 도연명 작품의 제목을 화제에 썼다. 특히 잡극에 까지 그의 시제가 채택된 일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 이렇게도 큰 것을 보면 소식이 도연명의 지위를 논하여 <<조식이나 이백두보도 따를 수 없다>>라고 한 극구의 찬사도 과찬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B037 – 시경 (詩經) / 작자미상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중국 고대인의 생활상을 노래한 중국최초의 시가집. 공자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중국 각 지역의 민요와 조정의 연회 및 제사시 불리어지던 노래의 가사를 수록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학뿐 아니라 중국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가집이다. 현존하는 <시경>은 한나라 모공이 전하는 <모시>이며 음악의 성질에 따라 <풍><아><송>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고대 중국의 문물제도 및 당시 중국인의 사유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


a.<시경>의 성립

 은주왕조 건국 초기(BC 1122년경)부터 춘추 중기(BC 570경)까지의 약 500년간에 걸쳐 황하를 중심으로 한 주의 영역 내에서 불리던 시가를 모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중국역사상 은대는 문명의 시원기라고 한다. 그런데 1898년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갑골문자>가 발굴되면서 이 곳이 은왕조 최후의 왕도(BC 1384 - 1123)인 은의 구지임과 갑골문자가 은대의 문자임이 밝혀져 세인을 놀라게 했다.

  갑골문자에 의해 고증된 바에 따르면 은말은 석기와 청동기를 병용하던 시대로, 주산업은 어로와 채취 그리고 유목이고 농경은 초기단계였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사회형태는 모계사회의 부족집단 체제였고 문자는 창제 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은대 말은 원시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옮아가는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주대에 들어와서 철기가 발명되면서 농경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농업이 주산업이 되자 부족들의 주거가 정착되고 부계사회가 형성되었으며 부족집단체제에서 국가조직체가 이루어졌다. 문자는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주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체제를 이룩한 왕조이고 중국문명의 시원이 바로 주왕조임이 사가들에 의하여 규명되었다.

  주대 이전에도 예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원초의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원시예술로서의 가무였다. 그 흔적은 복사와 주역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문자로 기록되어 전래된 것은 없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시경>은 문자로 기록되어 전래된 중국 최초의 시가이고 문학이며 중국문명사의 첫장이 된다. <시경>은 원래 <시> 또는 <시삼백>으로 불렸다. <경>자가 붙은 것은 전국시대 말기로, 그것도 <시>와 <경>을 합쳐 부른 것이 아니고, <<시서예악역춘추는 6경이다>>(<장자>의 <천운>편)이라고 했을 뿐이다. <시경>이라고 불려진 것은 한대의 사마천의 <사기> <유림전>에서 비롯되었으며 민간에서 통칭되기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송대부터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고시가 원래 3천 편이었는데, 공자가 이것들을 책정하여 311편만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공자가 <시경>을 정리했던 것은 사실이나 3천여편을 311편으로 책정한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한다. 물론 3백여편은 더 되었겠지만 공자는 다만 중복된 것, 의미가 불분명한 것은 제외하고 정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현존하는 <시경>은 311편이라고 하나, 그 중 6편은 제목만 있고 시사가 없으므로 실제는 305편이다.


b.<시경>의 내용

 <<꾸룩꾸룩 징경이(물수리)는 모래톱에서 우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짝일러니>>로 시작되는 <시경>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의 심성을 도야시켜온 교화의 원천이었다. 내용은 주왕조의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대에 걸맞는 밝은 서정시로부터 혼란기를 반영하는 어두운 서사시까지 다채로우나,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연애시다. 따라서 <시경>은 유교 이전의 고대가요의 황금시대에 꽃핀 중국 문학사상 희귀한 연애문학 또는 여류문학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구두로 전승된 작품이 어느 시기에 문자언어로 옮겨서 편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시경>은 한나라 모공이 전하는 <모시>이며 음악의 성질에 따라 <풍><아><송>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풍>은 국풍이라고도 하는데, 15개국에서 수집해온 민가로 이른바 지방의 속악이다. <풍>은 모두 160편으로 시가의 내용은 다양하다. 가장 많은 것이 남녀간의 연가와 사회시로, 전란의 고통을 노래한 것, 사회에 대한 불만, 전장에 나간 남편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과 걱정, 두고온 가정을 걱정하는 남편의 노래, 이별의 괴로움을 노래한 것 등이다.

  <아>는 소아와 대아로 분류되며 모두 111편이나, 그 중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는 6편을 제외하면 105편이 된다. 소아(74편)는 주로 연회음악이고 대아(31편)는 국중음악으로, 그 작자들은 대개 지배계급인 사대부로 알려져 있다. <아>는 <하>자와 음이 비슷하여 고대에는 통용되었다고 한다. 하는 우황이 세웠던 나라 이름으로 황하지역에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불리던 악곡에 맞추어 지은 시가를 <아>라고 하며, <국풍>의 속악과 구별하여 정악으로 삼았다고 한다.

  <송>은 제사지낼 때 쓰는 40편의 의식용 음악으로 셋으로 분류 되는데, <주송>(31편) <노송>(4편) <상송>(5편)으로 나누어지며, 상송은 은나라 후예가 있던 송에서 불렸던 시가였다. 사상내용에 따라 몇 개의 분류로 나누어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국풍>의 일부시는 사회의 계급모순을 반영하고 있는데, 노예에 대한 노예주 귀족들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폭로하는 한편, 노예들의 분노항거를 표현했으며, 노예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반영했다. 노동에서 얻은 열매는 몽땅 노예주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은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던 그 시대의 계급적 대립의 엄연한 사실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쩡쩡쩡 박달나무 찍어내어 / 찍은 나무 물가에 쌓아두니

  강물은 맑고도 물결이 치네 /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건만

  어찌하여 조 삼백전을 가지고 가는고? / 사냥도 안하건만

  어이하여 네 뜨락에 담비가 걸렸는고? / 여보소 군자님들 공밥이야 안 먹겠지?

  다음의 시는 노예들의 반항을 표현하고 있다.

  큰 쥐놈아 큰 쥐놈아 / 나의 기장 먹지 마라

  석삼 년을 살렸건만 / 나를 아니 돌보는가?

  너를 떠나가리로다 / 저 낙토로 가리로다

  낙토여 낙토여 / 내 살 곳을 찾으리라

  이런 부류의 시가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시경>에서 제일 가치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 <국풍>에는 또 병역과 요역의 과중한 부담에 눌려 신음하는 노동인민들의 현실생활과 그들의 사상감정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노예들의 입을 빌어 요역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부모조차 봉양할 수 없는 재난의 심연 속에서 헤매는 그들의 처참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있다. 병역과 요역은 장정 본인들에 극심한 고통을 주었지만 집에 남은 부녀자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었다.

  수자리에 가신 낭군 / 그 기약 할 수 없네

  언제나 돌아오리? / 닭은 홰에 오르고

  해는 이미 저물어 / 소와 양떼 돌아오네

  수자리에 가신 낭군 / 어이 생각 안하리오?

   3. <국풍>의 3분의 1은 애정과 혼인에 대한 시다. 불타는 연정을 표현한 시가 있는가 하면 버림받은 여인들의 분노를 나타낸 작품들도 적지 않다. 오로지 한 처녀만을 사랑하는 깨끗한 애정을 표현하는가 하면 청춘남녀를 사이에 애정을 숨김없이 토로하는 시들도 있다. 

  진수와 유수에 봄물이 출렁인다

  총각도 처녀도 난초꽃을 들었구나

  <<가보아요>> 처녀의 다정한 말에

  <<가보았소>> 정다운 총각의 대답

  <<또 가보아요 넓디넓은 유수 가는 놀기가 좋다나요>>

  총각처녀 장난치며 서로들 함박꽃 안겨주네


c.<시경>의 연구경향 및 그 영향

 중국은 시의 나라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시가문학이 발달하였고, 대부분의 황제들은 문학의 애호자임과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무제 조조 수양제 당현종이 그러한 예이며, 당대의 이백 두보 백거이 한유, 송대의 구양수 왕안석 소동파로부터 최근의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정치적 지위는 높았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는 시적 능력을 정치적 능력과 상관시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러한 시학과 정치학의 결합, 즉 중국식의 정치시학적 입장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공자이며 <시경>은 그러한 인물에 의해 편집된 최초의 시가집이다.

  <시경>은 대개 채시 진시 헌시의 방법으로 수집 된 것을 당시의 악관들이 선정하여 편집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는 제왕들이 채시관을 두어 매년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각 지방에 파견, 시를 모으도록 하여 각 곡의 민심동향과 정치의 반응을 살펴 이를 시정의 참고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15개 국풍의 시가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수집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후세의 학자 중에는 <시경>이 특정지역 내에서 특정인들이 불렀던 것이라는 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크며, 아와 송의 경우 대개 지시나 헌시의 방법으로 수집, 편찬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수집된 시들은 악관의 손에 의하여 음률에 맞게 정리되고 편집되었을 것이며, 그후 공자가 다시 이것을 정리한 것이 오늘날의 <시경>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자가 <논어>에서 <시삼백>이라는 말로 <시경>의 총 편수가 3백여 편이었다고 한 것으로 유추된다.

  공자는 <6경>, 즉 <시> <서> <예> <악> <역> <춘추>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본으로 삼았다. 그는 특히 시를 매우 중요시했으니, 그것은 시가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전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논어> <위정>편에 <<시삼백은 한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고 했으며, 또 <양화>편에서는 <사람이면서 <시경>의 주남 소남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담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이렇듯 공자는 <시경>을 유가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어 전국시대에도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나 순자가 <시경>을 중시했다.

   1. 진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제국가를 수립하면서 시황제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역경>을 제외한 모든 경전들이 불타거나 소실되었다. 뒤이어 한 왕조가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에 군림하면서 학술사상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천하에 산재한 고전적을 수집하고 학관을 세우는 한편, 전문분야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들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표자를 박사라 했다.

   2. 당시 <시경>으로 최초로 박사가 된 사람은 문제 때 노나라 사람 중배와 연나라 사람 한영이 있다. 이들은 비록 동일한 시경학자이긴 하나 치학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이들의 시를 세칭 <노시>와 <한시>라 한다. 그후 경제 때에 또 한 사람의 시경학자가 박사에 선임되었으니 제나라 사람 원고로, 이 학파의 <시경>을 <제시>라 한다. 이렇듯 전하시대에는 <노시> <한시> <제시>의 3개 시경학파가 있었다.

  전하 말에 노나라 사람 공왕이 그의 궁전을 넓히려고 공자가 살던 옛집을 헐 때 그 집 벽 속에서 많은 고전적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서한대에 통용되던 문자인 예서가 아니라 선진대의 문자로 되어 있었다. 이로부터 예서로 된 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금문파>, 서진대의 문자로 된 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고문파>라 이르게 되었다. 고전적 중에는 <시경>도 있었는데, 노나라 사람 모형은 금문파 학자들의 반대로 서한시대에 학관의 박사로 참여하지 못했다.

  후한 시대에 이르면서 <모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또 전한 말 후한의 대학자 정현이 <모시>를 연구하여 <모시>에 주석짓기에 이르러 <모시>는 단연 다른 3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기타 3개 <시경>학파는 점차 쇠퇴하여가더니 <제시>는 위대에, <노시>는 서진대에, 마지막으로 <한시>는 북송 초에 소멸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경>은 <모시>만이 남게 되었다. 소멸된 3가의 시는 고전적에 산재, 인용되어 그것들의 면모를 겨우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시경>을 <모시>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당대에는 공영달이 <모시정전>을 부연하여 <모시정의>를 찬술하여 당대의 통용본이 되었다. 당대부터 <모시정전> 해석에 불만을 가진 학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으나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4. 송대에 이르러 시경학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송대 경학의 대가인 주희는 전래의 <모시정전>의 견해에 부당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시경>의 주해서로 세 번의 개작 끝에 <시집전>을 찬술, 전통학파와 큰 논란을 벌였다. 그 결과 주희의 <시집전>이 시경학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송대의 학술이 팽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희의 이러한 사상적 기여하에 해설된 <시집전>이 통용되었음은 당연한 귀추라 하겠다.

  주희의 <시집전>은 그후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권위있는 <시경> 해설서로 통용되었다. 그렇다고 <모시정전>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으며 모시 정전파의 학자들도 그 맥을 이어왔다.

   5. 청대 말에 이르러 <시집전>은 일부 진보적인 고증학자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즉, 종래의 시경학자들이 거의 경학적인 면으로 <시경>을 다스린 것에 반해, 이를 고증학자들은 <시경>을 경학적인 면보다 역사적인 면에 치중하여 고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주해서에 적지 않은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든다면 방옥윤의 <시경원시>, 요제항의 <시경통론>, <모시>와 <시집전>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최술의 <독풍우식> 등이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시경>은 한대에 <노시> <한시> <제시> 등의 3개 학파가 형성되었으나 <모시>가 등장한 후 모두 쇠퇴하고 남송에 이르러 주희의 <시집전>이 나와 가장 권위있는 주해서로 통용되었다. 민국시대에 와서는 시경학계가 일대 변혁기를 맞게 되었다. 

  현대학자들은 <시경>은 경학이 아닌 학문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래의 경학자들은 <시경>을 정치의 도구로, 또 예교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각기 자기들 시대에 적용되게 왜곡시켜 주해했으나, 이제 <시경>은 <시경>의 본래적인 면모, 즉 과거 2천 년간 경학으로 연구되었던 <시경>은 오늘날 고대 문학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비록 근대에 와서 많은 학자들의 반론에 의해 <시경>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지양되고 민요로서 순수문학적 의의가 회복되었지만 세계를 인식하고 장악하는 훌륭한 기제로서의 시적 능력을 함양시키고,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제국의 문학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 책의 가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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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 (출전:나무위키)


관련 항목 : 유교, 시

유교 십삼경

삼경

삼례

삼전

기타

시경

서경

역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논어

맹자

이아

효경



1. 개요

2. 역사

2.1. 공자의 산삭설

3. 특징

3.1. 문학적 특징

3.2. 육의(六義)

3.3. 정(正)과 변(變)

4. 번역본

5. 시경과 관련 있는 것

5.1. 류성룡의 징비록

5.2. 단어


1. 개요[편집]


유교 경전 중 하나. 이름은 시(詩)지만, 현대의 시를 의미하기 보다는 율(律)이 있는 주나라 시대의 노래를 담은 민요집에 가까운 작품이다.


내용은 본디 311편이었다고 하나, 분서갱유 과정에서 6편이 제목만 전한 채 실전되고 현전하는 것은 305편이다.[1] 현전하는 흔히 말하는 시경의 경우, 한나라 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나온 주나라 당대의 과두문자[2]로 기록된 죽간본 시경[3]에 모장(毛萇)과 모형(毛亨)의 양모씨에 의해 주석이 달린 모시를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 주자의 주석이 더해진 시경집전(詩經集傳)을 근간으로 삼는다.


2. 역사[편집]


본디 주나라에서 쓰이던 많은 노래들 3000편을 공자가 산삭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이를 사실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유교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대우를 받다가 진나라 대에 벌어진 분서갱유로 모든 유교 서적들이 불태워질때 함께 소실되었다가 한나라 대에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숭상받으면서 오경박사를 두어 훈고학을 통해 유교서적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시경 또한 다른 경전들과 함께 복원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문이 삼가시(三家詩)다.


삼가시란 제(齊)의 원고생(轅固生)에 의해 전해진 제시(齊詩), 노(魯)의 신배(申培)에 의해 전해진 노시(魯詩), 한영(韓嬰)에 의해 전해진 한시(韓詩)의 세 학파에 의해 탄생한 시경으로, 이 삼가시를 금문경이라 부른다.


삼가시는 전한대에 노공왕의 집이 철거되어 시경의 원문인 죽간본인 고문경이 발견될 때까지 시경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문경이 발굴되고, 이에 주석을 단 모시(毛詩)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삼가시는 그 명맥이 단절되었고, 후한-동진의 혼란기에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한시의 외전 10권만이 전하고[4], 삼가시 원문은 전하지 않게 되었다.[5]


여기에, 송나라 대에 주희가 주석을 단 집전(集傳)까지 더해져, 이후 시경은 고문경에 모씨와 주자의 주석이 달린 채로 전하게 되었다.


2.1. 공자의 산삭설[편집]


흔히 시경에 대하여, 말할때, 공자가 3000편을 편집하여, 300편으로 산삭했다는 산삭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대개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장 공자가 생애에 시삼백을 논한 바는 있어도, 시삼천을 논한 바는 없으며, 당대에 공자 본인이 수집할수 있었던 정보도 끽해야 주나라와 노나라의 학사에 모인 기록이 대부분이었을텐데, 이 노나라와 주나라의 학사에 전하는 시들이 300여편 정도로 시경의 편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자가 시에서 올바른 것만 산삭했다고 하기에는[6] 풍(風)에서, 위풍 ,정풍, 빈풍 등에는 음란하다고 볼 수 있는 남여상열지사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보이는 등[7][8] , 딱히 산삭했다고 볼수 있는 흔적이 없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주나라와 노나라 학사의 문헌을 그대로 수록하고 정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3. 특징[편집]


3.1. 문학적 특징[편집]


시경의 기본적인 특징은 다름아닌 4언체다. 한 구에 4언으로 이루어진 구절이 무한히 반복되고, 당시에 실제로 불리던 노래였기 때문에 초기형태의 성조에 의한 운율이나 압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경의 문체는 이후 발전하여 5언체 중심의 북방문학을 발전시켜서, 초기 한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대로, 이 시경의 딱딱한 4언에 반대되게 6언 또는 7언이 중심이 된 초사가 있다. 초사는 초지방에서 발생한 시로 시경에 대비되는 남방문학의 시초로, 이 시경과 초사는 각각 오언시와 칠언시의 효시가 되었고, 둘은 서로에 영향을 주어, 한대의 악부시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2. 육의(六義)[편집]


시경을 분류할때 대표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에는 육의(六義)가 있다. 이 육의를 나누는 것은 시경의 대서(大序)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대서의 경우에도 사실 누가 지었는가 말이 많다. 자장이 지었다는 말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공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 육의는 시경에 담긴 여섯가지 뜻이라는 것으로 크게 시의 성질에 따라 나눈, 풍아송(風雅頌)과 서술방식에 따라 나누는 부비흥(賦比興)으로 나뉜다. 또한 풍아송중 아(雅)를 규모에 따라 대아와, 소아로 나누어, 풍(風), 대아(大雅), 소아(小雅), 송(頌)로 나눈 것을 사시(四始)라고 한다. 또한, 부비흥의 경우, 현대로 치면 수사법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식으로 시를 표현하는가를 의미한다.


성질에 따른 분류

풍(風): 서민의 노래. 주나라 각 제후국들의 일반적인 민요로, 각기 15개국의 민요를 담고 있다. 단 주나라 본국의 민요의 경우, 주풍이 아니라, 왕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남(周南)·소남(召南)·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왕풍(王風)·정풍(鄭風)·제풍(齊風)·위풍(魏風)·당풍(唐風)·진풍(秦風)·진풍(陳風)·회풍(檜風)·조풍(曹風)·빈풍(豳風)의 15국풍 160편.

아(雅): 조회나 연향 때 연주하는 노래

대아(大雅): 주나라 왕실의 행사나 의식에 쓰인 왕실의 흥폐를 논한 노래. 총 31편.

소아(小雅): 제후국의 행사나 의식에 쓰이거나, 작은 정사를 논할때, 민간에서 의식이 있을경우 쓰인 노래. 대아가 왕실에서 사용되 무게가 있는 반면, 제후나 신하, 서민의 의식에 쓰여 대아에 비해 작기 때문에 소아라고 한다. 총 80편이나 6편이 실전되어 현전하는 것은 74편.

송(頌): 선현을 기리는 노래. 주나라왕실에서 쓰인 주송, 노나라제후국에서 쓰인 노송, 송나라에서 선대인 상나라를 기린 샹송상송의 3종류가 있다. 총 40편.

작법에 따른 분류

흥(興): 흥이 무엇인가는 정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사실 이른바 흥이라는 것을 보면 왜 흥이라고 부르는 지는 알겠는데, 이걸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굳이 억지로 말로 표현하자면, 연역적 감정의 전파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하안과 공안국은 인비연류(引譬連類)라고 표현하였으며, 주자는 감발지의(感發志意)라고 풀이하였다. 다만 하안의 해석에 대하여서는 그럼 비와 흥은 뭐가 다르냐는 반론이 따르게 되기에, 현대 학자들은 주로 주자의 감발지의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부(賦): 하고자 하는 뜻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비(比): 하고자 하는 뜻을 무언가에 빗대어 표현한다. 비유법.

3.3. 정(正)과 변(變)[편집]


정이란, 그 내용이 교화되어 올바르고 단아한 것을 나타내며, 변(變)이란 교화가 흐트러져 그 내용이 어지럽혀 진것을 가리킨다.


풍의 경우 남(南)으로 끝나는 주남과 소남을 각기 주공과 소공의 교화아래 올바른 문화가 펼쳐져서 지어진 노래란 의미로 정풍이라 하며, 나머지 13열국풍은 교화되지 못하여 어지러워진 이후의 민요라고 하여 변풍으로 부른다.


아의 경우, 대아는 정아, 소아는 변아로 분류했고, 송의 경우도 주송과 상송은 정결하다고 하여 정송으로 보고, 노송은 흐트러져 변송으로 분류한다.


4. 번역본[편집]


국내에는 시경번역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긴 한데,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경우가 있고, 주희의 주석을 번역한 경우가 있으며,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함께 번역한 예도 있다.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것으로는 이기동의 《시경강설》(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정상홍 역 《시경》(을유문화사, 2014.), 김학주 역 《시경》(명문당, 2002.)이 유명한데, 이 가운데 김학주 역은 교수신문 선정 최고의 시경 번역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주희의 주석인 《집전》을 번역한 것으로는 성백효 역(전통문화연구회, 1998.), 김기평 역(아세아문화사, 2012.) 등이 있는데 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는 다산의 《시경강의》(실시학사 경학연구회, 사암, 2008)가 있다.


5. 시경과 관련 있는 것[편집]


5.1. 류성룡의 징비록[편집]


임진왜란 때의 재상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의 제목이 바로 이 시경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으로, 소비편은 위의 구분에서 송(頌)의 '주송'에 포함되어 있는 편이다.


5.2. 단어[편집]


'우연히 만나다'라는 뜻의 해후(邂逅)도 시경이 본 출처다.


고사성어 '절차탁마(切磋琢磨)', '훈지상화', '일취월장(日就月將)', '타산지석', '오매불망(寤寐不忘)', '연비어약(鳶飛魚躍)', '요조숙녀'도 역시 시경이 출처다.



[1] 실전된 6편은 소아(小雅)에 속하는 남해(南陔), 백화(白華), 화서(華黍), 유경(由庚), 숭구(崇丘), 유의(由儀). 이 작품들은 내용없이 이름만 전한다.

[2] 고대 서적들의 경우 과거 필기구의 발전이 미비해서 이전에는 대나무를 쪼갠 죽간에 점도가 높은 옻먹을 사용해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처음은 유난히 두껍고 점점 가늘어져 마치 올챙이같은 모양의 글자가 쓰여졌다. 이를 과두문자라고 한다. 수호전에서도 천강지살 108호걸의 이름과 별호를 새긴 석갈천문이 과두문자로 쓰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3] 이를 고문경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한대에 훈고학으로 복원된 시경을 금문경이라 부른다.

[4] 원전 22권의 경우 마지막으로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고려. 아마도 주변에 고서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취소선을 친것은 한시 원전이 고려에 있다는 것은 와전된 일이고, 실제로는 송나라가 고려에게 그 책이 있으면 전해달라는 요청한 기록이다.

[5] 그나마 시경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 과정에서 서경의 경우, 원문이 발견되지 못하고, 전한대의 금문상서에 진나라 시대의 위작인 위고문상서가등장하여 그 내용이 섞여서 원전의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가치를 많이 잃어버지만, 위고문상서가 후대의 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청화 대학에서 죽간으로 적힌 서경의 10여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악경의 경우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조차 되지 못하여 현전하지 않는다.

[6] 흔히 말하는 시삼백을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之蔽之曰思無邪)

[7] 이걸 두고 화랑의 후예에서 '공자님께서 시경에 음문을 두셨거늘'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8] 이 시경의 음문문제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떡밥이었던 부분인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든 설명해 보고자 우리 공자님이 그럴리가 없어 思無邪의 邪를 마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 思無邪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 하는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B036 – 상록수 (常綠樹) / 심훈(海風 沈熏, 1901 ~ 1936)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일제치하의 암울한 농촌현실 및 이 상황을 깨치고 나아가려는 젊은이들의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보여주는 이 장편은 <동아일보>(1935. 9.10 - 1936. 2. 15)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인물을 모델로 하여 지식인의 귀농 모티브를 중심으로 당시 농촌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주면서 농촌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한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기독교적 희생정신과 남주인공 박동혁의 농촌개혁 의지가 민족애로 결정된 심훈의 <상록수>는 이 작품의 짝으로 평가된 이광수의 <흙>과는 달리 당대의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와 저항정신을 담고 있기도 하다.


a.생애와 작품활동

 <브나로드> 운동의 교재와 같은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서울출신으로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복역한다. 1920년 상해로 건너가 수년간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극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1923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25년 <장한몽>에 이수일역으로 출연했고, 26년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 데 이어, 27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감독했다.

<조선일보> <경성방송국> <조선중앙일보사> 등에 입사했으나 번번이 사상문제를 일으켜 사직했다. 30년 <동방의 애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는데 <영원의 미소> <직녀성> <상록수> 등을 남겼다. 장편 <상록수>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된 작품이며, 심훈은 그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이 소설은 이광수의 <흙>과 함께 <브나로드 운동>의 모범작으로 꼽힌다. <동방의 애인>은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벌이는 강경노선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다룬 작품으로서 연재가 중단되었으며, <불사조>는 국내에서 좌익사상이 대두하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살핀 작품으로 역시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자 신문호의 뒷면에 애국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란 즉흥시를 썼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다. 시집 <그날이 오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시종 강한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다. 저항적이고 행동적이었던 그는 작품 속에서 당시 일고 있던 좌익적 사상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계급적 저항의식과 순진한 인도주의를 결합시키고 있다.


b.주요 등장인물

  박동혁: 농림고보를 중퇴하고 농민운동에 뛰어든 주인공.

  채영신: 기독교청년회연합회 농촌사업부에서 청석골로 특파한 여자. 신학교 학생.

  강기천: 지주의 맏아들. 당국의 농촌진흥회 사업 앞잡이로 농우회를 파괴함.


c.작품의 주요내용

 채영신과 박동혁은 모두 ??일보사 주최 계몽운동에 참가했던 열성적인 젊은이들로서 주최측이 베푼 다괴회에서 보고연설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박동혁은 고향 한곡리에서 3년째 한글과 셈하기를 가르쳤다. 그는 브나로드 운동이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지식청년들이 농어촌 방방곡곡에서 주민과 함께하며 비참한 생활을 해결하도록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운동보다 사상운동으로 나아가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길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지지와 반대가 엇갈렸을 때 채영신이 동혁을 강하게 지지한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학업을 뒤로 하고 농촌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후 동혁은 고향으로, 영신은 경기도 청석골로 간다.

  동혁이 김건배 동지의 머슴방에 야학당 겸 농우회관을 열고 회관건립을 목표로 공동답을 마련하는 등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영신이 정양 겸 견학을 온다. 영신은 농우회의 활동을 둘러보고, <한곡리 부인근로회>를 조직하여 건배 아내에게 맡긴다. 그녀가 돌아가기 전날 동혁과 해변에서 만나 장래를 약속하고, 3개년 계획을 세워 농촌사업의 뿌리를 다지기로 한 후 헤어진다. 영신은 이후 청석골의 문학적 개척사업을 위해 더욱 노력한다. 의사, 재판장 노릇까지 해가면서, 후락한 예배당에서 콩나물 시루같이 모인 아이들에게 농민독본을 가르치며 그녀는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러나 주재소 주임이 한글강습에 나오는 아이를 80명 이상 받지 말 것, 기부금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50여 명의 학생을 돌려보내야 할 형편이니 그녀는 더욱 청석학원을 짓는 일을 늦출 수 없다. 그녀는 지주에게 기부금을 받으려다가 유치장 신세를 지는 고초도 겪는다.

  한편 동혁은 창석골에 가보고 싶지만 기회를 기다리며 참고 더욱 열심히 일한다. 농우회 열두 명의 회원은 염천에도 쉬지 않고 일하여 드디어 회관을 완공한다. 그들은 <<힘만 모으면 무슨 일이든지 되는구나! 땀만 흘리면 그 값이 저렇게 나타나고야 만다>>는 무한한 기쁨을 느끼며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사철나무 같은 교목들을 기념으로 심는다. 한편 기천이가 면협의원이 되고 진흥회 실시에 앞장선다. 그는 자신을 지지할 동네 청년을 매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곡리에서 농우회관을 낙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신은 그보다 곱절이나 큰 학원을 지을 야심으로 밑천에 보태려고 학예회를 준비한다. 이를 계기로 마련한 돈으로 시작하여 청석학원은 낙성을 보게 된다. 그런데 동혁도 초대된 낙성식에서 영신은 쓰러지고, 맹장수술을 받는다. 동혁은 그녀를 간호하게 되고, 두 사람은 모처럼 자신들의 사업에 대해 반성한다.

  그들은 경제적인 사업을 할 결심을 한 것이다. 동혁은 아우의 급한 편지를 받고 영신의 퇴원을 못 본 채 한곡리로 왔을 때 기천이 농우회를 파괴하려는 사태에 접해서도 역시 <면단위 차원의 문화운동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으로>나갈 결론을 내린다. 동지 건배는 기천의 주선으로 군청에 들어가고, 기천에게 찬성한 다른 회원들은 모두 그의 소작인들이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혁은 우선 농우회의 저축금으로 기천에게 회원들이 진 빚을 본전만으로 청산시키고, 기천이 진흥회장이 된 자리에서 그것을 공식화시켜 그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회관이 진흥회로 넘어가는 것에 분개한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 동혁이 입건된다. 

  한편 영신은 일본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나기 전 동혁에게 전보까지 보냈지만 소식이 없자 한곡리로 찾아간다. 그녀는 겨우 면회를 허락받아 동혁을 만나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조선을 떠난다. 그런데 학업은 예상과 달리 취미에 맞지 않고 몸이 쇠약하여 각기병까지 앓게 되자 <<가자, 죽더라도 내 고향에가 묻히자!>>고 청석골로 돌아온다. 그녀는 사업에 대한 애착심이 고향을 떠나기 전보다 더해져 육신의 고통을 이겨낸다.

  그러나 그녀는 동혁도 만나보지 못한 채, 동혁에게는 끝까지 꿋꿋하게 싸워나갈 것을, 원재를 비롯한 청년들에겐 청석학원을 계속할 것을, 그리고 자신의 무덤은 학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마련할 것을 유언하고 죽는다. 동혁은 출감하여 전보를 받자 달려와 슬픔 속에서 영신을 영결하고, 그녀가 못다한 일을 두 몫 하겠다는 결심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동혁은 모범촌 몇 군데를 견학하고,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보리라 결심한다. 동혁이 동리 어귀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띈 것은 회관 낙성식 때 심은 상록수였다.


d.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상록수>는 1930년 초에 일기 시작한 <농민 속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브나로드 운동과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보급을 내세운 농촌계몽운동을 전형적으로 그린 농촌계몽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이 무렵 농촌계몽을 위한 브나로드 운동가들의 열성적인 봉사활동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작품 역시 <동아일보>에서 행한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으로, 1935년 9월부터 1936년 2월까지 연재되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심훈의 큰조카 박동혁(실명:심재영)이 그의 고향 당진군 부곡리에서 농촌운동의 실제조직인 <공동 경우회>의 활동과 당시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하다가 숨진 채영신(실명:용신)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단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작가 심훈은 사회주의적 계급문학을 표방했던 염군사의 회원 출신이다. 때문에 그가 그리고 있는 농촌계몽운동은 이전과는 달리 좀더 적극적이며 실천적이요, 실제적인 것이었다. 이 점은 이광수의 <흙>에서 형상화된 농촌계몽운동의 성격과 비교될 때 그 정당한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브나로드 사상의 일종의 교화소설적인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숱한 장애 속에서도 변치 않고 발전하는 사랑을 로망스 소설적인 성격(심훈의 조카이자 실존인물인 심재영 옹의 회고에 의하면 같은 시대에 태어나 농촌계몽운동에 함께 활동은 했어도 소설 속의 로맨스는 없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종말은 속죄양 모티브와 관련성을 가진 여주인공 영신의 죽음으로 이루어져서 비장감을 자아내고 있으며, 소설의 플롯이 동혁과 영신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구조가 반복되면서 발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교화소설이나 로망스 소설에서 벗어나고 있다. 동혁과 영신의 만남은 다섯 번 이루어지는데, 그 각각은 이 소설의 플롯의 전개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동혁과 영신과의 거듭되는 만남은 처음에는 타인으로 우연히 만나 이 둘의 사이가 동지에서 애인 사이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적 결합의 경지로까지 귀결되는 과정이며, 또한 두 주인공들이 벌이는 농촌사업의 수준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농촌계몽사상과 농촌계몽운동의 실상은 이광수의 <흙>에서 나타나는 지식인의 시혜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브나로도 운동의 성과를 단순한 계몽 차원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명제, 즉 일제와의 대결과 농민계층과의 밀착이라는 명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한곡리의 농우회관의 건립을 둘러싸고 잘 드러난다.

  또한 동혁의 농촌계몽사상은 단순히 글자를 깨우치고 단체를 만드는 문화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당장 시급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사상으로 발전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들의 농촌사업이 시혜적인 태도에서 수행되지 않고 농민계층과의 융합 속에서 진행되며 보다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당시의 농촌계몽소설 중에서는 선진적인 면모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지식인의 귀농을 주제로 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민족의 자활과 자강문제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 낭만성을 살려낸 것도 1930년대의 대표적 농민소설로 꼽히는 이유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의 분위기가 낭만성에 너무 의존하고 있고, 주인공이 여전히 영웅적인 이미지에 머물러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진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품은 <흙>과 함께 농민문학의 전범적인 소설로서 그후에 나타난 농민소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B035 – 고향 (故鄕) / 이기영(民村 李箕永, 1896 ~ 1984)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식민지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까지 평가 받는 <고향>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와 같은 농촌계몽소설이긴 하나, 전자들이 보수적 중도적 성향인 데 비해 <고향>은 사회주의적인 농민운동의 교범으로 간주된다. 이 소설은 일제 치하에서 다중의 억압을 받고 있는 한국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과 투쟁상을 그려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과 민중의 연대, 농민 분해과정, 공동체의 논리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뜰 수 있게 된다.


a.생애와 작품활동

 대표적인 카프 소설가. 호는 민촌.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천안 영진학교를 졸업 후 7년 동안 각지를 유랑하다가 논산 영화여자고등학교 교사, 호서은행 서기 등을 지냈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정칙영어학교를 다니다가 이듬해 광동대지진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을 접했고 막심 고리키에 심취했다. 24년 <개벽>에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3등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이듬해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 기자로 취직하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가입하여 31년에 카프 1차검거 때 구속되었다가 다음해 석방되었다. 34년 2차 검거 때는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45년 해방 후 월북하여 장편소설 <땅> <두만강> 등을 발표하며 북한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했다. 조선문학 예술총동맹 초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소친선협회부의장, 문학예술 총동맹위원장 등을 지냈다. 1984년 사망했다.

  등단작 <오빠의 비밀편지>에서부터 봉건적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몇몇 신경향파적 경향의 작품들을 거쳐 중편 <서화>, 장편 <고향>을 씀으로써 프로 소설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대표작에 단편 <농부 정도룡> <민촌> <민며느리> <홍수> 등과, 장편 <고향> <인간수업> <신개지> <대지의 아들> <봄> <두만강> 등이 있다.


b.작품 세계

 신경향파적 작품을 많이 씀으로써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기영은 일제하 사회주의 문학이 어떻게 변모해왔는가를 작품으로 보여준 작가다. 일제하 사회주의 문학은 신경향파 문학(카프창설 이후) - 목적의식기(카프 제1차 방향전환) - 볼셰비키화 단계(제2차 방향전환) –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및 새로운 창설방법의 모색기라는 단계를 거쳤는데, 이기영의 작품세계에서는 이 모든 단계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기영은 동시에 독특한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초기작품으로 <신경향파>적이라 할 <가난한 사람들>과 <실진>의 경우 가난에 눌린 주인공이 개인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치닫는다는 신경향파 소설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비판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그 파괴의 행동은 실제에서의 것이 아니라 환상에서의 것이며, <실진>에서의 굶주린 주인공이 살인을 하고 곡식을 빼앗지만 후에 그가 죽인 사람은 그와 다를 바 없는 극빈자였음을 알고 <<이것은 어느 개인의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수하고 있다. 과격한 관념이나 파괴적인 행동이 작가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의 이러한 면모가 새롭게 나타나는 작품이 <서화>, 그리고 <고향>이다.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하면서 카프 진영에도 혼란이 일어난 시기에 이기영은 다시금 독특한 현실감각으로 높은 수준의 리얼리즘을 성취할 수 있었다.


c.주요 등장인물

  김희준: 주인공. 도쿄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에 힘쓰는 젊은 지식인.

  안승학: 대지주 민 판서의 마름. 권모술수에 능하고 탐욕이 가득한 인물.

  안갑숙: 안승학의 딸.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노동자로 변신함.

  권경호: 갑숙의 약혼자. 출생의 비밀로 인해 개인적 고뇌를 겪음.

  인동, 김선달, 박성녀, 원칠이: 마을의 소작농민들.


d.작품의 주요내용

 가난한 원터마을은 그날그날 입에 풀칠해 먹고 살아간다.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만져서 제 논을 부치던 사람은 소작농으로 떨어지고 소작농은 빚더미에 눌려 마을을 떠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민 판서의 마름이 안승학으로 바뀐 후부터는 행악이 더욱 심해졌다. 

  희준이 도쿄 유학을 고학으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이 무렵이다. 마을사람들은 희준이 금의 환향할 것으로 기대했건만 정작 동구를 들어서는 그의 초라한 행색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희준은 마을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농민들을 일깨우고 힘을 합해 잘살아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돌아온 터였다. 그는 우선 읍내의 청년회에 가입하여 그 조직을 기반으로 일을 시작해볼 생각이었으나, 청년회의 유명무실한 활동과 회원들의 소시민적 무기력한 모습이 고작이다. 희준은 그나마 야학에 힘을 쏟으며 마을사람들과 친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안승학에게 부탁해 민 판서의 논 몇 마지기를 소작하기로 한다. 농삿일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책상 물림이라 농민들로부터 놀림도 당하고 꾸중도 들어가면서 일을 배워나간다.

  희준이 고향에 돌아온 후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탐욕과 무지였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초보적 조직화를 꾀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두레를 내기로 결정한다. 희준이 농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고 농민들이 집단적 힘에 고무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안승학이다. 그는 두레를 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학삼이를 시켜 방해공작을 펴지만 실패하고 만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승학은 자신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벼드는 모리배요 착취자다. 게다가 재산이 좀 모이자 계집을 번갈아 바꾸어 어미가 제각각인 네 남매를 둔다. 두레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마을 분위기는 일신해, 서로 앙숙이던 사람들은 화해하고 일치된 마음이 고양된다. 그리고 희준 자신의 인텔리 근성도 극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할 무렵에 원터 일대는 뜻하지 않은 수재를 만나게 된다. 그해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된 농민들은 마름인 안승학에게 가서 한 해만 소작료를 탕감해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들은 대표를 뽑아 직접 서울 민 판서댁에도 찾아가보지만 아무 소득 없이 마름과 상의해서 결정하라는 통보를 받을 뿐이었다. 희준의 제안으로 농민들은 추수 때가 되어도 벼베기를 하지 않고 버티지만 나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나 둘씩 이탈하려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곤경에 처한 희준과 농민들을 돕고 나선 것은 읍내 제사공장에 여직공으로 숨어 있는 갑숙이었다. 승학의 딸인 그는 읍내 부호의 아들인 권경호와의 애정문제로 번민하던 때가 있었지만 곧 개인적인 고민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진취적 여성이다. 갑숙은 어릴 때부터 희준을 남몰래 사모해오던 터였지만, 희준이 그의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열네 살에 조혼해버리자 그 꿈이 깨어지고 말았다. 희준 역시 아무 애정 없이 집안의 강요로 했던 결혼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틈만 나면 당사자들의 뜻에 의한 자유결혼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과거의 애정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동지적 애정으로 다시 뭉치게 된다.

  농민들은 갑숙을 비롯한 인순 방개 등 여직공들의 지원금으로 며칠을 더 버티지만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때 갑숙은 자신의 연애사건으로 아버지를 협박하면 굴복하게 되리라는 고육책을 내놓는다. 경호와 갑숙은 부모들의 동의 없이 자신들끼리 은밀히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가뜩이나 이들의 사이를 못마땅해오던 안승학은 경호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자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리며 갈라놓기 위해 애쓴다. 부호의 아들로 자라난 경호는 사실 부호 권상철의 친아들이 아니고 머슴 곽 첨지의 아들인 것이 밝혀져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승학은 그런 인물과 자신의 귀한 딸이 서로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예상대로 승학은 농민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게 되고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승리로 끝난다.


e.작품해설

 <고향>은 그의 대표작이자 식민지시대 한국 농촌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이광수의 우익적인 <흙>이나 심훈의 중도적인 <상록수>와 다른 좌익적인 농촌소설이다. <고향>은 식민지 봉건사회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계급적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터마을의 농사의 주기적 변천, 혹은 계절적 추이에 따라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리얼리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원터마을은 단순한 촌락공동체가 아니라 농민적 공동체로서의 단위역할을 수행하는 전형적인 마을로 설정되고 있다. 그것은 <두레>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있다. 현실적 실천은 노동쟁의로 집약되고, 농민적 현실에의 투시는 소작쟁의로 집약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구현은 안갑숙이란 여주인공을 등장시켜 보여주고 있다. 안갑숙을 전형적인 인물로 하는 <고향>의 이념형상성은 추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카프 문학사를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향>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김희준이라는 인물의 형상화다. <지식인 계급전형의 창조>라고 높이 평가되어온 이 인물은 그 이전까지 이기영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과는 다르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친 지식인이지만 <고향>이 무대로 하고 있는 원터 소작농의 아들로서 고향에 돌아와 농민운동을 조직해나간다. <민촌>이나 <종이 뜨는 사람들> 등 민중을 각성시키려는 지식인이 등장하는 이기영의 이전의 소설에서는 이들이 다른 계급에서 자라난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고향>의 김희준은 자기 계급의 지식인이다. 그는 원터마을의 한 주민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다. 그는 원터마을의 한 주민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다. 카프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지식인을 에워싸고 있는 관념성을 그는 벗어 던지고 있다. 그는 완전한 인물이 아니므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기도 하고 조혼한 아내에 대한 미움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농민운동을 꾸려가는 중에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희준에게는 가능하다. 그를 <지식인계급의 전형>이라 함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지식인 희준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고향>은 민중의 생동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괄괄하지만 총명하고 직심이 있는 인동, 어질고 순박하면서도 강단 있는 인순, 분방하고 솔직한 성격의 방개 등은 이 소설을 읽는 이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민중의 상이다. 인물형상화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마름 안승학 일가다. 안승학은 이전의 카프 소설에서 적대자가 조명되는 것보다 훨씬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개화문물에 친숙하다는 것과 술수에 능한 성격으로 마름의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안승학의 출세담, 그의 일상생활 묘사가 이 작품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딸 갑숙은 아버지의 봉건적인 전제에 저항감을 느끼는 인물로 가출하여 원터 근처의 제사공장 여직공이 된다. 갑숙은 마을사람들의 싸움이 곤경에 부딪혔을 때, 또 생활이 어려워 단결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안승학이 고자세를 거두지 않아 투쟁이 막혀 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갑숙의 금전적인 도움이라든지 갑숙과 경호의 관계로 안승학을 위협하는 등의 우연적 요소가 없었더라면 원터농민들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정도다.

  작가는 김희준을 내세워 현실적인 지식인상을 창조함과 동시에 투쟁의 대상이나 결과에서도 눈에 보이는 현실성을 부여잡으려하고 있다. 지주인 민 판서가 아니라 마름인 안승학을 대상으로 싸움이 벌어지고 싸움은 눈앞에 보이는 승리로 이끌어진다. 사회주의 운동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에 작가는 관념이 아닌 눈앞의 현실에서 사회대중의 투쟁의 승리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기영 개인의 측면에서나 식민지 시대 소설사에서 <고향>은 한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구체적인 농민생활의 세부적 묘사, 가난하지만 진취성을 잃지 않는 농민상의 제시, 노동자와 농민은 결국 같은 조건에 처한 계급임을 밝히는 노동동맹의 사상, 민중적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 등이 이 소설이 지닌 미덕인 동시에, 리얼리즘 미학의 측면에서도 앞 시기 프로 문학이 드러낸 한계를 극복하고 몇가지 중요한 진전을 이룩한 작품이다. 사건전개와 결말부분의 개인적 해결방식이 결함으로 지적되기도 하나, 대체로 이 소설은 농민문제를 형상화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소설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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