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ed byMarc Webb
Produced by
  • Karen Lunder
  • Andy Cohen
Written byTom Flynn
Starring
Music byRob Simonsen
CinematographyStuart Dryburgh
Edited byBill Pankow
Production
company
Distributed byFox Searchlight Pictures
Release date
  • April 7, 2017 (United States)
Running time
101 minutes[1]
LanguageEnglish
Budget$7 million[2]
Box office$29.8 million[3]


천재 소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고 싶은 아들(소녀의 외삼촌)과 천재로서의 재능을 키워서 뭔가 이루어 보려는 모친(소녀의 외할머니)의 대립과 전개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자식이 천재가 아니어서 화가 나는 삶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아줌마, 아저씨의 눈으로 볼 땐 이 무슨 복에 겨운 이야기인가 할 수도 있지만,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 땅에 간혹 나는 '천재'들이 실재 그들의 삶은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하였는지...

실재 천재를 자식으로 둔다면, 

그리고 천재 집안의 천재 여동생의 오빠로서 조금 덜한 천재지만 천재이기는 마찬가지인 이 남자가 자신의 대학교수직도 포기하고 작은 바닷가 마을에 평범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이 소녀를 다니게 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양육권을 다투면서 까지 '일상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과연 인생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반추하게 만든다고 생각된다.

가볍게 보고 살짝 들뜬 마음으로 생각해 볼만한 영화다.

그리고 천재소녀를 연기한 아역배우도 참 이쁘고 생동감 넘쳤고, 고민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캡틴 아메리카, 그리고 역시 천재 흑인여자로의 대찬 성공을 보여주는 영화에 출연했었던, Octavia Spencer의 조연 연기도 참 좋았다.



201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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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34 – 삼대 (三代) / 염상섭(廉想涉), 1897 ~ 196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 간주되는 염상섭이 쓴 이 작품은 30년대 서울의 보수적인 중인계층 출신으로 중산층 집안의 조씨가의 몰락과정을 그린 대표적 장편으로, 유교 전통사회에서 식민지시대, 근대사회로 변모하던 당시의 현실과 정신사의 이면을 빼어나게 그린 대표적인 가족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사실적 관찰을 통해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당대 젊은 지식인들의 다양한 초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a.생애와 작품활동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는 말을 즐겨 했던 염상섭을 두고 <<만약 그가 한국소설사의 첫머리에 없었다면 우리 문학이 얼마나 초라했을까>>라고 안도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의 존재는 우리 문학에서 <장인정신의 표본>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호는 횡보(橫步).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바 있는 선조로부터 <동몽선습 童蒙先習 >을 배웠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유아시절에는 부유한 편이었으나 부친이 한일합방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1911년 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나 이듬해 도일, 도쿄의 아사부 중에 입학한다. 그가 15세의 어린 나이에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의 집안이 문명개화의 세례를 먼저 받았다는 것, 그의 부친이 고위층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 등의 이유에서였다.

  1917년 그는 게이오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이때 몇 명의 일본정치가들에게 <조선독립론>을 써보낸 적이 있는데, 그의 성숙한 식견에 모두 놀랐다고 한다.

  1919년에 염상섭은 학비조달 불능으로 게이오 대학을 중퇴하고 이때의 오사카 거주 동포들을 상대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대거 궐기를 위해 텐노지 공원에서 현장을 미리 검색하려다 체포된다. 그는 금고 10월형을 받았으나 무죄 석방된다. 당시 도쿄에서는 무산계급의 해방을 부르짖는 노동쟁의가 치열했는데, 그 역시 이에 공감하고 석방된 후 어느 인쇄소에 직공으로 취직, 노동자 생활을 통해 투쟁의식을 키우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20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기자가 되고 동인지 <폐허>창간에 참여하기도 하나, 이내 신문사를 사직하고 오산중학 교원으로 가며, 평론 <자기학대에서 자기해방에>를 발표하고 문학 비평가의 역할문제를 에워싸고 김동인과 논쟁을 벌인다.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21년분터 시작되는데, 이해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 문단에 동단하며 특히 김동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22년에 단편 <제야>, 장편 <만세전> 등을 발표, 사실주의 문학세계를 구축해간다. 특히 <만세전>은 식민지 치하의 암담한 시대적 현실을 묘사한 초기대표작의 하나다. 창작 외에 그는 또한 <개성과 예술>, <지상선을 위하여> 등의 평론을 발표,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론을 소개한다.

  25년에는 <시대일보> 사회부장에 취임하고, 단편 <금반지> <정화> <고독> <윤전기>, 27년에 장편 <사랑과 죄>, 단편 <밤> <두 출발> 등을 발표, 사실주의에의 경도가 더욱 농후해진다.

29년에 결혼하며 <조선일보> 학예부장에 취임, 장편 <광분>, 단편 <똥파리와 그의 아내>를 발표, 점차 작가로서의 원숙기에 접어든다. 

31년에는 <조선일보>를 시작하나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 그의 문학의 원류를 형성하는 한편, 장편 <삼대>, 그 속편인 <무화과>와 <백구>를 차례로 발표한다. <삼대>는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3대에 걸친 가족의 세대변천과정을 통해 일제시대의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그의 가장 뛰어난 대표작이다.

  36년 염상섭은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가며, 이후 장편 <불연속선>, 단편 <실직> 등을 발표, 해방 직전까지는 안동 대동항 건설국의 홍보담당관으로 일한다. 45년 안동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만주거류민단 부단장이 되어 <거류민보>에 힘쓴다.

  46년에 귀국한 그는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에 취임, 언론계에 종사하며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이 무렵부터 625동란까지 발표한 주요작품으로는 단편집 <첫걸음>을 비롯하여 48년에 단편집 <삼팔선> <재회>, 49년에 단편집 <해방의 아들>, 그리고 그의 후기의 대표적인 단편들인 <임종> <두 파산> <1대의 유업>, 50년에 <굴레> 등이 있다.

  51년에 동란 중 그는 해군 정훈장교로 종군하며 단편 <탐내는 하꼬방> <산도깨비> 등과 장편 <취우> 등을 발표한다. 54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고, 서라벌예대 초대학장으로 취임하나 폭음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러나 창작활동은 계속하여 55년에 단편 <짖지않는 개> <부부>, 57년에는 단편 <절곡> <동서> <돌아온 어머니>, 58년에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 59년에는 <싸우면서도 사랑은> <올수> <동기> 등을, 60년대에는 단편집 <일대의 유업> 등을 발표한다. 건강이 나빠진 염상섭은 62년 31문화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의 영예를 받으나 <사상계>에 <횡보문단회상기>를 연재하다 이듬해 신병으로 사망했다.


b.문학적 특성

  염상섭은 초기의 자연주의에서 출발했으나 후에 사실주의로 발전하여 끝까지 시종일관했다. 그는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한국 근대소설 초창기의 선구자이자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 근대소설사의 초기에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선구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며 최초로 자연주의 문학론을 제기한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문학사적 공적에 있어서는 그가 31운동 이후의 신문학운동의 선구자였다는 일반적인 공적 외에 근대적인 비평활동의 선구자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과,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최초의 작가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염상섭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일부 부정론도 제기되지만 일반적으로 비판적 긍정론이 우세하다. 그 평가는 관점에 따라 논의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여기서는 시대적 현실인식, 세정과 서민의식, 사실주의 등으로 요약해본다.


   1. 시대적 현실인식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두 장편 <만세전>과 <삼대>는 식민지 체재하의 당대적 현상의 충실한 묘사를 통해 작가의 현실인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작품이다.

  <만세전>은 식민지 시대문학의 수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1인칭시점 형식에 의해 서술되는 이 작품은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인 주인공이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향하려 하는 데서 시작하여 귀향 후 끝내 부인을 사별하고 다시 서울을 떠나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잇다. 식민지의 현실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관점이 시종 비판적 자조적이며 궁극적인 현실대응의 태도가 모호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은 식민지 사회양상의 폭넓은 제시를 통해 당대적 현실인식을 진지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만세 전>에 제시된 식민지 시대현실의 묘사와 작자의 현실인식은 <삼대>에서는 한 가정 속에서의 세대간 대립과 갈등이라는 양상을 통해 보다 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삼대>는 식민지시대 최고의 문학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만세 전>에서 직감적으로 파악한 한국현실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염상섭은 <삼대>에서 한 가족을 중심으로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결핍과 역사적 당위의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그의 현실인식은 <만세 전>에 비해 치열성이나 강열도가 약화되었지만, 그것이 폭 넓고 밀도 있는 작품구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야의 확대와 전지성의 심화를 느낄 수 있다.


   2. 세정과 서민의식

  그의 작품경향은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만세 전>이 대표하는 초기의 3, 4년을 지나면서 뚜렷한 변화를 드러낸다. 즉, 지식인의 우울과 침통이나 반항적 감정 등이 짙게 노출되어 있는 초기 작품세계에서 가족을 배경으로 일상서민의 생활의식과 세정을 치밀하게 그려나가는 평범한 사실적 작품세계로 변모하게 된다. 주관적 주체적인 색채가 감소되고 객관적 표현에 철저해지기 시작하며, 제재는 편협해지고 범속해지게 된다. <삼대>도 작품의 다양한 인물군과 확대된 시간적 배경으로 그러한 한계성을 상당히 극복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족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유사성이 있다.

  염상섭의 작품세계가 식민지 사회라는 거시적 방향에 시선을 돌리고 있지만, 식민지 시대의 세대교체 문제를 깊이와 폭을 가지고 다루고 있는 <삼대>의 세계와는 스케일이 다른, 서민들의 범속한 일상사와 세정을 미시적으로 그리는 작품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후자가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의 본류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그의 작가정신과 작품의 세계에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사실주의

  초기의 작품인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자연주의 속성을 보이기도 한 염상섭은 전반적으로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을 고수해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20년대의 다른 사실주의적 작가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실주의적 방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 관찰자적인 객관적인 태도에 있다. 그의 객관적 태도는 대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작자의 주관을 일절 배제하는 것으로 그 철저성에 있어 같은 사실주의 계열의 한국작가들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플로베르가 <<예술은 개인적 감정과 정서적 감정적 감수성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 비개인성의 입장을 철저히 실천한 것이 된다.


c.주요 등장인물

  조의관 : 조씨 가문의 가장으로 완고한 봉건의식의 소유자. 재산을 노린 후취 수원집 일당에 의해 독살당함.

  조상훈 : 조의관의 아들. 일본 유학생.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에 반감을 가진 계급운동의 심정적 동조자.

  김병화 : 덕기의 중학동창이자 마르크스주의자.


d.작품의 주요내용

 덕기의 조부 조의관은 고루한 봉건의식의 소유자다. 어렵사리 모은 거액의 재산으로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받들고, 가문의 명예를 키워나가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삼는다. 칠순 노인이면서 부인과 사별 후 서른을 갓 넘긴 수원댁을 후취로 들여 네살박이 딸까지 두고 있다. 조의관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아들 조상훈이다. 맏아들이면서도 집안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교회사업에 골몰해 집안의 돈을 바깥으로 빼돌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구나 조의관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봉제사를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고 반대하고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진다. 집안의 모든 일도 손자인 덕기와 의논해서 결정하고, 자신이 죽고 난 후 재산관리도 덕기에게 일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덕기의 부친인 조상훈은 희대의 위선자다. 미국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에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요 교회 장로인 그는 교회를 통한 사회운동과 교육사업에 큰 뜻을 품고, 집안의 재산으로 그런 사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하고 민족운동가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실생활은 구린내 나는 축첩과 노름 그리고 술로 얼룩진 만신창이 난봉꾼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살피던 운동가의 딸인 홍경애와 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낳고도 무책임하게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당대의 오입쟁이들이 출입하는 매당집이란 곳엘 드나들면서 나이 어린 여자들과 황음荒淫에 빠진다.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다른 신세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친구 김병화처럼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병화가 하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해도 그 자신은 법과를 마쳐 판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자신의 그런 꿈이 가끔 운동가인 병화의 조소를 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병화는 목사인 아버지와 사상대립으로 가출해서 이곳 저곳 떠돌면서 기식하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뜻을 절대 굽히지 않는 반면,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정면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던 조씨 가문의 불화와 암투가 전면에 드러난 것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생긴 재산분배 과정에서였다. 조의관의 후취인 수원집과 그를 조의관에게 소개해준 최 참봉 등은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유서변조를 계획하고 조의관을 독살한다. 의사들의 배설물 검사로 비소중독이 판명되자 상훈은 더 명확한 사인규명을 위해 사체부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범인을 찾기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손자 덕기가 나타나 수원집 알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산관리권은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상훈은 법적 상속자인 자신을 건너 뛰어 아들인 덕기에게 그 권리가 넘어가자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한편 사훈에게 농락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 버림받았던 홍경애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술집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꾸려가지만 해외의 독립운동가인 이우삼과 연계를 가지면서 그를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한다. 경애는 과거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병화와 자주 만나는 사이에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조그마한 잡화상을 경영하며 경찰의 눈을 속이지만 그것이 다른 운동가인 장훈 일파들의 오해를 사게 되어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한편 이우삼이 국내를 다녀간 뒤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 닥친다. 비밀조직인 장훈 일파는 물론, 가게를 운영하며 경찰의 눈을 피해왔던 병화와 경애도 검거된다. 그리고 덕기도 병화에게 자금을 대 주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장훈은 비밀유지를 위해 코카인으로 음독자살을 한다. 장훈의 자살로 갑자기 조사가 미궁에 빠지자 연행되거나 검거되었던 사람들은 다 풀려 나오게 된다. 가짜 형사를 등장시켜 금고와 문서를 훔쳐냈던 상훈도 결국 훈방조치로 풀려난다.

  덕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느끼면서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 얹힌 조씨가문의 유업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망연해한다.


e.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1932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한국 신문학사를 통해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30년대 서울의 이름난 만석군 조씨 일가를 무대로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이 3대가 일제 식민지 하에서 어떻게 몰락하고 어떤 의식을 지니며, 당시 청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가를 사실적인 수법으로 파헤쳐 인간심리를 미묘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대지주이며 재산가인 조부 조의관은 양반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족보까지 사들일 정도로 명분과 형식에 얽매인 봉건제도를 좇는 구세대의 전형이고, 아버지 상훈은 신문물에 물들어 이를 받아들이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자 하면서도 축첩을 하고 애욕에 사로잡혀 이중생활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과도기적 인간형이다. 아들 덕기는 선량한 인간성의 소유자이나, 조부와 아버지의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재산을 지켜나가는 일에 한정되어 적극성을 잃은 우유부단한 인간형으로 그려진다. 이 3대의 이야기는 조부의 죽음과 함께 재산상속문제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인물들의 추악성을 그려 보임으로써 절정을 이룬다. 덕기의 집은 조부가 죽자 쑥밭이 되게 망해버린다.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사이에도 불신과 갈등이 있어 한패끼리 잔인한 테러가 횡행한다. 불의의

테러를 당한 덕기의 애인 필순의 아버지는 늑골이 부러져 입원을 한다. 덕기는 열심히 간호를 했으나 필순 아버지는 그의 가족을 덕기에게 부탁하며 죽어간다. 덕기의 친구 병화가 추구하는 인강에의 길, 필순 아버지의 불행한 일생 등에서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삶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보이며, 끝으로 새로운 세대, 즉 덕기와 병화 들의 명확한 새 세계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변모해가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세대교체를 분명하게 보였다. 장편인 만큼 여러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나 주로 삼대에 걸친 31운동 당시를 전후한 시대상을 그린 작품이다.

  횡보는 <삼대>의 집필의도에 대해 <<새로운 뜻을 뼈로 삼고 조선현실 사회의 움직이는 모양을 피로 하고 중산계급의 사람과 그들의 생각을 살로 붙여서 그리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대 삶의 광활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소설 <삼대>는 이 같은 목표를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으며, 우리 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동세대의 다른 작가들이 추상적인 지식이나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그려나갔다면, 그는 진짜 사람들이 숨을 쉬고 사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삼대>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대>는 우리 소설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이자 리얼리즘의 승리로 손꼽을 수 잇는데, 그 이유는 서울토박이 언어감각을 살려 당시의 중산층 생활을 장편적 수준에서 구체적이고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30년대의 식민지 사회를 보여주는 데는 어떤 역사나 논문보다 이 소설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이 소설 이후 그는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시점, 장면제시와 개성있는 인물창조에 대한 소설화 방법을 정착시켰다.



B033 – 무정(無情) /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 ~ 195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장편소설.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문학에 대한 향학열, 자유연애관 등을 주제로 봉건적인 것을 비판, 새 시대 계몽을 꾀한 이상주의자적인 소설로 신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고전적 여성과 신 여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 지식인이 민족시대라는 개념에 눈을 뜨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이 소설에서는 자유연애 관념, 생명중시의 태도, 동서양 비교론, 근대화 방법론 등의 문제를 나름대로 인식하게 된다.


a.생애와 작품활동

 위기에 선 경계선의 작가 이광수, 그만큼 한 인물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그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춘원문학을 혹평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영욕을 함께해온 작가였다.

  우선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호는 춘원이고 소설가 언론인 평론가로서 활약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5살 때 국문과 천자문을 깨우쳤고, 8살 때 4서3경을 읽을 정도로 천재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다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에 유학했으나 학비곤란으로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학원에 편입, 이 무렵 홍명회 문일평 등과 함께 공부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등을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고 또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고는 그의 무저항주의에 공감한다. 또한 홍명회의 영향을 받아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당시를 풍미한 자연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린다.

  1910년에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에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그뒤 귀국하여 19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여 문학적 명성을 얻는다. 그의 출세작인 <무정> 속에 나타난 반봉건적 사상과 자율적 혁신적 애정관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청년학생층으로부터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유림층으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했으며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1921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 변절자의 비난을 받으며 본부인과 합의이혼하고 허숙영과 결혼한다.

  귀국 후 그의 문필활동은 계속되나 순탄치 않았다.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나 이 논문에 나타난 자학적 부정적 민족관이 문제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한동안 문단에서 소외받는다. 1923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를 연재 발표하나 안창호를 모델로 한 그 내용이 문제돼 총독부에 의해 중단조치된다.

  이광수의 문학적 특성은 1924년경부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즉, 그는 <영대> <조선문단>의 간행에 관여하는 한편 장편 <재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표명된 기독교적 인생관은 그의 종교적 전환을 시사해주는 것이 된다. 또한 26년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를 발표하여 역사소설의 장르를 개척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문학적 주조는 민족주의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그는 1930년 장편 <군상> 3부작을 발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당대현실의 비극성과 지향성을 제시하며, 이어 장편 <흙(1932)>을 발표, 그의 민족주의적 이상주의를 표현했다.

  40세를 전후하면서 그의 문학작품에는 이상주의와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반영된다. 33년 장편 <유정>을 통해 전신 지상주의적 애정관을 표현하는가 하면, 35년에는 장편 <이차돈의 사>를 발표, 종교 특히 불교 쪽으로의 뚜렷한 경도를 보여준다.

  <사랑>(1939)은 신문에 연재되지 않은 전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이광수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내인생을 솔직히 고백했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불교에 심취한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한다. <사랑>은 <유정>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쓴 <사랑>에서는 <유정>에 이어 정신 지상주의적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며 이로써 그의 후년의 종교적 경도가 심해진다.

  1940년을 전후한 무렵부터 그는 일련의 친일행위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다. 39년에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무명>을 발표하지만 소위 <북지황군위문단>에 협력, 이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이어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개명을 하고 적극적인 친일행각에 나서며, 41년에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의 강요로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연설을 한다. 4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권으로 한국인학생의 학병 권유자 최남선과 함께 도일한다.

  1945년 해방 후 그는 친일파로 지목되어 극심한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며 부인과 법적으로 이혼하는 등 시련을 겪으며 49년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의해 구속 중 병보석되었다가 50년 납북되었고 그 후 자강도 만포시에서 병사했다.

  작품에 있어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계몽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남겨 한국 신문학사상 공헌한 바 크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 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 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최남선에 협력하여 <소년> <청춘> 등의 편집과 집필에 참가하면서 언문일치 등 신학문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초기의 신체시인으로서, 또한 최초의 근대소설 작가로서의 한국 현대문학의 실질적인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초기에 강렬하게 보여준 민족주의 내지 계몽주의적 요소는 후일의 친일적인 행동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이 있어 친일작가로서의 비판도 여전하다.


b.문학적 특징

  이광수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객관적인 분석적 논의보다 극단적인 부정론과 긍정론의 두 갈래로 전개되어왔으나, 그의 사상적인 면을 배제한다면 #1신문학의 개척자로 최고의 작가라는 점 #2계몽주의 문학이며 설교문학이라는 점 #3역사의식이 다소 결여된 위선의 문학이라는 점 #4민족주의 인도주의 문학이라는 점 #5연애소설의 창시자이며 대중본위의 소설을 썼다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어 보인다.

  백철은 이광수 문학의 사상적 배경과 스케일의 광대함을 특색으로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하여튼 춘원 이광수는 우리 나라 현대작가에서 가장 큰 작가다... 춘원은 문명비평가인 동시에 하나의 사상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사상이 들어 있어서 작품의 큰 비중이 되었다. 그리고 사상도 동서로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먼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인도주의, 기독교사상 불교에 대한 연구, 우리 나라 고대사에 대한 지식 등은 춘원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작품의 스케일이 큰 점도 우리 나라 현대작가로 춘원을 당할 사람이 없다. 그 문학의 폭량이 넓고 문맥이 굵고 어조가 유창한 것도 이 작가의 큰 특색이다. 말하자면 춘원은 우리 현대작가 중에서 거대한 작가다운 면모를 가진 유일한 작가다.>>

  이광수의 문학적 특성은 그의 문학세계의 방대함으로 인해 요약하기가 쉽지 않지만 대략 민족주의, 계몽주의, 이상주의, 사실주의 등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민족주의

  그는 우리나라 최초최대의 민족주의 문학자다. 그의 평생에 걸친 작품 전체에 일관하는 가장 뚜렷한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주의이며, 그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연구의 동기도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와 의무의 이행>>에 있다고 천명했다. 그의 민족주의 이념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일관하는 주요한 사상적 바탕이지만, 일제 말 그의 친일행각과 관련하여 그 내용과 의의에 대해 많은 비판적 부정적 평가가 가해져 왔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그의 민족주의가 근본적으로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2. 계몽주의

  이광수의 문학적 동기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성을 띤 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한국민중을 계도할 선각자로 자임했고, 자신의 문학을 주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을 계몽, 선전하는 수단으로 강조했다. 그의 계몽대상은 당시의 지성인이 아니라 지적 수준이 낮은 순박한 일반대중이었다. 이러한 일반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민족주의 이념이나 사상적 신념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설교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계몽적 태도의 과잉노출은 한편으로 작품의 구조적 긴밀성에 손상을 주고 결과적으로 그 예술적 감동성을 약화시켰다.


   3. 이상주의

  이광수 문학의 이상주의적 경향은 천도교 - 기독교 - 불교의 과정을 거치는 그의 종교적 편력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의 문학은 처음부터 다분히 이상주의적 경향의 기미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그가 당시의 현실로 인한 압박과 좌절 및 비극성을 절감할수록 그의 문학에서 심화되어 드러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 이념을 표방한 그의 많은 작품 중에는 민족이 처한 현실의 비극성이나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의 이념의 실현을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과, 그러한 이념이 궁극적으로 실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과, 그러한 이념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이상의 세계가 한결같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 인물과 세계는 지나치게 미화되어 비현실적이기조차 하지만, 당시의 독자대중들에게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의욕과 생기를 북돋는 효과를 발휘했다.


   4. 사실주의

  이광수가 취한 사실주의적인 방법은 문체 면에서 근대소설적 구어체 문체의 확립과,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묘사체 문체의 사용 등으로 나타난다. 언어나 문체 외에 이광수의 사실주의적 방법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사실주의, 멜로드라마적이고 공식적인 플롯 구성법, 평면적이고 유형적인 인물설정 등의 결함 등에 의해 고도의 예술적 차원에로까지 승화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취한 사실주의는 그가 천명한 계몽주의이상주의 작가적 입장에 의해 스스로를 제약, 한정된 성과에 멈추고 만 것으로 보인다.


c.주요 등장인물

  형식: 경성학교 교사, 도쿄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와서 개화사상을 가르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영채: 형식의 옛 약혼자로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다.

  선형: 김장로의 딸로 신교육을 받은 새 시대의 여성. 형식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받다가 그와 친해진다. 형식과 약혼하여 미국유학을 가려 한다.

  병옥: 신사상을 가진 신여성으로 기차 안에서 자살하러 가는 영채를 만나 그녀를 계몽한다. 결국 영채와 더불어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d.작품의 주요내용

  이형식은 도쿄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경성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데 미국에 유학 가려는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지도 한다. 그러던 중 형식은 선형에게 매혹되어 차츰 연정을 품게 된다. 이 무렵 형식의 어린 시절 동무이자 옛 은사 박 진사의 딸인 영채가 형식의 하숙집에 찾아온다. 그녀는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있었다. 몸은 기생이라 해도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켜왔다는 영채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형식은 바야흐로 선형과 영채라는 서로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때 영채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는 배 학감으로 하여금 그녀를 청량사로 유인하게 하여 겁탈한다. 형식이 영채를 구하러 청량사로 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음날 형식은 영채가 있는 기생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채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 뒤다.

  그러던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도쿄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길이었는데, 영채의 신세에 대해 듣고는 영채를 교육하기 시작한다. 병옥의 말에 영채는 죽음을 택하는 대신 병옥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봉건적 관념에서 벗어나 신여성으로서의 자질을 길러 나간다.

  한편 형식은 영채에 대해 자책을 느끼며 그녀를 찾기 위해 평양으로 간다. 그는 미친 듯이 평양 거리를 헤매며 영채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한다. 그는 영채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돌아오니 김현수는 거짓 소문을 날조하여 형식을 경성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김 장로는 그러한 난관에 빠진 형식을 자기의 딸 선형과 결혼시켜 둘이 함께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데 신혼여행 겸 유학길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형식과 선형은 영채와 병옥을 만나게 된다. 영채는 병옥의 도움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이제 일본으로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 같은 우연한 만남 후 기차는 삼랑진 수해현장에 이르러 연착이 되고 만다. 형식과 영채는 담담한 마음으로 서로의 일행을 소개한다. 그들은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고 모두 한 일행이 되어서 수재민 의연금 모집과 민중계몽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함께 봉사활동에 임한다. 그들은 스스로 민족의 미래를 담당할 주체임을 역설한다.

  이때 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똑같이 <나의 할 일>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모두 한마음이 된 듯하다. 형식은 교육자가 되고, 병옥과 영채는 음악을, 선형은 수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들은 모두 조선을 위한 역군이 되려는 희망에 부푼다.


e.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평가 받는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며 당시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연재되었다. <무정>은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하는 획기적인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한일합방 후 일제 탄압 아래 신음하는 동포의 민족주의 사상을 밑바탕으로 1910년대의 시대상을 형상화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사상, 자유연애관과 신결혼관, 그리고 기독교 신앙 등을 주제로 하고 일체의 봉건적인 것에 대한 비판과 새 시대의 계몽을 꾀한 이상주의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타난 남녀간의 윤리가 지배적인 세대에 있어서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으로 한때

사회적인 비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차차 새로운 시대사조로 새 세대의 환영을 받게 되었다. 작중인물의 대부분은 외국유학까지 마치고 온 지식계급, 이들은 새 시대의 인간상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당시 독자에게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주요 등장인물의 특수계급화로 대중과의 유리는 피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또한 작중인물인 이형식과 김선형은 막연한 인텔리 근성으로, 시급한 민족주의 각성을 구호로 하거나 당시의 민중의식을 포착한 리얼리즘의 소설이 아닌 계몽문학 또는 이상주의 문학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신소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없지 않으나, 세련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구성이나 대화나 장면묘사 등 현대소설적인 조건을 갖추고 봉건잔재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31운동 이후 한국 현대소설을 가능케 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작품을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는 근대적인 의식과 자아각성이 보인다는 점, 서술이 비약적 추상적인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이 되었다는 점,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탈피했다는 점, 구어체에 접근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정>은 계몽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근대적 문학인식은 김동인 주요한 중심의 동인지 <창조>가 나오면서 비로소 확산되기 시작했다.

  <무정>의 계몽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관계유형은 교사 - 학생 관계다. 첫 장면부터가 선형을 가르치러 가게 되는 이형식의 묘사이며, 선형 - 형식 외에도 노파 - 형식, 영채 - 병옥, 영채 - 기생 월화 등의 관계가 모두 사제관계다.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는 삼랑진 수해장면에서 이 점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형식이 우선 선형 영채 병옥에 대해 교사로서의 권위를 회복함에 의해 소설이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통일성도 부족한 형식의 성격은 교사로서의 그의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확신에 찬 선각자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교사는 학생을 계몽하고 학생은 다시 학생들을 찾아 나선다. 이것이 <무정>의 계몽주의다.

  그러나 1917년 당시만 해도 독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수용되었던 계몽주의는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른 상황을 맞게 된다. 교육과 계몽에 의해 사회가 변화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춘원이 조선민족의 자기비하에 기반한 민족 개조론을 써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일은 계몽주의의 쇠퇴를 잘 보여준다.

  한편 그의 계몽주의는 그것이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민중을 계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그것은 춘원의 민족주의가 가진 본질적 한계와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무정>의 근대문학사적 의의는 #1자아각성에 바탕을 둔 자유연애 및 민족주의 등 근대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점 #2서구의 <novel>의 개념에 접근한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소설이라는 점 #3최초로 포괄적 획기적으로 당대의 사회사에의 접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 #4근대소설다운 한글문체를 최초로 완성시킨 작품이라는 점 #5최초로 성격창조를 실험하여 성과를 거둔 작품이라는 점 #6최초로 사실적 표현기법을 시도, 성과를 거둔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1950년 625동란 중 납북되어 강제로 끌려가던 중 그해 10월25일 만포에서 병사하였다는 그의 뒤늦은 부음은 어두웠던 우리의 근대사를 생각케 한다. 1939년 이후 변절한 그의 친일행각이나 625중 <<두 번 다시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며 북으로 끌려가, 문우이던 벽초 홍명회의 위로도 아랑곳없이 행려병자처럼 외롭게 죽어간 한 예술가의 슬픈 운명 앞에 뒤늦은 조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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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一進會 ]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사회운동단체, 친일단체

설립일시

1904년

해체일시

1910년

설립자

송병준, 이용구

목차

정의개설연원 및 변천의의와 평가

정의


1904년에서 1910년 사이 송병준의 유신회를 개칭한 일진회에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 통합한 친일단체.


개설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었고, 유신회는 1904년 8월 20일 일진회로 개명하였다. 유신회는 1904년 8월의 유신회 취지서 전문을 통해 정치개혁을 중심으로 한 시정개선을 표방하였고, 이것은 일진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면서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일진회는 취지서에서 유신회보다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지향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황실존중과 국가기초 공고, 인민의 생명재산 보호, 정부의 정치개선 실시, 군정 재정의 정리 등으로 요약되었다.


그러나 일진회가 추구한 근대적 문명지상주의는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그 성격이 점차 변질되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추진과 다각적인 매수공작, 한국주차군사령부의 적극적인 지지와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후원 등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확보·유지하기 위한 수단들이 맞물리면서 이후 일진회는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군사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전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접촉하여 1904년 8월 18일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임시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하였다. 20일 회명을 일진회로 개칭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 무렵, 송병준은 이용구의 진보회(進步會)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해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하여 그해 12월 2일에 진보회를 흡수해 일진회로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13도 지방총회장에 이용구와 평의원장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이후 1905년 12월 22일 총회에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을 선출하였다.


일진회의 운영에 관한 재정은 표면상으로는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러일전쟁 중 일본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 지방의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였고 함경도에서 간도에 이르는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의 동태를 정찰하였다. 또한 을사조약 체결에 앞서 외교권 이양을 제창한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헤이그특사 사건을 이유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진회의 움직임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대한 방향과 병행되어 나타났다. 1907년 7월 고종의 양위와 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항일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 함께 일진회도 ‘자위단’을 조직해 의병탄압에 앞장서는 한편, 일제의 합방요구에 호응해 일진회장 이용구와 100만 회원 이름으로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이른바 ‘정합방 상소문’을 제출하고, 국민 2천만 동포에게 서고(誓告)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진회의 간부나 회원 중에서 탈퇴하는 자가 속출하였고 각계각층으로부터 성토와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일진회는 일제의 한국병탄을 위해서 매국적 소임을 다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데라우치 통감에 의해 그해 9월 12일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진회가 대한제국기 후반에 등장한 수많은 사회단체 중 유일하게 1904년 8월부터 1910년 9월까지 6년여의 긴 시간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을 모델로 한 문명개화노선과 국내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위한 계획과 실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반된 일본과의 협력은 초기 일진회의 성격이나 내적인 계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망국을 초래한 매국단체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진회 [一進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032 – 구운몽(九雲夢) /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 - 169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인간의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이라는 주제의 소설로 조선 중기의 문인 김만중이 쓴 소설이다.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8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해 인간계에 양소유로 환생하여 역시 이승으로 환생한 여덟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부귀공명을 누리다 보니 마침내 그것이 한바탕 허무한 꿈이었음을 깨닫는 내용의 소설로, 조선후기 몰락한 양반들의 회고적인 꿈을 그린 작품이다. 현실과 꿈, 유교와 불교, 천상과 지상의 세계라는 상호 대립적인 세계를 설정하고, 꿈속에서 부귀와 공명을 추구하다가 문득 꿈에서 깨어나는 주인공을 통하여, 인간 역사상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물음인 현실적인 삶의 의미와 초월적인 깨달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고대소설의 전범이다.


a.생애와 작품활동

 서포의 어머니는 흔히 맹자의 어머니와 비유되곤 한다. 자식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소설가. 호는 서포.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오로지 어머니 윤씨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했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베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봐 어린 자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한다.

  <소학> <당시> 등을 윤씨가 직접 가르쳤고 <맹자> <중용> 등은 곡식을 주고 사서 읽혔으며, <좌씨전> 한 질이 있으나 그 값이 너무 비싸 아들이 감히 말을 못하고 있자, 부인이 베틀 가운데의 베를 끊어 주었다고 한다. 또 이웃이 옥당서리를 알게 되어 홍문관의 <사서>와 <서경언해>를 빌려내어 손수 이를 베껴서 자식들에게 주었다 하니 자식들의 학업성취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후일 서포가 학자로 성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포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165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수찬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직언도 불사하는 강직성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김>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조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변덕쟁이 임금인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 <사씨남정기>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으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 점 등에서 사상의 진보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문학이론에서의 진보성을 보여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허균의 뒤를 이어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나타난 그는 우리 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즉, 소설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에 있어 소설의 가치를 인식,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구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국자의식은 높이 살 만하며, 특히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나,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로 유배지에서 쓴 <구운몽> 같은 국문소설의 창작은 허균을 잇고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b.저작 동기 및 작품 해설

 서포가 이 작품을 저작할 당시는 영어의 상태였고 부친의 분사, 모친의 병환 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자기의 가계를 생각할 때 자신의 심정은 그야말로 서인파의 중진으로서 벼슬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포 모친의 병환은 날로 더해가고 가계의 사정은 더욱 절박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세상을 등져야 할 체념적 인생관 속에는 변화불측한 꿈만이 남았다. 고향의 소식은 끊기고 몽매간에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 그래서 여기에서 <구운몽>은 출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운몽>은 모친의 무료함을 덜고 위로할 목적으로 단시일에 저술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는 3교화합의 이상화이다. 서포는 이 현묘하고 심도있는 3교의 이상화를 실제로 정치와 생활에 반영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그래서 3교의 이상적 실천화를 위해 <구운몽>을 저작한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인간의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이라는 소설로 숙종 때의 몰락해가는 귀족들의 회고적인 꿈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구운몽>을 저작할 당시 서포는 <사씨남정기>의 실패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유로써 입신출세할 서포였으나 이미 어렵게 되어 도와 불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유교의 현실적 실천과 불교의 내세적 이념과 도교의 고답적 도피사상의 각축장을 조성하면서도 결국은 불가의 숙명론적 세계에 귀의케 하는 성진의 생애야말로 흥망성쇠를 한 깃 숙명에 되돌리고 모든 인생의 희비애락을 일장춘몽으로 결론짓는 서포의 마지막 패러독스는 드디어 이차원의 인생관종교관으로 귀일하게 하는 유일의 허무사상, 바로 이것이 <구운몽>의 주제인 것이다.

  서포는 이 작품에서 영원한 안주의 세계를 희구하는 내세주의에 모든 것을 귀결시키고 향락이나 부귀공명도 거부하고 영원한 구원을 열망한다. 전생에 약속한 윤회의 세계로 다시금 돌아가는 인간이 여기에 있다. 즉,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속의 허망한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사상을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의 3교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현실 - 꿈 - 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재미있게 꾸몄다.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놓은 점은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다음으로 <어머니 콤플렉스>가 작품 전면에 나타난다. 선계에서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용궁에 가서 술을 마시고 대접을 받고 오다가 돌다리에서 8선녀를 만나는 것이 도입부의 <어머니 콤플렉스>로 볼 수 있고, 양소유가 토번국을 칠 때 꿈속에서 용궁에 초대되어 용녀인 백릉파와 가연을 맺는 것은 전개부의 <어머니 콜플렉스>라 할 수 있다. 또한 서포는 <구운몽>에서 작가 자신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들은 정부인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부모를 여의였거나 형제자매가 없다. 유복자 서포가 갖는 인간적인 동정은 자신의 슬픔이나 그의 모당 유부인의 고독까지도 생각하여 주인공들이 같은 처지에서 화해를 모색케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서포의 진보적 사상이 돋보이기도 하는데, 양소유의 두 부인과 여섯 첩에서 낳은 자녀들은 모두 적자서자의 구별 없이 벼슬을 한다고 그리고 있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서포의 유머 감각 역시 뛰어난데, 선의의 속임수를 작품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즉, 양소유가 여장하여 정소저를 만나고, 춘운이 선인귀신으로 둔갑하여 양소유와 정을 맺는다는 점, 또는 황태후가 양소유에게 정소저의 죽음을 거짓 알린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선의의 거짓은 오히려 무의미한 인간세상에 위트로서 나타난다.


c.작품의 주요내용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에서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 성진을 용왕에서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 위부인이 8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리려 한다. 용왕의 후대로 술에 취해 돌아오던 성진은 8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8선녀의 미모에 도취,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해 8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되고 다시 인간세상에 환생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의 양 처사의 아들로 내어났는데, 양 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집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 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마음이 맞아 혼약한다. 그때 구사랑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서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에 참석했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두련사의 주선으로 여관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기 위해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인연을 맺도록 한다. 이 때 하복의 새 왕이 역모를 꾸미니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린다.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정을 나누었는데, 이튿날 보니 하복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 예부상서가 된다.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가 베푼 주석에서 양소유를 보고 애가 탄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는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지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 날 밤 난양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임금의 사위)로 간택되지만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그때 토번왕이 쳐들어와서 양소유가 대원수로 출전된다. 진중에서 토번왕이 본낸 여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양소유는 백룡담에서 용왕의 딸인 백룡파를 도와주고 그녀와 또 인연을 맺는다. 그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에게 혼약이 물리침을 당해 실심에 빠진 정경패를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탄하여 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해지고 영양공주난양공주와 혼인한 데 이어 진 궁녀와 만나 동침하는 가운데 진채봉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노모를 찾아가 경사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룡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다. 그뒤 양소유는 2처 6첩을을 거느리고 일가화락한 가운데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비애에 잠긴다. 이에 9인이 인간세계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자고 할 때, 호승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꿈에서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와 전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8선녀가 찾아와 대사의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대사가 설법을 베푸니 성진과 8선녀의 본성을 깨우치고 적멸의 대도를 얻어 극락세계에 돌아갔다고 한다.


d.서포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서포는 복잡다단한 생을 살다 갔는데, 그 모진 인생의 종국의 결산이 <구운몽>이라 한다면, <구운몽>은 위대한 인생 체험기라고도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운몽>은 문학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 이 작품은 고대소설 창작에 있어서 전범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소설문학으로 진입하여 허균의 <홍길동전>으로 일단 진보를 보였을 뿐 그후 모든 소설이 전기작품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전기적 요소가 불식되고 현실적인 인생문제가 주제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로 인해 우리의 고대소설의 형식이 완성되자 바야흐로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한글소설이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옥루몽>과 같은 <몽>자 소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2) 작가의 인생관의 반영문제이다. 흔히들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라고 하고 소설은 작가의 영상이라고도 하는데, <구운몽>은 서포의 생생한 인생축도를 암시해놓은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이루지 못한 인간의 이상을 작품에서 독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명리와 야욕이 있고 여자와 영화가 있고, 종교와 학문이 있다. 이것이 서포가 현실에서 추구한 인생관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포는 불교를 위시한 3교사상의 융화성을 역설했다.

 (3) 이 소설이 국문학사상 높은 평가를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어느 나라 말이든 그 나라 말만이 참된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순한글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는 점이다.

<구운몽>은 이후에 소설에 영향을 미쳐 이 작품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키는 작품들도 대거 등장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고대소설 창작의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히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으며 고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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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선녀의 꿈 속에서의 이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9A%B4%EB%AA%BD)


-진채봉

불심을 어지럽히는 죄를 짓고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 팔선녀 중 한 명이다. 양소유가 과거를 보러 장안으로 상경하는 도중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팔선녀. 진나라 화주에서 모친을 일찍 여의고 부친을 홀로 모시고 있었다. 부친인 진 어사가 서울로 떠나 잠시 자리를 비워 진채봉이 혼자인 사이에, 산수를 즐기다 버드나무를 보며 시를 지어 읊는 양소유의 소리에 누각에서 봄잠을 자던 진채봉이 깨어 서로 눈이 맞는다.

-계섬월

천하의 청루삼절이라는 세 명기 중 하나로, "강남의 만옥연, 하북의 적경홍, 낙양의 계섬월"이라 불릴 정도로 기생으로서 널리 명성을 떨쳤다.

-정경패

대대로 정승을 한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 사도의 딸. 재능과 미모, 양쪽 다 뛰어나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재상가의 처자인데다가 집안에 틀어박혀 외출을 안하기 때문에, 양소유가 정경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여장까지 해야 했고 난양공주가 정경패를 만나보려 할 때도 애를 먹는다. 특히 음률에 정통하여, 어머니인 최부인이 뛰어난 음악가를 데려와 정경패에게 그가 연주하는 곡조를 두루 평론하게 하여 풍류를 즐겼다. 이를 악용하여, 양소유가 정경패의 얼굴을 볼 계교를 짠다. 양소유가 여장을 하여 악공으로서 최부인을 찾아와 정경패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도중에 이에 대해 눈치 채게 된 정경패는 얼굴이 붉어지며 뛰쳐나간다.

-가춘운

정경패의 시종으로 정경패와는 친구, 혹은 그 이상의 관계이다.

-적경홍

강남의 만옥연과 낙양의 계섬월과 함께 하북의 적경홍으로써, 천하의 청루삼절이라 일컬어지는 명기이다.

-이소화

난양공주라고도 한다. 당 황제의 여동생.

-심요연

양소유가 장군이 되어 토번 정벌을 위해 갔을 때 토번에서 보낸 자객이었으나, 천장에서 양소유를 노리다가 세숫대야에 비친 양소유를 보고 그만둔다.

-백능파

동정호 용왕의 딸.


[8여인 간단정리]

홀로남은 부친을 모시는 효성스런 평민의 딸 – 진채봉, 

천하의 명기 – 계섬월, 적경홍(청루삼절이라는 천하의 당대 3명기중 둘을 ^^)

귀족집에 태어나 고이 고이 잘 자란 딸 – 정경패와 그의 레즈비언 커플 가춘운, 묘한 설정이지만 재밌음

공주 두명 – 당황제의 여동생과 용왕의 딸 – 이소화, 백능파

의외의 캐릭터, 자신을 죽이러 온 미모의 여자객이지만 자신에 반해서 첩이 되는 심요연



B031 – 송강가사(松江歌辭) / 정철(鄭澈, 1536 - 159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일상적인 우리말을 구사해 한문학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정서를 그려낸 한 폭의 진경산수화와 같은 작품집. <송강가사>는 가사문학의 주옥 같은 절창을 담은 송강 정철의 국문 시가집으로, 고전시가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관동별곡사미인곡 등 4편의 가사작품과 훈민가를 포함한 79수의 시조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영욕과 부침이 반복된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자연과 인간, 꿈과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형상화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과시한 한국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a.송강의 생애

 우리 국문학사상 쌍벽으로 꼽히는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를 두고 일반적으로 <장가의 송강>과 <단가의 고산>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이는 단가에서조차 송강의 절대우위를 선언하기도 한다. 단가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면 송각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문인으로 호는 송강. 동령부 판관을 지낸 부친과 대사간(시간원의 장)의 딸을 부모로 하여 4남 2년 중 4남으로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큰누나는 인종의 숙의(왕비 다음), 작은누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대군의 부인이었다. 왕실과 이렇게 가까운 처지이니 그는 어릴 때부터 자유스럽게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고, 특히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은 그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여서 소꿉친구로 어울렸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송강이 10세(1545) 되던 해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8세의 경원대군이 임금이 되니 그가 명종인데, 임금이 어려서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영악한 여자여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그의 집안도 화를 당해 일가가 몰락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송강은 유년취학이 어려웠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부친이 석방되어 전라도 담양으로 함께 내려 오면서부터였는데 그의 나이 16세였다. 이후 10년간 여기에 살면서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수학했다. 이때가 송강에게 있어서 가장 꿈에 부푼 시기였다. 그것은 다감한 소년시절을 성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학문을 닦고 시재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성원 고경명 백광훈 등과 사귄 것도 이 시기였다.

  26세 때 진사시험에 일등한 송강은 다음해(1562) 별시문과에도 장원하여 그의 문재를 떨쳤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송강은 이후 파란만장한 운명을 맞이한다. 관직에 등용된 이후 도승지, 예조판서, 좌의정 등의 요직에 오르지만, 동서분쟁은 더욱 악화되어 송강은 어느새 서인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인과 마찰이 불가피했고 이로 인해 여러 번 유배생활도 했다.

  45세 때 강원도 순찰사가 된 송강은 임지에 부임하여 화려한 관동의 풍경을 두루 소요하면서 유명한 <관동별곡>을 썼고,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성균관의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의 자리에 오르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이 술을 즐기고 포용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여 담양으로 다시 내려와 독서와 자연을 벗삼았다. 정치적으로는 비참한 시기였으나 그의 작가 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보람찬 시기였다. 그 유명한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후세에 길이 남을 가사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54세 때 전주에서 서인 출신인 동인의 정여립이 모반사건을 일으키자 그 반대에 있는 송강은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 다시 귀양길에 오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피난길을 떠나던 중 개성에 이르러 개성사람들의 요구로 송강은 석방되어 남하하다가 북상하는 선조와 마주쳤다. 그는 충청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황달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송강의 일생을 대별해보면 #1파란 많은 관계생활 #2이에 따른 유배생활 #3은거와 창작생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등이 있다.


b.<송강가사>의 내용

 상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 <송강가사>는 상권 총 24장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가 실려 있고, 하권 총 20장에 <단가>라는 제목으 훈민가 16수등 총 77수가 실려 있다. 그 밖에 107수의 시조를 남겼다. 송강의 문학작품은 대체로 시조나 단가보다 장가가 더 유명한데, 그의 장가는 추종을 물허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단가는 도덕적 교훈의 성격을 띠고 있어 문학적 가치는 높지 않다. 역대로 많은 문인이나 관리들은 그의 가사를 즐겨 읊었는데, 특히 관동기생들은 필수적으로 암기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는 그 유명한 4대가사에 관해 살펴본다.


   1. <관동별곡>

  송강이 45세 되던 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한 후 산수 풍경 고사 풍속 등을 읊은 것으로 가사문학의 백미를 이루는 대표작이다. 총 294구로 된 장가로 고래로부터 묘사와 조어의 기묘함을 들어 <악보의 절조>라고까지 평을 받은 가사다. 용어는 34언의 어조에 맞추어져 있으며, 한문어투가 비교적 적고 사용된 한자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이다. 특히 감탄사의 중첩사용과 대귀법의 묘, 적절한 생략법의 구사는 뛰어난 문장의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저자가 정치생활 중 비교적 득의한 시대의 것 인만큼 가사 전체의 분위기가 명쾌하고 화려하다.

  강호에 병이 깁퍼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압패셧다

로 시작되는 <관동별곡>을 두고 조윤제는 <사>의 호탕비장함과 <조>의 유창한 흐름을 들어 한국장가의 제1등이라 했고, 이병기는 기풍의 웅장함을, 김사엽은 우리말의 자유자재한 구사를 들어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했다.

  그러나 이보다 25년이나 앞서 나온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이를 모방한 것이 발견된다. 제명과 내용, 저체적인 체제나 표현 등이 유사한 점이 많다. 때문에 <관동별곡>역시 <관서별곡>과 동공이곡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다만 송강의 <관동별곡>은 짜임새가 좀더 공교하고 가락의 흐름이나 조어의 기술이 보다 유창하며 세련되어 보이고 표현기교도 참신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관서별곡>을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관동별곡>은 이후 조우인의 <속관동별곡>과 위세직의 <금당별곡>에 영향을 주어 그 맥이 이어지는데, <관동별곡>이 끼친 영향도 지대함을 알 수 있다.


   2. <사미인곡>

  이 작품은 송강이 50세 되던 해 당파싸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 4년간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 은거하며 자신의 처지와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한 여인이 그 남편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마음에다 기탁하여 고백한 것으로, 뛰어난 우리말 구사와 세련된 표현으로 속편인 <속미인곡>과 함께 가사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2음보 1구가 총 126구에 달하고 34조의 음수율이 주졸을 이룬다. 구성은 #1서사 #2본사: 춘원하원추원동원 #3결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본사는 춘원하원추원동원 등으로 계절에 따라 짜여져 총 6단락으로 구분된다. 서사에서는 조정에 있다가 담양으로 퇴기한 자신의 위치를 광한전에서 하계로 내려온 것으로 대우(둘이 짝짓기)했다.

  춘원에서는 봄이 되어 매화가 피자 임금께 보내고 싶으나 임금의 심정이 어떤 상태인지 의구하는 뜻을 읊었다. 하원에서는 화려한 규방을 표현해놓고 이런 것들도 임께서 계시지 않으니 공허함을 노래했다. 추원에서는 맑고 서늘한 가을철을 묘사하고 그중에서 청광의 임금께 보내어 당쟁의 세상에 골고루 비치게 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했다. 결서에서는 임의 그리워한 나머지 살아서는 임의 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 꽃나무에 앉았다가 향기를 묻혀 임계 옮기겠다고 읊었다.

  전편을 통하여 한 여인의 독백으로 되어 있고, 여성적인 행위 정조 어투 어감 등을 살리면서

봄여름가을겨울에 맞는 소재를 빌려 작자의 의도를 치밀하게 표현했다.

  이몸이 생겨날 때 임을 따라 생겼으니

  한 평생 연분인 줄 하늘도 모르던가

  나 한몸 젊어 있고 임 한분 날 괴오시니

  이마음 이사랑은 견줄데 전혀 없다

로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사용된 시어나 묘사 또한 비범한 것으로 높이 칭송되고 있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가히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비길 만한 작품>>으로 평가했고, 김만중은 그의 <서포만필>에서 <속미인곡> <관동별곡>과 함께 <<동방의 이소(중국의 굴원의 작품)요, 자고로 우리 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3편 뿐이다>>라고 절찬한 바 있다.

  한편 <사미인곡>의 문학적 영향문제는 일반적으로 굴원의 <이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사미인>이라는 제명도 <이소>의 제9장에 있는 <사미인>이라는 편명과 같으며 <이소>의 충군적 내용이 이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언어표현기법형식구조 등 모든 면에서 송강다운 문학적 개성이나 독창성이 뛰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 작품을 본받아 동일한 주제와 내용을 가진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정철의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양사언의 <미인별곡> 등이 그것이다.


   3. <성산별곡>

  이 작품은 송강이 16세부터 27세에 등과할 때까지 10년간 낙향해 있던 곡인 성산이란 지명을 제목으로 하여 쓴 작품이다. 성산은 현재의 전남 담양에 해당한다. 여기서 송강은 그의 친척인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과 서하당 등의 정자에서 지은 작품으로, 동문수학하던 친한 벗이자 친척이던 김성원의 은둔 풍류생활을 칭송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주위의 경치를 노래했다.

  <성산별곡>의 내용은 성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계로 나누어 노래하고 여기서 자연과 짝하여 독서탄현으로 풍류를 즐기는 주인공을 찬미한 내용이다. 그 구성은 #1서사 #2춘사 #3하사 #4추사 #5동사 #6결사로 되어 있는데, 이 가사의 특색은 한 계절을 한 단위로 하여 엮어놓은 점이다. 총 169구로 된 이 가사는 송강 가사 중에서도 그리 평가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성산가단>을 활성화하고 동 가단을 송강문학의 산실로 만들어 우리 문학사를 크게 빛내주었다는 점에서 그 제작의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푸른 시내 흰 물결이 정자안을 둘렀으니

  천손의 비단폭을 그 뉘가 베어내어

  이엇는 듯 펼쳐놓은 듯 야단스런 경치로다

  산중에 달력없어 계절을 모르더니

  눈앞의 풍경이 사철따라 전개되니

  듣고 보는 일이 모두 선계로다

  이병기는 이 가사의 짜임새가 공교하다고 했고, 김사엽은 순수한 생활상과 그의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가사는 구성은 물론 조사법표현기교 등에 있어 송순의 <면양정가>의 영향을 받은 동공이곡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4. 속미인곡

  이 작품은 작가의 나이 50세에서 54세 사이에 지은 것으로 두 선녀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남편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을 읊은 것으로 2음보를 1구로 하여 96구에 해당하며 기본율조는 34조로 되어 있다.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오구려

  백옥경 좋은 곳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날도 다 저무는데 누굴 보러 가시는고

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사미인곡>의 속편이다. 그러나 <사미인곡>보다 언어의 구사와 시의의 간절함이 더욱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사미인곡>에서는 한자숙어와 전고가 간혹 섞여 있는 데 반하여 <속미인곡>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이를 증명한다. 연군의 뜻을, 임을 이별한 한 여인의 애달픈 심정에 의탁시킨 이 노래는 <사미인곡>과 같이 서정적 자아의 독백으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보조적 인물을 설정하여 대화체로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을 볼 수도 있다. 특히 <사미인곡>의 결사는, <<임이야 나를 몰라주실지라도 나의 충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일방적인 연군의 소극성을 보였지만, <속미인곡>은 보다 적극적으로 임까지도

오래도록 구슬프게 하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 작자의 생각이 한결 원숙해진 후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김만중도 전후 미인곡 중 <속미인곡>이 더 고상하다고 했는데, 이는 <속미인곡>의 표현이 지니는 진솔성과 간결함 때문이라 하겠다.


c.송강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선풍도골 같은 뛰어난 용모와 괴벽에 가까운 강직한 성격, 그리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송강의 성격은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치가의 필수 조건인 관용과 아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선천적인 기질은 자연히 술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초연히 속세를 떠나 시와 술로써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정치인으로서보다 시인으로 더 대성한 사람이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 국문학에는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송강가사>는 종래의 한자투어의 형태를 탈피하여 44조 운율에 의하여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했으며, 그의 호탕하고도 비장한 시풍은 우리 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송강의 작품에 대해서는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형용의 묘와 말의 기이함은 참으로 악보의 절조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나라 노래 중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하며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후세에 성행했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송강문학의 의의와 국문학적 위상을 점검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반적으로 한문학이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가 송강이고 그의 문학이었다. 우리 문학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15세기의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문학의 성장발전에 획기적인 촉매제가 되긴 했으나, 송강 당시만 해도 아직 한문학의 풍토가 지배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우리 문학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막대하다.

 (2) 우리 문학 소산의 요람지가 되어 우리 문학사를크게 빛내준 <성산가단>을 송강이 활성화시켰다는 점이다. 송강은 당시 시가활동의 무대였던 식영정 서하당 소쇄원 환벽당 등 이른바 성산가단에 출입하면서 활발한 시가 활동을 폈는데, 앞서 언급한 <성산별곡>을 비롯, 많은 단가한시가 여기서 산출되었다.

 (3) 송강처럼 문학에서 우리말의 고유미를 발견하고 이를 대담하게 활용한 작가도 드물다. 즉, 그의 국어활용술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이 때문에 그의 문학적 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로 하여금 친근감을 갖게 했다. 김만중이 송강의 문학을 높이 평가한 것(특히 속미인곡)도 송강의 이 국어활용술에 있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4) 송강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의 계보를 형성했다. 조우인 위세직 김상용 등에 영향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매호별곡> <송관동별곡> <조우인> <별사미인곡> <훈계자손가> <오륜가> 등의 시가를 낳게 하여 그 계보를 형성한 것을 보게 했다.

  위와 같은 점에서 송강과 그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상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식영정 경내에 있는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몸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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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八팔百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 셧다.

平평丘구驛역 을 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2.

昭쇼陽양江강 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髮발도 하도 할샤.

東동州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니,

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峰봉이 마면 뵈리로다.

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

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다, 몰다.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시고.

汲급長댱孺유 風풍彩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3.

營영中듕이 無무事하고 時시節졀이 三삼月월인 제,

花화川쳔 시내길히 楓풍岳악으로 버더 잇다.

行행裝장을 다 티고 石셕逕경의 막대 디퍼,

百川쳔洞동 겨 두고 萬만瀑폭洞동 드러가니,

銀은  무지게, 玉옥  龍룡의 초리,

섯돌며 는 소리 十십里리의 자시니,

들을 제 우레러니 보니 눈이로다.

4.

金금剛강臺  우層층의 仙션鶴학이 삿기 치니,

春츈風풍 玉옥笛뎍聲셩의 첫을 돗던디,

縞호衣의玄현裳샹이 半반空공의 소소 니,

西셔湖호 녯 主쥬人인을 반겨셔 넘노 

5.

小쇼香향爐노 大대香향爐노 눈 아래 구버보고,

正졍陽양寺 眞진歇헐臺 고텨 올나 안마리,

廬녀山산 眞진面면目목이 여긔야 다 뵈다.

어와, 造조化화翁옹이 헌토 헌할샤.

날거든 디 마나, 셧거든 솟디 마나.

芙부蓉용을 고잣 , 白백玉옥을 믓것 ,

東동溟명을 박차 , 北북極극을 괴왓 .

놉흘시고 望망高고臺, 외로올샤 穴혈望망峰봉이

하늘의 추미러 므 일을 로리라

千쳔萬만劫겁 디나록 구필 줄 모다.

어와 너여이고, 너 니  잇는가

6.

開心심臺 고텨 올나 衆듕香향城셩 라보며,

萬만二이千쳔峰봉을 歷녁歷녁히 혀여니

峰봉마다 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디 마나.

뎌 긔운 흐터 내야 人인傑걸을 고쟈.

形형容용도 그지업고 體톄勢셰도 하도 할샤.

天텬地디 삼기실 제 自然연이 되연마,

이제 와 보게 되니 有유情정도 有유情정샤.

毗비盧로峰봉 上샹上샹頭두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東동山산 泰태山산이 어야 놉돗던고.

魯노國국 조븐 줄도 우리 모거든,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야 젹닷말고.

어와 뎌 디위 어이면 알 거이고.

오디 못거니 려가미 고이가

7.

圓원通통골  길 獅子峰봉을 자가니,

그 알 너러바회 化화龍룡쇠 되여셰라.

千쳔年년 老노龍룡이 구구 서려 이셔,

晝듀夜야의 흘녀 내여 滄창海예 니어시니,

風풍雲운을 언제 어더 三삼日일雨우 디련다.

陰음崖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라

8.

磨마訶하衍연 妙묘吉길祥샹 雁안門문재 너머 디여,

외나모 근 리 佛블頂뎡臺 올라니,

千쳔尋심絶졀壁벽을 半반空공애 셰여 두고,

銀은河하水슈 한 구 촌촌이 버혀 내여,

실티 플텨이셔 뵈티 거러시니,

圖도經경 열 두 구, 내 보매 여러히라.

李니謫뎍仙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게 되면,

廬녀山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려니.

9.

山산中듕을 양 보랴, 東동海로 가쟈라.

籃남輿여緩완步보야 山산映영樓누의 올나니,

玲녕瓏농碧벽溪계와 數수聲셩啼뎨鳥됴 離니別별을 怨

원 ,

旌졍旗긔를 티니 五오色이 넘노 ,

鼓고角각을 섯부니 海雲운이 다 것 듯

鳴명沙사길 니근 이 醉취仙션을 빗기 시러,

바다 겻 두고 海棠당花화로 드러가니,

白鷗구야 디 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

10.

金금闌난窟굴 도라드러 叢총石셕亭뎡 올라니,

白玉옥樓누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工공倕슈의 셩녕인가, 鬼귀斧부로 다가

구태야 六뉵面면은 므어슬 象샹톳던고.

11.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 자가니,

丹단書셔 宛완然연되 四仙션은 어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 가 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郎냥湖호 거긔나 가 잇가.

淸쳥澗간亭뎡 萬만景경臺 몃 고 안돗던고,

12.

梨니花화 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낙山산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예 올라 안자,

日일出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니,

祥샹雲운이 집픠 동, 六뉵龍뇽이 바퇴 동,

바다 날 제는 萬만國국이 일위더니,

天텬中듕의 티니 毫호髮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詩시仙션은 어 가고 咳唾타만 나맛니.

天텬地디間간壯장 긔별 셔히도 셔이고.

13.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텩튝을 므니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려가니,

十십里리 氷빙紈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댱松숑 울흔 소개 슬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 혜리로다.

孤고舟쥬解纜람야 亭뎡子 우 올나가니,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 大대洋양이 거긔로다

從둉容용댜 이氣긔像샹,闊활遠원댜 뎌 境경界계,

이도곤    어듸 잇닷 말고.

紅홍粧장 古고事 헌타 리로다.

江강陵능 大대都도護호風풍俗쇽이 됴흘시고,

節졀孝효旌졍門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비屋옥可가封봉이 이제도 잇다 다.

14.

眞진珠쥬館관 竹듁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린 믈이

太태白백山산 그림재 東동海해로 다마 가니,

하리 漢한江강의 木목覓멱의 다히고져.

王왕程뎡이 有유限고 風풍景경이 못 슬믜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槎사 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살가,

仙션人인을 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15.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이니 하 밧근 므서신고.

득 노 고래, 뉘라셔 놀내관,

블거니 거니 어즈러이 구디고.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리 ,

五오月월 長댱天텬의 白雪셜은 므 일고.

16.

져근덧 밤이 드러 風풍浪낭이 定뎡거,

扶부桑상咫지尺쳑의 明명月월을 기리니,

瑞셔光광千쳔丈댱 이 뵈  숨고야.

珠쥬簾렴을 고텨 것고, 玉옥階계 다시 쓸며,

啓계明명星셩 돗도록 곳초 안자 라보니,

白백蓮년花화 한 가지를 뉘라셔 보내신고.

일이 됴흔 世세界계 대되 다 뵈고져.

流뉴霞하酒쥬 득 부어 다려 무론 말이,

英영雄웅은 어 가며, 四仙션은 긔 뉘러니,

아나 맛나 보아 녯 긔별 뭇쟈 니,

仙션山산 東동海예 갈 길히 머도 멀샤.

17.

松숑根근을 볘여 누어 픗을 얼픗 드니,

애  사이 날려 닐온 말이,

그를 내 모랴, 上샹界계예 眞진仙션이라.

黃황庭뎡經경一일字 엇디 그 닐거 두고,

人인間간의 내려와셔 우리 오다.

져근덧 가디 마오. 이 술  잔 머거 보오.

北북斗두星셩 기우려 滄챵海水슈 부어 내여,

저 먹고 날 머겨 서너 잔 거후로니,

和화風풍이 習습習습야 兩냥腋을 추혀 드니,

九구萬만里리 長댱空공애 저기면 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四海예 고로 화,

億억萬만蒼창生을 다 醉케 근 後후의,

그제야 고텨 맛나  한 잔 쟛고야.

말디쟈 鶴학을 고 九구空공의 올나가니,

空공中듕 玉옥蕭쇼 소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을 여 바다 구버보니,

기픠 모거니 인들 엇디 알리.

明명月월이 千천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  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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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인곡(思美人曲) ◈


《해설》본문 정철

<송강가사(松江歌辭) 이선본(李選本)>

 

목 차   [숨기기]

 1. 序詞

 2. 春詞

 3. 夏詞

 4. 秋詞

 5. 冬詞

1. 序詞

1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2  緣연分분이며 하 모 일이런가.

 

3 나 나 졈어 잇고 님 나 날 괴시니,

4 이  이 랑 견졸  노여 업다.

 

5 平평生애 願원요  녜쟈 얏더니,

6 늙거야 므 일로 외오 두고 글이고.

 

7 엇그제 님을 뫼셔 廣광寒한殿뎐의 올낫더니,

8 그 더 엇디야 下하界계예 려오니,

 

9 올 저긔 비슨 머리 헛틀언 디 三삼年년일쇠.

10 臙연脂지 粉분 잇마 눌 위야 고이 고.

 

11 음의 친 실음 疊텹疊텹이 혀 이셔,

12 짓니 한숨이오 디니 눈물이라.

 

13 人인生은 有유限 시도 그지업다.

14 無무心심 歲셰月월은 믈 흐  고야.

 

15 炎염涼냥이  아라 가  고텨 오니,

16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 할샤.

 

2. 春詞

1 東동風풍이 건듯 부러 積젹雪셜을 헤텨 내니,

2 窓창 밧긔 심근 梅花화 두세 가지 픠여셰라.

 

3 득 冷淡담 暗암香향은 므 일고.

4 黃황昏혼의 이 조차 벼마 빗최니,

5 늣기  반기 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6 뎌 梅花화 것거 내여 님 겨신  보내오져.

7 님이 너 보고 엇더타 너기실고.

 

3. 夏詞

1  디고 새 닙 나니 綠녹陰음이 렷,

2 羅나幃위 寂젹寞막고 繡슈幕막이 뷔여 잇다.

 

3 芙부蓉용을 거더 노코 孔공雀쟉을 둘러 두니,

4 득 시 한 날은 엇디 기돗던고.

 

5 鴛원鴦앙錦금 버혀 노코 五오色線션 플텨 내여,

6 금자 견화이셔 님의 옷 지어 내니,

 

7 手슈品품은 니와 制졔度도도 시고.

8 珊산瑚호樹슈 지게 우 白玉옥函함의 다마 두고,

 

9 님의게 보내오려 님 겨신  라보니,

10 山산인가 구롬인가 머흐도 머흘시고.

 

11 千쳔里리 萬만里리 길 뉘라셔 자 갈고.

12 니거든 여러 두고 날인가 반기실가.

 

4. 秋詞

1 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녈 제,

2 危위樓루에 혼자 올나 水슈晶정簾념을 거든마리,

 

3 東동山산의 이 나고 北븍極극의 별이 뵈니,

4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

 

5 淸쳥光광을 픠워 내여 鳳봉凰황樓누의 븟티고져.

 

6 樓누 우 거러 두고 八팔荒황의 다 비최여,

7 深심山산 窮궁谷곡 졈낫티 그쇼셔.

 

5. 冬詞

1 乾건坤곤이 閉폐塞야 白雪셜이  비친 제,

2 사은니와 새도 긋처 잇다.

 

3 瀟쇼湘상 南남畔반도 치오미 이러커든

4 玉옥樓누 高고處쳐야 더옥 닐너 므리.

 

5 陽양春츈을 부처 내여 님 겨신  쏘이고져.

6 茅모簷쳠 비쵠  玉옥樓누의 올리고져.

 

7 紅홍裳샹을 니믜고 翠취袖슈 반만 거더

8 日일暮모脩슈竹듁의 혬가림도 하도 할샤.

 

9 댜  수이 디여 긴 밤을 고초 안자,

10 靑쳥燈등 거론 겻 鈿뎐箜공篌후 노하 두고,

 

11 의나 님을 보려  밧고 비겨시니,

12 鴦앙衾금도 도 샤 이 밤은 언제 샐고.

 

13 도 열두 ,  도 셜흔 날,

14 져근덧 각 마라 이 시 닛쟈 니,

 

15 의 쳐이셔 骨골髓슈의 텨시니,

16 扁편鵲쟉이 열히 오다 이병을 엇디리.

 

17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18 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19 곳나모 가지마다 간  죡죡 안니다가,

20 향 므든 애로 님의 오 올므리라.

 

21 님이야 날인 줄 모셔도 내 님 조려 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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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美人曲 (속미인곡) ◈


《해설》본문

 

1 뎨 가 뎌 각시

2 본 듯도 뎌이고.

 

3 天텬上샹 白玉옥京경을

4 엇디야 離니別별고,

 

5  다 뎌 져믄 날의

6 눌을 보라 가시고.

 

7 어와 네여이고

8 내 셜 드러보오.

 

9 내 얼굴 내 거동이

10 님 괴얌즉 가마

 

11 엇딘디 날 보시고

12 네로다 녀기실

 

13 나도 님을 미더

14 군디 전혀 업서

 

15 이야 교야

16 어러이 구돗디

 

17 반기시 비치

18 녜와 엇디 다신고.

 

19 누어 각고

20 니러 안자 혜여니

 

21 내 몸의 지은 죄

22 뫼티 혀시니

 

23 하히라 원망며

24 사이라 허믈랴

 

25 셜워 플텨 혜니

26 造조物믈의 타시로다.

 

27 글란 각 마오.

28 친 일이 이셔이다.

 

29 님을 뫼셔 이셔

30 님의 일을 내 알거니

 

31 믈  얼굴이

32 편실 적 몃 날일고.

 

33 春츈寒한 苦고熱열은

34 엇디야 디내시며

 

35 秋추日일冬동天텬은

36 뉘라셔 뫼셧고.

 

37 粥쥭朝조飯반 朝죠夕셕 뫼

38 녜와 티 셰시가.

 

39 기나긴 밤의

40 은 엇디 자시고.

 

41 님 다히 消쇼息식을

42 아므려나 아쟈 니

 

43 오도 거의로다.

44 일이나 사 올가.

 

45 내 마 둘  업다.

46 어드러로 가쟛 말고.

 

47 잡거니 밀거니

48 놉픈 뫼 올라가니

 

49 구롬은니와

50 안개 므 일고.

 

51 山산川쳔이 어둡거니

52 日일月월을 엇디 보며

 

53 咫지尺쳑을 모거든

54 千쳔里리를 라보랴.

 

55 하리 물의 가

56  길히나 보쟈 니

 

57 람이야 믈결이야

58 어둥졍 된뎌이고.

 

59 샤공은 어 가고

60 븬 만 걸렷니.

 

61 江강天텬의 혼자 서서

62 디  구버 보니

 

63 님다히 消쇼息식이

64 더옥 아득뎌이고.

 

65 茅모簽쳠  자리의

66 밤듕만 도라오니

 

67 半반壁벽靑쳥燈등은

68 눌 위야 갓고.

 

69 오며 리며

70 헤며 바니니

 

71 져근뎟 力녁盡진야

72 풋을 간 드니

 

73 精졍誠셩이 지극야

74 의 님을 보니

 

75 玉옥  얼굴이

76 半반이나마 늘거셰라.

 

77 의 머근 말

78 슬장 쟈 니

 

79 눈믈이 바라 나니

80 말인들 어이며

 

81 情졍을 못다야

82 목이조차 몌여니

 

83 오뎐된 鷄계聲셩의

84 잠은 엇디 돗던고.

 

85 어와, 虛허事로다.

86 이 님이 어 간고.

 

87 결의 니러 안자

88 窓창을 열고 라보니

 

89 어엿븐 그림재

90 날 조 이로다.

 

91 하리 싀여디여

92 落낙月월이나 되야이셔

 

93 님 겨신 窓창 안

94 번드시 비최리라.

 

95 각시님 이야니와

96 구 비나 되쇼셔.





B030 –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 토머스 쿤(Thomas S. kuhn, 1922 ~ 1996 )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과학사학자가 쓴 과학철학책.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가 과학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과학발전의 혁명성을 강조한다. <<정치제도가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혁명이 일어나듯이 과학에서도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정상과학> 등의 개념들로 특징지어지는 토머스 쿤의 과학관은 <<과학혁명 -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는 정상과학의 전통수립 - 변칙성 및 정상과학의 위기의 출현 - 과학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해석하고 과학연구에 있어서의 과학혁명과 정상과학의 상호보완적 기능을 강조한다.


a.생애

 20세기 최고의 미국출신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 1922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1943년 물리학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수 졸업하고 과학연구 및 개발연구소(OSRD,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에서 2년간 일한 뒤 모교 대학원 물리학과로 되돌아가서 학위과정을 밟았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화학자이면서 과학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교의 코넌트 총장이 개설한 비자연과학계열 대상의 자연과학계론 강의를 도와주면서 과학의 역사적 측면에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박사학위 논문완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 전공인 물리학을 버리고 과학사로 뛰어들었다.

  쿤의 과학사에 대한 관심은 1948년 하버드 대학의 교양과정 및 과학사의 강사조교수 경력을 거치면서 과학사상의 혁명적 변화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0여 년간의 철학심리학 5,23언어학사회학 분야의 폭넓은 독서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과학혁명의 이론은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으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1956년 버클리 대학으로 옮겨 과학사 과정의 개설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2년뒤 스탠퍼드 대학의 행동 과학 고등연구센터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생활한 것을 계기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현대의 MIT에서 언어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b.쿤의 과학관

 쿤의 과학관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요지를 둠으로써 과학의 진보가 누적적이라는 종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쿤은 과학혁명들 사이에서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과학활동을 가리켜 정상과학이라 규정하는데, 이러한 정상과학에서 <과학자사회>는 <패러다임>(동시대의 학자들이 동일대상에 대해 가지는 신념 가치관 준거체계)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쿤의 과학관에 있어서의 과학혁명은 하나의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현상들의 빈번한 발생에 의해 위기에 처해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 다시 말하면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를 검토해볼 때 오늘날의 과학이 수세기에 걸친 과학자들의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님을 지적하고, 그들 과학자 집단은 일관된 과학관을 가진 단일집단도 아니었음을 패러다임의 개념과 과학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 책에서 천문학물리학 등 주로 자연과학분야의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면서 과학발전의 역사를 <과학 혁명 –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는 정상과학의 전통수립 - 이상의 생성 및 정상과학의 위기출현 - 과학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해석하고, 과학연구에 있어서의 과학혁명과 정상과학의 상호보완적 기능을 강조하는 과학관을 가지고 있다.


c.<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

 이 책은 1962년에 초판이 나오고 1969년에 후기를 참가하여 재판되었다. 내용의 구성은 서언과 본문 13장 그리고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처음 출판된 이래 과학사 과학철학은 물론 일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얼마나 많은 분야의 연구자들이 그의 해석에 공감하고 <패러다임><과학혁명><정상과학의 위기> 등을 인용하며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과학사학자가 쓴 과학 철학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역사와 과학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인 서술을 담고 있다. 과학사는 우화나 연대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과학사가 완성된 과학의 성취에 관한 연구에서, 연구활동 자체에 대한 동적인 연구로 바뀔 때 참된 과학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의 발전은 늘어나는 과학지식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직선적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낡은 과학이 버려졌다 해서 뒤에 나온 과학보다 덜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기존과학이 새 과학에 의해 대치되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쿤의 과학사 서술에서의 중심개념은 <패러다임(paradigm)>이다. 패러다임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뜻을 가진데다가 쿤 자신이 여러가지로 다르게 쓰고 있어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자 사회(scientific community)>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 신념 준거체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의 학파에 정합성을 주는 모델이다.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연구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한다. 반대로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위해 바쳐진다. 패러다임이 있기 전의 과학은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해서 어지럽기 짝이 없다. 일단 패러다임이 확립되면 난맥상이 정립된다. 그러나 정상과학은 완성된 과학이 아니다. 남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수께끼풀이(puzzle solving)이다. 이것은 패러다임을 다듬고 명세화하는 작업으로서 사실수집, 기구사용, 상수결정, 이론의 정식화 등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상과학은 점점 확고해진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정상과학에는 <이상(anomaly)>이 생기고 새로운 것이 불가피하게 나온다. 이것은 정상과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예상하는 바가 어긋나는 경우이고 이것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으로 발전한다. 이상이 계속 늘어나면 심각한 사태가 되며 정상과학에 위기가 닥쳐온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 원래의 패러다임은 빛을 잃고 어느덧 패러다임의 형성 이전과 비슷한 이론의 난립이 일어난다. 이에 정상과학은 이론의 특수한 수정에 의해 모순을 제거하려는 응급조치를 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 이상을 좀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고 낡은 패러다임과의 경쟁이 벌어진다. 새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의 집단적 개종과 충성을 얻어 득세하면 낡은 과학은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토대를 둔 새 정상과학이 성립한다. 이것이 곧 <과학혁명>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은 누적적 과정이 아니다. 곧,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의 개선이나 연장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방법과 목표를 채택하는 것이다. 쿤은 기존정치제도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위기가 조성된 끝에 반대진영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구제도를 뒤엎는 정치혁명과 과학혁명을 비교하고 있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세계관도 달라진다. 혁명 전후의 세계관과학방법은 같은 표준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논리적인 길은 없다. 논리의 규칙과 사용된 자료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기존질서와 단절하고 사물을 보는 새 방법으로서의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이 현상의 앙상블을 어떻게 보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과학혁명에서 과학의 논리적 구조보다 과학자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심리학과 사회학이 중요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d.포퍼(과학철학자)와의 논쟁

 <과학혁명의 구조>는 초판의 출간과 더불어 열광적인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쿤 혁명>을 일으켰다.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한 쿤의 독특한 과학관은 과학자로서의 현장경험과 해박한 역사지식의 산물이므로 역사가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으나 철학자들에게서는 강한 반발이 나왔다. 그의 접근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에 큰 바람을 일으켜 혁명적 과학철학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 저서에 대해 철학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중요한 철학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쿤은 귀납적인 과학관을 맹렬히 공격한다. 과학은 자료를 충분히 수집해서 일반화한 결과가 아니며, 과학자가 갖고 있는 선입관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칙은 실험조작을 하기 전에 미리 패러다임에 의해 추측되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1960년대 말 포퍼 및 그의 제자들과 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정상과학을 둘러싼 것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과학에 필수적인 비판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으며 수수께끼를 푸는 데 만족하므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쿤은 중요한 것은 오히려 정상과학이라고 응수하면서, 비판적 토론은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해당하는 것이며 자연과학에서의 토론은 패러다임이 성립하면 끝나고 위기가 닥칠 때 비로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역사를 추측과 반박, 이론과 실험의 싸움터로 보는 반증주의자 포퍼는, 진리는 한꺼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오류를 드러내는, 즉 반증되는 이론들을 탈락시키는 과정들을 거치며 추구해가는 것이라고 믿는 학자다. 포퍼의 과학관이 반증의 과정을 통해 지식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했듯이 그 사회철학도 혁명을 통한 급격한 변혁 대신 점진적인

사회발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포퍼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열린 사회의 청사진은 과학의 발전이 전통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누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반기를 든 쿤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쿤은 기존 정치제도가 거기서 파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때 혁명이 일어나듯 자연과학에서도 혁명은 일어난다는 주장을 폈다.

  특정한 시기의 과학자 집단이 인정한 문제해결의 모델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증가할 경우 혁신적인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나오고, 경쟁상태를 지나 새것이 낡은 것을 급기야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교체가 바로 과학혁명이라고 쿤은 주장했다.

  또한 쿤은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에도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고전적인 검증이론, 포퍼(Karl Popper)의 반증이론, 네이글(Emrst Nagel)의 확률적 견해에 대해 모조리 부정적이다. 그가 보기에 중립적 관찰언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이론의 검증을 위한 절대적 기준은 없다. 또 패러다임의 붕괴는 반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패러다임은 반증되기 전에 대치되는 것이다.


e.평가

 그는 상대주의 주관주의 비합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서로 다른 이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언어문화공동체의 구성원과 같이 둘 다 옳을 수 있다고 했는데, 문화의 경우에는 이것이 상대주의지만 과학에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그는 과학이 <억측과 논박>을 통해 오류를 고쳐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객관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포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주관주의자 비합리주의자임을 부인한다.

  이와 같은 쿤의 입장은 1970년에 나온 제2판의 <후기>에 종합되었다. 그의 주장은 논쟁 끝에 많이 무디어졌으며 적지 않은 논리적 결함을 드러냈으나 과학사가의 통찰력이 철학자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어쨌든 역사를 무시하고 논리만 고집하던 과학철학은 쿤에 의해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포퍼가 발견의 논리를 강조한 데 비해 쿤은 과학자 사회의 심리학 사회학이 중요하다고 고집한다. 여기서 쿤은 과학사회학으로 발전할 소지를 마련하고 있다. 실제로 사회학자들은 곧 쿤의 패러다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쿤이야말로 과학이 지식사회학의 범위 밖에 있다는 통설을 깨고 과학의 사회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평을 받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혁명의 구조>는 20세기 지성사에 획기적 이정표를 제시하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쿤의 깊은 지혜와 뛰어난 통찰력은 이미 뚜렷한 업적을 나타냈으며, 그가 끼친 영향은 본래의 영역인 과학사 및 과학철학의 범주를 넘어 인물사회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지고 있다. 특히 쿤의 패러다임은 생물학 역사학 경제학 인류학 특히 문학사 미술사 정치사 등에서 환영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 분야에서는 오래 전부터 <혁명적인 단절로 점철된 전통적 기간의 연속>이라는 서술방식을 써왔고, 쿤 자신이 그의 과학사 서술을 여기서 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쿤의 위대함은 오히려 과학만은 다르게 발전하리라는 소박한 믿음을 깨뜨린 데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새로운 책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새 책은 과학기술혁명이 제기한 두 가지 주요과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그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여서 그의 마지막 저작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의 연구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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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Kuh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omas Kuhn

Born Thomas Samuel Kuhn

July 18, 1922

Cincinnati, Ohio, U.S.

Died June 17, 1996 (aged 73)

Cambridge, Massachusetts, U.S.

Alma mater Harvard University

Era 20th-century philosophy

Region Western Philosophy

School Analytic

Historical turn[1]

Main interests

Philosophy of science

Notable ideas

Paradigm shift Incommensurability Normal science Kuhn loss[2]

Influences[show]

Influenced[show]

Thomas Samuel Kuhn (/kuːn/; July 18, 1922 – June 17, 1996) was an American physicist, historian and philosopher of science whose controversial 1962 book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was influential in both academic and popular circles, introducing the term paradigm shift, which has since become an English-language idiom.


Kuhn made several notable claims concerning the progress of scientific knowledge: that scientific fields undergo periodic "paradigm shifts" rather than solely progressing in a linear and continuous way, and that these paradigm shifts open up new approaches to understanding what scientists would never have considered valid before; and that the notion of scientific truth, at any given moment, cannot be established solely by objective criteria but is defined by a consensus of a scientific community. Competing paradigms are frequently incommensurable; that is, they are competing and irreconcilable accounts of reality. Thus, our comprehension of science can never rely wholly upon "objectivity" alone. Science must account for subjective perspectives as well, since all objective conclusions are ultimately founded upon the subjective conditioning/worldview of its researchers and participants.


Contents  [hide] 

1 Life

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3 Polanyi–Kuhn debate

4 Thomas Kuhn Paradigm Shift Award

5 Honors

6 Bibliography

7 References

8 Further reading

9 External links

Life[edit]

Kuhn was born in Cincinnati, Ohio, to Samuel L. Kuhn, an industrial engineer, and Minette Stroock Kuhn, both Jewish. He graduated from The Taft School in Watertown, CT, in 1940, where he became aware of his serious interest in mathematics and physics. He obtained his BS degree in physics from Harvard University in 1943, where he also obtained MS and PhD degrees in physics in 1946 and 1949, respectively, under the supervision of John Van Vleck.[12] As he states in the first few pages of the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of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his three years of total academic freedom as a Harvard Junior Fellow were crucial in allowing him to switch from physics to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He later taught a course in the history of science at Harvard from 1948 until 1956, at the suggestion of university president James Conant. After leaving Harvard, Kuhn taught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in both the philosophy department and the history department, being named Professor of the History of science in 1961. Kuhn interviewed and tape recorded Danish physicist Niels Bohr the day before Bohr's death.[13] At Berkeley, he wrote and published (in 1962) his best known and most influential work:[14]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In 1964, he joined Princeton University as the M. Taylor Pyne Professor of Philosophy and History of Science. He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History of Science Society from 1969–70.[15] In 1979 he joined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 as the Laurance S. Rockefeller Professor of Philosophy, remaining there until 1991. In 1994 Kuhn was diagnosed with lung cancer. He died in 1996.


Thomas Kuhn was married twice, first to Kathryn Muhs with whom he had three children, then to Jehane Barton Burns (Jehane R.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edit]

Main article: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SSR) was originally printed as an article in the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published by the logical positivists of the Vienna Circle. In this book, Kuhn argued that science does not progress via a linear accumulation of new knowledge, but undergoes periodic revolutions, also called "paradigm shifts" (although he did not coin the phrase),[16] in which the nature of scientific inquiry within a particular field is abruptly transformed. In general, science is broken up into three distinct stages. Prescience, which lacks a central paradigm, comes first. This is followed by "normal science", when scientists attempt to enlarge the central paradigm by "puzzle-solving". Guided by the paradigm, normal science is extremely productive: "when the paradigm is successful, the profession will have solved problems that its members could scarcely have imagined and would never have undertaken without commitment to the paradigm".[17]


During the period of normal science, the failure of a result to conform to the paradigm is seen not as refuting the paradigm, but as the mistake of the researcher, contra Popper's falsifiability criterion. As anomalous results build up, science reaches a crisis, at which point a new paradigm, which subsumes the old results along with the anomalous results into one framework, is accepted. This is termed revolutionary science.


In SSR, Kuhn also argues that rival paradigms are incommensurable—that is,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one paradigm through the conceptual framework and terminology of another rival paradigm. For many critics, for example David Stove (Popper and After, 1982), this thesis seemed to entail that theory choice is fundamentally irrational: if rival theories cannot be directly compared, then one cannot make a rational choice as to which one is better. Whether Kuhn's views had such relativistic consequences is the subject of much debate; Kuhn himself denied the accusation of relativism in the third edition of SSR, and sought to clarify his views to avoid further misinterpretation. Freeman Dyson has quoted Kuhn as saying "I am not a Kuhnian!",[18] referring to the relativism that some philosophers have developed based on his work.


The enormous impact of Kuhn's work can be measured in the changes it brought about in the vocabulary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besides "paradigm shift", Kuhn popularized the word "paradigm" itself from a term used in certain forms of linguistics and the work of Georg Lichtenberg to its current broader meaning, coined the term "normal science" to refer to the relatively routine, day-to-day work of scientists working within a paradigm, and was largely responsible for the use of the term "scientific revolutions" in the plural, taking place at widely different periods of time and in different disciplines, as opposed to a single "Scientific Revolution" in the late Renaissance. The frequent use of the phrase "paradigm shift" has made scientists more aware of and in many cases more receptive to paradigm changes, so that Kuhn's analysis of the evolution of scientific views has by itself influenced that evolution.[citation needed]


Kuhn's work has been extensively used in social science; for instance, in the post-positivist/positivist debate within International Relations. Kuhn is credited as a foundational force behind the post-Mertonian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Kuhn's work has also been used in the Arts and Humanities, such as by Matthew Edward Harris to distinguish between scientific and historical communities (such as political or religious groups): 'political-religious beliefs and opinions are not epistemologically the same as those pertaining to scientific theories'.[19] This is because would-be scientists' worldviews are changed through rigorous training, through the engagement between what Kuhn calls 'exemplars' and the Global Paradigm. Kuhn's notions of paradigms and paradigm shifts have been influential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for example the Keynesian revolution,[20] and in debates in political science.[21]


A defense Kuhn gives against the objection that his account of science from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results in relativism can be found in an essay by Kuhn called "Objectivity, Value Judgment, and Theory Choice."[22] In this essay, he reiterates five criteria from the penultimate chapter of SSR that determine (or help determine, more properly) theory choice:


Accurate – empirically adequate with experimentation and observation

Consistent – internally consistent, but also externally consistent with other theories

Broad Scope – a theory's consequences should extend beyond that which it was initially designed to explain

Simple – the simplest explanation, principally similar to Occam's razor

Fruitful – a theory should disclose new phenomena or new relationships among phenomena

He then goes on to show how, although these criteria admittedly determine theory choice, they are imprecise in practice and relative to individual scientists. According to Kuhn, "When scientists must choose between competing theories, two men fully committed to the same list of criteria for choice may nevertheless reach different conclusions."[22] For this reason, the criteria still are not "objective" in the usual sense of the word because individual scientists reach different conclusions with the same criteria due to valuing one criterion over another or even adding additional criteria for selfish or other subjective reasons. Kuhn then goes on to say, "I am suggesting, of course, that the criteria of choice with which I began function not as rules, which determine choice, but as values, which influence it."[22] Because Kuhn utilizes the history of science in his account of science, his criteria or values for theory choice are often understood as descriptive normative rules (or more properly, values) of theory choice for the scientific community rather than prescriptive normative rules in the usual sense of the word "criteria", although there are many varied interpretations of Kuhn's account of science.


Polanyi–Kuhn debate[edit]

Although they used different terminologies, both Kuhn and Michael Polanyi believed that scientists' subjective experiences made science a relativized discipline. Polanyi lectured on this topic for decades before Kuhn published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Supporters of Polanyi charged Kuhn with plagiarism, as it was known that Kuhn attended several of Polanyi's lectures, and that the two men had debated endlessly over epistemology before either had achieved fame. The charge of plagiarism is peculiar, for Kuhn had generously acknowledged Polanyi in the first edition of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5] Despite this intellectual alliance, Polanyi's work was constantly interpreted by others within the framework of Kuhn's paradigm shifts, much to Polanyi's (and Kuhn's) dismay.[23]


Thomas Kuhn Paradigm Shift Award[edit]

In honor of his legacy, the "Thomas Kuhn Paradigm Shift Award" is awarded by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 to speakers who present original views that are at odds with mainstream scientific understanding. The winner is selected based in the novelty of the viewpoint and its potential impact if it were to be widely accepted.[24]


Honors[edit]

Kuhn was named a Guggenheim Fellow in 1954, and in 1982 was awarded the George Sarton Medal by the History of Science Society. He also received numerous honorary doctorates.



B029 – 자본론, Das Kapital(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Capital, Criticism of Political Economy)) /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 188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20세기 역사와 거의 모든 학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대작.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결정체인 <자본론>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유통과 분배를 결정하는 원리를 규명하고 이 생산양식의 내부조직과 모순들을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밝힌 역작이다. 상품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하여 노동가치 잉여가치 착취재생산 자본축척 이윤율하락 산업예비군 공황이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체계적인 출발점을 제시했다.


a.생애

  칼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는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최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논리를 펴곤 하는데 과연 그럴까?

  독일의 경제학자 사회주의자 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세워 오늘날의 세계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립하게 된 원인을 만들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라인 주의 트리에르 읍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유태계 독일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5년 본 대학의 법학과에서 입학했고 이듬해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했는데, 전공인 법률보다는 역사나 철학공부에 더 열중했다. 당시의 베를린 대학은 독일철학계를 풍미했던 헤겔 철학의 중심지였다. 또한 그 무렵에 독일은 프랑스 7월혁명의 반동 탄압시기였지만 자유평등의 거센 사조는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 이끌려 독일관념론에 심취했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 등 헤겔 좌파의 영향 아래서 점차로 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을 버리고 무신론적 혁명적인 경향을 굳게 했다. 41년 대학과정을 마치면서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2년 10월 급진적인 신문인 <라인 신문>의 주필로 취임, 혁명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프로이센의 절대주의를 비판했으며, 이 시기를 통해 그는 관념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혁명적인 민주주의자에게 과학적 공산주의자로 바뀌게 되었다. 얼마 뒤에 신문이 폐간되자 그는 트리에르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구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나 그런 행복도 오래가지 않아 프랑스 영국 등으로의 망명생활이 시작되면서 풍운아로 변해간다. 44년 파리에서 평생동지인 엥겔스를 만났고, 마침내 1948년 2월에 <공산당 선언>을 하게 된다.

  3월에 베를린의 <3월혁명>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런던으로 건너가 혁명의 선전이라고도 할 <자본론> 집필에 전념한다. 1859년에 훗날 <자본론>의 서문이 된 <경제학 비판>을 써서 경제학의 기초를 세우고 1867년에는 <자본론> 1권을 간행했다. 이후 계속되는 궁핍 속에서도 학문적 정열을 불태워 건강을 해치면서도 <자본론>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자택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자본론> <경제학철학초고> 등이 있다. <자본론> 제2권은 1885년, 3권은 1894년에 엥겔스가 간행했다.


b.마르크스의 사상과 그 배경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존했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1. 시대적 배경

  그가 생존한 19세기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여파로 유럽세계가 풍랑 속에서 흔들리던 광란의 시대였다. 즉, 17, 8세기의 절대왕정을 타파한 근대사회 및 정치사상은 개인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근간으로 하면서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를 확립시키는 한편 자유주의적인 사조를 만연시켰다. 이 자유주의적 사조는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경제적 자유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소유권의 불가침, 계약의 자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적, 자유는 무절제한 <자유방임(laissez faire)>으로 인해 경제적인 불평등, 대량실업,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무질서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이러한 초기 자본주의 혼란상황을 목도한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발전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사상적 배경 및 사상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은 19세기의 3대 지적 유산인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관념철학>, 스미스와 리카도의 영국 <고전경제학>, 생 시몽, 푸리에, 오언의 프랑스 <사회주의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 종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설>, <계급투쟁론>과 <혁명론>등으로 발전시켰다.

 (1) 마르크스의 <철학이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독일의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독일의 관념철학의 영향을 받아 헤겔의 변증법과 그의 제자인 포이어 바흐의 유물론을 결합시켜 변증법적 유물론(유물변증법)을 완성했다. 즉, 모든 것은 내부 모순에 의해 정 - 반 – 합의 과정으로 계속 변화하는데, 결국 물질적인 하부구조(생산력+생산관계)가 정신적인 상부구조(법률적정치적 제도)를 결정짓는다고 보고, 사회변화와 역사발전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2)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은 잉여가치설과 착취설이 그 핵심이다. 이는 영국의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발전시킨 것인데, 노동가치설은 일체의 상품가치가 그 상품생산에 투하된 직간접적인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학설이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을 주창한 뒤로 그의 중심연구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를 해부하는 데 두었는데, 이때의 중심개념이 바로 잉여가치론이었다. 자세한 것은 <자본론>에 기술되어 있다.

 (3) 마르크스의 <정치이론>은 계급투쟁설 폭력혁명론 국가소멸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등으로 구성된다. 이는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한 생 시몽 등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이들의 사상은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과 해악을 비판하여 무계급사회의 이상을 고양시킨 점에서 마르크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을 사회와 상충계급 사람들의 자발적 반성에서 찾고 있는 데 비해 마르크스의 정치학은 그것을 계급투쟁에서 찾고 있다. 이 계급투쟁론은 유물사관이나 잉여가치론과 아울러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낳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여기서 그는 결국 자본주의의

필멸과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한다.


c.<자본론>의 내용

 그가 구상하고 서술한 <자본론>의 초고는 총 3권 4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자본의 생산과정, 제2부는 자본의 유통과정, 제3부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 제4부는 학설사였다. 제1권은 그의 생존시 1859년, 제2, 3권은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발행했고, 제4부는 카우츠키에 의해 <잉여가치의 제설>이란 이름으로 1905년과 1910년에 3권으로 나누어 발간되었다.

  마르크스의 기본철학인 유물사관이란 어느 사회를 알려면 그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역사는 주로 물질, 곧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관으로, 그의 자본론을 이해하려면 그의 경제이론을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은 각 개인이 사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저절로 사회전체의 이익도 증진케 하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는 사익과 공익을 조화시키는 기막힌 장치라고 보았다.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의 어두운 면, 즉 계급갈등 인간소외 착취 실업 빈곤 등 우리 인간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이 그의 저서 <자본론<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완전 자체의 내용이 다소 무겁고 난해하나 가능한 쉽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생산에 투하된 직간접 노동량의 총량이라는 노동가치설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의 시장가격은 노동의 가치와 일치하므로 상품의 판매수입은 노동자에게 전부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 일부를 자본가들이 <착취(exploitation)>한다고 보고,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 또는 불로소득이라고 명명했다.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노동자는 착취당하더라도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자본가는 그 속성상 자본을 계속 축적하려 하므로 노동자에게 그 몫을 다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으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가의 속성은 이윤과 자본의 계속적인 축적이라는 것이다. 축적의 목적은 후일의 소비가 아니라 부의 추구, 또는 자본축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본가가 자본을 축적하면 할수록 그 이윤율은 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될수록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착취하게 되므로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심화된다고 본다. 즉,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하락해서 노동자는 스스로가 생산한 제품조차 구입하게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 공장자동화 등에 사용하는 기계나 장비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이 이의 지배를 받게 되며 노동조건 또한 악화되어 소외감이 증가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가가 자본을 축적함에 따라 노동보다 자본의 사용이 많아져 실업이 증가하게 되므로 이른바 실업자들의 집단인 <산업예비군>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산업예비군의 증가는 노동의 임금이 인간의 최저 생계수준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막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의 이윤율이 계속 떨어지고 국내의 투자기회가 소진되면 자본가들은 정부와 결탁하여 해외에 진출, 식민지를 만들어 잔인하게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침략주의자 제국주의자가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소득분배의 불균등이 심화되므로, 수탈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점차 계급의식을 갖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축적이 고도화되고 대규모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경쟁체제는 붕괴되고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통해 독점화 현상, 즉 <독점자본주의(monopoly capitalism)>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은 증가하나 이를 소비할 노동자계층의 소득은 줄어들어 경제는 소비가 부족한 이른바 과소소비 상태가 되고 따라서 경기침체는 심화되어 <공황(depression)>이 발생하게 되므로 경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산대중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된다.

  독점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자본주의경제는 하나의 거대한 트러스트나 독점기업화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불황과 궁핍화도 극에 달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단결하여 격렬한 사회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이 노동자계층의 혁명과 대공황을 수반하는 경기변동이 자본주의의 위기와 멸망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이상이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으로 자본주의의 멸망과 사회주의의 도래를 설명하려고 한 자본론의 요지다.


d.마르크스 사상의 현대적 의의

 카를 마르크스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저널리스트였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경제학자였다. 또한 그는 철학의 목적을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번역하는데>> 두었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아마 인류역사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처럼 애증의 상반된 평가 속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예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만큼 천사와 짐승의 극단적인 평가를 받으며 후세 역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도 흔치 않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는 성인의 반열에 올라있으나 그 반대에서는 혹독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의 저서<자본론>이 우리 나라의 금서목록에서 해제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혹독한 탄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전달하려는 핵심적 요지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자본주의 체제가 현대사회의 조직형태로는 부적합한 체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는 소수의 자본가계층에서는 고도의 생산력으로 인한 엄청난 잉여의 혜택을 누리게 하면서 다수의 대중에게는 경제적 예속에 따른 막대한 인간적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며, 자본주의 체제는 주기적 불황을 초래하여 많은 대중들을 실업과 불안에 시달리게 만들고 노동자들을 궁핍화시킨다고 보았다.

 (2) 자본주의는 역사적 소명(생산력 증대)를 다하고 인류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류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과 케인스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한 단계로 보고 사회주의가 도래 할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건설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빗나가고, 최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만 보아도 마르크스주의가 틀렸으니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논리를 펴곤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맹목적 신앙이 금기인 것처럼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도 부당하다. 그의 사상은 인류역사에서 명멸한 다른 많은 위대한 사상과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오류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 또는 <과학적 논증> 역시 전적으로 실현되지도 완전하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 자신의 세계관과 역사철학에 입각해서 생각해보아도 그의 사상은 19세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지 역사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다>>는 절대빈곤의 나락에 빠져 있지 않다. 한 세기를 뛰어넘어서까지 인류문명의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은 그가 추구한 가치이지 그가 선택했던 방법이 아니다. 경제적 평등에 의해 뒷받침되는 자유, 소외되지 않는 노동, 정당한 근로에 의한 소득,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관습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개인의 자유롭고 전면적인 발전 등 그가 옹호한 <영원한 진리>는 당장은 요원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인류문명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B028 – 자유론, On Liberty/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밀이 내가 쓴 어느 책보다도 오랜 생명을 가질 것이다 라고 말한 이 저서는 사실상 그의 부인과의 합작품으로서, 자유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논한 근대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고전이다. 밀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한 최초의 자유주의 이론가로 자유주의의 민주적 개혁 및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그가 자유에의 위협이라고 본 순수한 다수의 지배 에는 반대한다. 이 책에서 밀은 개인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고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a.생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우선했던 밀. 그는 영국의 철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공리주의 사상가 밀의 아들로서 공리주의 사상의 계승자가 되도록 기대한 그의 아버지가 기울인 조기 천재교육은 유명하다. 3세 때 그리스 어를, 8세 때 라틴 어를 배우고 이를 기초로 역사와 문학서적을 널리 섭렵했다. 12세때부터는 그 범위가 철학. 논리학. 정치학. 경제학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아버지와 계속되었다고 한다.

 14세 때 1년 정도 도불하여 스포츠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아 지낸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에 일생에 걸친 취미가 되었다. 15세에 귀국한 후 벤담주의의 저작인 뒤몽의 <입법론>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공리주의 사상가가 되기고 결심했다. 1822년에는 벤담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동지들과 <공리주의자협회>를 만들고 <웨스트민스터 평론지> 등에 많은 기고를 했다. 다음해인 23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35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 보급을 위한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밀 자서전>에 의하면 20세 가을에 그는 어떤 일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공리주의적 개혁에도 열정을 가질 수 없게 되는 등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다. 이는 영국 사교계의 저급한 도덕수준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고전파 경제학의 사익추구 개념을 너무나 성선설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으므로 종래의 공리주의 사상을 수정할 필요를 통감하게 되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계보에 서 있는 콜리지와 칼라일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정치제도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주장한 논리에 반면의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생 시몽파와 콩트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또는 사유재산 제도와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고전파 경제학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이는 후에 그가 영국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배경이 된다.

 1830년 새로운 사상추구를 향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던 그는 후에 아내가 된 테일러와 만났다. 테일러는 미모와 지적 교양으로 밀의 인생의 지주가 되었으나, 밀의 사상내용에까지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어쨌든 그의 새로운 사상은 <런던평론>과 <런던웨스트민스터 평론>에 기고한 글들로 나타났는데, 특히 <벤담론>과 <콜리지론>은 그의 사상전환을 일단 총결산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벤담주의를 18세기 계몽사상의 전형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19세기적 반동인 콜리지에도 일정한 평가를 부여하는 공리주의 수정의 입장을 확립한 것이다.

 1843년에는 <논리학 체계>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 혁명운동이 유럽을 휩쓴 1848년에 출판된 <경제학 원리>에서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에 입각한 경제체제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종래의 경제학에 대해 분배형태는 인위적 . 역사적인 것이라는 등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또한 경제적 진보에 국민성의 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 등 고전파 경제학을 대담하게 수정하고자 했다.

 <자유론>은 모든 개인의 자유의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제를 가져오고, 모든 개인은 평균화하고 몰개성적이 되며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는 경세의 책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간정신의 자유와 개성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 원리>도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기보다도 사람들이 여가를 향수할 수 있는 정지상태 쪽이 바람직하며, 또한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시비도 어느 쪽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는가로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으로서 선거권의 확장운동에 몰두했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제안했다. 의원직을 물러난 후 집필활동을 계속하면서 남프랑스의 자연 속에서 곤충학자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b.시대적 배경과 밀의 사상적 변천

 밀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생 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자계급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갈등이 격화됨으로써 자유주의는 새로운 변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48년에는 <공산당 선언>도 나왔다.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밀은 예부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사회적 자유의 밑바탕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론>이 밀의 사상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밀의 사상적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면, 즉 인식론. 인성론 측면과 사회사상의 방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것이 편리하다.

 먼저 인식론과 인성론의 방면으로부터 본다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은사가 되는 벤담과 그의 부친을 통해 습득하게 된 사상은 로크, 흄 등의 경험주의의 인식론이며 또한 쾌락주의적 인성론과 공리주의적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는 앞 시기의 사상에 대해 자기나름의 비판과 반발을 보이는 시기다. 이 시기는 1826년으로부터 27년에 걸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의 <자서전> 속에서 <내 정신사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이 시기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러 콜리지를 통해 독일의 이상주의 사상에 접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벤담주의에 대해 불만과 약점을 발견하고 이것의 보충을 이상주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1838년 <벤담론>과 1840년의 <콜리지론>일 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후자에서는 독일의 이상주의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밀의 사상편력의 제3기는 대체로 1840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제2기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서  벤담주의에의 복귀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작은 1863년의 <해밀턴 철학의 검토>이다. 그리고 <자유론>이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제3기에서 제1기로 다시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제2기에서 경험한 이상주의적 경향은 결코 제3기에 있어서도 소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적 방면을 살펴보면 여기서도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상의 변천이 보여지고 있다. 그의 제1기에 있어서는 벤담의 자유방임주의가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근본원리였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에 있어서의 그는 상당히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하고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1848년의 <경제학 원리>일 것이다. 그런데 사상편력의 제3기에 있어서는 다시 그의 자유에의 동경이 힘차게 되살아나 간섭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맞섰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자유론>, 1861년의 <대의정치론>이며, 또한 유고인 <사회주의론>이다. 이처럼 <자유론>은 그의 자유주의 문헌의 대표작이다.


c.<자유론>의 내용

 밀의 자서전에 의하면 <자유론>은 1854년 하나의 논설로 씌어졌으나 1855년 1월 로마의 카피톨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것을 한 권으로 고쳐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 뒤 두 번이나 써서 밀쳐두었다가 가끔 꺼내서 수정하여 결국 전부를 고쳐 썼다 한다. 그 자신, 이처럼 주의 깊고 정성스럽게 수정한 것은 달리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간행은 1859년으로, 그 전해에는 35년간 일해 온 동인도회사를 물러나고 또 남프랑스 여행 중에 사랑하는 아내가 급사하는 슬픔을 당했다. <자유론>은 그녀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녀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자유론>은 5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서론>으로 전편에 걸친 개괄적 설명을 하고 있다. 종래에는 정치적 지배자들의 권력행사에 여러모로 제한을 가하기만 하면 국민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은 쉽게 실현되지 못했으며 새로이 다수결의 횡포라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압제는 반드시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여론의 압력 이라는 것도 있다.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갈 때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다수자가 수를 이용하여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이론이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리의 확립이 필요한데, #1 사상의 자유 #2 생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유와 취미의 자유,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3 개인과 개인의 단결의 자유다.


 제2장은 <자유론> 중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밝히고 있다. 밀은 우선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서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비난한다. 그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논할 때는 이 문제를 일단 둘로 나누어서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1) 박해를 받는 사상이 정당하고 현재의 지배적 사상이 잘못된 경우이다. 정당한 사상을 혹은 기타의 부당한 힘으로써 억압해서는 안된다.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 향후에도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사상의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라 할지라도 독선으로 흐르기보다 보다 더 나은 사상의 출현을 위해 사상의 문을 넓게 열어놓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이단자의 주장을 계속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면 미래에 더 좋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박해를 받는 사상이 잘못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도 탄압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은 비록 어느 시기에는 정당시 된다 할 지라도 오랜 시일이 경과하게 되면 마침내 죽어버린 독단이 되어 생생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진리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일단 생기를 잃어버린 사상은 다시 그 진리성이 되살아나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반대의견과의 정정당당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반대론은 설사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너그러이 그 존재를 허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3장은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에 관해 논하고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컨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경우에 개성의 주장은 인간 행복의 주요한 요소이며, 실제로 개성의 말살은 개인과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결여하게 된다. 


 제4장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 이어 대체 어떠한 행위가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두 경우, 즉 주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개인인 경우와 사회인 경우로 나누어서 전자의 행위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후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이것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개인의 행위를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와 다른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행위로 나누어, 오직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만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려고 했다. 


 제5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실례를 들어 앞 장에서 말한 자유의 한계에 관한 원리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즉, 이러한 실례로서 상행위, 자유무역론,독약매매, 술주정꾼의 취체, 매음과 

도박의 유혹 등을 들어 자유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설명하려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두 논점의 의의와 한계를 더한층 명료하게 하려는 데 있다. #1 개인은 그 행위가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사람의 이해에도 관계되지 않는 한 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요, #2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관해서는 개인은 당연히 사회에 대해서 사회적 또는 법률적 형벌을 가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d.사상적 평가

 본래 자유주의는 근대사회의 시작과 함께 봉건적 특권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으로부터 요구되었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을 주장했는데,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는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임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했다. 공리주의자 벤담은 인간을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자유론>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관은 이와 크게 다르다. 즉, 밀은 인간을 결코 쾌락과 고통의 충동에서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식하여 자유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이성자로 보고 있다. 또한 밀에 있어서의 인간은 단지 이성자일 뿐만 아니라 각 이성자는 또한 판이한 개성을 가지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 또한 밀은 적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한 한 그 자유는 어떤 사실의 수단이 됨으로써 가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물론 자유라는 것은 인격의 성장과 진리의 천명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수단의 하나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수단은 그 목적이 인격이며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의 수단과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밀은 인간에게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인격의 성장에 두었으므로 이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는 매우 광범위한 간섭의 범위를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론>은 자유의 이론에 관한 대표적인 문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에 있어서는 간섭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밀은 인간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서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했던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 을 의미한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다 건설하려 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 자유주의라는 사회사상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논했다. 그리하여 사회와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자유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사상은 3단계의 편력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만일 그가 여전히 벤담처럼 인식론에서는 경험주의를, 인성론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그리고 윤리관에서는 공리주의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자유주의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래스키가 밀은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만큼 민주주의 해악을 비판한 사람도 없다. 그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만큼 자유방임주의의 지나침에 대해 적의를 품은 사람도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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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Communist Manifesto ]

연도

1848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강령으로 삼기 위해 공동으로 집필한 선언이다.


1848년 2월 런던에서 독일어 판이 발간되고 나서 순식간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각국에 소개되었다. 비록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이 선언만큼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리고 정확하게 전달한 책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내용은 주요하게 네 부분,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봉건 시대부터 19세기 자본주의에 이르는 역사를 고찰한 뒤, 자본주의는 결국 몰락하여 노동자들의 사회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노동 계급의 선봉인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지배 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릴 사회 계층으로 규정되었다.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내용만 싣는다.


하나의 유령, 즉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맺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의 적들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던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훨씬 진보적인 반정부당이나 반동적인 적들에 맞서 거꾸로 공산주의라고 낙인을 찍으면서 비난을 퍼붓지 않았던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두 가지의 결론이 이 사실로부터 나온다.


1. 공산주의는 유럽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하나의 세력으로 이미 인정받고 있다.


2. 이제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입장과 목적과 취지를 전 세계 앞에 공개적으로 밝히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옛날이야기에 당 자체의 선언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다양한 국적을 소유한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문을 작성하여, 영어와 불어와 독일어와 이탈리아 어와 플랑드르 어와 덴마크 어로 출간하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엥겔스·마르크스

엥겔스(좌) : “나는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공동 집필하여 발표했어. 제1인터내셔널 총무위원으로 국제 노동 운동의 발전에 진력했고.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는 《자본론》 2, 3권을 편집하기도 했지.”

마르크스(우) : “나는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Karl Marx, 1818년~1883년).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집필했어. 자본주의 사회를 통렬히 고발했고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 과정,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 잉여가치론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사회 구성체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를 탐구했지.”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1)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사회의 역사2)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변함없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각 시기마다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 모두가 함께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을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벌여 왔다.


일찍이 역사상의 각 시기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즉 다수의 사회 계층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상태를 발견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귀족과 기사와 평민과 노예가 존재했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와 가신과 길드 조합원3)과 직인과 도제와 농노가 존재했고, 이러한 계급들의 경우에 거의 모두가 또다시 하위 계층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면서 발생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적 적대 관계를 해소하지 못했다. 그것은 낡은 것을 대신해서 새로운 계급과 새로운 억압 조건과 새로운 투쟁 형태를 확립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 즉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계급적 적대 관계가 단순화되었다. 사회 전체가 대단히 적대적인 두 진영, 즉 직접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양대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한층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의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자유민이 생겨났고, 이 자유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첫 번째 요소가 발전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희망봉4)의 발견은 성장 중인 부르주아지에게 신천지를 열어 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 교역, 교환 수단과 상품의 일반적인 증가는 상업, 항해, 공업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충격을 가함으로써 몰락해 가던 봉건 사회 안에서 혁명적 요소를 급속하게 발전시켰다.


공업 생산이 폐쇄된 길드에 의해 독점된 봉건적 공업 체제는 새로운 시장과 함께 성장하는 수요를 이제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었다. 매뉴팩처5)가 그것을 대신했다. 길드 조합원은 매뉴팩처를 경영하는 중간 계급에 의해 떠밀려났다. 즉 조직이 서로 다른 길드 사이의 분업은 동일한 작업장에서 각자 진행되는 분업을 따라잡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한편,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더 이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증기와 기계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현대적 대공업이 매뉴팩처를 대신했다. 공업을 경영하는 백만장자이면서, 모든 군대식 산업 조직의 우두머리에 해당되는 현대적 부르주아들이 매뉴팩처를 경영하는 중간 계급을 대신했다.


현대적 대공업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덕분에 개척된 세계 시장을 확고하게 다져 갔다. 세계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무역과 항해와 육상 교통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역으로 공업이 한층 더 성장해 갔다. 또한 공업과 무역과 항해와 철도가 확대되어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그만큼 성장해 가면서 자본을 축적했고, 중세의 모든 잔존 계급을 사라지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적 부르주아지 자체가 오랜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에서 일어난 잇따른 혁명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각 단계별로 성장함에 따라 그 계급의 정치적 지위도 향상되어 갔다. 봉건 귀족의 지배 하에서 피지배 계급에 속했고, 무장한 자치 단체였던 중세의 코뮌6),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처럼 독립한 도시 공화국이나, 프랑스에서처럼 납세 의무를 지닌 군주국의 제3신분에 속했으며, 그 이후로 매뉴팩처가 확립된 시기에는 봉건 귀족에 맞서 싸우는 견제자로서 반(半)봉건적 질서나 절대 군주제를 옹호함으로써 사실상 막강한 군주제의 주된 토대가 되었던 부르주아지는, 현대적 대공업이 확립되고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후로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드디어 독점적 정치 지배력을 획득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 본문 이미지 1

파리에 수립되었던 최초의 노동자 계급 주도의 혁명적 자치 정권 파리 코뮌의 시민들이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목가적인 관계를 끝장냈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신분’에 인간을 속박하는 온갖 봉건적 유대관계를 가차 없이 토막 내어 버렸다. 또한 부르주아지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는 적나라한 이기심과 냉혹한 이해타산 말고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광신, 기사적인 열정, 속물적 감상주의와 같은 가장 성스러운 황홀경으로부터 벗어나 이해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빠져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가치를 교환 가치로 전락시켰으며, 포기할 수 없는 수많은 특권적 자유 대신에 오로지 비양심적인 자유, 즉 자유로운 거래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착취형태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고 노골적이고 잔인한 착취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명예로운 모든 직업에서 그것의 후광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의사나 법률가나 성직자나 시인이나 학자를 자신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가족끼리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는 가족 관계를 오로지 금전만 따지는 관계로 전락시켜 버렸다.


중세에 야만적으로 힘을 과시했던 모습을 이제 반동 세력이 대단히 찬양하고 있는데, 부르주아지는 그런 모습이 가장 심각한 게으름을 적절하게 물리치는 도구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주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 지 가장 먼저 보여 주었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로마의 수로와 고딕식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부르주아지는 민족 대이동이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모든 역사적 사건보다 훨씬 획기적인 원정에 성공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형성된 생산 관계를 혁신할 수밖에 없고, 그 생산 관계에 따른 임금 노동 전체를 혁신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훨씬 오래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계급들의 생존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낡은 생산 양식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생산이 지속적으로 혁신되고, 모든 사회적 조건이 끊임없이 혼란을 겪고, 불안과 동요가 항상 지속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시대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다르다.


굳어지고 단단히 냉각되어 버린 모든 관계는 예로부터 오래된 일련의 편견이나 견해와 함께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관계조차도 미처 제자리를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관계가 되어 버린다. 굳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사라지고, 신성한 것들은 모두 다 능욕을 당한다. 마침내 인간은 자기의 진정한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족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산물을 팔기 위한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구 곳곳을 누비면서 돌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곳곳에 정착하면서, 모든 곳과 거래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계 시장을 이용함으로써,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는 범세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동 세력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국내적 기반을 그 토대부터 파괴해 버렸다.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온 모든 국내 산업이 이미 파괴되었거나 매일같이 파괴되고 있다. 그러한 국내 산업은 새로운 산업에 의해 떠밀려나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새로운 산업의 도입이 모든 문명국가의 사활적 문제가 되고 있다. 새로운 산업은 이제 더 이상 자국 내의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가져 온 원료를 가공하는 특성을 띤다.


또한 새로운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소비된다. 국산품으로 채워졌던 과거의 수요를 대신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과 나라의 생산물이 아니면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수요가 생겨난다. 지역적이고 국내적으로 격리된 채 자급자족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 대신에, 국가들이 모든 방면에서 교류하면서 전면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한 교류는 물질적 생산이나 지적 생산을 막론하고 모든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개별 국가의 지적 생산물이 공동 자산이 된다.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국가는 점차 존재하지 않게 되고, 지역적이고 국내적인 차원에 머무는 수많은 문학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차원의 문학이 형성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급속하게 개선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편리해짐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가,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종족조차도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저렴한 상품 가격은 야만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매우 집요하게 품고 있는 증오심까지도 굴복시키는 강력한 무기이다. 부르주아지는 멸망을 조건부로 삼으면서 모든 국가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도입하도록 강제한다. 부르주아지는 문명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 예컨대 모두가 스스로 부르주아가 되도록 강제한다. 한마디로 말해,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본뜬 세계를 창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 하에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나서 농촌 인구에 비해 도시 인구를 크게 증가시킴으로써, 상당수의 인구를 무지몽매한 농촌 생활에서 구제했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에 종속시켰던 것처럼, 미개국과 반(半)미개국을 문명국에, 농업 국가를 부르주아 국가에, 동양을 서양에 각각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과 재산과 인구의 분산 상태를 점차 해소한다. 부르주아지는 인구와 생산 수단을 각각 집중시켰고, 소수의 수중에 부를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초래되었다. 이해관계와 법률과 정치 체제와 세제가 각자 다르게 독립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지방들이 단일한 정치 체제, 단일한 법률 체계, 단일한 국가의 계급적 이해, 단일한 국경선, 단일한 관세 제도를 유지하는 단일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지배 기간 동안에 과거의 모든 세대가 이룩했던 생산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강력하면서도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 냈다.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지배, 기계, 공업과 농업에 대한 화학의 이용, 증기선을 이용한 항해, 철도, 전신, 경작지 확보를 위한 모든 대륙의 개간, 운하 개설이나 하천 이용,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 등 이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일찍이 어떤 시대에도 예측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은 부르주아지가 쌓아올린 토대로서 봉건 사회 내부에서 발생되었다. 이러한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자, 봉건 사회의 생산 조건과 교환 조건, 공장제 수공업과 농업으로 이루어진 봉건적 질서, 요컨대 봉건적 소유 관계는 이미 발전한 생산력에 이제 더 이상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엄청나게 방해했다. 그것은 분쇄되어야 했고, 마침내 분쇄되고 말았다.


자유 경쟁 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섰고, 그에 적합한 사회정치제도가 수립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유사한 움직임이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산 관계와 교환 관계와 소유 관계로 이루어진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회로서,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주문으로 불러 낸 지하 세계의 세력을 이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와 유사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에 걸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력이 현대의 생산 조건, 즉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지배를 존속시키기 위한 조건에 속하는 소유 관계에 맞서 저항해 온 역사에 불과하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립을 각 시기마다 더욱더 위협적으로 위기로 치닫게 하는 상업 공황이 그 점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공황이 발생할 경우, 현존하는 대부분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과거에 쌓아 온 생산력의 상당 부분마저도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상업 공황이 발생하면, 과거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졌던 일종의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만연한다. 사회는 갑작스럽게 잠시 야만적인 상태로 퇴보한다. 마치 기근이나 파괴적 전면전이 발생한 것처럼 모든 생활 수단이 공급되지 못하고, 공업과 상업이 파괴되어 버린 상태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너무나 지나치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생활 수단이 지나치게 풍부하고, 공업과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의해 좌우되는 생산력은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생산력이 이러한 소유 관계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한다. 또한 생산력이 이러한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부르주아 사회 전체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이 너무나 열악해서 생산력에 의해 만들어진 부를 포용할 수 없다.


부르주아지는 이 공황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을 강제적으로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기존의 시장을 훨씬 철저하게 착취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바꿔 말해서, 그런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훨씬 광범위하면서도 파괴적인 공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제도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는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향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무기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무기를 자신에게 겨눌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현대의 노동 계급을 만들어 냈다.


부르주아지, 바꿔 말해서 자본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 계급도 발전한다. 현대의 노동 계급은 오로지 노동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고, 자신의 노동이 자본을 늘려 줄 경우에만 노동할 수 있다. 이 노동자들은 다른 온갖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따로따로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어쩔 수 없이 변화무쌍한 경쟁과 변동이 심한 시장에 내맡겨진다.


기계가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분업이 확대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독특한 특성을 모두 상실해 버림으로써 장인다운 온갖 매력을 잃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는 기계의 부속물이 된다. 가장 단순하고 단조롭고 배우기 쉬운 요령만 그들에게 요구될 따름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경우에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생산 비용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모든 상품 가격은 상품의 생산 비용과 같으므로 노동력의 가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단순해질수록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 게다가 기계 이용과 분업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 시간이 연장되거나 정해진 시간 내에 요구되는 노동량이 증가하거나 기계의 운전 속도가 빨라지는 방식으로 노동 강도가 그만큼 높아진다.


현대의 산업은 가부장적인 장인이 경영하는 소규모 작업장을 산업 자본가가 경영하는 대규모 공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노동자 대중은 공장에 집결하여 군대식으로 편제된다. 노동자 대중은 산업 군대의 병사로서 장교와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위계질서의 명령 체계를 따른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노예이면서 부르주아 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나날이 시시각각으로 기계와 감시자, 특히 각각의 부르주아 공장주의 노예가 된다. 이러한 독재 체제가 영리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더욱더 노골적으로 기여할수록, 그 체제는 더욱더 인색하고 가증스럽고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육체노동의 경우, 기술과 체력을 점차 덜 필요로 하는 성격을 띠어 갈수록, 즉 현대의 산업이 한층 더 발전할수록,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성별과 연령별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노동자 계급에게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없다. 오직 연령과 성별에 따라 비용이 적게 들거나 많이 드는 노동 수단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노동자가 공장주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나서 마침내 현금 형태로 임금을 받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지, 즉 지주나 상점 주인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이 노동자를 못살게 군다.


소매상과 가게 주인과 몰락한 소매상과 수공업자와 농민과 같이 훨씬 낮은 계층에 속하는 중간 계급 모두는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소규모 자본은 대규모 공업을 경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자본가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몰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 방식이 출현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전문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에 속하는 인구로부터 보충된다.


메테르니히

“나 메테르니히(C.W.L. Metternich, 1773년~1859년)는 독일의 정치가이자 수상으로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고 보수 반동의 대명사로 불렸지.”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친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그 계급이 형성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게 맞서, 맨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투쟁하고, 그 다음으로는 동일한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더 나아가서는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산업 분야에 속한 노동자들이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생산 조건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생산 수단 자체를 공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경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수입 상품을 파괴하고,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을 불태우고, 이미 사라져 버린 중세의 직인 신분을 막무가내로 되찾으려고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전국에 흩어진 채 여전히 지리멸렬한 상태의 대중으로서 존재하면서 그들 서로 간에 경쟁하기에 급급하다. 노동자들이 어느 곳에선가 단결하여 훨씬 견고한 조직을 형성한 경우, 그러한 성과는 그들이 능동적으로 단결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필요에 의해 단결을 이루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동원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여전히 한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이 상대하는 적, 즉 절대 군주제의 잔재인 지주로서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부르주아인 프티부르주아와 싸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적 운동 전체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집중되고, 그렇게 해서 쟁취한 모든 승리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훨씬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자신의 세력이 커져 가면서 그러한 힘을 자각한다. 기계 탓으로 노동 간의 모든 차별성이 사라지고 거의 어디서나 임금이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 조건은 점차 똑같아진다. 부르주아들 사이에 경쟁이 격화되어 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상업 공황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은 더욱더 불안정해진다. 기계가 훨씬 빠른 속도로 점차 개선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계는 점점 불안정해진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차 두 계급 사이의 충돌이라는 성격으로 바뀌어 간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에 맞서는 단체, 즉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그들은 이처럼 우발적으로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 미리 대비할 목적에서 상설 조직을 만든다. 여기저기서 투쟁이 발생하여 폭동으로 바뀌어 간다.


때로는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시적 승리에 불과하다. 그러한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지금 당장 얻어지는 결과에 있지 않고 노동자들의 단결이 한층 더 강화되는 데 있다. 현대의 산업이 이룩해 낸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이러한 단결은 강화된다. 바로 이러한 교류를 통해 동일한 성격을 띤 수많은 지역 투쟁이 전국적 규모로 진행되는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된다. 하지만, 모든 계급투쟁은 일종의 정치 투쟁이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탓에 중세의 자유민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 낼 수 있었던 단결 수준을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철도가 발달한 덕분에 수년 만에 이루어 낸다.


기조

“나 기조(F.P.G.Guizot, 1787년~1874년)는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로, 7월 왕정 하에서 수상을 지냈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적 정치를 펼쳤어.”

이처럼 프롤레타리아를 단일한 계급으로 조직화하고, 그 결과로서 단일한 정당으로 조직화하는 일은 노동자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 때문에 끊임없이 실패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화는 훨씬 강력하게, 훨씬 굳건하게, 훨씬 위력적으로 계속해서 시도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 내부가 분열되어 노동자들의 특정한 이익이 법적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 사례로서 영국에서 ‘1일 10시간 노동법’이 실현되었다.


대체적으로 낡은 사회의 계급들 사이의 갈등은 여러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과정을 촉진한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처음에는 귀족과 투쟁했고, 나중에는 산업 발전에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지와 투쟁했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 항상 투쟁했다. 이 모든 투쟁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 무대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누려 온 정치적 일반교양의 요소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달리 표현해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대항할 무기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지배 계급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최소한 그들의 생존 조건이 위협받는다. 이들도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마침내 계급투쟁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지배 계급의 내부, 즉 사실상 낡은 사회 전체의 내부가 해체되는 과정이 아주 격렬하고도 명백한 특성을 띠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일부가 지배 계급으로부터 이탈하여 혁명 계급, 즉 미래를 자신의 수중에 장악한 계급에 가담한다. 따라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쪽에 가담했듯이, 이제는 부르주아지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가담한다.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중에서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가담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진정 혁명적인 계급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나머지 계급들 모두는 현대의 산업이 발전하면서 몰락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하위 중간 계급들, 즉 소규모 생산자, 상점 주인, 장인,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 계급의 일부로서 자신들의 존재가 소멸되지 않게 하려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 성격을 띠지 않고 보수적 성격을 띤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쪽으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동적 성격을 띤다.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될 절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는 경우에만 그들은 혁명적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위험한 계급’, 즉 사회의 쓰레기와 다를 바 없이 낡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한 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부패되어 가는 집단7)은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 속으로 흡수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조건 때문에 그들은 반동적 모략에 매수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처지를 살펴보면, 사실상 낡은 사회는 이미 전반적으로 수렁에 빠져 버린 상태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재산이 없다. 처자식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 관계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현대의 산업 노동, 즉 자본에 대한 현대적 예속으로 인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이나 독일이나 가릴 것 없이 어느 국가에서나 프롤레타리아는 국민적 성향을 모두 다 상실해 버렸다. 법률이나 도덕이나 종교나 모두 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매우 엄청난 부르주아적 편견에 불과하고, 그만큼 그 배후에는 부르주아적인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다.


과거에 지배권을 장악했던 모든 지배 계급들은 사회 전체를 자신들의 독점적 소유를 보장하는 조건에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확보한 자신들의 지위를 굳히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자신들의 독점적 소유 양식을 폐지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유지해 온 여타의 모든 독점적 소유 양식마저도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생산력을 장악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기 소유물이 아무것도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일어났던 모든 역사상의 운동은 소수자의 운동이었거나 소수자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 다수자가 참여하는 의식적이고 자주적 운동일 뿐만 아니라 압도적 다수자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는 바, 공공 조직의 상부 구조 전체를 철저히 해체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어설 수도 없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비록 내용상으로는 아니지만, 외형상으로 맨 처음에 일국적인 성격을 띤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마땅히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일소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발전 단계를 서술하면서, 성격이 다소 분명치 않은 내란이 기존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서 폭발적으로 공공연한 혁명으로 발전되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폭력으로 타도한 다음에 자신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까지 고찰했다.


공산당 선언 본문 이미지 2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처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유형의 사회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적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특정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려면, 피지배 계급이 적어도 예속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조건은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 하에서 농노는 코뮌의 구성원으로서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고, 마찬가지로 봉건적 절대주의의 속박에 묶여 있던 프티부르주아는 부르주아로서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시도했다.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노동자는 산업 발전에 따라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생활 조건 이하로 더욱더 열악해지고 있다. 그들은 극빈자로 전락하고, 구호를 필요로 하는 대상자는 인구나 부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간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존재하면서 억압적 법률을 행사하여 자신의 생활 조건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행위가 이제 현실에 맞지 않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르주아지가 지배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노예들에게 생활 조건을 보장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로부터 부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부양해야 할 만큼 그들이 딱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지배 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꿔 말해서, 부르주아지의 존립은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


부르주아 계급이 존립하면서 지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본 형성과 자본 증식이다. 자본의 존재 조건은 임금 노동이다. 임금 노동은 오로지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 관계에만 기반을 둔다. 부르주아지가 자신도 모르게 산업 발전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상호간의 경쟁으로 인해 고립되기보다 상호간의 교류 관계를 통해 혁명적으로 단결한다. 따라서 현대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기반 자체가 부르주아지가 서 있는 발밑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을 생산하는 셈이다.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모두 다 피할 수 없다.(······)


각주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는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서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현대의 자본가 계급을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현대의 임금 노동자 계급으로서 아무런 생산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생존하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다. - 1888년의 영어 판/엥겔스의 주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당 선언 [Communist Manifesto] -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바꾼 연설과 선언, 2006. 1. 15.,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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