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19 – 사기열전(史記列傳) / 사마천(司馬遷) (BC 145?~?)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사기>는 사마천이 이능사건과 관련하여 죽음보다 수치스런 궁형(宮刑)을 당하면서 완성한 불멸의 고전이다. <사기>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역사정신에 투철했던 한 인간이 빚어낸 인간승리의 결정체다. <사기열전>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서술방법인 기전체사서의 효시가 된 <사기> 중에서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는 사마천의 역사관.세계관.인간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제반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씌어진 <사기열전>은 역사서이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철학서이기도 하다.


a.생 애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를 헤로도트라고 한다. 반면에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은 <동양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후반시대의 역사가인 반고와 함께 역사학의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달력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루를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의가 점차 기술적으로 천시되고 옛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나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천하를 주유하며 주요 사적지를 직접 답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인물 등의 체험담 들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후 낭중의 벼슬에 올라 무제를 수행,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거행한 태산에서의 봉선(흙을 쌓아 담을 만들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일)의식에 태사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참석을 허락받지 못해 괴롭게 여기다가 분사했는데, 죽기 전에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천문.제사의 직을 관장하는 태사령이 봉선의 대의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녕 큰일임에 틀림없고 죽을 정도로 발분한 것도 당연하다.

 BC 108년 아버지를 이어 태사령에 임면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시경> <상서> <춘추> <전국책> 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상소문.국가의포도문 등을 섭렵,<사기>의 집필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BC 99년 한나라 장군 이능이 훙노와 싸우다가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능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단죄를 주장하는 무제와 일가멸족의 의견이 대세인 상황에서 사마천이 홀로 이능의 충절과 용감함을 들어 변호하자 격분한 무제는 사형을 선고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은 감옥 속에서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당시에는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50만 전을 내든지 아니면 생식기를 절단하는 <궁형>을 받는 일이었다. 넉넉치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궁형을 택했다. 2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뜻밖에도 한무제의 측근에서 일하게 되었다. 중서령이라는 높은 벼슬로 복귀했는데,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이는 그가 환관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정신적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분발하여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을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찾고자 하여 마침내 20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 130권을 완성했다. 이처럼 사관의 가문에서 출생, 천하주유, 부친의 유언, 저술 착수, 이능사건과 궁형, 사명감으로 완성된 책이 <사기>다. 그때가 BC 97년.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남게 된 것이다.


b.사마천의 역사관

 먼저 사마천의 역사연구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그의 편지의 일부를 보자.<<겸손치 못한 일이나 저는 감히 저의 무능한 문장으로 세상에 흩어져 없어져버린 구문을 수집하여 그 행해졌던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와 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한서>).>> 이 글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역사연구란 폭넓은 역사적 자료에 의거해야 하며 아울러 이러한 자료를 사실과 서로 검증하여, 일의 성패와 국가의 흥망원인에 대해 연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료의 진위감별력,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료와 진실에 근거하여 사실대로 쓰는 데 과감해야 한다. 사학자들은 절대로 주위의 압력이나 회유에 굴복해서는 안되며 객관적인 역사서술에 용감해야 하는데, 사마천은 두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모범이 되었다고 후세사가들은 평했다. 그는 이처럼 <사기>를 저술하면서 객관적 판단이나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즉 주관적 판단이나 감상은 언제나 본문 끝에다 <태사공월>이라고 써서 역사가로서의 엄정함을 갖추었다.


   2.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사기>에서 밝혔다. 즉, 역사연구에 있어 시대상황의 변화와 개인이 서로 만나게 되는 관계에 대해 연구했던 것이다. 인간사의 성패나 국가의 흥망은 인간 자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하늘과 신의 뜻에 의한 것인가? 이에 대한 사마천의 태도는 분명하다. 즉,인간은 역사의 주체이지 객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있어 인간사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천명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예로 사마천은 항우가 패배하여 자살하기 직전 하늘의 뜻으로 돌리며 <<하늘이 나를 망친 것이지 나의 탓이 아니다>>라고 한 데 대해, 항우가 패하여 죽은 것이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며 오직 그 스스로 일을 그르쳤다고 평가했다.


   3.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마땅히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역사발전과정과 법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란 발전적이고 변화적이며 역사의 각 마디는 상호연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기>는 통사체제를 활용하여 중국역사시대부터 한에 이르는 3천 년의 인류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한 최초의 책이며,아울러 이 한 폭의 역사의 그림책 속에서 각 시기의 특색 및 예법.제도.인물의 변천을 드러내었다. 바로 이것이 사마천의 <고금에 통달하는> 사상을 보여준 것이다.


   4. 네번째,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마땅히 역사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품격을 지닌 <<일가의 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사학은 일종의 고지식함을 많이 지니고 있어 역사서는 천편일률적이고 역사가는 개성이 부족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대부분이 정치세력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사마천은 후대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매우 힘원한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은 우수한 역사가로서 <사기>에서 대단히 개성적인 품격을 형성했는데, 그 결과가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술방법이다. 비록 공자가 편년체(연대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사기> 이전의 모든 역사책의 서술방법이었으나 <사기>이후 기전체가 유행하고 송나라 때 사마광의 <자치통감>이후 편년체의 편찬방법이 보다 완벽해져서 다시 새롭게 주목을 받는다)로 지었다는 <춘추>를 참고했다 해도 그 역사서술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 크게 다른 기전체라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c.<사기>의 내용


 <사기>는 처음 <태사공서>라 불려지다가 위.진 시대에 와서 <사기>라 약칭되었다. 이 책은 중국의 고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그 당시까지의 3천 년 역사를 인물중심으로 다룬 통사(기전체 사서)로,본기 12권,표 10권, 서 8권, 세가30권, 열전 70권 등 총 130권(10권은 그후 소실)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란 제왕의 일대기, <세가>는 제후의 일대기, <열전>은 그아래에서 역사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인물들을 묘사한 것이고,<표>는 연대기,<서>는 역법이나 경제 등의 제도사이다. 이중<열전> 70권은 이 책의 백미로서 사회 각계각층 그리고 각 방면의 중요한 인물 및 주변국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사공자전>편이 있는데, 이것은 사마천 자신의 가계와 사적을 서술하고 이 책의 편찬과정과 의미, 그리고 저자의 사학적인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본기>는 역대왕조의 역사를 제왕을 중심으로 쓴 연대기다. 황제의 첫머리에 <5제본기>로부터 시작하여 하.은.주.진.한의 5대에 걸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는 서술이 간략하고 내려울수록 사료가 풍부하여 자세히 기록했다.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비록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천하에 그 영향력을 떨쳤던 항우를 <항우본기>로 <진기>와 <한기>사이에 설정한 것과, 한나라의 2.3대 군주인 효제,소제는 본기로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한 이럼 점으로 볼 때 사마천의 견해는 유학파와는 달리 실증적인 특색을 지녔던 듯하다.

 <세가> 30권은 선진 이후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한 봉건제후국의 역사다. 주나라의 봉건제후는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복잡한 역사를 엮어내는 제왕을 중심으로 한 <주본기>만 가지고는 이 시대 제후국의 활동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가>란 차례를 세우고 각 나라별로 제후국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기>에 대해 <세가>를 세운 것은 단지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 예외로서 공자와 진승(진나라를 치기 위해 제일 먼저 봉기한 민중의 지도다)이 세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제후는 아니었고 진승은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무장임에도 <세가>로 대우한 것은 문화사에서 공자가 차지하는 비중과 정치사에서 진승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같다.

 <열전>의 서술은 사마천이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부분이며 70권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열전> 저술의 목적을 <<의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을 위해 70여 편의  열전을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대개가 전국시대 이후의 역사의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들의 생애를 깊은 통찰력,예리한 판단력,풍부한 상상력 등을 구사하여 다채로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의 질서를 내면으로부터 뒷받침하는 뜻에서 각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을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그와 같은 질서의 세계를 현실에서 권력을 잡은 자의 구체적인 권력지배의 세계와 혼동하지 않았다. 차라리 개인의 구체적인 권력자 행위는 그와 같은 질서이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행위의 동기,심성이란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된다. 특히 그와 같은 시대를 산 권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서술에는 가차없으며, 비록 평민이라도 그가 이념하는 질서세계를 유지하는 데 참여한 자를 위해서는 특별히 <열전>을 세워서 이를 기록하고 있다. <유협열전> <유림열전> <자객열전> <호리열전> <화식열전>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을 열전의 단위로 삼아서 서술한 것이 있는데, <조선열전>을 비롯한 <흉노열전> <남월동월열전> <서남이 열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위 민족과의 교섭이 잦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실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실리적 견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나, 중화사상의 표현으로 왕화가 미치는 곳이라 하여 더욱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열전>에는 특히 무제의 한사군설치를 둘러싸고 우리 나라의 청천강 유역에서 한군과 위만조선군이 충돌한 사건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대략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마천은 52만 자에 달하는 저작을 완성했다. 우리는 여기서 궁형의 고통을 참아가며 <사기>를 완성하고 아울러 과거에 대한 서술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삶의 존재의미를 이 저술 속에서 승화시킨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d.공헌


 사마천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대하다. 중국이 사상사.문학사.천문학사에서 특히 그렇다. 이는 사마천 자신의 천재성에 그 연원을 찾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 밖에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그가 산 시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진.한 이래 정치적인 분열상태가 종식되고 사상적으로도 백가쟁명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하여 구사회의 역사.문화를 총괄하고, 거기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철학적.역사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요구가 필연적으로 싹트게 된다. <태사공자서>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던 책 중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을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격찬해 마지않는 것은 그가 사학분야에 미친 공헌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의 역사문헌인 <상서>와 <춘추>에서는 개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 개인을 유교의 훈계담이나 정치법률에 붙여 제2차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기>의 출현으로 종래의 교훈적인 역사가 과학적인 학문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유교의 경에서 사학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라하여 경과 사는 한대부터 구분되기 시작했으며, 사가경과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마천과 후한의 반고에 의해서이다. 사마천의 뚜렷한 업적 중의 하나는 기전체(紀傳體)를 통해 역사서술을 시도한 점이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이 기전체의 서술체제는 중국 정사체에 계승되면서 송의 사마광의 <자치통감> 이후 나타난 연대 중심의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이후 동양 역사서술의 전형이 되었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사기>에 기록된 천년 전의 은나라 계보가 갑골문자의 발굴을 통해 정확히 확인된 바 있다. 또한 1974년 진시황의 지하궁전이라 하여 세계의 8대 불가사의로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릉의 동쪽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대규모 병마용갱의 발견 역시 <사기>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준 셈이 되었다. <사기>제6권에 <<37년 9월에 진시황을 여산에 묻었다. 시황은 즉위 초에 지하수맥 3개를 끊고 그곳에 동을 흘려서 그위에다 관을 설치했다. 접근하는 자가 있을 경우 화살이 저절로 쏘아지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기>가 단순한 역사서적만은 아니다. 전편에 보이는 유려하고 생동감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들의 인생역정이 서술되고, 왕에서 서민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까지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인간관계에 주목,곧 인간에게 있어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역사서술의 형식을 빌어 기술하면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밝히고, 나아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사서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탐구의 서적이다.

 사마천은 기전체 문학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이른바 우수한 전기문학작가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고도의 언어예술을 갖추고 시대의 언어를 구사하여 역사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생동감 있고도 간결하게 각인했다. <<역사가들이 부른, 만고에 빛날 노래이자 운이 없는 굴원의 <이소>다.>> 이것은 노신이 <사기>에 보낸 찬사이자, <사기>의 탁월한 문학성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중국문학사상 문학가로서의 사마천은 시인 굴원과 비교된다. 이것은 양자의 처지가 비슷란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작품에 내재하는 현실주의적 정신이 매우 유사한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사실을 소재로 한 역사산문을 높은 단계로까지 끌어올려놓은 공로 또한 크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 이때의 심정을 뒷날 친구인 임안에게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역경을 발전의 기회로 승화시킨 그이 투철한 역사정신을 음미해보자.


 <<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입니다. 진작 죽었어야 할 것을 이제까지 버티어온 것은 아버지의 유명인 <사기>의 찬술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온갖 수치와 굴욕을 참아가면서 나는 밤낮으로 이 일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내가 듣건대 그 옛날 문왕을 이리에 갇혀서 <주역>을 풀었고, 공자는 곤궁함 속에서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추방되어 <이소>를 쓰고<자구명은 <국어>를 지었고, 손자는 다리를 끊기고<병서>를 썼다고...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뜻하는 바를 알리기 위해 이런 글들을  썼던 것입니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흩어져 있는 전고를 모으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사적을 조사하여 그 성패와 흥망의 배후에 깃든 이치를 규명코자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극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빛조차 띠지 않고, 만약 이 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소장하고 지식인들에게 전달 할 수 있다면 저의 수치도 충분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설령이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한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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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사마천(司馬遷)


소경인 임안에게 보내는 답서-사마천(司馬遷)


史公牛馬走(태사공우마주) : 태사

司馬遷再拜言少卿足下(사마천재배언소경족하) : 사마천이 삼가 소경족하에게 재배하며 말씀드립니다

曩者辱賜書(낭자욕사서) : 저번에 외람되이 서신을 보내셔서

敎以順於接物(교이순어접물) : 교우 관계를 신중히 하고

推賢進士爲務(추현진사위무) :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데 힘쓰라는 가르침을 잊을 주셨습니다

意氣懃懃懇懇(의기근근간간) : 말씀이 간곡하셔서 

若望僕不相師(약망복불상사) : 제가 따르지 않을 것 같아 원망하시는 듯했는데

而用流俗人之言(이용류속인지언) : 세상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僕非敢如此也(복비감여차야) : 제가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僕雖罷駑(복수파노) :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亦嘗側聞長者之遺風矣(역상측문장자지유풍의) : 어른들의 유풍을 어렴풋이나마 들었습니다 

顧自以爲身殘處穢(고자이위신잔처예) : 그러나 돌아보면 스스로 궁형을 당하고 이름이 더럽혀져

動而見尤(동이견우) : 걸핏하면 허물을 입고

欲益反損(욕익반손) : 잘 하려고 하지만 일을 그르칩니다

是以獨鬱悒而與誰語(시이독울읍이여수어) : 그러니 혼자 수심에 잠길 뿐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諺曰(언왈) : 속담에 이르기를

誰爲爲之(수위위지) :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 일하고

孰令聽之(숙령청지) : 또 누구에게 기를 기울이겠는가?”라고 했습니다

蓋鍾子期死(개종자기사) : 종자기가 죽자

伯牙終身不復鼓琴(백아종신불복고금) : 백아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何則(하칙) : 왜 그랬을까요

士爲知己者用(사위지기자용) :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女爲說己者容(여위설기자용) : 여자는 자리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용모를 꾸밉니다

若僕大質已虧缺矣(약복대질이휴결의) : 저처럼 몸이 망가지면

雖才懷隨和行若由夷(수재회수화행약유이) : 록 재능이 수후주나 비화씨벽 같고

終不可以爲榮(종불가이위영) : 행실이 허유 백이처럼 고결히도 끝내 영광스럽지 못하고

適足以見笑而自點耳(적족이견소이자점이) :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 당해 스스로 더럽힐 뿐입니다

書辭宜答(서사의답) : 당신의 서신에 회답을 드려야 했는데

會東從上來(회동종상래) : 공교롭게 임금님을 따라 동쪽에서 장안으로 오게 되고

又迫賤事(우박천사) : 또 잡다한 일도 생겼습니다

相見日淺(상견일천) : 만나 뵐 기회도 적었고

卒卒無須臾之閒(졸졸무수유지한) : 또 매우 바빠 틈을 내어

得竭志意(득갈지의) : 저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今少卿抱不測之罪(금소경포불측지죄) : 지금 당신께서 생사가 달린 큰 죄를 지으신지

涉旬月(섭순월) : 한 달이 지나 12월이

迫季冬(박계동) : 가까워졌습니다

僕又薄從上雍(복우박종상옹) : 저는 또 임금님을 모시고 옹지역으로 가게 되어

恐卒然不可爲諱(공졸연불가위휘) : 당신께서 뜻밖에 죽음을 당할까 걱정됩니다

是僕終已不得舒憤懣以曉左右(시복종이불득서분만이효좌우) : 이렇게 되어 저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고민을 끝내 당신에게 알리지 못하면

則長逝者魂魄(칙장서자혼백) : 저 세상으로 간 당신의 혼백에

私恨無窮(사한무궁) : 한없이 유감스러울 것입니다

請略陳固陋(청략진고루) : 이제 저의 비루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闕然久不報(궐연구불보) : 오랫동안 끌어오다가 아제서야 답장하게 되었으니

幸勿爲過(행물위과) : 허물로 여기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僕聞之(복문지) : 제가 듣건대

脩身者(수신자) : 수신이란

智之符也(지지부야) : 지혜가 쌓인 것이고

愛施者(애시자) :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

仁之端也(인지단야) : 인의 시작이며

取與者(취여자) : 주고받는 것을 엄격히 하는 것이

義之表也(의지표야) : 의의 표현이고

恥辱者(치욕자) : 수치를 알고 욕된 것을 참는 것이

勇之決也(용지결야) : 용기 있다는 증거이며

立名者(입명자) :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行之極也(행지극야) : 행동의 극치라고 들었습니다

士有此五者(사유차오자) : 선비는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然後可以託於世(연후가이탁어세) : 그렇게 된 뒤에 세상에 나갈 수 있고

而列於君子之林矣(이열어군자지림의) : 군자의 행렬에 설 수 있습니다

故禍莫憯於欲利(고화막참어욕리) : 그래서 재앙 중에서 이익을 탐하는 것보다 더 비통한 것이 없고

悲莫痛於傷心(비막통어상심) : 슬픔 중에서 상심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行莫醜於辱先(행막추어욕선) : 행동 중에서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 없고

詬莫大於宮刑(후막대어궁형) : 부끄러움 중에서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刑餘之人(형여지인) : 형을 받은 사람이

無所比數(무소비수) : 보통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은

非一世也(비일세야) : 지금 한 세상 뿐이 아니라

所從來遠矣(소종래원의) :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昔衛靈公與雍渠同載(석위령공여옹거동재) : 전에 위나라 영공과 환관인 옹거가 같이 수레를 타고자

孔子適陳(공자적진) : 공자께서 화가 나셔서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셨습니다

商鞅因景監見(상앙인경감견) : 상앙이 환관인 경감의 소개로 진나라 효공을 만나자

趙良寒心(조량한심) : 조량이 상앙을 한심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同子參乘(동자삼승) : 환관인 조담이 문제를 모시고 수레에 오르자

袁絲變色(원사변색) : 원사가 화가 나 안색이 변했습니다

自古而恥之(자고이치지) : 옛날부터 환관을 멸시 했었습니다

夫以中才之人(부이중재지인) : 보통 사람들도

事有關於宦豎(사유관어환수) : 모든 일에 환관이 연관되면

莫不傷氣(막불상기) : 기가 상한다고 여기는데 

而況於慷慨之士乎(이황어강개지사호) : 기개 있는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如今朝廷雖乏人(여금조정수핍인) : 지금 비록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지만

奈何令刀鋸之餘(내하령도거지여) : 궁형을 받은 제가 어떻게 

薦天下豪俊哉(천천하호준재) : 천하의 호걸을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僕賴先人緖業(복뢰선인서업) : 저는 선인이 남기신 공로에 힘입어

得待罪輦轂下(득대죄연곡하) : 경성에서 일을 한 지

二十餘年矣(이십여년의) :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所以自惟(소이자유) :

上之(상지) : 위로는

不能納忠效信(불능납충효신) : 충성과 신의를 다하고

有奇策才力之譽(유기책재력지예) : 훌륭한 책략을 올려 재능이 있다는 이름을 날렸어도

自結明主(자결명주) : 현명하신 임금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次之(차지) : 다음으로는

又不能拾遺補闕(우불능습유보궐) : 또 잘못을 바로잡고

招賢進能(초현진능) :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천거하며

顯巖穴之士(현암혈지사) : 은거하고 있는 훌륭한 선비를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外之(외지) : 대외적으로는

又不能備行伍(우불능비행오) : 군대를 거느리고

攻城野戰(공성야전) :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우며

有斬將搴旗之功(유참장건기지공) : 적장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는 공로도 세울 수 없습니다

下之(하지) : 아래로는

不能積日累勞(불능적일루로) : 오랜 세월 공을 쌓아서

取尊官厚祿(취존관후록) : 높은 관직이나 후한 봉록을 받아

以爲宗族交遊光寵(이위종족교유광총) : 친척이나 친구들이 영광으로 생각사게 할 수 없습니다

四者無一遂(사자무일수) :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고

苟合取容(구합취용) : 남의 비이나 맞추고 영합해서

無所短長之效(무소단장지효) :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것이

可見如此矣(가견여차의) : 이와 같습니다

嚮者(향자) : 전에

僕亦常廁下大夫之列(복역상측하대부지열) : 제가 하대부 서열에 있을 때

陪外廷末議(배외정말의) : 외정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不以此時引維綱(부이차시인유강) : 그때 법도를 바로잡지 못하고

盡思慮(진사려) : 생각도 깊이 하지 못하여

今已虧形(금이휴형) : 지금 몸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하고

爲掃除之隸(위소제지례) : 청소나 하는 노예처럼

在闒茸之中(재탑용지중) : 천한 사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乃欲仰首伸眉(내욕앙수신미) : 이에 고개를 들고 슬픈 눈썹을 펴고서

論列是非(론열시비) :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不亦輕朝廷(불역경조정) : 이는 조정을 무시하고

羞當世之士邪(수당세지사사) : 당세의 재능 있는 선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嗟乎(차호) : 아

嗟乎(차호) : 아, 

如僕尙何言哉(여복상하언재) : 저와 같은 천한 사람이

尙何言哉(상하언재) :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且事本末(차사본말) : 게다가 일의 본말도

未易明也(미역명야) :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僕少貧不羈之材(복소빈불기지재) : 젊었을 때 좀 출중한 재응이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長無鄕曲之譽(장무향곡지예) : 그러나 장성하고 난 후로는 시골구석에서도 훌륭한 평판조차 없습니다

主上幸以先人之故(주상행이선인지고) : 다행히 임금께서 저의 선친의 연고로

使得奏薄伎(사득주박기) : 태사의 일을 이어받게 하시어

出入周衛之中(출입주위지중) : 궁중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僕以爲戴盆何以望天(복이위대분하이망천) : 저는 두 일을 겸직해서 할 수 없다고 여기고

故絶賓客之知(고절빈객지지) : 손님과의 왕래도 끊고

亡室家之業(망실가지업) : 집안일도 잊어버렸습니다

日夜思竭其不肖之才力(일야사갈기불초지재력) : 밤낮으로 불초한 능력을 다하고

務一心營職(무일심영직) : 일심으로 자구에 힘써

以求親媚於主上(이구친미어주상) : 임금님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而事乃有大謬不然者夫(이사내유대류불연자부) : 그러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그렇지 못했습니다

夫僕與李陵(부복여이릉) : 저와 이릉은

俱居門下(구거문하) : 같은 같은 시중이었으나

素非能相善也(소비능상선야) : 평소 서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趣舍異路(취사이로) : 서로 자기의 길을 걸어

未嘗銜盃酒(미상함배주) : 일찍이 함께 술을 마시며

接慇懃之餘懽(접은근지여환) : 은근한 기쁨을 나눠 본 적도 없습니다

然僕觀其爲人(연복관기위인) :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릉은 사람됨을 보건데

自守奇士(자수기사) : 비범한 선비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며

事親孝(사친효) :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與士信(여사신) : 사람과 사귐에 신의가 있고

臨財廉(임재렴) : 재물에 임해서 청렴하며

取與義(취여의) : 주고받는 데는 의롭고

分別有讓(분별유양) : 분별함에 겸양이 있고

恭儉下人(공검하인) : 아랫사람에게 공손했습니다

常思奮不顧身(상사분불고신) : 항상 분발해 일을 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以徇國家之急(이순국가지급) : 국가의 위험함에 군령을 내림은

其素所蓄積也(기소소축적야) : 그것이 평소에 쌓은 바였습니다

僕以爲有國士之風(복이위유국사지풍) : 저는 국사의 위풍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夫人臣出萬死不顧一生之計(부인신출만사불고일생지계) : 무릇 신하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인생의 책략을 내어

赴公家之難(부공가지난) : 조정의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斯以奇矣(사이기의) : 비로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今擧事一不當(금거사일부당) : 지금은 일을 하다가 한 가지만 잘못되어도

而全軀保妻子之臣(이전구보처자지신) : 자신과 처자만 보호하려는 신하들이

隨而媒糱其短(수이매얼기단) : 멋대로 그 잘못을 날조합니다

僕誠私心痛之(복성사심통지) : 정말 속으로 이런 일을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且李陵提步卒不滿五千(차이릉제보졸불만오천) : 게다가 이륭은 오천 명도 안되는 보병을 거느리고 

深踐戎馬之地(심천융마지지) : 적진 깊숙이 들어가

足歷王庭(족력왕정) : 흉노 군주의 근거지까지 갔으니

垂餌虎口(수이호구) : 이는 먹이를 호랑이 입에 늘어드린 것과 같습니다

橫挑彊胡(횡도강호) : 그렇지만 막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여

仰億萬之師(앙억만지사) : 수십만 군사를 올려다보고

與單于連戰十有餘日(여단우련전십유여일) : 흉노의 왕과 연이어 10여 일을 싸웠는데

所殺過當(소살과당) : 죽인 적군의 수가

虜救死扶傷不給(로구사부상불급) : 죽은 아군의 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旃裘之君長咸震怖(전구지군장함진포) : 적군이 사상자를 구하려 오지도 못하자 흉노의 왕이 매우 놀라

乃悉徵其左右賢王(내실징기좌우현왕) : 측근의 현왕을 부르고

擧引弓之人(거인궁지인) : 궁인을 일으켜

一國共攻而圍之(일국공공이위지) : 거국적으로 이릉을 공격하고 포위했습니다

轉鬪千里(전투천리) : 아군은 천리 길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다

矢盡道窮(시진도궁) : 화살도 다 떨어지고 도로도 막히게 되었으며

救兵不至(구병불지) : 구원병이 끊기고

士卒死傷如積(사졸사상여적) : 사상자도 들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然陵一呼勞(연릉일호로) : 그러나 이릉이 군사들을 큰 소리로 위로하자

軍士無不起(군사무불기) : 모두 분기 하지 않음이 없었어

躬自流涕(궁자류체) : 절로 감격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沬血飮泣(매혈음읍) : 온 얼굴에 피눈물을 뒤집어쓰고

更張空弮(갱장공환) : 소리 죽여 울면서 빈 활을 잡고

冒白刃(모백인) : 시퍼런 칼도 무릅쓰고

北嚮爭死敵者(북향쟁사적자) : 북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陵未沒時(릉미몰시) : 이릉이 전쟁에서 패배당하지 않은 사실을

使有來報(사유래보) : 사자가 와 보고하자

漢公卿王侯皆奉觴上壽(한공경왕후개봉상상수) : 한나의 공경과 완후가 술잔을 들어 천자께 축하를 드렸습니다

後數日(후수일) : 며칠 후

陵敗書聞(릉패서문) : 이릉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主上爲之食不甘味(주상위지식불감미) : 천자께서는 식사를 하시기는 하나 맛을 모르시고

聽朝不怡(청조불이) : 조회에 참석하나 기쁜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大臣憂懼(대신우구) : 대신들도 걱정하고 두려워

不知所出(불지소출) :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僕竊不自料其卑賤(복절불자료기비천) : 저는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見主上慘愴怛悼(견주상참창달도) : 천자께서 몹시 슬퍼하시는 것을 뵙고

誠欲效其款款之愚(성욕효기관관지우) : 저의 자그마한 충성이나마 다하려 했습니다

以爲李陵素與士大夫絶甘分少(이위이릉소여사대부절감분소) : 이릉은 사대부들과 본래부터 동고동락하여

能得人死力(능득인사력) : 다른 사람들의 사력을 다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雖古之名將不能過也(수고지명장불능과야) : 이런 점은 비록 옛날의 명징이라 할지라도 이릉보다 못합니다

身雖陷敗(신수함패) : 그가 적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彼觀其意(피관기의) : 속뜻을 보건대

且欲得其當而報於漢(차욕득기당이보어한) :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가 나라에 보답하려 하고 있습니다

事已無可奈何(사이무가내하) :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其所嶊敗(기소최패) : 그가 적을 무찌른 공로는

功亦足以暴於天下矣(공역족이폭어천하의) : 세상에 나타내기에 충분합니다

僕懷欲陳之而未有路(복회욕진지이미유로) : 제가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適會召問(적회소문) : 우연히 부르시고 하문하시어

卽以此指推言陵之功(즉이차지추언릉지공) : 이러한 취지에서 이릉의 공로를 말씀드려

欲以廣主上之意(욕이광주상지의) : 천자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塞睚眦之辭(색애자지사) : 원성을 막으려 했지만

未能盡明(미능진명) : 명백히 설명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明主不曉(명주불효) : 천자께서 저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시고

以爲僕沮貳師(이위복저이사) : 제가 이사 장군을 모함하고

而爲李陵遊說(이위이릉유설) : 이릉을 위해서 유세한다고 여기시어

遂下於理(수하어리) : 영옥을 맡은 관리에게 저를 넘기셨습니다

拳拳之忠(권권지충) : 간절한 저의 충성심을

終不能自列(종불능자열) : 끝내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因爲誣上(인위무상) : 그래서 천자를 속인다고

卒從吏議(졸종리의) : 여겨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家貧貨賂不足以自贖(가빈화뢰불족이자속) : 집이 가난하여 속죄할 수도 없습니다

交遊莫救(교유막구) : 평소 교제하던 사람들도 구해주려고 하지 않고

左右親近(좌우친근) : 측근에 있던 사람들도

不爲一言(불위일언) : 저를 위해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身非木石(신비목석) : 제가 목석처럼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獨與法吏爲伍(독여법리위오) : 옥리와 함께

深幽囹圄之中(심유령어지중) : 깊은 옥중에 갇혀 있으니

誰可告愬者(수가고소자) : 누가 억울하게 겪은 이런 고통을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此眞少卿所親見(차진소경소친견) : 이것은 당신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僕行事豈不然乎(복행사기불연호) : 저의 사정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李陵旣生降(이릉기생강) : 이릉이 살아서 적에게 항복하여

隤其家聲(퇴기가성) : 그 가뭄의 명성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而僕又佴之蠶室(이복우이지잠실) : 저도 궁형을 시행하는 밀실로 불려가

重爲天下觀笑(중위천하관소) :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悲夫(비부) : 슬프고

悲夫(비부) : 슬픕니다 세

事未易一二爲俗人言也(사미이일이위속인언야) :  상 사람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僕之先(복지선) : 저의 선친께서는

非有剖符丹書之功(비유부부단서지공) : 부부나 단서를 가질 만한 공로가 없습니다

文史星歷(문사성력) : 천문·태사·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近乎卜祝之閒(근호복축지한) : 점치는 일과 비슷합니다

固主上所戲弄(고주상소희롱) :  이러한 일은 본래 천자께서 장난삼아 노시던 것으로

倡優所畜(창우소축) : 광대를 양성하는 것 같아

流俗之所輕也(유속지소경야) : 세상 사람들이 경시하는 것이었습니다

假令僕伏法受誅(가령복복법수주) : 만약 제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는다 하더라도

若九牛亡一毛(약구우망일모) : 아홉 마리의 소리에서 털 하나 잃어버리는 것과 같고

與螻蟻何以異(여루의하이이) : 땅강아지나 개미와 같은 미천한 것이 죽는 것과 다름이 무엇이겠습니까

而世又不與能死節者(이세우불여능사절자) : 게다가 사람들은 저를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特以爲智窮罪極(특이위지궁죄극) : 생각이 모자라 죄가 극에 달해

不能自免卒就死耳(불능자면졸취사이) : 마침내 스스로 죽임에 나가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何也(하야) : 왜 그렇겠습니까

素所自樹立使然也(소소자수입사연야) : 평소에 스스로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는데

或重於太山(혹중어태산) :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或輕於鴻毛(혹경어홍모) :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 하나보다 더 가볍습니다

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야) : 이는 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太上不辱先(태상불욕선) : 가장 훌륭한 죽음은 선조를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其次不辱身(기차불욕신) : 그 다음이 자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其次不辱理色(기차불욕리색) : 그 다음은 이치에 어긋나거나 얼굴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其次不辱辭令(기차불욕사령) : 그 다음이 언사에 욕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其次詘體受辱(기차굴체수욕) : 그 다음은 무릎을 끊기고 욕 당하는 것이고

其次易服受辱(기차역복수욕) : 그 다음이 죄수복을 입고 욕 당하는 것입니다

其次關木索(기차관목색) : 그 다음이 죄인이 되어 형틀을 쓰고 밧줄로 묶여서

被箠楚受辱(피추초수욕) :  곤장을 맞으며 욕을 당하는 것이고

其次剔毛髮(기차척모발) : 그 다음이 머리를 깎이고

嬰金鐵受辱(영금철수욕) : 목에 쇠사슬을 두르고 맞으며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其次毁肌膚(기차훼기부) : 그 다음이 살갗을 훼손당하고

斷肢體受辱(단지체수욕) : 몸을 잘리는 욕 당하는 것이고

最下腐刑極矣(최하부형극의) : 가장 나쁜 것이 궁형을 받는 것입니다

傳曰(전왈) : 옛 책에 이르기를

刑不上大夫(형불상대부) : ‘대부에게는 형벌을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此言士節不可不勉勵也(차언사절불가불면려야) : 이 말은 선비의 절개는 강제로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猛虎在深山(맹호재심산) :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에 있으면

百獸震恐(백수진공) : 모든 짐승이 두려워 떱니다

及在檻穽之中(급재함정지중) : 그러나 우리에 같혀 있게 되면 

搖尾而求食(요미이구식) : 꼬리나 흔들며 먹이를 구하게 되는데

積威約之漸也(적위약지점야) : 이것은 굴복 당해 호랑이의 위엄이 점점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故士有畵地爲牢(고사유화지위뢰) : 그래서 선비는 땅 위에다 선을 그어 감옥으로 삼는다 해도

勢不可入(세불가입) : 기개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削木爲吏(삭목위리) : 나무를 깎아 법관으로 삼는다 해도

議不可對(의불가대) : 논의 때문에 그 심문을 받지  않는 것이니

定計於鮮也(정계어선야) : 이것은 이미 계획된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今交手足(금교수족) : 저는 지금 손발이 묶이고

受木索(수목색) : 머리에는 형구를 쓰고

暴肌膚(폭기부) : 몸을 다 드러내고

受榜箠(수방추) : 채찍을 맞으며

幽於圜牆之中(유어환장지중) :  옥에 갖혀 있게 되었습니다

當此之時(당차지시) : 이러한 때를 당하여

見獄吏則頭槍地(견옥리칙두창지) : 옥리를 보면 머리를 조아리고

視徒隸則正惕息(시도례칙정척식) : 교도관을 보면 놀래어 가슴이 뛰는데

何者(하자) :왜 그렇겠습니까

積威約之勢也(적위약지세야) : 오랫동안 감옥에 갖힌 기세 때문입니다

及以至是(급이지시) :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言不辱者(언불욕자) : 욕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所謂强顔耳(소위강안이) : 소위 뻔뻔스러운 사람이니

曷足貴乎(갈족귀호) :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且西伯伯也(차서백백야) : 문왕은 서백으로 계실 때

拘於羑里(구어유리) : 강리에 갇혔었고

李斯相也(이사상야) : 이사는 재상 노릇 할 때

具于五刑(구우오형) : 오형을 받았습니다

淮陰王也(회음왕야) : 회음왕은

受械於陳(수계어진) : 진 지역에서 체포되었고

彭越․張敖(彭越․장오) : 팽월과 장오는

南面稱孤(남면칭고) :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다가

繫獄抵罪(계옥저죄) : 옥에 같혔습니다

絳侯誅諸呂(강후주제려) : 강후로 봉하여진 주발은

權傾五伯(권경오백) : 여씨 일족을 평정하였으나

囚於請室(수어청실) : 청실에 같히게 되었고

魏其大將也(위기대장야) :  두영은 대장이었으나

衣赭衣(의자의) : 죄인의 옷을 입고

關三木(관삼목) : 몸에는 삼목을 걸치게 되었습니다

季布爲朱家鉗奴(계포위주가겸노) :  계포는 주씨 가문의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灌夫受辱於居室(관부수욕어거실) : 관부는 감옥에서 욕을 당했습니다

此人皆身至王侯將相(차인개신지왕후장상) : 이분들은 각각 황제·제후·장군·제상에 올라

聲聞鄰國(성문린국) : 이웃나라까지 명성을 떨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及罪至罔加(급죄지망가) : 그러나 죄를 지어 법에 저촉되었는데도

不能引決自裁(불능인결자재) : 우유부단하여 자결하지 못하고

在塵埃之中(재진애지중) : 세속에서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古今一體(고금일체) : 이러한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이니

安在其不辱也(안재기불욕야) : 어찌 욕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由此言之(유차언지) : 이로 말하건대

勇怯(용겁) : 용감한 것과 겁이 많은 것은

勢也(세야) : 정세에 좌우되는 것이고

强弱(강약) : 강하고 약한 것은

形也(형야) : 당신의 형세에 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審矣(심의) : 살피건데

何足怪乎(하족괴호) : 이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夫人不能早自裁繩墨之外(부인불능조자재승묵지외) : 범 앞에 서기전에 자결하지 못하고

以稍陵遲(이초릉지) : 우유부단하여

至於鞭箠之間(지어편추지간) : 매를 맞고서

乃欲引節(내욕인절) : 자결하겨고 하니

斯不亦遠乎(사불역원호) : 역시 너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古人所以重施刑於大夫者(고인소이중시형어대부자) : 옛 사람들이 대부에게 법을 적용할 대 신중을 기했던 까닭은

殆爲此也(태위차야) : 이러한 것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夫人情莫不貪生惡死(부인정막불탐생악사) : 사람의 마음은 살고 싶어 하고 죽기를 꺼리며

念父母(념부모) : 부모를 생각하고

顧妻子(고처자) : 처자를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至激於義理者不然(지격어의리자불연) : 그러나 의리에 감동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乃有所不得已也(내유소불득이야) : 이는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今僕不幸(금복불행) : 지금 저는 매우 불행합니다

早失父母(조실부모) : 부모님을 일직 여의고

無兄弟之親(무형제지친) : 형제도 없으며

獨身孤立(독신고립) : 홀로 되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少卿視僕於妻子何如哉(소경시복어처자하여재) :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 대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且勇者不必死節(차용자불필사절) : 또 용감한 사람만이 반드시 절개를 지켜 죽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怯夫慕義(겁부모의) : 유약한 사람도 능히 의를 사모하면

何處不勉焉(하처불면언) : 어찌 힘쓰지 못하하겠습니까

僕雖怯懦(복수겁나) : 제가 비록 겁이 많아

欲苟活(욕구활) :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亦頗識去就之分矣(역파식거취지분의) : 또한 생사의 명분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何至自沈溺縲紲之辱哉(하지자심익류설지욕재) : 어찌 스스로 감옥 안에 갇혀 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且夫臧獲婢妾(차부장획비첩) : 종이나 옆에서 시중드는 계집도

由能引決(유능인결) : 오리려 자결할 수 있는데

況僕之不得已乎(황복지불득이호) : 어찌 제가 할 수 없겠습니까

所以隱忍苟活(소이은인구활) : 제가 욕됨을 참고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면서

幽於糞土之中而不辭者(유어분토지중이불사자) : 더러운 감옥에 갇혀서도 오히려 사양하지 않은 것은

恨私心有所不盡(한사심유소불진) : 개인적인 생각을 다 표현해 내지 못했고

鄙陋沒世(비루몰세) : 비루하게 죽으면

而文采不表於後世也(이문채불표어후세야) : 후대에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古者(고자) : 예전에

富貴而名摩滅(부귀이명마멸) : 부귀하면서도 이름을 내지 못한 인물이

不可勝記(불가승기) : 수없이 많았지만

唯倜儻非常之人稱焉(유척당비상지인칭언) : 뜻이 크고 기개 있는 비범한 인물만이 칭송을 받았습니다

蓋文王拘而演周易(개문왕구이연주역) : 문왕께서 구금되시어 주역을 풀이하셨고

仲尼厄而作春秋(중니액이작춘추) : 공자께서 곤궁하셨을 때 춘추를 저술하셨습니다

屈原放逐(굴원방축) : 굴원은 추방을 당하고서

乃賦離騷(내부이소) : 이소를 지었고

在丘失明(재구실명) : 좌구명은 눈이 먼 후에

厥有國語(궐유국어) : 국어를 편찬했습니다 답답하고

孫子臏脚(손자빈각) : 손자는 다리를 잘린 후에

兵法脩列(병법수열) : 병법을 논했고

不韋遷蜀(불위천촉) : 여불위가 촉으로 쫓겨난 뒤에

世傳呂覽(세전여람) : 여씨춘추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韓非囚秦(한비수진) : 한비는 진나라에 갇힌 뒤에

說難孤憤(설난고분) : 세난과 고분을 지었고

詩三百篇(시삼백편) : 시경 300편도

大抵聖賢發憤之所爲作也(대저성현발분지소위작야) : 대개 성현께서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此人皆意有鬱結(차인개의유울결) : 이러한 분들은 뜻이 있었으나 막혀 답답하고

不得通其道(불득통기도) : 자기의 견해와 도리를 전할 방법이 없어

故述往事(고술왕사) : 지난 일을 서술하여

思來者(사래자) : 후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乃如左丘無目(내여좌구무목) : 좌구명은 눈이 멀고

孫子斷足(손자단족) : 손자는 다리를 잘려

終不可用(종불가용) : 끝내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자

退而論書策(퇴이논서책) : 물러나 책을 써서

以舒其憤(이서기분) : 마음속의 울분을 풀고

思垂空文以自見(사수공문이자견) :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僕竊不遜(복절불손) : 요즈음 저는 불손하게도

近自託於無能之辭(근자탁어무능지사) : 쓸 줄 모르는 문장에 기탁하여

網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 예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누락된 이야기를 망라하여

略考其行事(약고기행사) : 간략하게 고증하고

綜其終始(종기종시) :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稽其成敗興壞之紀(계기성패흥괴지기) : 성공·실패·흥성·쇠망의 이치를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上計軒轅(상계헌원) : 그리하여 위로는 현원에서

下至于玆(하지우자) :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爲十表(위십표) : 표 10편

本紀十二(본기십이) : 본기 12편

書八章(서팔장) : 서 8장

世家三十(세가삼십) : 세가 30편

列傳七十(열전칠십) : 열전 70편 등

凡百三十篇(범백삼십편) : 도합 130편을 지어

亦欲以究天人之際(역욕이구천인지제) : 천도와 인사의 관계를 궁구하고

通古今之變(통고금지변) : 고금의 변화를 살펴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 일가의 문장을 이루려 했습니다

草創未就(초창미취) : 그러나 초고를 작성하기도 전에

會遭此禍(회조차화) :  이런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惜其不成(석기불성) :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是以就極刑而無慍色(시이취극형이무온색) : 애비록 극형을 당했으나 노기를 띠지 않은 것은 석히 여겨

僕誠以著此書(복성이저차서) : 제가 이 책을 저술하여

藏諸名山(장제명산) : 명산에 간직해 두었다가

傳之其人(전지기인) :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게 전하여

通邑大都(통읍대도) : 모든 고을과 도시에 알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則僕償前辱之責(칙복상전욕지책) : 이렇게 되면 제가 이전에 욕됨을 참고 자결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보상받게 될 것이다

雖萬被戮(수만피륙) : 비록 수만 번 죽임을 당해도

豈有悔哉(기유회재) : 어찌 후회스러움이 있겠습니까

然此可爲智者道(연차가위지자도) : 그러나 슬기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지만

難爲俗人言也(난위속인언야) : 일반 사람에게는 하기 어렵습니다


且負下未易居(차부하미역거) :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처신하기가 어려우며

下流多謗議(하류다방의) : 천박한 사람은 비방받기가 쉬운 법입니다

僕以口語遇遭此禍(복이구어우조차화) : 제가 말을 삼가지 못하여 이러한 화를 입고

重爲鄕里所戮笑(중위향리소륙소) :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以汙辱先人(이오욕선인) : 조상을 욕되게 했으니

亦何面目復上父母丘墓乎(역하면목복상부모구묘호) : 무슨 명목으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가겠습니까

雖累百世(수루백세) : 수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垢彌甚耳(구미심이) : 수치만 더 심해질 뿐입니다

是以腸一日而九迴(시이장일일이구회) : 이로 인하여 근심스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생기고

居則忽忽若有所亡(거칙홀홀약유소망) : 집에 있으면 정신이 몽룡하여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으며

出則不知其所往(출칙불지기소왕) : 문을 나서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每念斯恥(매념사치) :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汗未嘗不發背沾衣也(한미상불발배첨의야) : 등에서 식은땀이 흘려내려 옷을 적십니다

身直爲閨閤之臣(신직위규합지신) : 환관과 같은 신하가 되었으니

寧得自引於深藏岩穴邪(영득자인어심장암혈사) : 어찌 스스로 은거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故且從俗浮沈(고차종속부심) : 그래서 잠시 세상의 부침과

與時俯仰(여시부앙) : 시대의 파고를 따라

以通其狂惑(이통기광혹) : 행동하며 미치고 어리석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습니다

今少卿乃敎以推賢進士(금소경내교이추현진사) : 지금 소경께서 저에게 현인을 추천하라고 하셨는데

無乃與僕私心刺謬乎(무내여복사심자류호) : 이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과 상반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今雖欲自雕琢曼辭以自飾(금수욕자조탁만사이자식) : 지금 비록 제가 미사여구로 제 자신을 숨다 해도,

無益於俗(무익어속) :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不信(불신) : 사람들도 불신할 것이니

適足取辱耳(적족취욕이) : 도리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취할 뿐입니다

要之(요지) :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死日然後是非乃定(사일연후시비내정) : 죽은 후에나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입니다

書不能悉意(서불능실의) : 글로써는 저의 생각을 다 쓸 수 없어

略陳固陋(약진고루) : 비루한 생각을 간략하게 적는 바입니다

謹再拜(근재배) : 삼가 재배드립니다.



출처: http://hwalove.tistory.com/entry/卷五-15報任少卿書-司馬遷 [빈막(賓幕)]


B018 – 한비자(韓非子) / 한비자(韓非子) (BC 280~23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전국시대의 법가주의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진다. 곧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法治主義), 관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며(術治主義), 군주에게는 절대적인<세>가 필수적(勢治主義)이라고 보는 사상인데, 이는 한비자에 의하여 <법술>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주관성이 개입될 수지가 있는 온정적 이물장치를 극력 배격하고, 특히 <관료주의에 의한 국가 권력의 농단>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군주에 의한 관료의 통제술과 객관적이고 엄격한 법치를 통한 군주의 절대공권력의 확보를 말하고 있다.


a.생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 안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었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 ??  ??)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도가.명가.법가.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문장을 모은 저서<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중하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과 <법술>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b.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위.조 삼진 지역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북ㄱ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위.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종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논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에 보면,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지는데, <법치주의> <술치주의> <세치주의>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이사와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 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이사는 위나라의 문후를 섬겨 변법을 추진했고 상앙은 진나라 효공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법술의학>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법치의 운영방법으로 술치와 세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술.세>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명)과 실제의 공로(형)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은 명가의 실재론과 상통한다.


c.<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라 불렀는데 당의 한유도 한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 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이병>편: 밝은 임금은 형과 덕 두 대의 손잡이를 잡고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 신하 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 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형이요 상이란 덕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된다.

   2. <비내>편: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고 믿어서는 아니 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윈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위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3. <고분>편: 중신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술>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4. <설난>편: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행해야 성공하며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5. <오두>.<십과>편: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 하는 자. 

 (2)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3)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

 (4)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 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

 (5)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순간 얻는 상인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1)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2)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

 (3)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4) 음악에 빠지는 것

 (5) 지나친 욕심

 (6) 여락에 빠지는 것

 (7)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다니는 것

 (8)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9)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10)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 된 자가 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d.의의 및 영향


 우리는 앞에서 유가와 도가 그리고 여기서 법가사상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도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주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의 통지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커다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보면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일단 달성하게 된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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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47가지 사례

출전

『한비자』 망징편

이 글은 한비자가 저술한 『한비자』 「망징(亡徵)」편에 실려 있는 것으로, 임금을 중심으로 왕족과 측근, 중신(重臣) 등 상류계급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기생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통해 전국시대 말기의 사회 혼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비자』의 「망징(亡徵)」편은 글자 뜻 그대로,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말하고 있다. 한비자는 여기에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후로 볼 수 있는 47가지 사례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한비자는 47가지 망국의 징후들을 제대로 포착하여 국가를 개혁하지 않는 한, 그 나라가 멸망의 길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견했다. 강력한 왕권과 법치의 전통을 세운 진나라만이 살아남고, 그 외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이 모두 멸망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면, 한비자의 예견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나라가 망하는 47가지 사례


一. 대개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는 작은데 대부(大夫)들이 차지한 영토는 크며, 임금의 권위는 가볍고 대신들의 권력이 무거우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 법령과 금법(禁法)을 가볍게 여기고 모략과 꾀에만 힘쓰고, 나라 안의 정치는 황폐하게 만들고 나라 밖의 외교와 원조에만 의지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 여러 신하들이 쓸모없는 학문만을 익히고 귀족의 자식들은 변설을 즐기며, 장사꾼들은 재화를 나라 밖으로 빼돌려 쌓아놓고 백성들은 나라 안에서 곤궁하게 지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 임금이 화려한 궁전과 높은 누각 및 정원의 연못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호사스러운 수레와 의복 및 기구나 노리개 등의 사치를 즐겨,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五. 임금이 때와 날을 받아 귀신을 섬기며, 복서(卜筮 : 점술)를 믿고, 제사 지내는 일을 좋아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六. 임금이 신하들의 의견을 들을 때, 많은 벼슬아치들의 말을 증거로 참고하여 알아보지도 않고 오직 한 사람만을 밖으로 내보내 정보를 얻는 창구로 삼는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七. 나라의 관직이 몇 사람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고, 벼슬과 봉록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八. 임금이 게으르고 무엇이나 이루지 못하고, 유약하여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옳은 일과 잘못된 일을 결정짓지 못해 스스로 확고하게 설 수 없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九. 임금이 탐욕스러워 만족하지 못하고, 이익만을 가까이하고 좋아한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 임금이 잔혹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좋아해 법령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변설을 즐겨 그 실용(實用)에 힘쓰지 않으며, 아름답게 꾸민 글에 빠져 그 공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一. 임금의 사람됨이 천박해 속마음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고, 자신의 계획을 남에게 누설하기를 좋아해 조금도 감추지 않고, 여러 신하의 의견과 말을 쓸데없이 이리저리 옮기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二. 임금의 성품이 너무 강해 신하들과 화합할 줄 모르고, 간언(諫言)을 물리치고 신하들에게 이기는 일을 즐기며, 나라의 이익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자신의 믿음에만 의지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三. 임금이 다른 나라와의 외교나 원조만 믿고 이웃 나라를 얕보며, 강대국의 도움에 의지하여 가까운 이웃 나라를 멸시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四.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처자식과 재산은 나라 밖에 두며, 위로는 임금의 모사(謀事)와 계략(計略)에 참여하고 아래로는 백성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五. 백성들은 재상(宰相)을 믿지 않고, 신하들은 임금에게 충성심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임금이 총애하고 신뢰해 내쫓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六. 임금이 나라 안의 뛰어난 선비를 중용(重用)하지 않고 나라 밖의 사람에게 관직와 봉토(封土)를 주며, 공로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명성만을 좇아 진퇴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에서 데려온 사람만을 믿고 그 지위를 높게 하여 나라 안의 신하들보다 귀하게 만들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七. 임금이 왕위를 정당하게 승계할 적자(適者)를 가볍게 여기고 서자(庶子)를 대등하게 대접하고, 태자(太子)가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임금이 죽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八.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나라는 혼란스러운데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며, 나라의 재력(財力)은 살펴보지도 않고 이웃의 적을 가볍게 여기면 그 나라는 망한다.


十九. 나라가 작으면서도 큰 나라에 대해 겸손하지 않고, 힘은 약하면서도 강한 나라를 겁내지 않으며, 무례하게도 이웃의 큰 나라를 업신여기고, 탐욕만을 추구하고 외교에 졸렬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태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임금이 강성한 적국에서 후처(後妻)를 맞아들여 정부인으로 삼으면 태자의 자리는 위태로워지고, 신하들은 마음을 바꾸어 정부인 쪽으로 쏠릴 것이니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一. 임금이 겁이 많아 자기 신념대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지레짐작은 재빨리 하면서도 마음이 유약하여 정작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망설이다가 때를 놓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二. 임금이 일이 있어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데 신하들이 왕위(王位)를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새로운 임금을 세우거나, 외국에 인질로 가 있는 태자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임금이 다른 아들로 태자를 정하면 민심은 흔들린다. 나라 안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三. 임금이 대신들을 가볍게 대우하거나 욕을 보여 원한을 품게 하고 또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형벌을 가하고 일을 시켜, 그 원한과 수치를 잊지 않고 있는데도 그 사람들을 자신의 주변 가까이에 둔다면 역적이 생긴다. 역적이 일어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四. 세력 있는 두 대신이 권력다툼을 하고 임금의 형제들이 세력이 강해 나라 안에 당파가 생겨나고, 또한 나라 밖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서로 세력을 다투는 일이 생기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五. 임금이 젊은 시녀(侍女)나 아름다운 후궁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총애하는 신하나 농간(弄奸)하는 측근의 지모(智謀)를 써서, 조정 안팎의 원망과 슬픔이 가득한데도,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불법(不法)을 저지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六. 임금이 원로대신을 업신여기고 왕실의 형제나 친척들에게 무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잡아 죽이는 일이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七. 임금이 조그마한 술수로 법을 어긋나게 만들고, 사사로운 일로 공사(公事)를 그르치게 하며, 법률과 금령을 쉽게 바꾸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八. 국경에 튼튼한 요새를 쌓지 않고 성곽은 허술하며, 군비는 축적되어 있지 않고 물자는 부족하며 방위태세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가볍게 적을 공격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二十九. 임금의 일족이 장수(長壽)하지 못하여 즉위하자마자 잇따라 죽고,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대신이 권력을 잡고 휘두른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도 벼슬을 주어 당파(黨派)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나라의 영토를 떼어 외교의 담보로 삼아 원조를 기대한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 임금의 자리와 권력을 물려받을 태자가 존경받고 세상에 알려져,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세력이 커지고 강대한 나라들과 접촉과 교섭이 빈번하여,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가 일찍이 갖추어지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一. 임금이 소심하고 성급하여 아무 일에나 쉽게 흔들리며, 상황에 대한 이해득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二. 임금이 쉽게 화를 내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즐겨 농사나 군사를 그르치면서, 쉽사리 적국을 공격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三. 임금의 측근인 고관대신(高官大臣)들이 서로 시기하여 싸우고, 대신들의 세력이 융성하여 밖으로는 적국의 힘을 빌리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괴롭히며, 사사로운 원한으로 자신들의 원수를 공격하는데도, 이를 임금이 내버려둔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三十四. 임금은 어리석은데 그 측근인 왕실의 친척이나 형제는 현명하고, 태자의 세력이 약해 서자가 이를 업신여겨 대항하고, 관리의 힘이 약하면 백성들은 오만해져 나라 안은 혼란스러워진다. 민심이 흔들리고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그 나라는 마침내 망한다.


三十五. 임금이 자신의 분노를 가슴에만 담고 있고 형벌을 내려야 할 때에도 죄목을 들출 뿐 처벌을 하지 않으면, 신하들은 겉으로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임금을 미워하고 나라를 걱정하게 된다. 또한 죄가 있는 신하를 처벌하지 않으면 그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게 되므로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六.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너무 강력한 권한을 주거나 국경을 수비하는 책임자에게 너무 높은 지위를 주면, 법을 남용하여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거나 일을 처리할 때도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전횡을 일삼게 되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七. 왕후(王后)가 음란하고, 임금의 모후(母后)가 추한 행동을 거듭하면, 조정 신하들이 궁전의 내실(內室)과 함부로 정을 통하게 되고 남녀의 유별함이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에 임금의 모후(母后)와 왕후(王后)가 서로 대립하여 파당을 만들게 되어 그 나라는 망하고 만다.


三十八. 임금이 왕후를 함부로 대하고 시녀나 후궁만을 총애하여 태자보다 서자의 권위가 높아지면, 나라의 질서가 무너진다. 재상의 권위가 가벼운 반면 관직이 낮은 신하들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막강해지면, 조정의 안과 밖은 서로 시기하여 다투게 된다. 조정의 안팎이 서로 다투어 평화롭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三十九. 대신의 자리가 지나치게 높고 귀하게 되면, 그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지지자가 많이 생겨나 무리를 만들어 강해진다. 그들이 임금의 판단을 가로막고 나라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자제들은 관직에 중용(重用)되는 반면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의 자식들은 배척당하고, 지방의 작은 고을에서 행한 착한 일 따위는 높이 드러나는 반면 관리의 공로는 무시되고, 개인의 행위는 귀하게 여기는 반면 나라에 대한 공로를 천하게 여기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一. 임금과 나라의 창고는 텅 비었는데 대신(大臣)의 창고가 가득하고, 조상 대대로 뿌리박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반면 다른 나라에서 옮겨와 임시로 사는 사람은 넉넉하고, 평소 논밭을 갈다가 전쟁이 나면 목숨 걸고 나가 싸우는 선비는 곤궁한 반면 상공업(商工業)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이익을 얻는다면 그 나라는 곧 망한다.


四十二. 임금이 큰 이로움을 보고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재난의 징조를 듣고서도 대비하지 않고, 나라의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천박하게 여겨 인의(仁義)의 헛된 명분만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자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三. 임금이 자신은 효행(孝行)을 하지 않으면서 필부(匹夫)의 효행만 흠모하고, 나라의 이익은 돌보지 않고 모후(母后 : 太后)의 명령만을 좇고, 왕후나 후궁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환관(宦官)들이 나랏일을 좌우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四. 임금이 말과 논리에 능숙한 반면 이치에는 어긋나고, 마음은 지혜롭지만 술수(術數)에 익숙하지 않고, 다재다능한 반면 법도(法度)에 따라 일을 다루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五. 새로 조정에 나온 신하가 높은 자리에 오른 반면 옛 신하들은 밀려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나랏일에 중용(重用)되는 반면 어진 선비는 드러나지 않고, 공적이 없는 사람은 귀하게 되는 반면 고생해 공로를 세운 사람은 천한 대우를 받는다. 이 때문에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원망하게 된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원망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六. 왕실(王室)의 친인척과 대신들의 봉록이 실제 공로보다 높고 후하거나, 신분에 따른 복식(服飾)이 그 등급을 침범할 정도로 화려하거나, 궁궐과 가옥 및 음식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데도 임금이 이를 금하지 않으면, 신하들의 탐욕은 멈출 줄을 모르게 된다. 신하들의 탐욕이 멈출 줄 모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四十七. 왕실(王室)의 사위나 자손(子孫)들이 백성들과 함께 한 마을에 살면서, 그 이웃 백성들에게 오만하게 굴고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라가 망하는 47가지 사례 (2천 년을 살아남은 명문(名文), 2006. 7. 27., 포럼)


B017 – 순자(荀子) / 순자(荀子) (BC 315~236년경)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순자는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린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으로 계승한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계승했는데, 마찬가지로 공자의 사상을 맹자가 이상주의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순자는 현실주의적으로 이어받았다. 성악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강조한 순자는 인간을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분업원리를 통한 엘리트 중심의 군주국가체제를 옹호했으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이용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교육과 사회제도의 중요성을 설파함으로써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종합하여 진한 이후 중국에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성립.출현에 기를을 마련했다.


a.생애


 BC 3세기경의 중국사상가.이름은 황.순자는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으로 그의 출생 및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기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그가 태어난 조나라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중국 변두리에 위치한 나라였다. 그는 50세 무렵에 문화가 발달한 제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학술적인 체계를 세웠다. 당시 제나라의 민왕은 학술장려에 힘써 학자를 우대하는 한편, 수도인 임치 부근에 문화지역을 마련하고 이곳에 큰 저택들을 지어 학자들이 여기서 살며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곳에는 유학자들이 자유로이 토론도 하고 학문연구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순자는 이곳에서 선학들이 연구한 학문의 지식을 흡수,분석하면서 그의 학문적 분석체계를 세워나갔다. 순자는 민왕의 뒤를 이은 양왕에 의해 학자들의 수석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좨주(祭酒)로 초빙되었다. 후일 사마천이 <사기>에서 <<순경(경은존칭)은 조인이다. 나이 50에 처음으로 제에 유학했다. 순경은 세 번 좨주가 되었다. 제인이 순경을 참소하자 초로 갔다>>라고 밝혔듯이 순자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참소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 제나라를 떠났다.

 그는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의 도움으로 난능현의 장관자리를 얻게 되나, 곧 춘신군의 한 문객의 춘신군에게 그를 멀리 하도록 권해 그를 파직시켰다. 여기서 물러난 순자는 고향 조나라로 돌아왔으나 춘신군은 그를 다시 불러 다시 장관에 등용했다. 그는 제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진나라에 잠시 초빙되어 상앙의 법치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체제의 혁신을 통한 통일의 기틀이 마련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성문법에 바탕을 둔 통치와 행정의 능률화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후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저작에만 힘썼다.

 순자는 자기가 공자를 계승했다고 자부했으나, 그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충돌하여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중국 고대사상을 최후로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b.순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 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순자는 여러 면에서 맹자에 비판을 가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갈구하고 이로 인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며, 이러한 욕구제한의 가장 좋은 방법은 <예>라 했다. 특히 공자나 맹자의 효제 제일주의에 비판을 가해, 효제는 소행이고 이보다 의를 좇아서 군주를 섬기는 <충의>가 더 큰 행동이라고 했다. 이는 공자 이래 효제일주의에서 탈피하여 충의를 보다 중요한 도덕적 순자의 <성악설>과 <충의론>은 다음에 오는 법가사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 천론

 맹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순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초인적인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다. 고대중국 전통사회는 경천사상에 바탕을 두고 천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인격신으로 생각했다. 공자.맹자.자사에 이르러 천의 인격적 이미지는 벗겨졌지만 천은 대덕의 근거로서 본체론적 의미를 지닌다.

 천은 인간에 앞서 있으면서 인간에 내재한다. 인간의 최고경지인 성인은 내재하는 천을 발견,발현시킴으로써 천일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순자는 <천론>편에서 전통적인 천관을 자연물이고 인간은 생물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천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인은 천을 알기를 구하지 않는다. 군자는 나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신중히 하고 하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군자는 이것을 이용한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거나 일식.월식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것 없다. 두려운 것은 인요다. 즉,정령을 제때 발하지 못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어지러운 것을 말한다. <천론>편은 <비상>편과 아울러 순자의 과학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2. 성론

 대부분의 사회이론이 그 사람의 인성론과 깊은 관계가 있듯이 순자의 성론은 그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순자는 <성악>편에서 인성이 악함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람의 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 이것을 따르므로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함이 없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함이 있다. 이에 따르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 생기고 충신이 없게 된다.>> 인간이 성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 악하게 된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본성은 마찬가지다. 성인은 악한 본성을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변화시켰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맹자가 인성이 선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과 위(인위: 인간이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놓은 것)를 구별하지 못한 말이라고 비판한다. 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인간에는 <교육>과 <예>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3. 사회사상

 순자는 <왕제>편에서 <<힘이 소만 못하고 달리는 것이 말만 못한데 소나 말이 인간의 부림을 당하는 것은 왜 그런가?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밝힌다. 그리고 <비상>편에서는 <<사람이 사람된 까닭은 두발에 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 자신의 욕망만족을 먼저 추구하지만 인간에게는 판단력이 있다. 인간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협력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것이 라고 한다. 일종의 사회계약론이라 하겠다. 일단 사회가 구성되고 나면 질서유지가 필요하다. 질서유지는 분, 즉 신분질서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순자는 세습제나 종족적 특권은 부정하지만 능력에 따른 계급의 발생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계급의 최정상에 인군이 있고, 인군은 절대권력으로서 분을 관장해야 한다>>고 한다.


   4. 정치사상

 순자는 무엇보다도 경험을 중시한다. 그래서 과거의 축적으로서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정치사상은 과거를 향한 복고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현실주의다. 정통유가들은 선왕들을 높이고 왕도와 패도를 대립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순자는 후왕을 더 높인다. <비상>편에서 <<후왕을 버리고 상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순자에 있어 후왕의 법은 곧 선왕의 법의 구체화인 것이다. <왕제>편이나 <왕패>편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이상정치는 왕도보다도 패도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군과 민을 연결시키는 것은 <인의도덕>이 아니라 <이익>이다. 군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상필벌에 의한 실력정치.능력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은 법을 중시하게 되고, 한편 인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능력있는 사람의 배출을 돕게 된다고 한다.


   5. 정명론

 <천론>편이 순자의 자연관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면 <정명>은 그의 인식이론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 정명은 공자에게서 시작된다. 정명에는 윤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와 논리적 인식적 측면에서 개념을 바로잡는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실지향을 버리지 못하는 중국사상가에 있어 후자의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전자에 귀일된다. 공자의 정명이 주로 전자에 속한다면 명가는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명가는 개념을 실과 독립적으로 논하여 궤변에 빠지고 말았다. 순자는 두 측면을 다 지니면서 궤변에 빠지지 않고 명(개념).사 (판단).변설(추론)을 실과의 관계 하에서 분류하여 설명한다. 명에는 단명.겸명.별명.공명이 있는데, 명에 차이가 있는 것은 천관,즉 감각기관이 있고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대상을 마음의 미지가 종합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순자는 개념을 분석함과 동시에 인식작용에 대해서도 해명코자 노력했다. 이상 천론.성론.사회사상.정치사상.정명론을 통해 볼 수 있었듯이 순자의 사상은 과학적이요 현실적이며 실제적이다.


c.<순자>의 내용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순자>는 20권 32편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순자 자신이 저술하고 일부는 제자들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근학>편에서 인간의 본성은 학문을 한 후에야 선해진다는 것으로 교육의 효과를 명시하고,<수신>편에서는 본성을 교정하는 방법으로 예와 사법을 중시할 것을 논했다. <불구>편은 사리의 근본을 깊이 고찰하여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영욕>편에서는 영광과 치욕은 사람이 스스로 취함에 기인함을 논했다. <비상>편에서는 미신을 배척하고 선왕의 제도와 문물은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는 후왕의 것을 본받아야 함을 논하고,<비12자>편에서는 맹자.자사 등 12자를 논하고 있어 그의 박식함을 알 수 있고 사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효>편에서는 주공.공자의 도를 찬양하여 유가학설을 옹호하고 있고, <왕제>편은 인간사회의 원리를 예의로 삼았으며, <부국>편은 사람의 물욕을 배척하지 않고 예의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공리를 경시하지 않는 생계의 원리를, <왕패론>은 정치기술을, <군도>편에서는 정치의 근본을 위정자의 인격에 두는 인격본위의 정치를 강조하여 인치와 법치의 득실을,<천론>편은 천도와 인도를 구분하여 인간이 하늘에 가리어 사람을 모르는 장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는 정신을 논한 것으로 그의 철학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정론> 편은 묵자의 공리주의를 배격했고, <예론>편에서는 예의 기원과 예의 세 가지 근본, 즉 정치적 법제와 사회적 전례, 그리고 윤리적 예의를 논했다. <악론>편에서는 음악은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음악의 원리,음악과 인생과의 관계를 논했다. <해펴>편은 사람들이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은 마음 한구석이 욕망이나 이익에 가리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성이 가려지고

막힌 것을 벗겨줌으로써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학 이론이며, <정명>편은 바른 논리는 바른 인식에서 나온다는 논리학 이론이다.


d.순자사상의 평가


   1. 순자의 논리는 전편에 걸쳐서 인간의 성악의 관념이 일관되고 있다. 즉, 인간이 선천적인 본성에 지배되지 않고 후천적인 <인위>를 존중했다. 여기에서 맹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맹자는 <예>를 <인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으나, 순자는 <예>를 인성의 타고난 악한을 없애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도덕에 있어서 <예>를 가장 중요시했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이고 맹자는 인을 더욱 확대시켜 <인의>를 강조했으며, 순자는 <인>을 들고 <의>를 실천하는 덕으로서 <예>를 강조했다. 이리하여 <인.의.예>는 유교의 기초가 되는 3덕이 된다. 이 3덕은 중국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행동 규범이기도 하다.

   2. 순자만큼 후천적인 학문을 중시한 사람도 없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을 중시하여 그의 중심사상을 <노력주의>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에서 유래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대중국에서는 재해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는데,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이를 부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대의 선왕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한 것도 그의 이러한 후천적인 노력주의 사상에 근거한다고 보여진다.

   3. 순자의 뛰어난 점 중의 하나는 그가 공자의 사상을 잘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도가.법가.묵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공박하지만 않고 훌륭한 사상은 받아들여 그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넓혔다는 사실이다. <순자>에서 보이는 인식론과 논리학 이론이 보이는 것도 그의 폭넓은 학문연구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미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비자.이사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와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법가와 순자의 사상이 근본취지는 다르지만 순자의 예(인간 욕구제한을 위한 중용적 기준)가 법에 근사한 것임을 생각하면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한무제 때의 동중서가 순자를 칭찬한 사실은 한대의 정치와 결합한 유가사상이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그의 성악설은 한의 양웅.왕충 이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성론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당 이후 유가들이 그들의 도통을 찾기 시작하면서 순자는 차츰 유학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당나라의 한유만 하여도 순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송 이후에는 성악설, 또 한 현실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 이단시되어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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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荀子 ]

저자

순황(荀況)

해설자

장현근(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목차

『순자』와 실천 유학

『순자』와 그 시대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와 실천 유학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와 그 시대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B016 – 장자(莊子) / 장자(莊子) (BC 365?--29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모든 관념과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절대자유의 경지>를 탐색한 장자,당시의 시대적 혼미를 깨우기 위해 제창된 그의 개방주의는 각파 간의 이론적 대립을 해소시키고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숨막히고 답답한 속박에서 벗어나 넓고 시원한 세계를 호홉하며 삶을 향유하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우리는 <장자>속에서 일체의 전체주의적 권위와 이념적 독단론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인륜도덕이나 문명의 발전보다는 무한한 우주의 변화 속에서 개성의 해방과 자유추구의 예술적 경지를 맛볼 수 있다.


a.생애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제자백가 가운데서도 노자의 철학을 발전시킨 도가의 대표자다. 우리는 흔히 유교에서의 공자와 맹자를 도교에서의 노자와 장자와의 관계로 비유하곤 한다.

 성은 장,이름은 주,전국시대에 송나라의 몽 출신으로 잠시 말단관리를 지낸 것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중국남방의 학풍과 특히 달인 정신을 이어받아 환상이 풍부했고 모든 일에 초월,달관했던 개방주의 철학가다.

 일설에 의하면 하루는 장자가 푸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주나라 이를 다음과 같이 사양했다고 한다. <<왕의 구중궁궐 속의 존경 받는 거북이보다는 진흙탕 속에서 꼬리치는 거북이로 살고 싶다.>>

 문장을 교묘하게 잘 지어 세상일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인정을 밝힘으로써 유가나 묵가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시의 석학들도 그의 예봉을 꺾지 못했다 한다. 그의 말은 광대무변하면서 자유분방했기 때문에 당시 제후들은 그를 기이한 사람으로 여겨 등용하지 않았다. 논리학파의 혜시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노자의 사적과 연대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 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b.시대적 배경과 장자의 사상


   1. 시대적 배경

 당시의 중국 철학계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집착, 극히 협소한 가치체계 속에 말려들어 자기 학설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학파간의 논쟁이 치열했다. 순수경험에 바탕을 두고 출발했던 중국철학은 이 시기에 오면서 개인적인 주관주의로 전락,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서 보고 해석하는 이른바 백가쟁명의 상황이 벌어졌다. 제가들은 각기의 문호를 폐쇄하고 남의 주장을 거부하여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범한 당시의 철학적 과오는 부분적인 것에 치우쳐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집과, 세상사를 인간중심.자기 위주로 하려는 망념,권위의식에 빠져들어 자연의 진면목은 여러가지 가상에가려졌으며, 여러 가상을 더듬어 생긴 단견은 다시 인간본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장자철학은 이 같은 가상과 가식.편집을 철저히 타파하고 본래의 자연과 적나라한 인간으로 직접 빈틈없이 만나도록 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문제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인생의 가장 순탄하고 자유로운 삶을 되찾도록 하는 데 그 취지를 두었다.

 이러한 시대적 혼미를 깨우기 위해 제창된 그의 개방주의는 각파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시키고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숨막히고 답답한 속박에서 벗어나 넓고 시원한 세계를 호홉하며 삶을 향유하는 슬기를 갖게 했다. 나아가 장자사상, 특히 달관적 인생관은 때로 불우에 처한 이들의 고뇌를 씻고 안위를 주는 종교적 기능도 했고, 그의 심미적 자연관은 각박하고 단조로운 인간세상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 생활의 담박과 정신적 소요를 가져다 주는 청량제 구실을 하기도 했다.

   2. 장자의 사상

 장자의 사상은 <제물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제물론이란 현실의 모든 차별상을 평등시하는 일종의 관념철학으로서, 생사.귀천.대소.시비.선악 등 모든 문제의 대립상을 제일시 하는 초월적 입장을 강조하고, 그 대립상에 의해 발생하는 현실적 고뇌를 초탈하려는 것이다. 이런 높은 경지를 <도추(도의 중심)> 또는 <천균(천의 중심)>이라 했다.  그리고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절대자유의 경지를 <소요유>(구애받는 것이 없는 느긋한 놀이)라 이름지었고 이 경지에 도달하려는 방법을 <인순>이라 했다. 다시 표현하면, 이 세상의 모든 구별과 차별.대립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무의미하며, 선도 약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나도 타인도,자연과 인간도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주만물의 전체성을 토대로 모든 사물을 판단할 때 너와 나의 구별은 사라지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있을 때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즉, 천균을 따르는 경지야말로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느긋한 정신의 자유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초월적인 종교성이 있다. 만물제동.만물제일.물이일체의 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두는 인순주의(因循主義)에 의해서 정신의 자유와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c.<장자>의 내용


   1. <장자>의 내용

 <장자>는 총 33편으로 내편 7,외편15, 잡편11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장자가 직접지었다는 내편(??  ?? ??)이 그의 사상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고,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이 내편의 뜻을 연구.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등을 엿볼 수 있다. 내편 중에서도 처음의 <소요유>와 <제물론>의 2편이 장자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소요유>는 장자의 이른바 <유>즉 도를 터득한 초월자의 생활을 말한 것이고, <제물론>은 <유>의 성립근거로서의 <도>를 뚜렷이 한 것으로서, 이 <도>와 <유>가 장자사상의 기본개념이자 <장자> 내용의 중핵이다.

 장자에 의하면 <도> 란 일체의 존재를 생멸변화시키면서 그 자신의 생멸변화하는 것이 없는 것,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편재하는 것, 현상체계의 일체의 차별과 대립상들을 하나로 싸서 인간의 분별지와 언어로써는 아무도 규정할 수 없는 큰 카오스, 즉 <혼돈>이다. 이것은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편재하고 있으므로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포용하여 거기서는 <<서시의 미도 문둥병의 추와 같고 태산의 크기도 추모(매우 잔털)의 작음과 같다>>고 한다. 인간의 분별지에 성립되는 가치적 차별, 즉 현우미추.선악시비.성패영욕도 여기서는 상대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고, 이 대립을 하나로 포용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계속 생멸변화하는 크나 큰 변화의 흐름 자체, 이것이 장자의 <도>다.

 따라서 <장자>에 있어서 도는 일단 일체의 존재를 생멸변화시키면서 그 자신의 생멸변화하는 일이 없는 불변자로서 설명되고는 있으나, 그 불변자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변한 변화, 즉 생멸변화하여 다하는 일이 없는 유전의 흐름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자>가 말하는 이와 같은 <도>는 인간이 좌상을 버리고 이 천지자연의 이법인 <도>에 허심하게 매달려서 거기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이른바 <유>다.

 <장자>의 <유>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를 자기의 현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그 적극적인 긍정 속에서 자기의 삶을 가장 깊고 가장 풍부하게 영위해나가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속박하는 분별욕이나 가치적 편견을 버리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이 본래 하나인 <도>의 입장에 몸을 두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눈으로 자기와 세계를 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를 자기의 현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해나가는 데에서 추도 또한 나의 추로서 사랑하고 죽음도 또한 나의 죽음으로서 긍정하는 경지가 성립되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눈으로 일체를 보아가는 데서 모든 개인을 존중하고, 새로운 미와 가치를 창조해가는 풍부한 입장이 실현된다. 이른바 <<생을 선으로 하고, 사를 선으로 하고>> <무용의 용>을 발견하고, <<받아서 기뻐하고 잊어서 되돌리는>> 자유인의 생활이 <장자>의 <유>다. <장자>는 이와 같은 자유인을 <지인>이라 부르고 <신인>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이것을 9만리 상공을 나는 <대봉>에 비유하고 있다.

 장자는 이러한 <유>를 바탕으로 달관된 인생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인생관의 요지는 자연에 순응하라, 항상 자기를 겸허하게 하라, 피차의 입장을 바꾸어서 시비를 보라, 유용과 무용 사이에서 처신하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하려면 타고난 그대로 살아라, 오리발이 짧다고 잡아 늘리고 학의 목이 길다고 짧게 줄이면 오히려 제구실을 못한다. <<감관이 없는 <혼돈>에 일곱 구멍(감관기능)을 파놓고 보니 혼돈는 죽었더라>> 고 한 장자의 비유처럼 있는 것을 다르게 개조하거나 없는 것을 인위로 만들어내면 자연의 생태가 파괴되고 형평이 깨져서 자연과 만유는 다 같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인위를 가지고 자연을 파괴하지 마라>>고 외쳤다.

 항상 자기를 겸허하게 하려면 욕심을 버려라. 자아를 텅 비게 개방하라. <<배를 산속에 감추고 산을 또 못 속에 감추었는데 한 밤중에 도적이 와서 이를 훔쳐갔다. 그러니 천하에 천하를 감추지 (결국 내놓은 것이 된다) 않으면 지켜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는 마음, 있는 것을 언제나 지키려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속박에서 풀린다.

 세상의 혼란은 피차의 시비에서 비롯된다. 너와 나는 구별이 없고 평등하다. 본래 잘나고 못난 것이 없다. 그런데 자기만 옳은 양 남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기 한계를 알아라. <<하루살이가 밤낮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가 겨울을 경험했을리 없다.>> 즉, 편지는 전체를 알 수 없는데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니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시비는 피차의 입장을 고집하는 데서 생기므로 그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니 피차 자기를 초월해서 전면을 보고 두 면을 합해서 판단하라.

 끝으로 장자철학의 실용성은 <양생>과 <처세>에 있다. 자연과 마찰 없이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이 최대의 양생법이다. 즉, 자기의 자유를 잃지 않고 모든 주위와 융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허해야 바람을 맞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쓸모 없어서 꺾이는 것도 있고 쓸모가 있어서 꺾이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장자는 <<유용과 무용 사이에 처신하라>>고 했다.


   2. 읽는 법

 <장자>는 우언. 중언. 치언의 세가지 화술로 씌어졌다. 우언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법이나 상징법으로 언어를 넘어서서 있는 진의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요, 중언은 자기의 말을 성인의 말처럼 가장해서 사람들을 권위적으로 심복시키는 화법이며, 치언은 어리석은 말로 자연을 대변하는 소리다. 장자는 언어의 약점과 또 그 횡포를 누구보다도 일찍 간파한 철학자다. 

 <장자>는 무엇보다도 그 문장의 특징을 이해하고 다음 순서에 따라 읽으면서 철학체계를 세워가야 한다. 즉, 잡편의 <우언>은 <장자>의 범례요, <천하>는 서론격이다. 이 2편은 <장자>의 안내와도 같은데, <천하>편은 중국철학사상 최초의 비평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제물론>을 읽으며 전체구조 속에서 환위법에 의해 모든 대립과 갈등에서 해방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소요유>에 들어가 <대붕>이 되어 우주를 향해 비상하는 장지정신의 극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철학의 체계는 현세간을 버리고 초월만을 일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덕충부> <응제왕> <전자방> 등을 읽어 인생과 자연을 개관하고 자연에 임하는 슬개를 터득한 다음, <대종사> <지북유>편에서 성숙된 인격으로 화하여 다시 <인간세> <산목> 편을 읽으면 초월해서 보았던 소요의 경지가 바로 현세간이었음을 깨닫고 본래의 자리로 환원하게 된다.


d.장자사상의 평가


 동양문화의 전통은 인간윤리의 존중과 자연과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내세운 <인>이나 <수기치인>은 바로 인간윤리의 전형이며, 도가에서 내세우는 <무위자연>사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가가 지배층의 철학이라 한다면, 도가는 피지배층의 철학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크게 나눈다면 <유가형>과 <도가형>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유가형의 사고는 엄숙하여 윤리.교육.정치 등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지배했으며, 도가형의 사고는 자유분방하여 문학.예술 등 인간의 내면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두 사상이 반드시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물러나 숨는다는 유가의 군자로서의 몸가짐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멀리하고 홀로 자연속에 은거하는 도가의 가르침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흔히 중국인들은 <공인으로서의 유가, 개인으로서의 도가> 라고 하듯이,고도의 긴장생활을 요구하는 유가와 이를 풀어주는 도가는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동양문화의 정신은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양면같이 보일 수도 있으나 <유가적 참여사상>과 <도가적 은퇴사상>은 동양사상을 깊이 이해하면 이들이 항상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동양의 지식인들은 <<써 주면 나가서 정성을 다해서 일하고, 물러날 경우에는 미련없이 물러나 자기의 지킬 도리를 다한다>>는 <행사장>의 정신에 투철했다. 즉, <달즉겸제천하>하고 <궁즉독선기신>했다.

 위에서 살편본 것처럼 장자의 사상은 1. 인간의 무력과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 2. 피동의 적극성 (필연으로서의 자유) 강조,즉 소극적 염세주의, 숙명론적 사고 3. 낙천주의 (인간성의 본래적 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 4. 범신론적 다원적 사고(유일신의 부정) 5.개성과 개물의 존중 6. 보편화(무한대화) 사고 7.절대적 진리의 부정과 상대성 주장 등이 있다.

 맹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굳은 신뢰로 무장하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은 데 비해, 장자는 통일전쟁으로 치닫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당시의 여러 사상도 혼란만 부채질할 뿐 이라는 것을 깨닫고 궁극적인 자유의 경지를 홀로 찾아나선다.

 장자는 모든 현실적 제약, 모든 상식적 통념,기존의 모든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에서 자신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화해 버린다. 상대화를 통한 자유와 추구는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가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 (<장자> 외편 <지락>에서 극에 달한다. 여기서 장자는 삶과 죽음을 상대화하고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까지도 상대화하는 냉정함을 보인다.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추구했지만 절대를 규정하지도, 절대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제약하지도 않았다. 장자는 모든 관념을 상대화시키면서 자신의 말까지도 상대화 시켜 버린다. 그리고 절대의 세계는 미지수의 상상력에 맡겨놓는다.



B015 – 도덕경(道德經) / 노자(老子) (기원전 6또는 4세기)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이책의 저자는 노자이므로 <도덕경>은 <노자>로도 불린다. 유가 및 제자백가를 비판하고 있는 도가사상의 원전인 <도덕경>에는 우주만상의 변화발전의 총원리로서 <도>의 개념과 개체의 원리인 <덕>의 개념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서술방식이 대화체나 서술체인 일반적인 중국고전과는 달리 이 <도덕경>은 5천여 자로 된 짧은 철학시집으로 <도>편과 <덕>편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a.생애


 도가사상의 시조, 중국사상사에서 나타난 인물 중 가장 신비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 노자다. 그의 생존연대, 출생,그리고 성명,그의 사상을 담은 <도덕경>에 관한 문제들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학자들에 의해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그의 생존연대와 <도덕경>의 저술연대 및 그 내용에 관한 사실여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문제삼은 학자들을 살펴본다면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하나는 노자라는 인물이 전혀 가공인물이라는 것이고,한편은 노자가 역사적 실존인물임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어 어느 한쪽으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도덕경>의 성립연대가 오르내리고 노자 한 사람의 유작이냐 아니냐 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도덕경>에 담긴 사상적 성격 내지 그 철학적 근간에 있어서는 변함없이 그 특성을 보유하면서 일관되게 읽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자의 인물 내지 <도덕경>에 관한 이러한 많은 문제점들은 노자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사기>의 <노자열전>에 나우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노자의 성은 이, 이름은 이,자는 담,춘추시대에 초나라 왕실의 도서관리인을 지냈다고 한다. 

 공자가 방문하여 그를 찾아가 <예>에 관해 물으니,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숭배하는 이들은 그 육체와 뼈가 썩어버리고 남은 것은 공허한 말뿐이다. 또한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때를 만나면 영화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이다. 참된 군자는 덕이 있으나 외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 그대는 교만과 욕심,그리고 꾸미는 빛과 잡념을 버려라. 이런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처소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달리는 놈은 덫을 놓아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새는 활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며 변화가 심하여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용과 같은 사람이더라>>라고 말했다 한다. 여러 나라를 노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무위의 도>에 힘쓰며 지내다가, 얼마 후에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은거를 위해 서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주나라를 떠나 관문에 이르렀을 때 노자의 명망을 알고 있던 관문지기 윤희가 노자를 알아보고 <<선생께서 세상을 은둔하려 하시니 몇 글자를 남겨주십시오>>하고 강권하니, 이에 노자가 도와 덕의 뜻이 담긴 <도덕>에 관한 글, 상.하 2편으로 된 5천여 자의 문장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는데, 그후로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도덕경>이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고, 그것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료 <사기>의 <노자전>에서도 의문을 표명하고 있어, 공자의 선배로서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실재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의 학설로서는 BC  479년에 죽은 공자보다 100년 정도 후배라는 설과, 가공의 인물로서 실재를 부정하는 설이 있다. 그의 무위자연 사상은 열자와 장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b.노자의 사상과 그 성격


   1. 사상적 성격

 중국사상사에서 오늘날까지 도도히 흘러 내려오는 세 가지 사상의 물결은 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가사상이다. 불가사상은 한대에 멀리 인도에서 들어와 뒤늦게 중국사상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유가와 도가사상은 중국 자체 내에서 발생하여 고대로부터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어온 사상이다. 이 두 사상은 끝까지 서로를 용납하지 아니한 채 나름대로의 특질을 더욱 뚜렷이 하면서 발전해왔다. 하나는 <인성론>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자연론>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 사상적 전개의 과정은 서로 대조적인, 때로는 전연 반대의 평행선적인 사유과정을 밟으면서 내려왔다. 물론 이러한 두 사상의 입장이 지양, 극복되는 속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교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후대 송학에 와서 그렇게 된 것이요, 그러는 속에서도 두 사상은 자기상실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확보의 길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입장을 동시에 마련하면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노자가 주창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도가사상은 공자의 유가사상과는 달리 당시의 혼란된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노자는 춘추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위자연 사상을 내걸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윤리를 비판하며, 전제군주의 절대권에 대한 일반백성의 저항권을 포함시키고 개인의 독립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사상 가운데서도 도가만은 현실성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상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때문에 도가사상은 본래 중국사상이 아니라 인도의 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남방의 양자강 유역에서 발견한 초나라의 이질적 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현실주의 사상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도가의 주장은 인간의 생활을 자연에 순응시키려는 자연관과 만물의 생성에 대한 숭배.자연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군주의 역할 등에 관하여 초기 중국인의 관심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사상 내용

 (1) <도>: 노자가 말하는 도란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이요, 우주를 우주일 수 있도록 하는 궁극적인 원리이자 본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모든 사물과 모든 가치의 배후에 있는 참된 자연의 원리를 <도>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으로 하여금 그것일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의 근원을 도라고 본 것이다.

 도는 형이상학의 원리이기 때문에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고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없으며 잡고자 해도 잡히지 않는다. 인간의 5관으로서는 지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명명할 수 없는 무명의 것이지만, 설명을 위해 편의상 붙인 이름이 <도>라는 것이다.


 (2) <덕>: 노자에 의하면 도는 만물의 생성의 근원으로서 만물의 생성과 과정에서 사람이나 사물은 근원적인 도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덕>이라고 했다. 도가 만물생성의 본원이라면 그 도에 따라 자라고 성숙하고 변화하는 성능, 즉 도에서 부여받은 어떤 자연스런 능력과 힘을 뜻한다. 즉, 덕이란 보편적인 도가 개별적인 사람이나 사물에게 깃들인 각 개체의 원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도를 따르고 도를 지키는 것이 덕이다. 따라서 덕은 도처럼 <무위>여야만 한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도 일단 <유위>하기만 하면 그것은 이미 덕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무위자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중심적인 논리가 아니라 우주 대자연의 실상과 도리다. 그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자유스럽게 지낼 때 (덕을 지닐 때) 가장 행복하며 그때 비로소 참된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노자는 무위자연이라 불렀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자) 그러한 대로(연) 사는 삶으로 보았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다름아닌 무위자연이다. 무위자연은 자기 멋대로 하는 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서로의 생명과 자유를 존중해주고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소박한 공동체의 삶을 뜻한다. 노자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물과 모든 가치의 배후에 있는 참된 자연의 원리인 도에 따른 삶으로 보았다.


 (4) <윤리사상>: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나 규범, 그리고 그 규범을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국가권력 자체에 혼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즉, 인위적인 윤리규범의 체계를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선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내리고 또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 것은 <도덕경> 총 81장 중 1장인 <체도>장으로,<도덕경> 전체의 총론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어, 제1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도덕경>의 전체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c.<도덕경>의 형성과 내용


 <도덕경> (또는 <노자>)은 전체가 81장으로 되어 있는데, 상편(1--37장)에서는 <도>에 관한 내용이고 (도경), 하편(38--81장)에는 <덕>에 관한 내용(덕경)이다. 그러나 이는 후세의 사람이 편집할 때 그렇게 나눈 것이지, 본래는 도와 덕을 나누어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도덕경>의 내용을 그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도와 덕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도덕경>의 구성체제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했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며 설사 실존인물이라 해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내용을 이루는 기본사상은 변함없이 <무위자연>의 사상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내용은 약 5천여 자로 문장 서술방식은 대화체나 서술체인 일반적인 중국고전과는 달리 간결하고 격언적 표현이 많고, 대구와 각운을 많이 썼으며, 의표를 찌르는 역설적인 말이 특색이다. 민간에 널리 구전되어온 속담과 격언을 모은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비유적인 난해한 어구도 많고 고대의 해석에도 이설이 많다. 노자의 사상에서 특이한 것은 <무위>와 <자연>이다. 노자가 산 춘추시대 말기에는 중국의 봉건질서의 중심인 주나라가 쇠하고 지방에 할거한 제후들이 각기 패권을 다투며 침략과 전쟁을 일삼던 때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쟁과 가렴주구,부역,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굶주리는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격한 노자는 <<백성들을 제발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며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바로 그의 무위자연의 정치사상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농부가 밭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면 그 나라의 명운이 무궁할 것(59장)>> 이라 하고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작은 물고기를 삶는 일에 비유했다. 즉, <<뒤집지도,조급히 서둘지도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한다(60장)>>는 것. 또 노자는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그리되 <<가장 훌륭한 군주는 백성들이 오직 임금이 있다는 것만을 알 뿐(17장)>> 이라고 했다. 즉, 최상의 군주는 무위로써 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공을 이루고 일을 성취해도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저절로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옛날 요순시대의 농부들이 배불리 먹고 막대치기 놀이를 하며 부른 노래(밭을 갈아 밥을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며, 날이 새면 들일 가고 밤이 되면 잠을 자니 임금의 공이 무엇이냐)는 무위자연의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주장하는 인이나 의하는 것도 모두 천하에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며, 충신이란 것도 국가가

혼란해져서 생기는 것이요, 자애도 육친(부자.형제.부부)이 화목하지 못한 데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18장). 그러므로 사람이 지나친 재주와 지혜,인과 의,기교와 이익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로 늘어나고 백성들이 효도하고 자애로운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요, 도적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 했다(19장).

 그러나 이 세 가지(성지.인의.교이)를 아주 끊어버리면 생활이 너무 재미없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귀속할 데가 없으므로,그들의 돌아갈 수 있는 소박함을 보여주어 거기에 따르게 하면 사심과 욕망이 작아질 것이라고 했다.

 대개 노자는 무.허.정.유약.박을 높이 평가하는데, <무>는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유도 무에서 나온다고 했다(1장). 허는 빈 것을 말하는데, 도는 항상 비어 있어 차는 일이 없지만 속이 깊어 거기에서 얼마든지 퍼내어 쓸 수 있다고 했다(4장). 그는 이것을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6장)>>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골짜기는 항상 비어 있어 차는 일이 없고 바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냇물이 모여드는데, 이 골짜기의 모습이야말로 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빈이라고도 하는데, 현은 신비하고 오묘한 것을 뜻하고 빈은 암컷을 가리키니, 만물을 생성케 하는 도는 곧 신비하고 오묘한 암컷이란 뜻이다.

 <정>은 만물이 왕성하게 낳고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상태라고 했다. 소란스럽거나 야단스러운 것은 천지를 운영하고 만물을 생성화육하는데 해가 되지만, 도는 언제나 고요하고 안정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만물은 그 속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길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항상 유약한 것을 찬양했다.

 그러기에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며 서로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물은 거의 도에 가깝다>>(8장)라고 물을 찬양하고 암컷을 찬양했다. 물은 부드럽고 약하나 이 세상에 물보다 강한 것이 없으며, 암컷은 유약하고 조용하지만 수컷의 강함을 이긴다>> 고 했다. 그는 유약의 본을 바람에 휘어지는 나무와 어린아이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22장의 <<휘어지는 나무는 꺾어지지 않으므로 안전하다>>와 <<어린이의 뼈는 약하고 살은 부드러우나 잡는 힘은 세다>>(55장)라고 한 말은 다 거기서 나온 말이다. 바꿔 말하면 생명이 있는 것만 이 유약하며, 생명을 잃으면 경직되므로 유약은 곧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끝으로 노자는 소박함(박)을 도의 순수한 원형으로 보았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도는 박과 같다>>(32장).박이란 아무런 가공도 안한 순수한 원목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시원인 도를 상징한다. 사람이 소박한 마음을 지키다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천하의 그 누구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이 소박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천하의 만물은 저절로 그를 찾아 모여들 것이며, 하늘과 땅은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고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균제될 것이다.


d.사상적 평가 및 그 영향


 이상으로 <도덕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말은 간략하나 뜻은 깊고 크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고 각자의 해석이 상반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단정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커서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1.사상적 평가

 아마도 노자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교와 유교를 구분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체계는 도의 역할에 반대되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1) 노자에 의하면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 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함으로써 하여지는 모든 관습과 제도를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문화와 미신을 비난하고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높였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설정하여 인위적인 예교를 강조하며 자연에 따를 것을 가르치면서도 인간이 만든 문화의 가치를 중시했다.

 (2) 이 두 체계는 사물과 인간의 구별을 시인하고 현실적인 상쟁의 대립을 전제하여 사색한 것은 자연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인생의 수수께끼였다. 반면에 노자는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 불상쟁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이상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3) 이 두 체계는 하늘의 개념에서도 대조적이다. 노자에 의하면 도는 우주를 위한 포괄적 원리이기 때문에 도가 하늘에 앞선다. 그러나 공자는 하늘의 개념을 최고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늘의명령을 인간사에 섭리하는 살아 있는 힘이라고 주장하고 항상 외경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한 가지 공통점은 <중용>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 중용에 주요한 논거로서 어떠한 움직임이 극단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자연의 불변의 법칙을 들고 있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말라>>는 것이 두 사람의 금언이었다.


   2. 영향

 노자와 그의 사상을 담은 <도덕경>의 사상적 영향은 매우 크다.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는 그 무위청정의 술이 실제 정치에 이용되어 한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한무제 이후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노자의 가르침은 정치보다 수신과 처세 면에서 존중받게 된다. 북위의 구겸지는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에 신선사상,음양오행설,참위설,그리고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을 섞어 <도교>를 민간종교로 완성하고, 북위의 태무제는 유교가 이단시하는 유목민족의 중국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444년 도교를 국교로 삼기도 했다. 도가사상이 도교로 종교화함에 따라 노자는 도교의 최고의 신이 되고 도교에서 <도덕경>은 최고의 경전이 되었다.

 노자의 사상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역경> <장자>와 함께 3현으로 존중되고 인간의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하면서 피지배 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국에서도 <도덕경>에 나오는 내용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조선시대에는 도교의 주무관청인 소격서 폐지문제로 조광조와 중종의 독대가 새벽까지 계속된 사실만 보아도 민중의식 속에 뿌리내린 도교사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노자의 사상은 유학자들 특히 송.명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이들이 주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도덕경>의 사상으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주역>에서 말하는 음양의 도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정이천 같은 사람은 노자를 비판하면서도 노자의 도체에 대한 통찰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주관의 기본 개념인 <이>와 <기>도 <도덕경>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비교,고찰하기 위해서도 <도덕경>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데, 그 속에 함축된 풍부한 사상들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비교해볼 수 있고, 현대 과학철학에도 시사해주는 점이 적지 않다.

 노자는 정치적인 문제,윤리적인 문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생활문제에 있어서 한발 물러나는 여유 속에서 인간 본연의 질서를 찾으려 했다. 이것은 오늘날 경쟁위주의 산업사회에 있어서 문제해결의 어떤 실마리를 찾게 해줄 수도 있으나, 우리에게 주는 보다 더 큰 고전적 가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가 철학적 문제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계상황에 도달한 서양문명이 그 돌파구를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도가사상에서 찾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B014 – 중용(中庸) / 자사(子思) (BC 492--43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천인합일의 도>를 제시한 유교의 <철학개론서> 윤리와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생사의 문제를 밝히는 불교사상이나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철학적 기반이 약하다는 자기반성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당시 지식인의 취향에 부응하여 주자는 당시 13경이나 되던 유가경전을 4서로 압축했다. 4서 중에서도 <중용>은 유교의 사상에 심원한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고 흔히 소우주로 불린다. 즉, 우주와 인간의 근본원리를 <성>으로 설명하여 송과 명 이래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부여한 저서다.


a.자사와 중용의 유래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공자세기>에 <<공자가 이를 낳으니 자를 백어라 했다. 이는 나이 50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가 가를 낳았는데 그의 자가 자사다. 나이 불과 12살에 송에서 곤경을 당한 일이 있고 중용은 그의 저술이다>> 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체로 긍정하고 있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 중의 한 편(31편)이었으나,<대학>보다 앞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진작부터 단행본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중용>이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역시 송대에 와서다. 송대에 학문적 경향이 철학적으로 심화되고 유가경전 가운데서 그러한 철학적 원리를 간명하게 밝힌 서적이 요구됨에 따라 <중용>이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송대의 여러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중용>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정자(정호.정이 형제)가 <중용>에

주석을 붙여 <논어> <맹자> <대학> 과 함께 4서의 하나로 다루게 되었고, 주자가 이전의 모든 주석을 총정리하여 <중용장구>를 지음으로써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용의 체제는 <예기> 중의 고본에 의하면 33절인데, 정자는 이것을 37절로 고쳤고, 주자는 다시 33장으로 만들었다. 즉, <천명지위성>에서부터 <천지위언.만물육언> 까지를 1장으로 하여 자사의 입언으로 삼고, 이하 10장에서 공자의 말을 이끌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으로 <군자지도비이은>으로부터 <애공문정>까지의 20장에서 도가 천인에 일관하여 은현을 겸유하고 대소를 다 포용함을 논하고, 중용 즉, <성>된 것을 밝히고 있다. 최후로 <자성명위지성>에서 끝 장까지 <천인일관>의 의미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그 입문으로 <신독>의 필요성을 논했으며, 그 도덕의 극치에 이르러서는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고 무성무취의 경자에 도달케 됨을 논하여, 상장의 중화위육과 상호연관을 맺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중용>은 한마디로 <천인일관>의 이치를 설명했고 성의 도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성은 우주의 본체인 성의 표현이요, 이것은 바로 또 하나의 소우주라고 생각했다.


b.<중용>의 내용과 중심사상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널리 보급되면서 유가의 전통사상에 일대충격이 가해졌다. 그 이유는 1. 유가경전이 수기치인의 도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윤리와 정치를 중시하는 것임에 반해서 불교의 경전은 생사의 문제를 밝히는 철학적인 면을 가진 점이고, 2. 불교에 있어서도 중구에서는 특히 선종이 성립되여 복잡한 이론을 따질 것 없이 마음 하나를 밝히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고 하는 주장이 풍미함으로써 당시의 대중들이 모두 불교에 쏠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가는 자기반성이 불가피해졌다. 1. 간명 직절을 추구하는 당시 교양인들의 분위기에 부응하기 위해 모두 13경이나 되는 경전의 간소화가 요구되었고, 2. 유가사상이 경국제세의 현실문제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하여 4서가 출현하게 되었다. <대학>은 유학의 지향처와 차서를 밝히는 책으로서, <중용>은 유학의 철학적 배경을 밝히는 책으로서 채택되었다.

 <중용>은 그 첫머리에 <<하늘이 내려준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고 하여 유교철학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아니라 도에 바탕해 있고, 도는 우리의 본성에 바탕하고 우리의 본성은 다시 천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전후 두 부분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전반 부분은 <중용 (중화)>을 설하고 후반 부분은 <성>을 설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하기 이전의 순수한 심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심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중화>를 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이를 <중용> 이라 한다.

 제1장은 전편의 요체로서 천명.성. 도.교로써 중용의 철학적 근거를 밝힌 뒤, 사람이 중화를 이룩할 때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함을 보게 되고 만물을 자라게 할 수 있다는 중용 최고의 경지를 밝히고 있다.

 제2--11장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용의 도를 이루는 방법을 논함으로써 1장의 뜻을 완결시켰다.

 제12--20장은 먼저 <5도>(군신.부자.부부.형제.친구의 도)과 <3덕>(지.인.용),그리고 <9경>(수신: 임금 자신의 덕을 닦을 것, ?현: 현명한 인재를 존중할 것, 친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들 것, ?대신: 대신을 공경하는 것, ?군신: 여러 신하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 자?민: 백성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는 것, 래백공: 여러공인들을 모여들게 만드는 것, ?원인: 먼 곳의 사람들을 유화시키는 것, ???: 제후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을 설명하고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성>을 밝히고 있는데, <성>을 우주가 우주되는 원리라고 설한다.

 <<성은 하늘의 도요,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고 하여 수양을 통해 성을 이루면 타득하여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성은 속임이 없음이요, 그침이 없음이다. 진실,무망하고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우주의 원리가 될 수 있다. 성 없이는 만물이 존재할 수 없다.

 27--33장은 지성을 체득한 성인의 도덕교화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의 도는 이 성의 원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이 성을 철저히 체험한 사람이 곧 성인이다. 성을 체험한 사람만이 비로소 우주와 합일될 수 있다. 여기에 유가의 궁극적인 경지인 천인합일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밖에 <대학>에는 이용후생에 관한 사상이 경시된 인상이 있으나, <중용>에서는 <자서민> <내서민> <내백공> 등 상당한 주의가 경주되고

있다.


c.중용론 비교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


 인류역사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지적 능력이 기원전 6--2세기에 최고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사회에서 고대국가체제로 전환되면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산에서 자유로워진 전문적 지식인을 배출했고, 이들은 이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니, 이들이 서양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동양의 공자.맹자.순자.장자.석가 등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물질문명의 발전이 정신문화의 발전을 앞지르면서 양자간의 불균형발전이 심화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동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공자와 서양학문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서로 정신적인 교감이 오고간 듯 그들은 <중용>을 가지고 인류행위의 준칙으로 삼으려 했다.

 그들의 공통점을 들어보면 

1.그들은 다 같이 사람들에게 덕을 밝히고 선을 행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이 개인도덕과 정치도덕을 하나로 합쳐놓고서<지극한 선>이란 최후의 목표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 

2. 중용의 도가 바로 덕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즉 <과불급>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중용의 덕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둘 다 똑같이 느끼고 있다. 올바른 길은 하나지만 그릇된 길은 매우 많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잘못 빠지기는 쉽지만 선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3. 중용이란 곧 상대적인 양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며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지나치는 일도 없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다.그리고 그 행동은 언제나 그 경우에 합당하고 어떤 일에나 꼭 알맞게 된다. 

4.모든 행등은 중용이 준칙이 되며 그 행동에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 및 국가의 정치행위가 모두 포괄된다. 

5. 중용의 덕이란 마땅히 언제나 그것을 버리지 않고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굴곡을 이루는 것이므로, 중용은 그때 그때 알맞게 나아가야 하며, 그 경우와 일에 따라 계속하여 쉴새없이 언제나 꼭 알맞은 길을 추구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자의 출생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100여 년이 바르다. 이들 동양의 성인과 서양의 철인은 모두 어지러운 세상에 생존했기에 당시의 학술과 사상은 지극히 복잡했다. 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업적을 소술하고 문왕과 무왕의 다스림을 법도로서 밝혀 드러내었으며, <시경>을 편찬하고 <서경>을 정리하고 <춘추>(이설 있음)를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나라와 주나라 이래의 학술과 사상을 집대성한 분이 공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 깊고도 넓어서 그가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여서, 그리스 학술과 사상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집대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동양의 성인과 서양의 칠인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중용의 도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마음도 서로 같았고 이론도 같았던 것이다.

   

d.<중용> 비평


 주자는 4서에 대하여 <논어>는 유학자의 생활태도를 익히게 하고,<맹자>는 유학원리의 정치적 적용을 알게 하며,<대학>은 학문의 지향처를 알게 하고, <중용>은 학문의 궁극처를 알게 한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중용>은 4서 중에서도 초학자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대학> <논어> <맹자>에 이어 가장 나중에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 내용을 집약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인간은 본래 도를 알고 성을 행하는 <성>을 부여받고 태어나므로 필연적으로 도가 행해지며 <교>가 마련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주적으로 중용의 도를 걷고 그것을 배움으로써 <지.인.용>의 덕을 갖추는 동시에 그 근본에서 <성>을 뚜렷이 하고, 마침내 <성>이 <지성>이 되어 완성될 뿐만 아니라 우주정신과 일체가 되어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것을 완성한 것이 <성인>이고 성인 가운데는 예부터 성인의 도를 계승하여 뚜렷이 한 공자가 목표가 된다. 인간은 공자를 목표로 하여 먼저 자기를 닦는 일에서 도를 걷고 지성에 이르려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처럼 <중용>은 천도와 인도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이 너무도 형이상학인데 기울어 일상적 도덕을 너무 고원한 것으로 만든 느낌이 있고, 너무 개인적 방면의 고찰에 치우쳐서 사회의 일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성을 너무 이상의 것만으로 인정한 결과 후세 유학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는 점 등에 있어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중용>이 유가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실천성만을 내세우는 유교사상에 심원한 철학적 근거를 부여한 점을 들 수 있다. 원래 유교는 실천성을 요구하는 사상으로, 공자는 주로 형이하학적인 일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의 인륜의 교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상이 노장철학에 비해 어딘가 심원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이에 자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심원한 기초를 세우고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中庸思想 ]


정의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決定)에 있어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현명한 행동의 도.


내용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을 뜻한다. 이 사상은 중국 외에도 인도와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하여 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플라톤은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따라서 크기의 양적 측정이 아닌 모든 가치의 질적인 비교를 중용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을 참다운 덕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도(中道)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교사상에 있어서 중용이란 현실에 적용되는 행도(行道)의 최선의 길을 뜻하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중용≫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핵심이며 상대가치개념의 중간인 중(中)을 인식하여 그로써 실행하는 사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유학사상에 있어서 중용의 의미와 그 이해에 관한 접근을 다각도로 시도하고, 나아가 한국유학에 있어서 이이(李珥)와 정약용(丁若鏞)의 중용설(中庸說)을 고찰하여 그 사상적 발전양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함께 ≪예기≫ 49편 중에 있던 것을 주희(朱熹)가 따로 뽑아내어 비로소 유교의 기본경전인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송대에 불교의 융성에 따른 유교의 자기반성과 불교의 심성론이나 도교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사상 자체 내에도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할 시대적 요청에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간명하고 심도 있게 밝히는 책으로 특히 취택된 것이 바로 ≪중용≫이었다.


저자에 대한 학설은 구구하나 자사(子思)와 그의 제자의 작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이 책의 가장 주된 사상이 ‘중용’과 ‘성(誠)’이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주로 중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희는 중용을 주석하기를, “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 않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인성(人性)이 지극히 중정(中正)하여 질서를 이룬 안정된 상태가 사물에 접하여 감이동(感而動)하기 이전의 인성본연(人性本然)을 나타내는 말이며, 용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평상(平常)됨을 나타내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용의 참된 뜻과 그 실현은 중과 용, 즉 알맞음과 꾸준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중덕(中德)뿐만 아니라, 꾸준한 용덕(庸德)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결국 중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의로(義路)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되는 세계에 맞게[中] 쓰는[庸] 것이 곧 중용이라 할 수도 있으므로, 이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중용, 즉 ‘맞게 쓰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객관이 주관에 맞는 것[中]이 진(眞)이라 한다면, 주관이 객관을 쓰는 것[庸]은 이(理)라 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중용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진리의 일차적 내용이 인의(仁義)이고 인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악(禮樂)인 것이다.


따라서, 인의의 이상을 예악으로써 현실에 중정하도록 쓰는 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은 진리의 소재(所在)이고 용은 진리의 소용(所用)이라면, 진은 중용의 인식이고 이는 중용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의는 중용의 이상이고 예악은 중용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용의 의의는 지행(知行)의 덕을 존중하고 있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중용은 지요(至要)한 것이나 인간들은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지와 행의 상호조화 내지는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용사상의 본체론적·심성론적 논리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주자의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성정(性情)에 대해서는 중화(中和)를 말하여 중을 도의 체(體), 화를 도의 용(用)으로 보았고, 또 이의(理義)에 대해서는 중용을 말하여 중은 천하의 정도로서 용(用)으로 보아 시중의 중으로 보았다. 용은 천하의 정리로서 체로 보고 있다.


또, 중화와 중용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중화는 체, 중용은 용(用)이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 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중화의 ‘중’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서, 천부본연(天賦本然)의 성이며 천명의 성(天命之性)인 것이고, 그것은 미발(未發)의 상태이므로 불편불의(不偏不倚)요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이며, 심지체(心之體)로서 은(隱)인 것이다. 이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곧 천명의 정으로서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본체라 하겠다.


그리고 중화의 ‘화’는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는 것, 즉 중절(中節)을 말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달도(達道)이며, 심지용(心之用)으로서 삼라만상에 현현(顯現)되는 것으로 비(費)라 하겠다.


한편, ≪중용≫의 첫머리에서는 천명(天命)·성(性)·도(道)·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힘으로써 ‘치중화(致中和)이면 천지위언만물육언(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는 중용의 최고·최후의 경지를 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숭고한 중용의 도는 오직 성인만이 능히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군자의 중용의 도는 해괴하거나 비현실적인 도는 아니며, 또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다. 일반 부부의 우(愚)로도 가히 알 수 있고 부부의 불초(不肖)로도 능히 행할 수 있는 비근하고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도는 일상생활의 전역에 걸쳐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역에 걸친 다양한 양상을 통일하는 근본원리의 제시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중용≫ 제12장에서 밝히고 있는 이른바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인 것이다.


주희는 비를 용지광(用之廣), 은을 체지미(體之微)라 주석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과 용, 중과 화를 비와 은으로 비교한다면, 중용의 중은 ‘비’, 용은 ‘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는 체로서 은이요, 중용은 용으로서 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중용사상의 현실적 의의를 불교나 도가철학 및 법가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한다.


도가와 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위로 고상한 이상만 추구함으로써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무욕(無欲)을 내세워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만 보고 거기에 무위순응(無爲順應)할 것만을 주장하며, 유위유의(有爲有意)로서의 인의·도덕·예악 등의 제도를 아래로 봄으로써, 단번에 이상을 실현하려는 상달(上達)만 내세우고 단계적인 현실긍정과 실현을 의미하는 하학(下學)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므로, 이는 초인문(超人文)·초인도적(超人道的)인 태도로서 중용의 의의에 어긋나는 지나침(過之)인 것이다.


또, 아래로 현실타개의 방술(方術)로서 무자비한 위력으로 제도적 억제만을 내세우는 반인문(反人文)·반인도(反人道)의 법가류(法家流)는 인성을 악으로만 보고 복종만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이는 중용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이른바 ‘모자람(不及)’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성의 선악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또 일[事]의 대소후박(大小厚薄)을 참작하여 시의에 좇아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전술한 바 있는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인 것이다. 이는 바로 이상과 현실의 가장 바람직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은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였고, 이 성리학이 16세기 중엽 이황(李滉)과 이이를 통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는 성리설에서 서로 입장의 차이가 뚜렷해 두 봉우리를 이루었거니와, 그 성리설의 성격은 그들이 시대현실 속에서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한 해답이었다.


이황이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사회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현실을 절실히 인식하였던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이 역시 이기일원론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시대사회가 지닌 모순과 불합리성을 통찰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개선의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황이 존리사상(尊理思想)에 근거한 도덕세계에 보다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면, 이이는 이기지묘설(理氣之妙說)을 주창하여 현실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황은 성(誠)을 기본으로 하여 일생 동안 경(敬)의 실천에 노력한 반면, 이이는 이황보다는 현실문제와 학문의 세계를 더 연관시키려 하였다.


한편, ≪중용≫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한다면, 그 전반부는 중용의 철학적 의미를, 후반부는 그것의 실현에 대한 천도와 인도의 문제인 성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이의 중용에 대한 이해는, 실천에 중심을 둔 성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이의 중용설은 주로 ≪성학집요 聖學輯要≫에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중용과 중화의 의미를 비와 은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이는 비(備)와 은(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비를 이(理)가 사물 또는 인사(人事)에 산재한 바의 소당연자(所當然者), 즉 당위성으로 보고, 부자(父慈)·자효(子孝)·군의(君義)·신충(臣忠)의 유(類)로 이를 용이라 하고, 은(隱)은 그 소이연자(所以然者), 즉 존재성으로서 체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이는 비 속에도 소이연으로서의 은, 즉 이치가 내재하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이는 전술한 바 있는 주자의 성정론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답성호원 答成浩原>에서 밝히고 있는데, 즉 미발은 태극의 체[太極之體]이며, 또 지선의 체[至善之體]로서 천명의 성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성(誠)을 천지실현(天地實現)으로서의 심(心)의 본체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대본(大本)은 재심의 중[在心之中]이요, 달도(達道)는 재사물의 중[在事物之中]이고, 또 재심의 중은 미발의 중으로 지선 그 자체이며, 재사물의 중은 지선의 용[至善之用]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주자는 성(誠)에 대하여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이며 천리(天理)의 본연이라 하였지만, 이이는 ≪율곡전서≫ 권4 성의(誠疑)에서, 성에는 실리의 성[實理之誠]과 실기심의 성[實其心之誠]이 있다고 밝혀, 실리의 성은 소이연으로서 천리의 본연이고, 실기심의 성은 소당연으로 인간의 마음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천도로서의 성이 소이연의 뜻이라면, 인도로서의 성은 소당연의 뜻이므로 성에는 실리와 실심, 즉 천도와 인도의 양면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이는 이황이 정주(程朱)의 존양성찰(存養省察)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학(爲學)의 방법을 계승, 거경궁리(居敬窮理)로써 인(仁)의 실현방법, 즉 수양론을 언급한 반면에, 주성(主誠)을 내세워 독특한 수양론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이의 성사상(誠思想)은 천인(天人)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중용에 있어서의 체용의 은비관계(隱費關係)를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실학의 대가로 실학파 중에서 경세치용파의 종사(宗師)인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많은 경전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정약용의 야심적인 경전연구를 통한 주석체계는 경학사(經學史)에서도 중요한 업적임에 틀림없을 뿐더러, 이것은 곧 그의 철학적 근본입장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경학체계를 통하여 성리학과 훈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재천명하려고 하였던 것은 단순한 복고주의라기보다 그 시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산철학(茶山哲學)의 근본견해가 유학의 본질과 전통에 따라 인간문제에 대한 관심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중용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중용자잠 中庸自箴>에서, 중용이 원시유가의 실천적 행동규범임을 강조하여 그 중요성을 제시하는 한편, ≪중용≫의 사상과 내용을 ‘중용’으로써 주지(主旨)로 하고 또 일관시키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또 중과 중화와 중용을 구분하여 중과 중화는 같고 중용은 ‘중이용(中而庸)’ 또는 ‘중화지용(中和之用)’이라 하였다. 여기서 중과 중화가 같다는 것은, 미발일 때에는 집중(執中)을 하고 이발(已發)일 때에는 중절(中節)을 하기 때문에 중·화 2자(字)는 이것을 합하여 중 1자로 하여도 무방하다는 견해인 것이며, 중용을 ‘중이용’ 또는 ‘중화지용’이라고 한 것은 중과 중화가 일시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항구불이(恒久不已)하여야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주자학적인 해석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또, 정약용은 <중용강의>에서, 주희가 중용의 용을 평상이라 한 것에 대하여, 이러한 문구는 불교에서 온 것이지 유가의 옛 경전에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희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자신은 용덕(庸德)을 상덕(常德)이라 하였고, 상의 뜻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항상·경상(經常)·평상이라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정약용의 중용해석은 다분히 분석적·구체적인 것이고 실천에 역점을 둔 이론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성(誠)에 대하여 “성이라는 한 글자는 만덕(萬德)의 근원이 되며 ≪대학≫과 ≪중용≫의 두 책은 모두 ‘성’ 한 글자로써 수공(首功)을 삼는다.”라고 <중용자잠>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지도’와 ‘신독(愼獨)’과 ‘성’을 연관시켜 중용지도의 실현은 신독이 아니면 안 되며 신독의 공부 역시 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여기에서도 주자의 지나친 관념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면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성실성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론이 유교의 한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은 있으나 논리전개는 실학적인 긍정적 요소가 있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중용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의미를 조명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과학이나, 주관적 진리에만 몰두하는 철학유파들은 각기 이상과 현실의 결여와 무시로 인한 괴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대과학과 철학의 편중된 진리관에 반하여, 유교사상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인간이 하는 실용의 ‘중용’을 진리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진리는 단순한 객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순전한 주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용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용사상 [中庸思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013 – 대학(大學) / 작자미상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대학>은 유교사상의 핵심을 밝힌 <정치와 개론사>로 원래 <중용>과 함께 <예기> 중의 한 편이었으나, 이것을 주자가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지식인 필독서인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의 하나로 편찬한 때부터 널리 읽히게 되었다. <대학>이란 <대인> 성인남자의 학(교육)>을 줄인 말로 그 핵심은 수기치인도, 다시 말하면 내성외왕의 도이다. 교육의 목적(명덕.신민.지선)과 8과제(격물.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현실적인 <치국평천하>를 설하는 <대학>은 <천인합일의 도>를 제시하는 <중용>과는 상효 표리를 이루는 경전이라 할 것이다.


a.<대학>의 제목과 저자에 대한 논란


 <대학>은 <중용> <논어> <맹자> 와 함께 사서중 하나이며 시.서.역의 3경과 더불어 유가의 기본경전으로 꼽힌다. 시.서.역의 3경은 아득히 옛날부터 있어온 명칭이나, 4서는 송대의 주자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명칭이다. 오늘날 유가의 경전을 총칭하여 <13경>이라고 하는데, 이 13경은 3경과 <예기> <춘추>를 합쳐 5경이라 하고, 춘추의 3전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예기의 3례 <주례> <의례> <예기>와 <논어> <맹자> <효경> <이아>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대학>을 <치자의 학>이라고 보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인의 학>이라고 보는 설이다.  정현은 << <대학>은 그 기록함이 박대하여 이것을 배우면 가히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대체로 전자의 입장을 취했고 사마광도 이에 동의했다. 후자는 주자가 주장한 설인데, 그는 <<<대학>을 <대인 (성년남자)의 학 (교육)>이라 했다.

 그러면 대학의 본뜻은 어느 것이 타당할까?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의 도>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남을 다스리는 도리를 말하고 있는 <대학>은 바로 <대인지학>이요 <치자지학>인 동시에 더 나아가 <인간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대학>은 지금처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니라 5경 중의 하나의 <예기>의 49편 중 42편 <대학> 편을 당의 한유가 독립시킨 것으로, 송의 사마광이 <대학강의>를 저술한 이래 주자는 더욱 <대학>을 숭상하여 1189년 <대학장구>를 저술, <대학>문장의 순서를 고치면서 경1장과 전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말, 전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부언 해설한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증자--자사--맹자--정자의 계통으로 전해내려왔다고 하는 <도경전>을 완성하고 또 <대학>을 4서의 하나로 삼음에 따라 중요한 위치에 섰으며, 이후 <정주학>이 유행함에 따라 읽히게 되었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정자는 대학이 공자의 유서라고만 했을 뿐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주자는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뜻을 공자의 제자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증자의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다.

 자사가 증자의 제자이니, <대학>은 결국 자사의 저작이 아닐까 하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던 것이 청대에 고증학의 발달과 함께 <대학>의 저작 및 저작연대가 아주 달라졌다. 청대의 고증학자 최술은 자사의 작으로 정설화 되어온 <중용>도 맹자의 이후의 작이라고 규정했고, 최근 중국학자 호통.전목 같은 학자는 <대학> <중용> 의 자사 작을 부인하고 진.한 사이에 무명씨에 의해 이록된 저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대학>의 작자에 대해서 여러 주장이 있으나, 유교의 정신을 가장 조직적으로 기술했고 또 증자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한 점으로 보아 증자 이후 공문의 제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b.<대학>의 내용 및 근본사상


 먼저 언급해둘 것은 현존 <대학>은 <예기>에 수록되었던 그대로의 <대학> (대학고본)이 아니라 주자가 새로 정리한 <대학>이란 점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는 <예기>의 <대학>이 착간이 되어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착간이란 글씨를 써둔 대쪽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쪽에 글씨를 썼는데, 그 대쪽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 

 주자는 <예기>에 수록된 <대학>편은 틀림없이 착간이 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 <대학>편의 내용을 지금의 현재의 순서로 정리하여 이를 <대학신본>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그러나 왕양명은 대학신본은 완본으로 탈락과 착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대학>의 내용이 3강령 8조목을 서술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그 집차를 경 1장, 박 10장으로 장구를 정했다.

 <대학>은 유학의 요지를 완전히 조직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대학>의 구성은 2편으로 되어 있는데, 제 1편은 경문으로서 <대학>의 총론에 해당하며, 제 1장에는 3강령, 제 2장에는 8조목이 서술되어 있고, 제 2편 전문은 경문에 대한 각론으로 3강령 8조목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따라서  3강령 에서는 <대학>의 근본사상인 수기치인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고,  8조목 에서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3강령

 3강령은 대학 서두에 나오는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명명덕, 둘째 신민, 셋째 지어지선의 3자를 완성하는 일이다.

 명덕을 밝힌다 함은 덕을 닦아 일신을 수양하는 일이고, 백성을 새롭게(친하게) 한다 함은 자기완성을 이룩한 훌륭한 인격자가 백성을 지도하여 새로운 백성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은 수기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치인이다. 지어지선은 마지막 귀착점을 말하는 것이니, 그의 심술을 지극한 경지에 둔다는 뜻이다.

 

 (1)명명덕 : 주자는<< <명덕>이란 본래 갖추고 있는 성>>이라 하고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허하고 영하며 항상 빛난다. 중리를 갖추고 있으면서 만사에 합당하게 적응하는 덕이 된다. 그러나 그 본체는 항시 빛나고 있어 한시도 쉬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때 묻지 않게 하고 늘 밝게 닦아서 원래 하늘에 타고난 대로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명명덕이란 양심을 계발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도덕적 지.정.의를 닦는 일이라 하겠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수신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잘 다스려질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한 구절은 분명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꾀한 것이라 하겠다.


   (2) 신민: 이 용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고주(왕양명계통)과 신주(정자와 주자계통)인데,고주에서는 친민이란 친애의 뜻으로서 천하국가의 인민과 친해지는 일을 말하고, 정자는 신민 즉,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자는 이 설을 계승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새롭다는 말은 옛것을 바꾸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명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이웃도 그렇게 되도록 영향을 미쳐서 이웃으로 하여금 역시 묵은 때를 제거할 수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친>과 <신> 두 가지 견해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나 학자 수로는 주자의 의견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명명덕과 신민(친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사상의 근본인 정교일치가 가능케 되는 근거가 있다.


   (3) 지어지선: 지선에 머무른다 함은 도덕적 부동불이 상태에 머무르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서도 고주와 주자주 사이에 차이에 있다. 고주에 따르면 지어지선은 <<선을 행해서 미처 지극한 데 이르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일출일입에 조수함이 없으면 또한 백성을 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어지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자는 <<지극한 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치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다 지극히 선한 데에 머물러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즉, 천성의 극을 다하고 한치의 사욕도 없는 그런 경지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주자가 말하는 우주의 본체인 이의 세계의 표현이요, 형이상학의 견지다. 동시에 명명덕이나 신민이나 모두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서양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부동심)와 비슷한 개념이다. 위에서 말한 명명덕과 신민의 개념과 지어지선의 관계는 무엇일까? 지어지선은 <대학>의 도의 도달점이요 귀결점이다. 명명덕(도덕)과 신민(정치)의 결합점인 것이다. 대학지도는 명명덕과 신민이 지어지선해서 비로소 유가의 근본사상이 계통있게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8조목

 8조목은 3강령을 실천하는 순서요 단계이다. 이를 열거하면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이중 개인적 실천윤리인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5조목은 정치윤리인 제가.치국.평천하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결국 유학의 도는 그 근본이 <수신>에 있고 또 그 근저에는 <격물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8조목에는 각 조목을 설명하는 글, 즉 전이 있는데, 유독 격물치지에 관한 전은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스스로 격물치지의 전을 보완했는데 이것을 주자의 부인하고 보전장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왕양명은 8조목설을 부인하고 원래의 6조목설을 주장했음). 그만큼 격물치지를 중요시한 것인데, 이 격물치지의 해석에는 72가지 설이 있었다 한다.


   (1) 격물 格物: 격물은 대학지도에 있어 가장 근저를 이루는 조목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이설이 있다. 따르면 격물은 천하사물의 이에 궁극함을 말하고, 왕양명은 격물이란 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양자의 설을 비교하면 물은 주자에 있어서 이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의이며,격은 주자에 있어서는 지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정이다. 주자에 의하면 천하사물은 각기 이를 갖추고 있으나 이를 궁극해나가면 천하 사물의 표리와 실체가 훤하게 관통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자의 해석이 너무 광범한 것을 반박했다.

 왕자에 의하면 물은 사물이니 나의 의지있는 것이 물이다. 나의 뜻이 사친에 있으면 사친이 곧 물이요, 나의 뜻이 사군에 있으면 사군이 곧 물이라고 했다. 즉 격물은 뜻이 있는 바의 물에 대해 부정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2) 치지 致知: 격물에 대해서 주자와 왕자 두 사람 사이에 이론이 있듯이 치지에 관해서도 그 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먼저 주자의 설에 의하면 치지란 지식을 다하는 일이다. 즉, 지식의 계발을 뜻한다. 주에 이르기를 <<치란 추극함이요, 지란 지식을 말한다.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구하여 알아야 하는 일이면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다>>라고 했다. 즉, 자기의 의식을 한없이 넓게 하고 깊게 해서 천하일체의 사물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은 주자의 광범한 해석을 피하고 <<치자지아>>라고 했다. 즉 <<치지라고 하는 것은 후세 유가들이 이르는 것과 같이 그 지식을 충광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타고난 내 마음의 양지에 이르는 것을 말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지란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양지를 말하는 것이고, 치란 이 양지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지에 대한 주.왕의 설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보통 말하는 바의 지식을 추극하여 외부적으로 발전하여 사사물물에 불통함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자신의 내부에 구비하고 있는 선천양지에 도달케 하여 사물을 바로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에 있어서는 객관적 지식의 수집, 궁리주의, 선지후행설이 될 것이며, 왕자에 있어서는 선천양지의 지각,직각주의,지행합일설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지격물란 주자에 의하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고, 왕양명은 의지가 존재하는바 사물에 의해서 부정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다는 것이다.


   (3) 성의 誠意: <대학> 중에는 명언이 많지만 특히 <성의>에 관한 장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데, <의>란 주자에 의하면 <<의자심지소발>>이라 했다. 즉, 사려.정서.욕망 등의 총칭이다. 그리고 심이란 의의 본체로서, 욕망을 의라 한다면 심은 마치 품성과 같은 것이다. 

 <성>이란 참된 것이다. 대학에 이르기를 <<이른바 자기의 생각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같이 악을 미워하고 잘생긴 여인을 좋아하는 것같이 성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스스로 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스로 속이지 않음은 소극적인 면이요, 스스로 마음에 흡족해함은 적극적인 면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면 자연 스스로 흡족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을 막고 마음에 흡족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은 여기에 <신독>을 말하고 있다.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즉, 독거에 불선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한거에 보통 불선을 저지르게 마련이며, 이것이 쌓여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 정심 正心: 뜻이 성하게 되면 정심이 생긴다. 정심이란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무릇 사람의 마음에는 분노.공포와 두려움. 즐거움.우환 등의 정서가 있어 때때로 정심을 잃게 하므로, 뜻을 지성으로 갖는 동시에 그 본체인 마음을 정한 위치에 두도록 힘써야 한다. 만약 마음이 정서와 감정에 지배되어 그 정상을 잃을 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분간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정심의 중요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5) 수신 修身: 수신은 글자 그대로 몸을 닦는 일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격의 수양을 말한다. <대학>의 말로 하면 수신은 곧 명명덕하는 일이다. 수신의 방법은 지금까지 말한 정신.성의 치지.격물을 바로 행하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치지격물에 의해서 지를 닦고 성의로써 의지를 옳게 가지며 정심에 의해서 정서를 바로잡으면, 거기에 절로 수신이 되고 인격이 완성되어 명덕이 저절로 밝아질 것이다. 여기에 비로소 근본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는 바로 <대학>에 나타난 신천도덕사상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완성된 인격, 밝혀진 명덕은 천하국가에 사회적.객관적으로 투사되어서 제가.치국.평천하되는 것이다.


   (6) 제가 齊家: 대학에서 말하는 제가는 가족생활의 도덕적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자신의 수양 없이 그 집안을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제가의 요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쪽에 치우치는 것, 즉 편협한 행위를 경계함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고, 자기가 천히 여기고 밉게 보는 것에는 치우치게 마련이며,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되고, 자기가 슬프고 긍휼히 여기는 것에도 치우치게 되며, 자기가 오만하고 게으르게 다루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란 천하에 드물다. 만약에 감정에 치우쳐 집안을 다스리려고 할 때 거기에 공평을 기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가를 위해 <효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7) 치국 治國: 치국의 요체는 제가에 있다고 했으니, 그 집안을 잘 다스릴 때 비로소 그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8) 평천하 平天下: 평천하의 기본은 제가와 치국이다. 임금이 노인 섬기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들이 이것을 본받아 자기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게 될 것이고, 또 임금이 장자를 대하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이 이것을 본받아 형제의 도를 다할 것이고, 또 임금이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백성들 역시 마음가짐이 중후하게 되어 감히 임금께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은 백성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치자의 마음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즉, <군자민지부모 민지소호호지 민지소오오지 차지위민지부모> (詩云 “樂只君子,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라고 했다. 즉,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나 또한 싫어하나니, 이것은 백성을 위주로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되는 생각이라고 본다. 이밖에도 평천하의 조항에는 이보다 의를 중히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c.<대학>에 대한 평가


 <대학>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기본경전의 하나다. 송나라의 정이천은 <<대학>은 공자학파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책이며, 초학자는 이곳을 지나 덕의 길로 나아가는 문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을 읽다 보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익히고 깨달은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하며, 학문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는 부수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해도 변화하는 만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지식에 앞서 학문의 본질과 명철한 지혜의 눈을 뜨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 행간에 도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방향이 인간과 사회의 활동을 위한 쪽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문을 하는 학자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실제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3강령 실현의 수단으로 수기를 첫째로 내세우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대학은 그 이상실현의 수단으로 근본을 세우는 일, 즉 나 자신이 먼저 완전한 도덕적 본체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런 사고는 유교전체를 통한 근본사상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아울러 <대학>에서 제시하는 정치의 순서가 논리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대학은 평천하의 수단으로 치국을 말했고, 치국의 전제로 제가를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제가 없이 치국이 될 수 없으며, 치국 없이 평천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순서의 설정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대학>의 이처럼 특징적인 내용도 있으나 한 두 가지 미흡한 점도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관념적 도덕주의에 빠져서 물질적 측면에 대한 언급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대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있어서는 정치의 일면인 부국강병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맹자가 유가에 입각하고 있으면서 경제적인 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도>라 할 수 있는데 즉,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타인을 다스리는 도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생활의 수양과 사회생활과의 결합, 곧 윤리와 정치와의 결합을 논하는 학문이었으나 군자의 학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 (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학》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데, 주희는 경문 1장을 증자가 지었고, 전문 10장을 증자의 문인이 해설했다고 주장하였다. 경문은 성인이 직접 언급한 진리, 전문은 성인에 버금가는 현인이 경문을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삼강령을 밝힌 부분을 경문으로, 팔조목을 밝힌 부분을 전문으로 보았다. 주희는 사서체제를 정립하면서 공자(논어) -> 증자 -> 자사(중용) -> 맹자(맹자)의 도통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대학을 증자의 저서라 하진 못하더라도 증자와 관계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주희가 정이의 설을 따라 3강령 중 ‘親民’을 ‘新民’으로 고치고, 본래 있던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조 앞에 격물과 치지의 장을 새로 지어 보망(補亡)한 8조목을 만든 이래, 송대 성리학을 존숭하는 이들과 고본 《대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왕수인은 ‘친민’이 옳다고 하여 고본 《대학》을 따랐으니,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주희는 사서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읽으라 할 정도로 대학을 중요시했다.


김용옥은 대학을 순자계열의 사상가에 의해 전국시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본다. 저술 목적은 스승의 지위를 확립하여 황제의 권력을 제약하고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으며 집필시기는 여불위가 집대성한 여씨춘추의 집필시기와 일치한다고 보고있다. [1]


내용[편집]

《대학》은 자기 수양을 완성하고 사회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학’(大學)이라는 의미는 통치자의 학문이라는 설과 인격자의 학문이라는 설로 나눌 수 있다. 주자는 《대학》이 소학(小學)을 마치고 태학(太學)에 입하하여 처음 배우는 개설서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학교의 기본 교양 교재와 같은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은 유가 사상의 주요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자신을 수양한 후에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즉 사회의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한 후에 이를 주변 사회로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삼강령과 팔조목에 담아 내었다.


삼강령[편집]

명명덕(明明德) : 자신의 밝은 덕을 밝게 드러내야 한다.

신민(新民) : 자신의 밝은 덕으로 백성을 새롭게 한다.

고본 《대학》에 수록된 용어는 친민(親民) : 백성과 친하게 된다.

지어지선(止於至善) : 최선을 다하여 가장 합당하고 적절하게 처신하고 행동한다.

팔조목[편집]

격물(格物) :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찬찬히 따져보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치지(致知) : 지식과 지혜가 극치에 이르게 하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성의(誠意) : 의지를 성실히 다지는 것

정심(正心) : 마음을 바로 잡는 것

수신(修身) : 자신을 수양하는 것

제가(齊家) :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는 것

치국(治國) :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평천하(平天下) :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것





B012 – 맹자(孟子) / 맹자(BC 372~BC 289 추정)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권력과 부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전국시대에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창했던 맹자의 정치방법론이 담긴 책, 맹자는 극심한 사회변화 속에서 절대군주 중심의 강력한 국가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성선설에 기초하여 지식인들의 자율적인 도덕원리에 입각한 <인정>과 <왕도사상>을 피력했다. <맹자>에는 이와 같은 맹자사상의 전모가 주로 그의 제자, 또는 당시 군주들과의 대화 속에 생생한 필치로 전개되고 있다.


a.생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와, 공부기간을 다 마치기 않고 돌아온 아들에게 짜고 있던 베를 끊어 교훈을 준 <단기지훈>의 고사로 유명한 맹자와 그의 모친.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유교사상가로, 공자 사후 100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있으나 정확한 생물연대는 알 수 없다. 맹자는 현 산동성의 추현지방인 주나라 사람이며,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씨 집안의 자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공자와 같이 맹자도 아버지를 일찍 잃었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배려와 지도 속에서 자랐다. 맹자와 그의 모친은 처음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으나, 맹자가 언제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올리는 놀이를 하자 그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고 팔고 하는 놀이를 하므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니 비로소 맹자가 공부하는 흉내를 내었다. 즉,아들을 기르는 데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젊었을 때 노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배우고, 뒤에 제자들과 양나라의 혜왕,제나라의 선왕,추나라의 목공,등나라 문공 등에게 유세를 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그가 제후들이나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을 엮어 <맹자>를 집필했다. <맹자>는 오랫동안 읽히지 않다가 당나라 때 한유가 이 책을 세상에 밝혔고, 그것이 북송에 계승되어 차츰 중요시되었으며 남송의 주희가 4서의 하나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는 성격상 차이점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자는 내성적이고 세련된 선비였으며 조심성있고 말하기 앞서 깊이 생각하는 반면, 맹자는 외향적이었으며 그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그의 재치는 널리 주목을 끌었다. 공자는 어려운 질문을 받게되면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이와 달이 맹자는 그의 적대자들을 몰아치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b.시대적 배경과 맹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인의>를 강조한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 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유력한 제후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무력으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제나라의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패도를 부정하고 왕도를 제창했다.  맹자의 사상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지주를 찾는다면, 하나는 윤리사상으로서의 성선설이요, 다른 하나는 정치사상으로서의 혁명론이 될 것이다.


   1. 맹자는 인성론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내세우고, 그 증거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라는 4덕의 싹이 되는 4가지 마음이 있는데,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 그것들이다. 이를 <사단설>이라 한다. 이 사단설을 바탕으로 <오륜>을 설명했다. 즉,부자 사이에는 친이, 군신사이에는 의가, 부부에는 별이, 장유사이에는 서가, 붕우사이에는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맹자의 성선설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의 성악설과 아울러 인성론의 두 전형이 되었다. 성선설에 근거를 둔 맹자의 윤리사상은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는 것으로 <주관적 윤리학>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지 않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순자의 성악설을 <객관적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된다.


 2. 맹자는 정치론에 있어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제창했다. 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로써는 인심을 얻을 수 없으며, 인애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정치철학으로 왕의 덕의 유무에 따라 천명이 따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덕이 없는 악덕군주를 신하들이 몰아내는 것이 혁명이며,이는 민심이 천심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라 하여 후세 왕조교체에 있어서의 선양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맹자와 민심에 대한 강조는 이른바 <역성혁멍>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임금도 임금답지 못하면 교체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사상에 철저했다. 다음의 제의 선왕과 맹자와의 다음 문답은 그의 혁명론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제의 선왕이 묻기를 <<무왕(의 왕)이 주(의 폭군)를 몰아 냈다고 하니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옛기록에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좋습니까?>>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며, 잔적지인을 일부(일개의 필부)라 합니다.일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아직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 대화는 은의 마지막 왕인 주처럼 국왕이 포악무도할 경우 한갓 하찮은 사나이로 전락한 것이므로 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이 같은 맹자의 혁명론의 근거에는 그의 민주주의와 애민사상이 있다. 민과 군주와 사직의 세 가지 중에서 민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한

맹자의 말에서 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그의 민본주의 사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왕도사상>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c.<맹자>의 내용


 <맹자>는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혜왕편. 공손추편. 등문공. 이루편. 만장편. 고자편. 진심편으로 엮어져 있으며, 각 편을 다시 상하로 나눈 14권본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중 양혜왕.공손축.승문공 등의 3편은 맹자가 각국의 제후들을 만나 민본사상에 기반을 둔 정치를 강조하며 제후를과 나눈내용이며, 이루편 등 4편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대부분은 명백한 주제가 들어 있다.


   1. <양혜왕>편: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전란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유력한 군주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각국 제후들의 초청에 응했다. 제의 선왕에 가장 기대를 걸고 그에게 민생을 안정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즉, 무력을 위주로 하는 패도를 피하고 천명에 따라 민의를 존중하는 왕도를 제창했던 것이다. 그의 의견이 한때 수용되는 듯 했으나 제와 연이 무력으로 전쟁하자 맹자는 선왕을 포기하고 다른 제후들과 대해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왕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의 설득은 공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의 왕도사상에서는 천명(민의)에 바탕한 백성의 저항권이 인정되었고 <서경>과 더불어 <역성혁명이론>을 제공했다.

   2. <공손축>편: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제국에 체재하는 동안 맹자가 강설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왕도.양기.사단에 관한 논설은 유명하다. 왕도론은 전편과 거의 같고,양기론은 마음을 주재하는 <지>이외에 육체를 지배하는 <기>의존재를 지적,이를 높이 키워서 도의와 합치시키는 것을 <호연지기>를 기른다 하여 왕도 강설자의 용기를 지탱하는 전재로 삼았다.  또한 이 입장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문제삼아 과거 현자의 처세방식을 비판하고 거취의 진퇴를 분명히 한 공자를 찬양했다. 아울러 성선설의 내용을 이루는 4덕과 4단을 논하고 있다.

   3. <등문공>편: 15장으로 되어 있다. 왕도정치의 일환으로 그가 제창한 그 유명한 <정진법>이 설명된다. <정진법>이란 토지를 우물정자(정) 모양으로 나누어 중앙은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개념인데. 이어 당시의 지식인을 매혹시킨 농가나 묵가의 사상을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자급자족의 근로생활을 제창하는 농가가 실제적으로는 교역경제에 의존하는 맹점을 공박, 사회발전 면에서 농가를 거부하고 분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절약을 중히 여겨 박장을 권장하는 묵가가 어버이의 장례만은 후하게 하는 모순을 공박,왕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들 이단을 배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대장부론>을 토해낸다.

 <<천하라는 넓은 집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하여 뜻을 이루면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혼자서 자기의 도를 실천하여, 부귀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 못하고 무거운 무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게 되어야만 그것을 대장부라 한다.>>

   4. <이루>편: 정치.윤리.교육.경전.인물평론 등에 관한 어록으로 61장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짤막한 구절로 되어 있으며 배열도 순서와 통일이 결여되어 있어 제자들의 편집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모아진 어구 그 자체는 다른 편의 결함을 보완하고 맹자사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되는 것이 많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존립할 수가 있으나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5. <만장>편: 18장으로 상편은 제자인 만장의 물음에 대답하고, 요.순.우 등의 전설을 비판했다. 하편 역시 만장과의 대화를 통하여 왕도 강설자의 생활신조를 보다 상세하게 말했다.

   6. <고자>편: 36장이다. 상편은 주로 인성론이 들어 있는데, 전반에 있는 고자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논쟁은 두 사람이 모두 비유를 써가며 팽팽하게 맞섰으나, 맹자는 그것을 승리의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상편의 후반은 이미 나온 왕도.양기.4단 등 과 관련되는 수양론으로 밤낮으로 양심을 지키도록 노력하고,외계의 자극에 따라 악으로 달리기 쉬운 관능욕을 자제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입장은 단적으로 <<야기를 간직하라>>라고도 하며 <<욕을 적게 한다>>고도 하여 송유의 수양론에 영향을 주었다. 

   7. <진심>편: 84장의 짤막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맹자는 요순 이래 500년마다 1시기로 보는 성현계보를 말한 뒤 열렬한 기백과 자신을 가지고 그 자신을 공자 다음 가는 왕도 제창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인생삼락>이 여기서 그려지는데, 1.부모형제가 안녕한 것 2.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3.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기쁨이 그것인데, 천하를 얻은 것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거부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떠나는 자는 그대로 두고 가르침을 받고자 오는 자는 그 사람의 과거에 구애됨이 없이 맞이한다.>>

 요컨대 <맹자>전체의 주축은 <왕도사상>의 강조이고, 입설의 근거로 <성선설>과 강설 때 솟아나는 기백도 간과할 수 없는 요점일 것이다. 문제는 내용에 어울리게 투지가 넘치는 박력을 나타내 보이고, 구성 및 수사도 긴밀한 추고를 거쳐 개성적이다. <장자> 내편과 함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교묘한 비유를 구사한 나머지 수사 그 자체에 뜻밖에 많은 기변이 숨어 있다.


d.맹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맹자는 공자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유학의 체계를 확립하여 대체로 공자 이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제2의 성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인의>의 도를 확립하고 인정을 왕도의 기초로 하여 왕도.패도의 변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사람을 끄는 웅변,도덕적 용기,그리고 깊은 신념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대중화시켰고, 또한 농가가 묵가 등의 이단을 철저히 배격하여 유학을 전국시기에 돋보이게 했다.

 맹자는 원래 기백이 강하고 언변에 능해서 호연지기를 설하는 곳, 대장부론을 설하는 곳, 출처진퇴를 설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감동적이다. 특히 <맹자>를 읽다 보면 마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문답으로 몰고가 물리치는 장면을 연상케 되는데, 그의 웅변, 그리고 적절한 인용과 교묘한 비유는 탁월하다. 공자와 맹자는 거의 같은 사상을 가졌으나 성격이나 사상적인 면에서 미묘한 차이점이 있었다.

   1. 공자는 인을 주장했지만 맹자는 인의를 주장하여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라고 규정했다.

   2. 두사람 모두 훌륭한 정부에 관심을 가졌지만 공자가 군주는 전능한 성전이라는 인식과 다만 치자에 대한 백성의 신임이 중요함을 인정했을 뿐이라, 맹자는 정부는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백성을 군주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간주했다. 맹자는 <<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백성을 장악하라. 백성의 마음을 장악하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련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고 했다.

   3. 위와 같은 논리에서 백성에게 천명을 어긴 박덕한 군주를 교체할 수 있는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거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자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정직이고 변함없는 관계를 밝혔을 뿐이다. <<치자는 치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그리고 아들은 아들답게>>라고 <논어> 에서 밝혔다.

   4. 두 사람 다 훌륭한 정부는 물심양면의 복지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용인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맹자는 그의 선생보다 훨씬 더 자세했다. 그에게는 백성이 부유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진법.조세관리.자원보존과 같은 앞서 말한 각 분야에서 그의 신념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또한 <맹자>는 오랫동안 한 유가의 저작으로 제자류에 끼여 평가될 때는 찬반 양론이 있어왔는데, 당의 한유가 이 책을 옛글 중에 유일한 것으로 격찬함으로써 차츰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남송의 주자가 <대학> <중용> <논어> 와 함께 4서의 하나로 삼은 이후 초학필독의 고전취급을 받았으며, 절대적 권위가 주어져 한민족의 정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평가를 떠나서 본서의 현대적 의의를 든다면,  

   1. 성립연대 및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많은 전국시대의 저작들 중에서 본서와 같은 것은 유력한 길잡이로 믿을 수 있는 사료가 되고, 사상사뿐 아니라 문화상의 연구 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2. 본서의 내용은 전국 유가의 사상. 감정. 생태는 물론이고, 정치.윤리,교육에 관한 제언은 현대에도 참조할 만한 많은 지혜와 교훈을 간직하고 있다.

   3. 본서는 단지 맹자 개인의 언행론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나타난 자서문학으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맹자(중국어: 孟子, 병음: Mèngzǐ, 멍쯔[*], 라틴어: Mencius 멘키우스[*],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생애[편집]

생몰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산둥 성 쩌우청 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이다. 어머니 장(仉)씨는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에게도 큰 감화를 받으며 학교의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자사의 계통은 공자의 경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天)'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적과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때 제나라에 체류했을 당시 그 인접국인 연나라에서 자지가 난을 일으킨 것을 제 선왕에게 보고하여 자지의 난을 진압하게 한 적도 있었다.


2.맹자의 사상[편집]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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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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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 d • e • h

저서로 맹자가 있다. <맹자>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고 하나 의문이며 실제로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이라고 하겠다. 맹자는, 하늘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그 피조물(被造物)을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정해 이를 만물창조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 하늘과의 관련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늘의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하늘이 정한 법칙의 달성이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이 맹자의 기본적 인간관인 것이다.


공자가 인(仁)이라 부르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맹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생각하고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여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은·주 이후의 전통적인 유산인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자에 대한 숭경의 정조(情操)로 공자가 발견했던 인간의 실천적 계기를 종교적으로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하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사덕(四德)의 사단(四端:싹)이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仁)은 '측은(惻隱)의 마음' 혹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마음'이며, 의(義)는 불의불선(不義不善)을 부끄럽게 알고 증오하는 '수오(羞惡)의 마음', 예(禮)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마음', 그리고 지(智)는 선악시비를 판단하는 '시비(是非)의 마음'으로 설명되고 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이라고 했으나 사단(四端)은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분화(細分化)라고 하겠다. 한편, 맹자는 '인(仁)이란 사람으로서의 덕'이라 하고 특히 그것이 위정자에 의해서 실현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의 사고방식을 계승하는 면도 있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의에는 수오(羞惡)의 마음이라는 의미 이외에, 개개의 예가 적절타당하기 위해서의 원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그가 '예의'라고 병칭(竝稱)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맹자는 공자의 '인'을 다시 한번 깊이 고찰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공자와 맹자로는 용어법에도 차이가 있고 또한 맹자 자신의 용어법에도 일관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있으나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덕목(德目)의 정리라는 점에서는 '사단'설 외에 '오륜(五倫)'설이 유명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다섯으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한다.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유덕자(有德者)를 천자(天子)로 명한다는 <서경(書經)> 이후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하늘의 신앙에 의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주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의 의지는 민(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으로 알 수 있다 하여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요소가 부가되었다.


맹자는 농사의 방해가 되는 노역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우선 민생(民生)의 안정을 꾀하며 이어 도덕교육을 행하여 인륜(人倫)의 길을 가르치면 천하의 사람들은 기뻐하여 심복하고 귀일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옛날 성왕(聖王)들의 정치, 즉 '인정(仁政)'이며 '왕도(王道)'라고 했다. 이 주장이 맹자의 '왕도론'이며 그는 또한 <서경>에 강조되고 있는 은·주 교체기(交替期)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확인하고 있다. 그의 논법은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난 은나라 왕 주(紂)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신하였던 주의 무왕은 필부(匹夫)인 주를 토벌한 것이지 군(君)을 시역(弑逆)한 것은 아니라는 격렬한 것이었다. 이 점에 바로 군신의 의 이상의 것으로서 천명(天命)이 설정되어 있다. 맹자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하늘을 설명하지 않았던 공자보다 여기서는 앞서고 있다.맹자는 주나라 제후국 노나라 출신으로 은·주 교체기(交替期)에 대한 그의 관점은 주나라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다.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났다는 것은 주관적인 해석으로, 왕이 부도덕하다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쿠테타에 명분이 되는 논리로서, 맹자 스스로가 주장한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위배된다. 맹자는 논리라면 주공단이 명분없이 섭정 할 때 은나라 후예 무경에게 주나라가 망했어야 정의로운 것이며,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현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은 쿠테타 세력에게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가 수립한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이나 덕에 의한 정치라는 사고방식을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성선설이나 왕도론(王道論)에서 그 경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5백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는 일종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공자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인의 전형이라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인 요·순(堯·舜)부터 5백년쯤 지나 은의 탕왕(湯王)이 나오고, 탕왕에서 5백년쯤 지나 주나라의 문왕(文王), 문왕에서 5백년쯤 지나 공자가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 자신은 공자부터 당시까지 1백년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는 공자의 길을 유지 확보하는 자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7%B9%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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