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28 – 자유론, On Liberty/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밀이 내가 쓴 어느 책보다도 오랜 생명을 가질 것이다 라고 말한 이 저서는 사실상 그의 부인과의 합작품으로서, 자유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논한 근대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고전이다. 밀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한 최초의 자유주의 이론가로 자유주의의 민주적 개혁 및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그가 자유에의 위협이라고 본 순수한 다수의 지배 에는 반대한다. 이 책에서 밀은 개인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고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a.생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우선했던 밀. 그는 영국의 철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공리주의 사상가 밀의 아들로서 공리주의 사상의 계승자가 되도록 기대한 그의 아버지가 기울인 조기 천재교육은 유명하다. 3세 때 그리스 어를, 8세 때 라틴 어를 배우고 이를 기초로 역사와 문학서적을 널리 섭렵했다. 12세때부터는 그 범위가 철학. 논리학. 정치학. 경제학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아버지와 계속되었다고 한다.
14세 때 1년 정도 도불하여 스포츠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아 지낸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에 일생에 걸친 취미가 되었다. 15세에 귀국한 후 벤담주의의 저작인 뒤몽의 <입법론>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공리주의 사상가가 되기고 결심했다. 1822년에는 벤담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동지들과 <공리주의자협회>를 만들고 <웨스트민스터 평론지> 등에 많은 기고를 했다. 다음해인 23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35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 보급을 위한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밀 자서전>에 의하면 20세 가을에 그는 어떤 일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공리주의적 개혁에도 열정을 가질 수 없게 되는 등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다. 이는 영국 사교계의 저급한 도덕수준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고전파 경제학의 사익추구 개념을 너무나 성선설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으므로 종래의 공리주의 사상을 수정할 필요를 통감하게 되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계보에 서 있는 콜리지와 칼라일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정치제도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주장한 논리에 반면의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생 시몽파와 콩트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또는 사유재산 제도와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고전파 경제학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이는 후에 그가 영국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배경이 된다.
1830년 새로운 사상추구를 향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던 그는 후에 아내가 된 테일러와 만났다. 테일러는 미모와 지적 교양으로 밀의 인생의 지주가 되었으나, 밀의 사상내용에까지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어쨌든 그의 새로운 사상은 <런던평론>과 <런던웨스트민스터 평론>에 기고한 글들로 나타났는데, 특히 <벤담론>과 <콜리지론>은 그의 사상전환을 일단 총결산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벤담주의를 18세기 계몽사상의 전형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19세기적 반동인 콜리지에도 일정한 평가를 부여하는 공리주의 수정의 입장을 확립한 것이다.
1843년에는 <논리학 체계>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 혁명운동이 유럽을 휩쓴 1848년에 출판된 <경제학 원리>에서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에 입각한 경제체제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종래의 경제학에 대해 분배형태는 인위적 . 역사적인 것이라는 등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또한 경제적 진보에 국민성의 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 등 고전파 경제학을 대담하게 수정하고자 했다.
<자유론>은 모든 개인의 자유의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제를 가져오고, 모든 개인은 평균화하고 몰개성적이 되며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는 경세의 책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간정신의 자유와 개성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 원리>도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기보다도 사람들이 여가를 향수할 수 있는 정지상태 쪽이 바람직하며, 또한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시비도 어느 쪽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는가로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으로서 선거권의 확장운동에 몰두했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제안했다. 의원직을 물러난 후 집필활동을 계속하면서 남프랑스의 자연 속에서 곤충학자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b.시대적 배경과 밀의 사상적 변천
밀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생 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자계급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갈등이 격화됨으로써 자유주의는 새로운 변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48년에는 <공산당 선언>도 나왔다.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밀은 예부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사회적 자유의 밑바탕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론>이 밀의 사상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밀의 사상적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면, 즉 인식론. 인성론 측면과 사회사상의 방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것이 편리하다.
먼저 인식론과 인성론의 방면으로부터 본다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은사가 되는 벤담과 그의 부친을 통해 습득하게 된 사상은 로크, 흄 등의 경험주의의 인식론이며 또한 쾌락주의적 인성론과 공리주의적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는 앞 시기의 사상에 대해 자기나름의 비판과 반발을 보이는 시기다. 이 시기는 1826년으로부터 27년에 걸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의 <자서전> 속에서 <내 정신사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이 시기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러 콜리지를 통해 독일의 이상주의 사상에 접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벤담주의에 대해 불만과 약점을 발견하고 이것의 보충을 이상주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1838년 <벤담론>과 1840년의 <콜리지론>일 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후자에서는 독일의 이상주의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밀의 사상편력의 제3기는 대체로 1840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제2기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서 벤담주의에의 복귀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작은 1863년의 <해밀턴 철학의 검토>이다. 그리고 <자유론>이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제3기에서 제1기로 다시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제2기에서 경험한 이상주의적 경향은 결코 제3기에 있어서도 소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적 방면을 살펴보면 여기서도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상의 변천이 보여지고 있다. 그의 제1기에 있어서는 벤담의 자유방임주의가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근본원리였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에 있어서의 그는 상당히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하고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1848년의 <경제학 원리>일 것이다. 그런데 사상편력의 제3기에 있어서는 다시 그의 자유에의 동경이 힘차게 되살아나 간섭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맞섰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자유론>, 1861년의 <대의정치론>이며, 또한 유고인 <사회주의론>이다. 이처럼 <자유론>은 그의 자유주의 문헌의 대표작이다.
c.<자유론>의 내용
밀의 자서전에 의하면 <자유론>은 1854년 하나의 논설로 씌어졌으나 1855년 1월 로마의 카피톨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것을 한 권으로 고쳐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 뒤 두 번이나 써서 밀쳐두었다가 가끔 꺼내서 수정하여 결국 전부를 고쳐 썼다 한다. 그 자신, 이처럼 주의 깊고 정성스럽게 수정한 것은 달리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간행은 1859년으로, 그 전해에는 35년간 일해 온 동인도회사를 물러나고 또 남프랑스 여행 중에 사랑하는 아내가 급사하는 슬픔을 당했다. <자유론>은 그녀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녀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자유론>은 5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서론>으로 전편에 걸친 개괄적 설명을 하고 있다. 종래에는 정치적 지배자들의 권력행사에 여러모로 제한을 가하기만 하면 국민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은 쉽게 실현되지 못했으며 새로이 다수결의 횡포라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압제는 반드시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여론의 압력 이라는 것도 있다.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갈 때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다수자가 수를 이용하여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이론이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리의 확립이 필요한데, #1 사상의 자유 #2 생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유와 취미의 자유,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3 개인과 개인의 단결의 자유다.
제2장은 <자유론> 중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밝히고 있다. 밀은 우선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서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비난한다. 그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논할 때는 이 문제를 일단 둘로 나누어서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1) 박해를 받는 사상이 정당하고 현재의 지배적 사상이 잘못된 경우이다. 정당한 사상을 혹은 기타의 부당한 힘으로써 억압해서는 안된다.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 향후에도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사상의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라 할지라도 독선으로 흐르기보다 보다 더 나은 사상의 출현을 위해 사상의 문을 넓게 열어놓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이단자의 주장을 계속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면 미래에 더 좋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박해를 받는 사상이 잘못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도 탄압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은 비록 어느 시기에는 정당시 된다 할 지라도 오랜 시일이 경과하게 되면 마침내 죽어버린 독단이 되어 생생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진리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일단 생기를 잃어버린 사상은 다시 그 진리성이 되살아나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반대의견과의 정정당당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반대론은 설사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너그러이 그 존재를 허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3장은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에 관해 논하고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컨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경우에 개성의 주장은 인간 행복의 주요한 요소이며, 실제로 개성의 말살은 개인과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결여하게 된다.
제4장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 이어 대체 어떠한 행위가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두 경우, 즉 주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개인인 경우와 사회인 경우로 나누어서 전자의 행위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후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이것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개인의 행위를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와 다른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행위로 나누어, 오직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만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려고 했다.
제5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실례를 들어 앞 장에서 말한 자유의 한계에 관한 원리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즉, 이러한 실례로서 상행위, 자유무역론,독약매매, 술주정꾼의 취체, 매음과
도박의 유혹 등을 들어 자유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설명하려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두 논점의 의의와 한계를 더한층 명료하게 하려는 데 있다. #1 개인은 그 행위가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사람의 이해에도 관계되지 않는 한 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요, #2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관해서는 개인은 당연히 사회에 대해서 사회적 또는 법률적 형벌을 가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d.사상적 평가
본래 자유주의는 근대사회의 시작과 함께 봉건적 특권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으로부터 요구되었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을 주장했는데,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는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임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했다. 공리주의자 벤담은 인간을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자유론>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관은 이와 크게 다르다. 즉, 밀은 인간을 결코 쾌락과 고통의 충동에서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식하여 자유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이성자로 보고 있다. 또한 밀에 있어서의 인간은 단지 이성자일 뿐만 아니라 각 이성자는 또한 판이한 개성을 가지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 또한 밀은 적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한 한 그 자유는 어떤 사실의 수단이 됨으로써 가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물론 자유라는 것은 인격의 성장과 진리의 천명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수단의 하나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수단은 그 목적이 인격이며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의 수단과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밀은 인간에게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인격의 성장에 두었으므로 이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는 매우 광범위한 간섭의 범위를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론>은 자유의 이론에 관한 대표적인 문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에 있어서는 간섭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밀은 인간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서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했던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 을 의미한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다 건설하려 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 자유주의라는 사회사상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논했다. 그리하여 사회와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자유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사상은 3단계의 편력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만일 그가 여전히 벤담처럼 인식론에서는 경험주의를, 인성론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그리고 윤리관에서는 공리주의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자유주의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래스키가 밀은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만큼 민주주의 해악을 비판한 사람도 없다. 그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만큼 자유방임주의의 지나침에 대해 적의를 품은 사람도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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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Communist Manifesto ]
연도
1848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강령으로 삼기 위해 공동으로 집필한 선언이다.
1848년 2월 런던에서 독일어 판이 발간되고 나서 순식간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각국에 소개되었다. 비록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이 선언만큼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리고 정확하게 전달한 책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내용은 주요하게 네 부분,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봉건 시대부터 19세기 자본주의에 이르는 역사를 고찰한 뒤, 자본주의는 결국 몰락하여 노동자들의 사회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노동 계급의 선봉인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지배 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릴 사회 계층으로 규정되었다.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내용만 싣는다.
하나의 유령, 즉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맺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의 적들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던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훨씬 진보적인 반정부당이나 반동적인 적들에 맞서 거꾸로 공산주의라고 낙인을 찍으면서 비난을 퍼붓지 않았던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두 가지의 결론이 이 사실로부터 나온다.
1. 공산주의는 유럽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하나의 세력으로 이미 인정받고 있다.
2. 이제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입장과 목적과 취지를 전 세계 앞에 공개적으로 밝히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옛날이야기에 당 자체의 선언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다양한 국적을 소유한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문을 작성하여, 영어와 불어와 독일어와 이탈리아 어와 플랑드르 어와 덴마크 어로 출간하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엥겔스·마르크스
엥겔스(좌) : “나는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공동 집필하여 발표했어. 제1인터내셔널 총무위원으로 국제 노동 운동의 발전에 진력했고.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는 《자본론》 2, 3권을 편집하기도 했지.”
마르크스(우) : “나는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Karl Marx, 1818년~1883년).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집필했어. 자본주의 사회를 통렬히 고발했고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 과정,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 잉여가치론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사회 구성체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를 탐구했지.”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1)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사회의 역사2)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변함없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각 시기마다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 모두가 함께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을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벌여 왔다.
일찍이 역사상의 각 시기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즉 다수의 사회 계층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상태를 발견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귀족과 기사와 평민과 노예가 존재했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와 가신과 길드 조합원3)과 직인과 도제와 농노가 존재했고, 이러한 계급들의 경우에 거의 모두가 또다시 하위 계층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면서 발생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적 적대 관계를 해소하지 못했다. 그것은 낡은 것을 대신해서 새로운 계급과 새로운 억압 조건과 새로운 투쟁 형태를 확립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 즉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계급적 적대 관계가 단순화되었다. 사회 전체가 대단히 적대적인 두 진영, 즉 직접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양대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한층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의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자유민이 생겨났고, 이 자유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첫 번째 요소가 발전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희망봉4)의 발견은 성장 중인 부르주아지에게 신천지를 열어 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 교역, 교환 수단과 상품의 일반적인 증가는 상업, 항해, 공업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충격을 가함으로써 몰락해 가던 봉건 사회 안에서 혁명적 요소를 급속하게 발전시켰다.
공업 생산이 폐쇄된 길드에 의해 독점된 봉건적 공업 체제는 새로운 시장과 함께 성장하는 수요를 이제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었다. 매뉴팩처5)가 그것을 대신했다. 길드 조합원은 매뉴팩처를 경영하는 중간 계급에 의해 떠밀려났다. 즉 조직이 서로 다른 길드 사이의 분업은 동일한 작업장에서 각자 진행되는 분업을 따라잡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한편,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더 이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증기와 기계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현대적 대공업이 매뉴팩처를 대신했다. 공업을 경영하는 백만장자이면서, 모든 군대식 산업 조직의 우두머리에 해당되는 현대적 부르주아들이 매뉴팩처를 경영하는 중간 계급을 대신했다.
현대적 대공업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덕분에 개척된 세계 시장을 확고하게 다져 갔다. 세계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무역과 항해와 육상 교통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역으로 공업이 한층 더 성장해 갔다. 또한 공업과 무역과 항해와 철도가 확대되어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그만큼 성장해 가면서 자본을 축적했고, 중세의 모든 잔존 계급을 사라지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적 부르주아지 자체가 오랜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에서 일어난 잇따른 혁명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각 단계별로 성장함에 따라 그 계급의 정치적 지위도 향상되어 갔다. 봉건 귀족의 지배 하에서 피지배 계급에 속했고, 무장한 자치 단체였던 중세의 코뮌6),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처럼 독립한 도시 공화국이나, 프랑스에서처럼 납세 의무를 지닌 군주국의 제3신분에 속했으며, 그 이후로 매뉴팩처가 확립된 시기에는 봉건 귀족에 맞서 싸우는 견제자로서 반(半)봉건적 질서나 절대 군주제를 옹호함으로써 사실상 막강한 군주제의 주된 토대가 되었던 부르주아지는, 현대적 대공업이 확립되고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후로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드디어 독점적 정치 지배력을 획득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 본문 이미지 1
파리에 수립되었던 최초의 노동자 계급 주도의 혁명적 자치 정권 파리 코뮌의 시민들이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목가적인 관계를 끝장냈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신분’에 인간을 속박하는 온갖 봉건적 유대관계를 가차 없이 토막 내어 버렸다. 또한 부르주아지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는 적나라한 이기심과 냉혹한 이해타산 말고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광신, 기사적인 열정, 속물적 감상주의와 같은 가장 성스러운 황홀경으로부터 벗어나 이해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빠져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가치를 교환 가치로 전락시켰으며, 포기할 수 없는 수많은 특권적 자유 대신에 오로지 비양심적인 자유, 즉 자유로운 거래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착취형태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고 노골적이고 잔인한 착취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명예로운 모든 직업에서 그것의 후광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의사나 법률가나 성직자나 시인이나 학자를 자신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가족끼리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는 가족 관계를 오로지 금전만 따지는 관계로 전락시켜 버렸다.
중세에 야만적으로 힘을 과시했던 모습을 이제 반동 세력이 대단히 찬양하고 있는데, 부르주아지는 그런 모습이 가장 심각한 게으름을 적절하게 물리치는 도구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주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 지 가장 먼저 보여 주었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로마의 수로와 고딕식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부르주아지는 민족 대이동이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모든 역사적 사건보다 훨씬 획기적인 원정에 성공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형성된 생산 관계를 혁신할 수밖에 없고, 그 생산 관계에 따른 임금 노동 전체를 혁신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훨씬 오래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계급들의 생존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낡은 생산 양식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생산이 지속적으로 혁신되고, 모든 사회적 조건이 끊임없이 혼란을 겪고, 불안과 동요가 항상 지속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시대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다르다.
굳어지고 단단히 냉각되어 버린 모든 관계는 예로부터 오래된 일련의 편견이나 견해와 함께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관계조차도 미처 제자리를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관계가 되어 버린다. 굳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사라지고, 신성한 것들은 모두 다 능욕을 당한다. 마침내 인간은 자기의 진정한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족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산물을 팔기 위한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구 곳곳을 누비면서 돌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곳곳에 정착하면서, 모든 곳과 거래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계 시장을 이용함으로써,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는 범세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동 세력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국내적 기반을 그 토대부터 파괴해 버렸다.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온 모든 국내 산업이 이미 파괴되었거나 매일같이 파괴되고 있다. 그러한 국내 산업은 새로운 산업에 의해 떠밀려나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새로운 산업의 도입이 모든 문명국가의 사활적 문제가 되고 있다. 새로운 산업은 이제 더 이상 자국 내의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가져 온 원료를 가공하는 특성을 띤다.
또한 새로운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소비된다. 국산품으로 채워졌던 과거의 수요를 대신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과 나라의 생산물이 아니면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수요가 생겨난다. 지역적이고 국내적으로 격리된 채 자급자족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 대신에, 국가들이 모든 방면에서 교류하면서 전면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한 교류는 물질적 생산이나 지적 생산을 막론하고 모든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개별 국가의 지적 생산물이 공동 자산이 된다.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국가는 점차 존재하지 않게 되고, 지역적이고 국내적인 차원에 머무는 수많은 문학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차원의 문학이 형성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급속하게 개선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편리해짐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가,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종족조차도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저렴한 상품 가격은 야만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매우 집요하게 품고 있는 증오심까지도 굴복시키는 강력한 무기이다. 부르주아지는 멸망을 조건부로 삼으면서 모든 국가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도입하도록 강제한다. 부르주아지는 문명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 예컨대 모두가 스스로 부르주아가 되도록 강제한다. 한마디로 말해,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본뜬 세계를 창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 하에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나서 농촌 인구에 비해 도시 인구를 크게 증가시킴으로써, 상당수의 인구를 무지몽매한 농촌 생활에서 구제했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에 종속시켰던 것처럼, 미개국과 반(半)미개국을 문명국에, 농업 국가를 부르주아 국가에, 동양을 서양에 각각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과 재산과 인구의 분산 상태를 점차 해소한다. 부르주아지는 인구와 생산 수단을 각각 집중시켰고, 소수의 수중에 부를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초래되었다. 이해관계와 법률과 정치 체제와 세제가 각자 다르게 독립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지방들이 단일한 정치 체제, 단일한 법률 체계, 단일한 국가의 계급적 이해, 단일한 국경선, 단일한 관세 제도를 유지하는 단일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지배 기간 동안에 과거의 모든 세대가 이룩했던 생산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강력하면서도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 냈다.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지배, 기계, 공업과 농업에 대한 화학의 이용, 증기선을 이용한 항해, 철도, 전신, 경작지 확보를 위한 모든 대륙의 개간, 운하 개설이나 하천 이용,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 등 이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일찍이 어떤 시대에도 예측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은 부르주아지가 쌓아올린 토대로서 봉건 사회 내부에서 발생되었다. 이러한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자, 봉건 사회의 생산 조건과 교환 조건, 공장제 수공업과 농업으로 이루어진 봉건적 질서, 요컨대 봉건적 소유 관계는 이미 발전한 생산력에 이제 더 이상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엄청나게 방해했다. 그것은 분쇄되어야 했고, 마침내 분쇄되고 말았다.
자유 경쟁 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섰고, 그에 적합한 사회정치제도가 수립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유사한 움직임이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산 관계와 교환 관계와 소유 관계로 이루어진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회로서,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주문으로 불러 낸 지하 세계의 세력을 이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와 유사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에 걸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력이 현대의 생산 조건, 즉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지배를 존속시키기 위한 조건에 속하는 소유 관계에 맞서 저항해 온 역사에 불과하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립을 각 시기마다 더욱더 위협적으로 위기로 치닫게 하는 상업 공황이 그 점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공황이 발생할 경우, 현존하는 대부분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과거에 쌓아 온 생산력의 상당 부분마저도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상업 공황이 발생하면, 과거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졌던 일종의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만연한다. 사회는 갑작스럽게 잠시 야만적인 상태로 퇴보한다. 마치 기근이나 파괴적 전면전이 발생한 것처럼 모든 생활 수단이 공급되지 못하고, 공업과 상업이 파괴되어 버린 상태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너무나 지나치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생활 수단이 지나치게 풍부하고, 공업과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의해 좌우되는 생산력은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생산력이 이러한 소유 관계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한다. 또한 생산력이 이러한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부르주아 사회 전체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이 너무나 열악해서 생산력에 의해 만들어진 부를 포용할 수 없다.
부르주아지는 이 공황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을 강제적으로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기존의 시장을 훨씬 철저하게 착취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바꿔 말해서, 그런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훨씬 광범위하면서도 파괴적인 공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제도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는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향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무기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무기를 자신에게 겨눌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현대의 노동 계급을 만들어 냈다.
부르주아지, 바꿔 말해서 자본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 계급도 발전한다. 현대의 노동 계급은 오로지 노동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고, 자신의 노동이 자본을 늘려 줄 경우에만 노동할 수 있다. 이 노동자들은 다른 온갖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따로따로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어쩔 수 없이 변화무쌍한 경쟁과 변동이 심한 시장에 내맡겨진다.
기계가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분업이 확대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독특한 특성을 모두 상실해 버림으로써 장인다운 온갖 매력을 잃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는 기계의 부속물이 된다. 가장 단순하고 단조롭고 배우기 쉬운 요령만 그들에게 요구될 따름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경우에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생산 비용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모든 상품 가격은 상품의 생산 비용과 같으므로 노동력의 가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단순해질수록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 게다가 기계 이용과 분업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 시간이 연장되거나 정해진 시간 내에 요구되는 노동량이 증가하거나 기계의 운전 속도가 빨라지는 방식으로 노동 강도가 그만큼 높아진다.
현대의 산업은 가부장적인 장인이 경영하는 소규모 작업장을 산업 자본가가 경영하는 대규모 공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노동자 대중은 공장에 집결하여 군대식으로 편제된다. 노동자 대중은 산업 군대의 병사로서 장교와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위계질서의 명령 체계를 따른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노예이면서 부르주아 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나날이 시시각각으로 기계와 감시자, 특히 각각의 부르주아 공장주의 노예가 된다. 이러한 독재 체제가 영리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더욱더 노골적으로 기여할수록, 그 체제는 더욱더 인색하고 가증스럽고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육체노동의 경우, 기술과 체력을 점차 덜 필요로 하는 성격을 띠어 갈수록, 즉 현대의 산업이 한층 더 발전할수록,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성별과 연령별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노동자 계급에게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없다. 오직 연령과 성별에 따라 비용이 적게 들거나 많이 드는 노동 수단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노동자가 공장주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나서 마침내 현금 형태로 임금을 받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지, 즉 지주나 상점 주인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이 노동자를 못살게 군다.
소매상과 가게 주인과 몰락한 소매상과 수공업자와 농민과 같이 훨씬 낮은 계층에 속하는 중간 계급 모두는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소규모 자본은 대규모 공업을 경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자본가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몰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 방식이 출현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전문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에 속하는 인구로부터 보충된다.
메테르니히
“나 메테르니히(C.W.L. Metternich, 1773년~1859년)는 독일의 정치가이자 수상으로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고 보수 반동의 대명사로 불렸지.”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친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그 계급이 형성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게 맞서, 맨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투쟁하고, 그 다음으로는 동일한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산업 분야에 속한 노동자들이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생산 조건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생산 수단 자체를 공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경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수입 상품을 파괴하고,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을 불태우고, 이미 사라져 버린 중세의 직인 신분을 막무가내로 되찾으려고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전국에 흩어진 채 여전히 지리멸렬한 상태의 대중으로서 존재하면서 그들 서로 간에 경쟁하기에 급급하다. 노동자들이 어느 곳에선가 단결하여 훨씬 견고한 조직을 형성한 경우, 그러한 성과는 그들이 능동적으로 단결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필요에 의해 단결을 이루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동원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여전히 한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이 상대하는 적, 즉 절대 군주제의 잔재인 지주로서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부르주아인 프티부르주아와 싸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적 운동 전체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집중되고, 그렇게 해서 쟁취한 모든 승리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훨씬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자신의 세력이 커져 가면서 그러한 힘을 자각한다. 기계 탓으로 노동 간의 모든 차별성이 사라지고 거의 어디서나 임금이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 조건은 점차 똑같아진다. 부르주아들 사이에 경쟁이 격화되어 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상업 공황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은 더욱더 불안정해진다. 기계가 훨씬 빠른 속도로 점차 개선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계는 점점 불안정해진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차 두 계급 사이의 충돌이라는 성격으로 바뀌어 간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에 맞서는 단체, 즉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그들은 이처럼 우발적으로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 미리 대비할 목적에서 상설 조직을 만든다. 여기저기서 투쟁이 발생하여 폭동으로 바뀌어 간다.
때로는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다. 그러한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지금 당장 얻어지는 결과에 있지 않고 노동자들의 단결이 한층 더 강화되는 데 있다. 현대의 산업이 이룩해 낸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이러한 단결은 강화된다. 바로 이러한 교류를 통해 동일한 성격을 띤 수많은 지역 투쟁이 전국적 규모로 진행되는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된다. 하지만, 모든 계급투쟁은 일종의 정치 투쟁이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탓에 중세의 자유민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 낼 수 있었던 단결 수준을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철도가 발달한 덕분에 수년 만에 이루어 낸다.
기조
“나 기조(F.P.G.Guizot, 1787년~1874년)는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로, 7월 왕정 하에서 수상을 지냈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적 정치를 펼쳤어.”
이처럼 프롤레타리아를 단일한 계급으로 조직화하고, 그 결과로서 단일한 정당으로 조직화하는 일은 노동자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 때문에 끊임없이 실패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화는 훨씬 강력하게, 훨씬 굳건하게, 훨씬 위력적으로 계속해서 시도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 내부가 분열되어 노동자들의 특정한 이익이 법적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 사례로서 영국에서 ‘1일 10시간 노동법’이 실현되었다.
대체적으로 낡은 사회의 계급들 사이의 갈등은 여러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과정을 촉진한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처음에는 귀족과 투쟁했고, 나중에는 산업 발전에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지와 투쟁했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 항상 투쟁했다. 이 모든 투쟁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 무대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누려 온 정치적 일반교양의 요소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달리 표현해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대항할 무기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지배 계급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최소한 그들의 생존 조건이 위협받는다. 이들도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마침내 계급투쟁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지배 계급의 내부, 즉 사실상 낡은 사회 전체의 내부가 해체되는 과정이 아주 격렬하고도 명백한 특성을 띠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일부가 지배 계급으로부터 이탈하여 혁명 계급, 즉 미래를 자신의 수중에 장악한 계급에 가담한다. 따라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쪽에 가담했듯이, 이제는 부르주아지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가담한다.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중에서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가담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진정 혁명적인 계급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나머지 계급들 모두는 현대의 산업이 발전하면서 몰락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하위 중간 계급들, 즉 소규모 생산자, 상점 주인, 장인,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 계급의 일부로서 자신들의 존재가 소멸되지 않게 하려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 성격을 띠지 않고 보수적 성격을 띤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쪽으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동적 성격을 띤다.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될 절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는 경우에만 그들은 혁명적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위험한 계급’, 즉 사회의 쓰레기와 다를 바 없이 낡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한 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부패되어 가는 집단7)은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 속으로 흡수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조건 때문에 그들은 반동적 모략에 매수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처지를 살펴보면, 사실상 낡은 사회는 이미 전반적으로 수렁에 빠져 버린 상태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재산이 없다. 처자식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 관계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현대의 산업 노동, 즉 자본에 대한 현대적 예속으로 인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이나 독일이나 가릴 것 없이 어느 국가에서나 프롤레타리아는 국민적 성향을 모두 다 상실해 버렸다. 법률이나 도덕이나 종교나 모두 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매우 엄청난 부르주아적 편견에 불과하고, 그만큼 그 배후에는 부르주아적인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다.
과거에 지배권을 장악했던 모든 지배 계급들은 사회 전체를 자신들의 독점적 소유를 보장하는 조건에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확보한 자신들의 지위를 굳히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자신들의 독점적 소유 양식을 폐지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유지해 온 여타의 모든 독점적 소유 양식마저도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생산력을 장악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기 소유물이 아무것도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일어났던 모든 역사상의 운동은 소수자의 운동이었거나 소수자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 다수자가 참여하는 의식적이고 자주적 운동일 뿐만 아니라 압도적 다수자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는 바, 공공 조직의 상부 구조 전체를 철저히 해체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어설 수도 없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비록 내용상으로는 아니지만, 외형상으로 맨 처음에 일국적인 성격을 띤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마땅히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일소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발전 단계를 서술하면서, 성격이 다소 분명치 않은 내란이 기존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서 폭발적으로 공공연한 혁명으로 발전되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폭력으로 타도한 다음에 자신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까지 고찰했다.
공산당 선언 본문 이미지 2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처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유형의 사회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적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특정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려면, 피지배 계급이 적어도 예속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조건은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코뮌의 구성원으로서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고, 마찬가지로 봉건적 절대주의의 속박에 묶여 있던 프티부르주아는 부르주아로서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시도했다.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노동자는 산업 발전에 따라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생활 조건 이하로 더욱더 열악해지고 있다. 그들은 극빈자로 전락하고, 구호를 필요로 하는 대상자는 인구나 부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간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존재하면서 억압적 법률을 행사하여 자신의 생활 조건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행위가 이제 현실에 맞지 않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르주아지가 지배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노예들에게 생활 조건을 보장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로부터 부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부양해야 할 만큼 그들이 딱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지배 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꿔 말해서, 부르주아지의 존립은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
부르주아 계급이 존립하면서 지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본 형성과 자본 증식이다. 자본의 존재 조건은 임금 노동이다. 임금 노동은 오로지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 관계에만 기반을 둔다. 부르주아지가 자신도 모르게 산업 발전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상호간의 경쟁으로 인해 고립되기보다 상호간의 교류 관계를 통해 혁명적으로 단결한다. 따라서 현대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기반 자체가 부르주아지가 서 있는 발밑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을 생산하는 셈이다.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모두 다 피할 수 없다.(······)
각주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는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서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현대의 자본가 계급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현대의 임금 노동자 계급으로서 아무런 생산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생존하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다. - 1888년의 영어 판/엥겔스의 주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당 선언 [Communist Manifesto] -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바꾼 연설과 선언, 2006. 1. 15.,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