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8– 성호사설(星湖僿說) / 이익(李瀷) (1681~1763)
성호는 그의 호이고 사설은 <자질구레한 말> 이라는 뜻으로 성호가 겸손한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흔히 백과사전류로 부류되는 <성호사설>은 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이다. 따라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성호사설>이다. 평생을 야인으로 지낸 성호가 정치.경제.사회 등 국정전반에 걸쳐 재야에서 보내는 개혁의 메시지로, 그 성격과 영향에 있어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고염무가 지은 <일지록>에 견줄 만한 대저로 평가된다.
a.생애
중농주의 실학사상의 대가인 이익의 호는 성호, 본관은 경기도 여주. 대대로 높은 관직을 누리던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은 당시 언관의 총수였던 대사헌직에 있었다. 1680년(숙종 6)에 서인들이 남인들을 몰아냈던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로 죄천되었다가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9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난 성호는 몸이 허약했고 뚜렸한 스승 없이 둘째형인 잠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살벌한 당쟁 속에서 노론에 밀려난 남인 가문에 태어났던 성호의 일생은 출발부터가 고난에 찬 것이었다. 25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장에서 부정이 판치는 것을 보고 회시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다음해에 형인 잠이 장희빈을 옹호하다가 당쟁으로 희생되자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한다. 국가에서 몇번 벼슬을 하사했으나 거절하고 고향인 첨성리 (경기도 안산.현재는 아파트 단지)에 성호장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사상은 권철신.안정복.이긍익.이중환.이기환.정약용 등에 계승되었다.
그가 65세 되던 해데 그의 학행을 높이 산 조정이 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끝내 야인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 때문에 그는 만년에 심한 가난에 빠져 <<나의 궁핍과 기아가 날로 심하여 졸지에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저서로는 <성호집>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집속록> <사서삼경질서> 등이 있다.
b.실학과 이익의 사상
1.실학사상
실학이란 조선후기 영.정조 때 일어난 학풍으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현실개혁을 통해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회개혁 사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정책적으로 채택된 성리학의 자기반성과 그의 극복과정에서 나타난 발전적 국면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기풍은 주로 경기기지방의 학자들에 의해 주로 일어났는데, 청나라에서 수입된 고증학과 서학(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학문적 성향과 시기를 중심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8세기 중반 이익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다.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이 학파는 중농주의적 입장에서 토지.조세.교육.과거.군사제도의 개혁 등 각종제도개혁에 치중했다. 실학파의 비조인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토지의 균전론을 주장했고,이익은 <곽우록>에서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겸병을 막는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익은 17세기 이후에 그 폐단이 노정되기 시작한 화폐의 유통에 따른 서울의 상업 고리대자본이 농촌에 침투하여 농촌경제를 파탄시키고 이농을 <촉진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또한 당시의 이앙법의 보급과 광작운동으로 부농의 출현과 소농민의 증가현상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당시 성행하던 성리학의 비생산적인 관념론을 배격하고 당시의 정치경제적 현실개혁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뒤를 이어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다. 이들의 사상은 당시 별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구한말의 애국계몽사상가와 국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 18세기 후반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다. 이 학파는 유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으로 이어지는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상공업의 진흥방안을 학자들 나름대로 제시했다.
(3)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다. 이학파는 경서및 금석.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했다.
2.이익의 사상
많은 실학자 중에서도 이익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이.유형원에서 비롯한 실학의 물결이 <성호>라는 호수로 모여 들었으며.다시 이 호수는 여러 새 흐름의 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역사학파의 안정복, 지리학의 윤동규, 이중환, 경학의 이병휴. 수학의 이가환, 그리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의 경제학은 모두 그 연원을 성호에 두고 있다. 이렇듯 실학은 이익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익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했다. 불교와 선비의 무실한 학풍을 배격하고 수기치인의 학문을 강조했으며 자득을 강조했다.
(1)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는 중농사상에 입각한 한전론과 사농합일을 주장하여 각 농가에 영업전을 지급하되 매매는 금지하고,그밖의 토지에는 매매를 허락하여 토지소유의 평등을 이루고자 했다. 고리대와 화폐, 환곡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사창제도를 주장했다.
(2)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자주적 역사관과 실증성을 강조했다. 종래 중국중심의 화이관에서 벗어나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여 우리가 중국에 예속될 수 없음을 밝혔다. 또한 역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종래의 주관적인 태도를 벗어나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3) 정치적인 면에서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기본적으로는 덕치를 말하면서, 현실에 있어서는 제도.형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쟁에 대한 폐단도 지적하여 당쟁은 양반수에 비해 관직수가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과거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4) 사회적인 측면에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가 빈곤하고 농민이 피폐한 이유로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 게으름.승려. 기교(사치.미신) 등의 6가지를 들고 이것을 추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c.<성호사설>의 내용
흔히 백과사전류로 분류되는 <성호사설>은 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 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으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서 편찬했다. 이것이 <성호사설유선>이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성호사설>이다.
스스의 글을 간추리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하는 안정복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상의하지 말고 수정하라고 하는 등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신뢰감을 보였고, 안정복과 같은 우수한 제자에 의해 <성호사설>의 간행을 보게 된 것을 기뻐했다.
이 책의 끝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곽우록>은 이 책의 요약이요 결론이다. 곽우록 이란 재야에 있는 평민은 국가의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면 직접 그 피해를 입기 때문에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분에 넘치는 안을 제시하는 천민의 걱정 이란 뜻이다.
<성호사설>이 백과사전적 성격을 가진 데 반해 <곽우록>은 국정 전 분야에 걸쳐 그 폐단과 구제책을 체계적으로 논한 탁견에 가득 찬 명저다. 내용은 경연.전론.균전론.붕당론.논과거지폐 등 19개 항목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각각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본서는 모두 10권, 5편(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총 305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천지문>은 천문.지리에 관한 서술로서 해와 달, 별들, 바람과 비, 이슬과 서리, 조수, 역법과 산맥 및 옛 국가의 강역에 관한 것으로, 특히 서양기술의 정교성을 인식, 새로운 서양문물의 적극수용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단군과 기자조선의 강역이 요동지방까지 미쳤음을 논중하고,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2.<만물문>은 생활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복식.음식.농상.가축.화초 및 화폐와 도량형,병기에 서양기기등에 관한 서술이다.
3.<인사문>은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학문과 사상,인물과 사건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노비제도 및 서얼차별제도의 폐지,과거제도의 개선,고리대의 근원인 화폐제도의 폐지등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적.개혁적 내용을 담고 있다.
4.<경사문>은 <육경사서>와 중국.한국역사서를 읽으면서 잘못 해석된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그리고 역사사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붙인 사론이 실려 있다.
5.<시문문>은 중국과 한국 역대문인의 시문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성호사설>에 나타나는 그의 전반적인 사상은 성호의 사상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유난히 강조했던 당쟁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를 <곽우록 붕당론>에서 살펴본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권을 장악한 이조 전랑의 권한이 너무 커서 이 요직을 둘러싼 싸움이 불씨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주자학의 성격이 명분 실리를 내세워 남의 부정을 가려내는 데 준엄하여 융합의 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등 다채롭다. 심지어 일인 어용학자들은 우리의 고유한 민족성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성호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당파는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에서 생기니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진다. 가령 열 사람이 모두 굶고 있는데 한상의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 하자. 밥도 다 먹기 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며, 왜 싸우느냐고 하면 건방졌다거나 손을 쳤다거니, 말이 불손했다거니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은 싸움이 말이나 손짓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나 실상 문제는 밥에 있는 것이다. 가령 그럴 때 여러 사람에게 각기 한 상 씩 각 상을 차려주면 의좋게 먹을 것이 아닌가. 요는 배고픈 사람은 많고 밥은 한 그릇밖에 없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싸움은 가지각색의 구실과 더불어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당쟁의 시초는 한 사람의 선악, 한가지 일의 처리를 가지고 논하는 데서 비롯하여 당파가 대치하여 혈전을 벌이게 된다. 지금 정부에서 백관을 모아 인물이나 일의 시비를 묻는다면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백출할 것이되 당파로 배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당파가 생기는가? 그 원인은 1.과거를 너무 자주 보아 많은 사람을 급제시킨 것 2.벼슬에 오른 다음 인사처리에 있어 일정한 원칙이 없이 정실에 좌우되어 함부로 진퇴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것은 나라가 선비를 찾는 것이 아니고 선비가 벼슬을 하기 위한 것이다.과거 이외에도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르는 사람도 있어 벼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없이 많은데 벼슬자리가 적고 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자꾸 바꾸어 번갈아 벼슬하게 했고 그 결과 좋은 자리에서 좌천되거나 또는 관직에서 파직되면 여기에 불만과 원망이 싹트게 마련이다. 중국에도 당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2백여 년간에 걸쳐 갈수록 격화된 나라는 없다. 선조 이래 당파가 둘로 갈리더니 둘이 넷이 되고 넷이 다시 여덟이 되어 서로 역적으로 모함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원한이 누적,세습되고 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한 동리에서 살아도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도,혼인도 하지 않는다. 당파가 이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너무 많은 급제자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해진 관직은 정승 3에 판서가 6이요 기타 벼슬도 한정되어 있으니 벼슬자리는 모자라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당파는 새로운 내분이 생긴다. 일단 당파가 갈리면 당인의 눈에는 자파의 이익만 있고 국리민복은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당파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죽는 자를 명절로 치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는 자는 못났다고
하니 당쟁의 형세는 더욱 치열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1.과거의 횟수를 줄이고 2.근무성적을 참작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키고 승진을 신중히 할 것 3.요직은 신중히 맡기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오래 유임시키고 각자의 본분을 지키도록 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상의 것이 이 책에서 주장한 당쟁관이다. 당시의 정치내지 사회환경으로 보아 명철하고 정확한 주장이라 하겠다.
d.성호사상의 의의
<성호사설>에 담긴 이익의 사상은 흔히 거대한 호수 에 비유된다. 성호의 학문은 유학에 기초를 두면서도 교조적인 주자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학문이 현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 붕당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표명했고, 그 원인에 대해 양반수와 관직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양반과 노비 등 신분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는 조금도 당파성이 없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논하고 있다. 그의 붕당론은 어릴 때부터 골똘하게 생각해온 당쟁관의 총결산이며, 당파를 초월하는 그의 양식과 우국심의 발로이자 실학정신의 정형이다.
당시의 지식인은 관념의 세계에 빠지곤 했으나 성호는 평생을 농민과 함께 가난하게 생활했기때문에 누구보다도 농촌의 현실과 봉건제도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 고리로서 토지문제 등 당면과제를 중심으로 전개했으나 그의 적극적이며 계몽적인 개혁사상은 정부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천수를 누리는 중에도 가난 속에 살았지만 많은 제자를 기르고 방대한 저술을 남겨 우리 역사에 한 줄기 서광을 남겼다. 그의 80평생은 당대에 온갖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것이었다. 그의 제세의 탁견은 살아서 햇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민폐를 구하기 위한 실제적인 의견 및 모든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규명,지적한 것을 볼 때 이익이야말로 보기 드문 석학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그의 개혁이론이 봉건체제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한계를 지적받기도 하나,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僿 잘게 부술 사,잘게 부술 새 1. 잘게 부수다 2. 막다 3. 성의(誠意) 없다 4. 자질구레하다 a. 잘게 부수다 (새) b. 자질구레하다 (새) c. 무성의(無誠意) (새) [부수]亻(사람인변)
[實學 ]
a.정의
18세기를 전후하여 새롭게 나타난 범유학적(汎儒學的) 탈성리학(脫性理學的) 경향을 가진 사회개혁사상.
b.개설
오늘날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실학의 개념은 실학의 발생배경이나 학파에 대한 이해, 또는 실학과 성리학, 실학과 개화사상에 대한 관계 설정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되고 있다. 현재 학계 구성원의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대체적 개념은, ’조선 후기 18세기를 전후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새롭게 나타난 범유학적(汎儒學的) 탈성리학(脫性理學的) 경향을 가진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의 일종으로서, 민본(民本)과 위민(爲民)을 주창한 전근대적 사회개혁사상의 일종”으로 규정될 수 있다.
c.실학사상의 출현과 전개과정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살펴 볼 때, 실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조선왕조의 성립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때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생각하였던 대표적 인물들로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그리고 권근(權近, 1352∼1409)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도입하고자 하던 성리학이 불교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고 훈고(訓詁)와 사장(詞章)에 치우친 한·당(漢唐)의 유학보다도 우월함을 인식하였다. 즉, 그들은 성리학이 인의충신(仁義忠信) 등의 수기(修己)로 인해서 한나라나 당나라 시대의 유학보다 ‘위기’(爲己)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충효를 비롯한 오륜과 육예(六禮) 학습을 통해서 불교보다 ‘제가·치국·평천하’의 실효를 더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한편, 실학이라는 용어는 조선 중기 사회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다. 즉, 이황(李滉, 1501∼1570)이나 이이(李珥, 1536∼1584)도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설인 성리학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은 조선의 지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갔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예론을 전개하고 있던 윤증(尹拯)은 예학(禮學)을 실학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주자(朱子, 朱熹)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유학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실학’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새로운 학풍의 맹아로서는 성리학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양명학을 우선 들 수 있다. 양명학은 성리학에의 비판의식과 관련하여 장유(張維, 1587∼163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등에 의해 주목받은 바 있었고,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단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들은 양명학을 인정하고 그 학문적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학적 태도는 범유학의 입장에서 성리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상적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 노력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은 선진유학에 대한 연구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의 사상계에서 선진유학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17세기 이래 허목(許穆, 1595∼1682)을 비롯한 근기남인(近畿南人)의 학문연구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경향과 당시 사회의 내재적 요청, 그리고 외래의 문물에 자극 받아 실학사상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경세치용적(経世致用的) 학문을 강조하거나 자신의 저서에서 ‘실학’(實學)이라는 단어를 직접 구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학문체계는 당대부터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이익(李瀷, 1681∼1763)도 학문은 치국평천하(治国平天下)의 경세에 유용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자신이 직접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실학’이라는 단어를 구사하여 사장(詞章)과 기송(記誦) 그리고 훈고(訓詁)와 구별되며, 공리(功利)나 노장사상, 불교, 성리학 등과는 다른 학문체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경우에도 농공상(農工商)의 이치를 포함하는 선비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지칭하면서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잘못하는 것은 사(士)에게 ‘실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한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저서에서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성리학을 ‘잡학’(雜學)이라고까지 폄하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재용을 넉넉히 하고, 문장이나 행정실무에 뛰어나 어떠한 일이라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을 주창하였다. 여기에서 정약용의 실학개념이 간접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경우에는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문태도를 강조하였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사농공상에 걸친 실사(實事)를 실지(實地)로 탐구 실천할 것을 제창하면서 자신의 실학사상을 표현하였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주자(朱子)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선진시대(先秦時代) 원초유학(原初儒學)의 입장에서 왕도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우리 학계는 이러한 사례들과 그들의 특성 있는 연구경향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사상계의 변화 양상 가운데 그 왕도정치론의 조선적 변용을 ‘실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d.형성 배경
실학자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현실세계의 분석을 통해서 주자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왕도정치론을 존중하였지만, 여기에서도 그들은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에 대체될 수 있는 경세론으로 육경고학에 기초한 왕도정치론을 제시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에 이르러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반대하고 실학적 왕도정치론이 제기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즉, 실학사상의 등장 배경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해체가 강화되어 나가던 내재적 상황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부 외래적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실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상의 경향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이 표시되기 시작하였던 식민지시대에는 이 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청조 문물의 수용이나 서학의 전래와 같은 외래적 요인들을 주로 주목하였다.
그후 ‘실학’의 개념을 정립시켰던 해방 직후의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식민사관 극복론과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 논리에 따라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실학의 발생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실학발생의 원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과 함께 외래적 요인에 대한 균형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체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외래적 요인의 인정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경계하였으며, 주체성의 문제는 수용의 태도나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외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결과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자생적 능력에 의해서 추진되고 전개되는 것이지만 밖으로부터의 외적 변수나 요인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제시되었다.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 발생의 원인에 대해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재적 배경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17∼18세기 이래의 농촌 사회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토지 겸병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소작 경영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는 경영형부농(經營型富農)이나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곧 농민층 분해 현상의 집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실학은 이러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이에 대한 대안적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의 여러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자신의 개혁안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일부 실학자들은 농민분해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일부 성장하고 있는 부농층의 처지를 대변하였고, 또다른 사상가들은 토지에서 이탈된 빈농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의 토지 소유 자체는 인정하고 경영의 전환과 소작 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양란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역시 실학사상의 발생에 있어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의 과정에서 서울이 상업도시적 양상을 짙게 띠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상업과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향을 주목하면서 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 걸맞은 유통을 중시하는 경세론을 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역시 실학 발달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비교적 폭넓게 붕괴되어갔고, 그것은 대체로 양반의 일부와 대다수의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하향방향과 서민층의 일부가 신분상승을 성취하는 상향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에 직면한 일부 진보성향의 사상가들은 사회적으로 하향과정에 놓여있는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모색하였고, 이를 통하여 의 개혁적 실학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성립하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성리학을 본위로 한 조선 사상계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던 사상이었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조선왕조의 대표적 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 의연히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양란 후의 조선왕조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부조리가 드러나고 변화의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사상계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추구하면서도 주자 유일 기준의 입장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에 입각한 학문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백겸(韓百謙), 이수광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의 학인들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주자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공허한 논의가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권득기(權得己, 1570∼1622) 및 권시(權諰, 1604∼1672) 부자나 허목의 경우에도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허목의 경우에는 고문 고학을 존중하며 주자 주소의 번잡함과 폐쇄성을 탈피하여 육경을 중시하는 원초유학의 체제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17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상황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에 그들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선진시대의 원초유학으로 돌아가 왕도정치론의 견지에서 새로운 개혁안을 모색해 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성리학적 학문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어 갔고, 여기에서 탈성리학적,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제시된 개혁사상인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후반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되던 당시의 사상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한 경화학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적 의리지학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성리학의 자기극복과정에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적 지식을 기본 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학자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자들과 본격적인 갈등이나 대립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시대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와 문화전통의 해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전면적으로 반성 비판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라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이상사회의 중세적 재건논리였다는 특성에만 머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을 들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왕조적 통치질서가 요청되었으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침잠되어 있던 집권세력들은 폭 넓은 통치질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소변통론(小變通論)의 입장에서 보완적 대책을 세우는 데 한정되어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일부 진보적 관료와 재야 지식인들은 민생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16세기말 이이가 제시한 바와 같은 무실론, 즉 현실개혁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자 유일의 기준이 아닌 원초유학의 입장에 선 무실론을 전개하였고, 그것을 다시 발전시켜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성립시켜 나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왕조 전기의 과학부문의 업적이나 무실론으로 대표되는 경세적 학풍들은 참고된 바가 적지 않았다.
외래적 요인
실학사상의 발달에는 내재적 요인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과 이 시기에 전래된 서학(西學) 및 청대 학문의 영향도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국제정세의 변동 가운데는 조선과 청이 맺고 있던 관계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즉, 조선은 17세기 전반기 병자호란의 과정에서 참패를 당하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측면에서 전개해 갔다. 또한 대륙에서도 명청의 교체가 일어나, 만이(蠻夷)였던 청이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서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과정에서 조선중화주의(朝鮮中心主義)가 일어나서 소중화론(小中華論) 혹은 소화론(小華論)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당시의 현실을 중화가 이미 소멸된 상황으로 규정하였던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왕도정치론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보존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의 학계가 다시 중국에 이를 전수시켜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인해서 초래된 이와 같은 조선중심주의적 사고방법의 출현은 실학자들의 자아각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의 경우에서도 정통론과 화이론의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재검토 작업은 실학자 자신의 사상이 새롭게 정립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한편,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세동점의 결과로 중국에 전해진 서학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문 서학서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이때 전해진 서학서 가운데에는 천주교 사상을 논하는 서적과 함께 수학, 천문학, 농학, 측량, 지도와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이 있었다.
한문 서학서를 통해 실학자들에 흡수된 서학의 종교사상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서학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층은 대체로 성리학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진유학에 기초하여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변혁시켜 보려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은 당시의 학문풍토가 지니고 있던 사변적 경향과 관련하여 한문 서학서 가운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리편(理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로 논하고 있던 내용은 원초유학의 신관(神觀)에 대한 수용을 뜻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교 신앙이었다. 보유론은 서학이 유학에 대립되는 사상이 아니라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준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던 원초유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이 원초유학의 틀을 빌려 자신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던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심성론을 비롯한 그들의 사상이 이미 성리학적 사상의 틀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학서에서 논의하는 인간관 등의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그들은 선진유학의 재검토를 기초로 하여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개혁하고자 시도하였고, 여기에서 그들은 서학 자체도 변혁의 이념으로 파악하고 이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학은 실학이 성리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서학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론들도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 및 과학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서학의 자극을 받으며 천문학과 지리학 혹은 기하학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다.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며, 서학서의 이론을 직접 적용하여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공사용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서양 천문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문의 관심이 조선과 조선 문화로 돌려질 수 있었다.
즉, 실학이 조선중심적인 사유체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안원(顔元)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명말·청초의 학술 사상에서는 일종의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 경향에서 등장하는 개혁적 이상은 청조 지배층의 의도적 왜곡작업으로 인해 변질되었다. 그 개혁적 이상이 거세되고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기 이후에 활동하였던 조선 실학자들은 명말 청초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혁이념을 가꾸어 나갔다. 한편 청조의 고증학(考證學)도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는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청대 고증학에 대해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냉담하기조차 하였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 실학에 미친 청대 고증학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 명말·청초의 학문 경향에 좀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e.실학사상의 특성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성으로는 탈성리학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탈성리학적 사상은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의 가르침을 유일한 근거로 하여 유교경전을 해석해왔던 조선 성리학의 관행을 거부하고, 경전의 해석에 새로운 기준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물론 실학자들도 주희의 학문적 권위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유학의 해석에 있어서 적용되어 오던 주희에 대한 맹종적 태도를 배격하였고, 그의 경전 해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탈성리학적 경향은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리학의 이념을 극복하고, 선진유학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사유체계를 형성해보려던 노력의 결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허목(許穆)이나 이수광(李睟光) 단계에서부터 이미 드러난다. 또한 정약용은 성리학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하여 기질을 선천적 제약으로 해석하였던 성리학의 입장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을 일하자아의 주체적 자율경향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규정하였다.
즉, 실학자들은 주자주(朱子註)를 기준으로 한 성리학의 유학 해석방법을 벗어나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해갔다. 이렇게 구성되어 간 철학이 탈성리학적 철학이었다. 이들은 탈성리학적,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제기하면서 변법적(變法的) 개혁을 추진하려던 국가재조(国家再造)의 사상을 제기하였다. 이 학인들의 사상을 뒷날 ‘조선 후기의 실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실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번째의 특성은 그 연구방법론에서 드러난다. 즉 그들은 성리학에서 취하고 있던 학문연구 방법론을 비판 극복하기 위해서 원초유학의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원초유학의 방법론은 사변적이거나 심오한 것에 매달리지 않고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실제성(実際性)을 위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실학자들은 이 원초유학의 학문방법론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실학은 백과전서적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학의 연구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실학은 이기(理氣) 심성(心性) 등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견해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에 근거하여 인간과 세계와 자연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실학은 왕도정치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나갔다. 실학은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원초유학에 입각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왕도정치론을 개진해 나가던 시점은 조선 후기 중세사회 해체기였다. 그들은 이 해제기적 양상으로 각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던 비리와 모순을 개혁하고 경색된 현실을 타개하여,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각 분야를 개혁하고자 하는 과제들을 검토하였다. 이와 같은 탈성리학적 사고방식과 원초유학적 연구방법론을 통해서 실학은 자신의 개혁안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왕도정치론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그들은 중국 고대의 삼대(三代)를 왕도정치가 구현된 이상세계로 규정하고, 이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즉, 실학은 현실의 국가체제를 개혁하여 궁극적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왕도정치론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고 경색된 현실의 타개를 주장하는 개혁론적 사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실학에서는 왕도정치를 현실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들을 모색해 나갔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과는 입장을 달리해서, 왕도(王道)의 기준을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적 요소에 설정하기보다는 현실의 개혁을 통한 ‘안인’(安人)에 설정하였다. 실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조선왕조의 현실이 전쟁을 치른 직후나 마찬가지로 일대 변혁이 요청되는 상황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국가를 재조(再造)하는 방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편, 실학사상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성리학은 인간의 심(心)에 관한 문제를 중요시하는 심학(心学)의 경향을 취하고 있었다. 실학도 당시 사상계의 경향에 따라 이기심성론(理気心性論)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 결과 일단의 실학자들은 성리학과 다른 입장에서 심성론을 제기해 나갔고, 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의 심성론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성리학적 심성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황(李滉)이나 이이(李珥)는 기질지성(気質之性)의 선천적 규정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선천적 기(気)의 차이에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귀천과 현우(賢愚) 그리고 선악을 규정받고 태어나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인간의 숙명을 변화시키기란 어려운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 결과는 세계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갖는 독자성이나 자율성이 왜소화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선천적 ‘기질지성’에 구애되는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체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실학은 인간의 심(心)이 활성(活性)인 것임을 강조하였고, 인간의 본질을 성(性)이 아니라 심(心)으로 인식해 갔다. 이 과정에서 실학의 인간관은 인성이 선(善)으로 정향(定向)되었다고 단정하는 성리학적 도덕률의 허구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실학에서는 인간의 심(心)은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영명성(靈明性)과 스스로 선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율성(自律性)을 타고났다는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율과 각자의 책임 및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가능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재해석을 근거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 이해에 도달하였고, 백성을 본위로 하는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게 되었다.
f.실학의 연구 분야
실학은 이와 같은 새로운 철학과 왕도정치론을 총론으로 삼아 분야별 각론을 전개하였다. 실학의 각론에서는 첫 번째로 조선의 존재와 전통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우선 실학자들은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개혁안의 원리도 지난날의 역사 경험을 통해서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그들에 있어서 역사란 조선의 주체적 인식을 위한 도구였고, 자신의 개혁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문체제로 인식하였고,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으로 성리학적 윤리성를 거부하고 지리를 주목하거나 시세(時勢)를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역사의 인식 대상을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확대하였으며, 우리의 고대사에서부터 당대사에 이르기까지 그 인식의 시대적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은 민족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지리와 인문지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비롯한 민속에 관해서도 조사와 연구를 진행시켰다.
실학자들은 민족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전통적 화이관(華夷観)의 극복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중국과는 구별되는 자아(自我)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존재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어와 문학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을 비롯한 민속에 관해서도 애정을 가지고 조사와 연구를 진행시켰다.
그들은 역사지리와 인문지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개혁안의 원리도 지난날의 역사 경험을 통해서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그들에 있어서 역사란 조선의 주체적 인식을 위한 도구였고, 자신의 개혁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실학의 각론에서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분야는 정치제도의 개혁에 관한 문제들이다. 실학자들은 왕도정치론에 관한 성찰을 통해서 군신간(君臣間)의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고자 하였다. 국정의 각 분야에 관한 연구에 힘을 기울여서 국가의 제도 개혁에 관한 문제를 논하였다. 수취 체제의 개편에 관한 광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제도 등 관리 임용 방법의 개선책을 논하였다. 그들은 군사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실학의 각론에서 세 번째로는 현실 개혁을 위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주목할 수 있다. 실학사상을 낳게 한 것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실학자들은 농촌의 피폐상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제도 및 농업경영의 개선책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개선안을 내놓았다. 그들은 부당한 수취체제의 문란상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적 신분제도의 모순을 극복해보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신아구방’(新我旧邦 ; 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말 한 마디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실학의 네 번째 연구분야로는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을 들 수 있다. 실학자들은 자연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에 대해 연구하였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연구를 지속하였다.
실학자들은 자연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를 구별하는 객관적 자연관에 입각하고자 노력한 측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실학자들은 자연을 객관적인 순수존재로 파악하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생활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농업기술의 혁신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광업기술이나 공학 기술의 도입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의 연구 분야 가운데 다섯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새로운 철학 연구이다. 그들은 새로운 개혁의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천윤리를 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철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유학에 대한 주자(朱子)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유학사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철학에서는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사유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드러나고 있다.
g.실학사상의 유형
실학사상은 그 성행하던 당시 실학사상가들이 뚜렷한 연대의식을 갖고 특정 학파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에서는 상호 유사성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후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의 유형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편 실학의 유형화를 위해서는 실학사상의 상한과 하한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실학의 상한을 15세기 초엽으로 잡는 경우도 있고, 16세기 중엽에 실학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그 형성의 시기를 17세기의 초엽이나 중엽으로 주장하기도 하며 실학사상은 18세기 후엽에 등장한 북학사상 만으로 제한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견해 가운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17세기 중엽에 살았던 유형원 이후부터를 실학사상의 발흥기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18세기 후반기 설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학발생 시기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실학의 유형을 구분하는 여러 시도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 가운데 첫번째의 것으로는 실학의 시간적 전개과정에 따른 분류를 우선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천관우는 실학사상을 준비기(16세기 중엽∼17세기 중엽), 맹아기(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전성기(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으로 나누어 실학을 관찰한 바 있다.그는 실학이 시대에 따라 달리 드러내는 특성을 기준으로 하여 실학의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조기준(趙璣濬)은 실학의 전개 시기와 사회경제적 배경을 연결하여 실학의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실학을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학(17세기 초), 과도기의 실학(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시민계급을 대변하는 실학(18세기 말∼19세기 중엽), 전환기의 실학(19세기 말∼20세기 초)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실학이라는 동일한 용어 안에 봉건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시민계급의 근대사상까지가 함께 포괄되는 무리한 측면이 노정되고 있다.
한편 이우성(李佑成)은 실학의 시기적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성에 주목하여 이를 분류하기도 하였다. 즉 실학사상은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18세기 전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18세기 후반) 그리고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19세기 전반) 등으로 실학사상을 분류하였다.
한편 실학사상의 유형화에는 그 인적(人的) 계보를 중시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성호(星湖) 이익의 문하를 짗칭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라는 실학의 유형을 설정하기도 한다. 또한 실학사상이 발생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상의 유형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근기학파(近畿學派), 강화학파(江華學派) 혹은 호남학파(湖南學派)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적 유대 관계나 지역적 연대를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을 유형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크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학사상의 학문적 특성과 관련하여 이를 분류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중농학파, 중상학파 등의 개념이 차용되어 실학의 분류작업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토지제도 및 향정기구의 개편 문제를 그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경세치용학파, 상공업의 발전문제와 기술부분의 혁신에 연구의 촛점을 두었던 이용후생학파, 그리고 경서(經書) 및 금석문(金石文)과 고전에 대한 고증을 위주로 하였던 실사구시학파 등의 분류도, 그 분류의 타당성 여부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학문적 성격과 일정한 관련을 가진 분류로 생각된다.
한편 최근의 북학파에 대한 주목도 그 북학이라는 사상의 탈성리학적(脫性理學的), 청조문화(淸朝文化) 수용적 경향 등을 기준으로 하여 분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h.실학연구의 과정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연구는 개항기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기 시작한 시점은 개항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국가적 위기 탈출의 방략을 마련하고 개항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인물’에 대해 일정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 구체적 사례로는 당시 신헌(申櫶)이나 강위(姜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개혁적 인물과 사상의 존재를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는 구국의 방략으로 삼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에 대한 관심이 비로소 싹트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개항기 실학에 대한 관심은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좀더 분명히 나타났다. 그 사례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899년에 두 차례에 걸쳐 정약용을 우리나라 ‘경제학의 큰 선생’으로 소개한 바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개혁적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하여 좀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을 경세가(經世家)나 경제가(經濟家)로 직접 지칭함으로써 그 개혁사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또한 1905년의 ‘을사조약’ 내지는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유교구신적(儒敎救新的) 차원에서 ‘실지학문’을 보국(保國)의 방략으로 생각하였고, 조선 후기의 ‘경세가’나 ‘경제선생’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국권회복의 길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은 당시 사상계나 학계의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는 지배적 현상은 아니었고, 일부 선각적 개신유학 계열의 인물에 의해 제시된 소수의견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시에 진행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경향’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애국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경세가들이 논의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조선왕조는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시대에 접어든 이후, 실학에 관한 연구 과정에서는 대략 세 가지의 주목할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첫 번째로는 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들은 개항기의 연구를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개혁적 학풍에 대한 연구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면서 개혁적 인물들에 대한 인식의 범위와 이해의 깊이를 확대 심화시켜 갔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개혁사상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표출되었고, 이를 개념화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최남선(崔南善) 단계에 이르러 조선 후기의 개혁적 학풍을 ‘실학’이란 용어로 설명하게 되었다. 최남선은 실학이란 단어를 서술어가 아닌 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최남선은 학문적 개념을 가진 실학이란 명사의 개발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실학’이라는 용어는 당시 학계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는 못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연구자들은 이 학풍을 여전히 ‘실제에 근거를 두어 독자성을 구하려는 학문’(依實求獨之學) 혹은 ‘실사구시의 학’, ‘조선경제학파’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경향을 비로소 ‘실학’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연구자들을 실학으로 범주화하여 이에 특정 개념을 부여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한편, 식민지 시대 조선의 학계에서는 세 번째로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상인 ‘실학’을 하나의 학파로 설정하여 계보화하여 인식해 보고자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의 현상은 축차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이와 같은 경향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식민지화라는 정치적 좌절을 겪은 이후 민족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강화해 나가려던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상에 대한 존재확인과 함께 개념화 및 계보화 작업이 진행되어 갔다.
식민지 시대 실학연구에 있어서 또 다른 분기점으로는 1934년에 진행된 ‘다산서세백주년기념’(茶山逝世百周年紀念)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사업은 조선 독립을 위한 좌우합작 기구였던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문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의 『여유당전서』가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이 운동의 중심적 인물은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등이었다. 정인보는 정약용이 그 사상의 종지(宗旨)를 ‘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新我舊邦)에 두고 있음을 말하면서 조선사회의 혁신책을 제시하기 위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도였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계열에 속하는 백남운(白南雲, 1895∼1979)은 이를 ’봉건적 쇄국주의의 계급적 양반의 도(道)에 대한 반항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인인애(隣人愛)와 자유사상의 동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정약용을 ‘근세적 자유주의의 일 선구’라고 하면서도 ’아직은 봉건사상을 완전히 해탈한 것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제창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상의 과도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한편, 이청원(李淸源)은 이 새로운 ’아세아적 전제국가 하에서의 소농민의 공동체적 생활을 재건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여, ‘실학’을 조선 후기 봉건국가의 재건 논리의 하나로 파악하였다.
한편, 민족주의 계통의 역사연구자들 가운데 최익한(崔益翰)과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최익한은 정약용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그를 룻소(J. J. Rousseau, 1712∼1778)나 벤담(J. Bentham, 1748∼1832) 등 유럽 근대의 사상가들과 비교하여 그의 근대성을 인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상은 ’종래 계급의 반성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지 신흥계급의 대표로서의 사상체계는 아니다”라고 규정하였다.
반면에 안재홍은 정약용에 대한 적극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즉 그는 정약용이 중국에 대한 독립적 자존의식을 가진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이며, 계급타파와 평등론을 제시하여 ‘근대 자유주의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사상을 ‘일종의 국가적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있어서 ‘실학’은 ‘민족문화의 우수성’ 내지는 ‘민족적 자주성’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문화 재건의 논리에 입각하여 연구되었다. 비록 이 시기의 ‘실학‘ 연구는 그 범위와 대상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이에 관한 본격적 연구 성과도 미진한 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조선에서 독자적 사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부인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들의 연구와 주장은 민족문화의 전통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한국역사에 있어서 현대는 일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대를 말한다. 바로 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실학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남북한은 모두 민족문화 재건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철저히 파괴된 민족의 문화를 다시 세워서 신생 독립국가의 기초를 다지려던 노력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낙후된 사회의 발전을 위해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해 갔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인민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 과제는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투영되었고, 남북한의 연구자들은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앞 단계의 연구를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각기 상이한 역사관을 가지고 사상사의 연구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남북한의 학계가 모두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내재적 발전론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분야에 있어서 자생적 발전상이 속속 연구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발전을 촉진시킨 사상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실학사상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실학연구에는 이와 같은 연구 분위기와 관련하여 사회경제사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근대화론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실학의 개념과 발생 배경 및 그 연구 분야 및 역사적 의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먼저, 실학의 개념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특성과 함께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사상이 존재하던 조선 후기는 전근대적 사회로부터 근대를 지향하던 시기로 규정되었다. 실학은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설정한 기반 위에서 모색되어 갔다. 그리고 그 사상의 발생 당시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던 전근대성을 극복하려던 실학의 노력에서 근대의 여명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에 1960년대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에서는 실학을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을 반영하는 사상이거나 혹은 그러한 발전을 이끌어준 사상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실학은 ‘허학‘(虛學)인 성리학에 대항하는 학문이라고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에서 드러나는 과도기적 특성을 주목하여 이를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근대지향적’ 과도기의 사상으로 보고자 하였다. 이 견해는 1967년 이후 천관우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실학을 근대성으로 규정하였던 1930년대 안재홍의 견해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여 실학사상을 새롭게 규정해서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정신을, 몰민족의식(没民族意識)에 대립하는 민족정신을 뜻한다”고 말하면서, 실학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근대지향적, 민족주의적 성격”임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당시 시대적 과제가 근대화였다는 사실과, 민족주의가 강화되어 가고 있던 사회분위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그의 실학 개념 제시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개념 규정이 제시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상에서 이 기준에 의해 실학적 요소를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 특성의 확인을 위해 중화문화와는 구별되는 자아 인식의 존재 여부를 검출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観)에 입각하여 청국을 이적(夷狄)으로 규정하였던 성리학자들까지도 실학자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제도 개혁론은 현상타파론이므로, 일반적 제도개혁론도 봉건적 현상을 타파하고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모든 개혁론을 ‘실학적 개혁’ 즉 ‘근대적 개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판단은 일종의 착오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데에서 실학의 범위는 거의 무한정하게 확대되어 나가기도 하였고, 실학 연구에 대한 회의가 싹트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는 ‘근대지향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실학 개념의 모호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실학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의 개념을 ‘탈성리학’으로 규정하고 실학을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사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도 대체로 실학 이갠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근대성학의지는 민족주의적 특성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의 의 일각에서는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실학개념에 관한 사상임을 다시 의 진전을 기반으로 하여 ‘근대지향적 성격’, ‘탈성리학적 성격’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새롭게 시도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실학연구는 한단계 더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이 양자간의 단절을 주장하던 종전의 연구와는 달리 그 연결성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근기남인이나 소론 및 노론 낙론 계통 등 당색과 관련하여 드러나는 실학적 개혁사상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는 연구결과도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학계의 분위기는 실학을 성리학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이 강하고 이 두 개의 사상을 별개의 것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i.실학사상의 존재형태와 한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의 개념은 연구자나 연구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학계에서 성취한 연구의 실학 개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실학사상은 18세기 전후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사회개혁사상으로서,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고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던 왕도정치론의 조선적 변용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당대의 학인들이 직접 문호를 열고 기치를 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실학파’ 등으로 스스로 확인한 사상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을 실학자로 자처한 바도 없고,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서로 모여 타자와 구별되는 배타적 견지에서 학파를 조직한 바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학계에서 당시의 학풍을 실학으로 명명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즉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그리고 19세기 중엽 최한기에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즉자적(對自的, an sich)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실학사상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신의 독립성을 확연히 천명하는 대자적(卽自的, für sich) 단계의 사상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실학은 분명 조선 후기의 사상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역사 속에서 즉자적 형태로 나타난 사상이었기에 일률적인 모습을 갖기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 다양성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이 이 개혁사상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비판적 학풍으로서의 실학사상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실학자들이 제시하였던 개혁안의 상당 부분은 왕조체제의 유지를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이 제시하였던 사회개혁안은 중세사회의 해체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거나 근대사회의 출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으로 평가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상당수가 몰락지식인 출신이었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여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도 전개하지 않은 듯하다. 나아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실학사상에서는 그 사회개혁의 의지가 약화되어가는 현상마저 드러나고 있었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 걸쳐 전개된 실학사상에서는 수취체제를 비롯한 제도개혁의 의지가 강렬하게 표출된 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에서는 민생과 직결된 이와 같은 요청들이 점차 약화되어갔던 것이다.
한편, 실학사상이 유학의 이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성리학으로부터 배격되거나 탄압받지 않을 수 있었다. 실학사상이 범유학적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왕조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과 실학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며 현실정치를 주도하는 한, 실학이 사상적 공존은 용인받을 수 있지만 그 개혁정신의 궁극적 관철은 무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제도의 개혁해는 역사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기 보다는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데에 특장이 있던 사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 의미 있는 사상으로 평가될 수는 있을지언정, 당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였던 사상으로 이해되기에는 제한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j.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
한편, 개화사상도 해방 이후 남북한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개념이었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이 개화사상의 출현 시기와 그 개념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북한의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이 1882년 임오군란을 전후로 출현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화사상은 구미 각국의 급격한 근대문명 발전에 영향을 받아, 낙후한 조선정부를 개조하여, 만청(満清) 봉건 통치배들과의 봉건적 종속관계를 폐기하고 ‘독립 자주’ 정신으로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조선을 급속히 개화시켜 근대국가 체제로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을 ‘1880년대 이후 한일합방 이전 시기까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을 지배하던 사상’으로서, ‘선각자들이 무지한 대중들을 교도하여 문명의 단계로 이끌어 보려던 경향’이며,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기의 사상으로 보았다. 반면에, 또다른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이 1853년 이후 중인 역관 출신 오경석(呉慶錫)에 의해서 제시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즉, 오경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개화사상은 조선이 처한 현실을 ‘민족적 대위기’(大危機)로 판단하고,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일시 혁신을 단행하고,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며,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자주적 개항과 통상을 추진하던 사상으로 규정되고 있다.
한편,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회세력 가운데 하나로 중인층이 주목되기도 하였다. 개항이전 중인층들은 양이(洋夷)가 가지고 있는 군사면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의 명맥을 보전해야 된다는 생각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양반들로 하여금 이러한 면에 눈을 돌리도록 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850년대에 개화사상을 형성하면서 실학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근대 부르주아 계몽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의 형성에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개화사상은 ‘민족적 독립’과 ‘자주와 진보’라는 두 지표로 집약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또한, 개화사상은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 일련의 선진적 지식인들이 양무운동(洋務運動) 단계의 청국을 직접 방문하거나 서양 사정을 소개한 청국 서적의 영향을 받아 세계사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주창한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이 사상은 개항기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개화사상의 현실정치에 대한 적용은 시무개화파(時務開化派)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런데, ‘개화’라는 용어는 1880년 이후 상소문(上疏文)이나 교서(敎書)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화사상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 귀임한 1881년 이후 일본 명치정부의 ‘문명개화론’에 자극을 받아 제시된 사상으로서, 국가주도하에 문명개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일종의 계몽사상이었다. 그리고 1884년 당시 외교계에서는 ‘개화당(開化黨)’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개화·개화파·개화당 등의 용어는 개항기 한국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용어였고, 개화사상가들도 자신의 사상이 전통적 견해와는 구별되는 ‘개화사상’이라고 자각하고 있었다. 즉, 개항기 개화사상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대자적(對自的)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요컨대,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학계에서 새롭게 정립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를 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 개념에 대한 규정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양자 간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다.
실학은 즉자적 형태로 존재하였던 사상인 반면 개화사상은 즉자적 단계를 넘어서 대자적 사상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실학은 선진 유학의 왕도정치론에 기반을 둔 국가재조론인 반면, 개화사상은 자본주의 국제질서를 체험한 이후에 제시된 국가의 자주화와 근대화를 지향하던 사상이었다. 한편, 조선왕조사의 역사가 전개되던 과정에서 18세기를 전후하여 실학의 단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나 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개화사상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실학과 개화사상은 상호 선후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학과 개화사상의 상호관계를 단순한 선후관계의 범위를 넘어서 인과관계로까지 이해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학의 개념과 개화사상의 개념이 발전·확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 두 사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발생하게 되었다.
k.실학과 개화의 연결론
해방 이후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던 초기적 양상으로서 남한학계에서는 실학사상에서 근대성을 추출하기 위한 근대주의적 시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학사상이 근대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개항 이후의 신사조(新思潮)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였고, 개항 이후의 개화사상가들이 실학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론 내지는 개화사상의 원인으로 실학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기와 1960년대 전반기 북한의 연구자들은 실학자의 토지개혁론을 사회주의적 주장과 연결하여 실학사상의 진보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실학과 근대사상의 일종인 개화사상의 연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남한이나 해외에서의 연구자들은 남북의 연구성과를 집약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을 상호 밀접히 연결시키고자 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실학사상에 대한 근대주의적 접근이나 적극적 평가는 이미 1930년대의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이 전통은 1950년대 후반기까지 남북한의 학계에 같이 영향을 미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학계에서는 196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실학사상에 대한 적극적 평가와 더불어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관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북한 학계의 입장은 1955년 최익한(崔益翰)에 의해서 제시된 바 있었다. 그는 박지원의 저작이 갑신정변을 계획하였던 개화독립당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여, 개화사상과 실학사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실학자의 개혁론 등을 검토해보면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체계적 논문을 통해서 제시되기도 하였다. 한편, 남한의 학계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관해서 제시된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로부터 일정한 자극을 받아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대한 문제가 1960년대 말엽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논의에 앞장선 연구자는 김영호(金泳鎬)와 조기준(趙璣濬)이었고, 개화사상을 전공하던 이광린(李光麟), 강재언(姜在彦) 등도 이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였다. 즉, 김영호(金泳鎬)는 1968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좀더 구체화시켜서 전혀 별개의 사상 체계로 이해되던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실학사상 속에 근대적 요인이 부분적으로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였고, 개화사상은 서양근대 자본주의의 동양진출과 관련하여 나타난 타율적인 근대사상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에 반성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전통과 근대의 단절을 의미하며, 전통은 곧 전근대성을 뜻하고, 근대화는 곧 서양화라고 규정하는 ‘자기 허무주의적 역사의식’을 나타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통해서 곧 전통의 내부에서 근대화로 이어지는 주체적 자기전개의 한 논리를 발견하고자 하였고, 전통과 근대의 단절 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박규수(朴珪壽)가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켜주는 교량적 인물의 하나임을 주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김영호는 ‘민족 허무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던 북한 학계의 선행 연구를 이어 받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이라는 주제를 별도의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서 실학과 개화사상은 인적 계보를 통해서나 사상의 논리에 있어서나 매우 밀접하게 연관을 갖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상호 구분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논의가 당시 남한 학계에서 단기간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남한의 실학 연구자들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이었다. 김영호와 비슷한 시기에 조기준(趙璣濬)도 실학사상이 개항기 이후의 신사조(新思潮)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실학사상의 전개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면서 그 마지막 단계를 ‘전환기의 실학’으로 명명하였다. 그는 이 ‘전환기의 실학’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구체적 증거로서는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기록에 근거하여 개화사상가 김옥균이 박규수의 매개로 박지원의 사상을 접하였을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이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한 황현(黃玹, 1855∼1910)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 인적 계보를 중요시 하였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논증하고자 시도한 연구자로는 이광린(李光麟)을 들 수 있다. 그는 개화사상의 연원을 밝히려는 입장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련성에 착목하였다. 그는 개항 이후 문명화 또는 부강화(富强化)를 표시하는 개념으로서의 개화(開化)를 일부 인사들이 받아들이는 데에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지적(知的) 유산인 이용후생학파의 북학론(北學論)을 주목하였다. 그는 이 사상을 토대로 나라의 부강을 이룩해야 된다는 개념으로서의 개화나 자강을 1870∼1880년대의 일부 인사들이 수용하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광린은 개화사상은 실학의 지적 유산과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로 척사사상을 타파하고 나타날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그는 개화사상이 실학의 영향을 받고 등장하였음을 밝힐 만한 구체적 사료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개화사상가 중에 실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증언한 기록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초기 개화사상 등을 살펴보면 실학의 영향을 받았던 흔적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1870년대 초에서 1890년대 중엽까지 활동하였던 개화기 지식인의 실학에 대한 인식을 논하며, 박규수(朴珪壽)가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승화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강위(姜瑋)의 경우도 실학을 개화사상가로 발전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신헌(申櫶)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자로 규정하였다. 이 ‘전기 개화사상가’들은 처음에는 실학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새로운 국제환경에 부딪치자 개화사상가로 탈바꿈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광린은 이들 전기 개화사상가들이 실용적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실사구시’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후기 개화사상가들은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의 논의과정에서 양자의 절충을 중시하였고, 여기에서 실학의 중요성이 인지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강재언(姜在彦)은 조선실학사상과 북학론이 근대 조선에서 원류로 될 수 있는 사상적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특히 북학파의 사상에는 근대사상으로 발전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실학사상의 특성으로 새로운 지리지식에 의해서 화이사상의 명분론적 세계관의 극복, 자주적 개국론의 전개,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와 질서의 개혁 주장, 봉건적 지벌과 문벌에 대한 반대, 국내시장 형성의 전제가 되는 교통수단의 정비론, 주자학적 도그마와 속박에서 인간 이성의 해방 주장을 들었다.
강재언은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하면서, 외발적 요인에 촉발되어 근대적 변혁사상인 개화사상으로 차츰 질적 전환을 취하여 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강재언은 실학자와 ‘초기 개화파’의 연결관계에 주목하였다.
강재언은 실학파 가운데 박지원과 박제가 김정희 등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유대치) 등을 통해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등과 연결되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주역이었던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등 시무개화파(時務開化派)들도 박규수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박규수가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절(結節)시킨 중심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남한의 역사학계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대해서 대개는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실학사상을 근대사상으로 평가하며, 이를 근대의 기점으로 잡고자 하였던 시도가 진행된 바 있었다. 이들은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학을 바로 근대사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종래의 봉건적 규범에서 벗어나 근대사상에로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인식하는 정도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접합 가능성을 인정해 왔다.
특히, 실학의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서 왕조말의 개화·자강사상으로, 나아가 일본 강점기의 근대화를 전제로 한 민족주의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자주적 근대화의 욕구도 기저에 있어서는 그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학의 농업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실학의 농업론이 성리학적 농업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으나, 점차 반성리학적 경향으로 전환되어 지주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봉건적 농업체제가 내포한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가와 농민경제의 안정을 지향하였다는 측면에서 실학의 농업론이 근대사회개혁의 이론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이론이 농민전쟁시기에는 허전(許傳, 1797∼1886), 이기(李沂, 1848∼1909), 강위(姜瑋, 1820∼1884), 김성규(金星圭)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우리의 전통사상이 스스로 개척한 사회개혁사상·근대화론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사상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서 개화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면서 강화되었고, 개화사상의 연원이 실학에 있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논자들은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실학의 왕권강화론이 근대사상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화이관의 극복 논리나 공직담임권의 확대론 등은 개화사상과 상호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용후생학파의 개혁적 사유가 구체적이고 실천적 운동에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좌절의 운명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동으로서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근세 실학사상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좌절의 운명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학사상은 개국 후에 있어서는 개화파의 사상운동을 사상 내재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견해를 통해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오경석(吳慶錫)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논의되었다. 개항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분석과정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검토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개항기 전공자 대부분이 조선 후기 이래 실학적 전통과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적응 노력의 결과로 개화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음을 말하게 되었다.
한편, 남한의 철학계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에 대해서 긍정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즉, 이와 같은 경향은 실학자 개인의 철학사상을 연구하거나 실학사상의 철학적 의미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최한기(崔漢綺)의 철학을 논하면서,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을 실증적·과학적인 근대화와 관련시켜 새로운 태도로 발전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을 시대적으로 살리려 하였음이 주목된 바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설명되었다.
그리고 철학적 입장에서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인물로서 이정직(李定稷, ?∼1910)을 주목하는 연구가 발표된 바도 있었다. 이정직의 사상을 분석한 결과, 실용(實用)과 이용(利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정직은 서구의 자연관과 서양철학사상을 도입하여 합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이를 통해서 사상사적 측면에서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철학계에서는 개화사상이 실학사상을 계승하였고, 개화파들이 서구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자 할 때, 실학사상은 바로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과학사상, 사회·정치·경제사상은 당시뿐 아니라 조선근대사회에서도 생산력의 발전과 과학발전 및 철학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입장도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주목될 수 있다.
이처럼 철학계에서는 개화사상이나 현대사상과의 관련 속에 실학사상의 해석과 평가가 앞으로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실학사상이 사상사 속에 과거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보편적 진실성으로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인식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의식하면서, 이 연구에 박차가 가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실학은 개화사상이라는 ‘근대사상’ 또는 ‘근대지향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는 실학과 민중운동의 연결을 논하는 데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중운동은 근대사회를 도래시키는 내재적 원동력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므로 실학과 민중운동의 관련을 주목하는 입장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논하는 시도의 일부로 파악된다.
한편, 김용섭은 조선 후기 사상계의 특성과 관련하여 실학파의 농업론이 민란(民亂)과 항조투쟁(抗租鬪爭) 시기의 진보적 농업론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농민운동과 실학사상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였으며, 동학농민전쟁기 농민군 지휘부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자인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활동하였던 지역문화의 특성을 주목하였다. 전봉준이 살았던 고부(古阜) 인근에는 유형원(柳馨遠)이 살았던 부안(扶安)이 있고, 유형원의 사상적 영향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을 통해서 오랫동안 전수되고 있었고, 고부는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康津)과 같은 호남지방이라는 사실 등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서당 훈장이었던 전봉준의 신정(新政)에 요컨대, 1960년대 전반기 북한 학계와 1960년대 후반기 이후 현재까지의 남한 학계에서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주로 상호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실학과 농민운동의 연결을 논하였다.
이와 같은 연결론은 실학과 개화사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두 사상의 지향점 내지 의도가 외적(外的)으로는 국가·사회의 개혁에 있었다는 동일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사의 지적 전통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남한 학계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주목하였던 1960년대 후반기 이후 북한 학계에서는 이 양자간의 관계를 단절시켜 파악하고자 하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반면 당시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근대화론과 일정한 연관하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이 정설로 굳어져 갔다. 이 양자 사이의 연결 여부에 대한 근거는 지속적이지만 미약하게 제시되어 왔다.
l.실학의 역사적 의미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데에도 오늘의 연구자들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었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가능케 해줌으로써 조선 후기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 사상은 조선 후기의 민중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민생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였고,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개화사상의 형성에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동학농민전쟁기 사회개혁사상의 배경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을 긍정적으로 보아왔던 견해에 대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 긍정 일변도의 평가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와 실학자 개개인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실학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 본격적 변혁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의 변혁을 도출해 낸 데에는 이르지 못 하였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 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朝廷)이나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나이가서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은 그 사회개혁적 의지가 약화되는 현상을 드러내었다. 한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양자를 직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화사상의 근대적 측면을 매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에는 그 한계성이 적지 아니하게 발견된다. 이 때문에 실학의 역사적 기능을 재평가하려는 기운이 오늘의 연구자에게서는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몇가지 긍정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즉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당시 동양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일종의 중세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과 현실에 관한 연구를 촉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발견과 인식은 분명 민족적 자각의 강화와 관계되는 현상이며, 조선의 학문적 전통을 올바로 세우려던 그들의 노력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실학사상은 비록 범유학적 개혁사상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반 모순에 대한 그침없는 성찰의 결과를 나타낸다. 그들은 토지제도 및 군역제도의 개혁과 환곡 수취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또한 그들은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당시 사회의 신분제에 대해서도 개선의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성찰이 비록 현실적 개혁으로까지 직결되지는 못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개혁을 향한 여론의 조성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실학사상이 적극적인 측면에서 현실 개혁을 직접 유도해 내지는 못 하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에서 실학자들이 수행한 그 현실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해준 역할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실학사상은 조선의 중세철학을 대변하는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객관적 자연관과 평등한 인간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즉 실학사상은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사유형태를 일깨워 주었다. 이 점에서도 실학이 또 달리 발휘하고 있었던 긍정적 기능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긍정적 기능을 감안할 때 실학사상에 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우리에게는 계속 요청되고 있다.
m.연구의 전망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과제가 확인되어야 한다.
우선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전체 사상사의 맥락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조선 후기 사상계에서는 정학(正學)이라고 불리우던 성리학과, 선진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이었던 실학(實學), 그리고 사학(邪學) 으로 지칭되던 불교, 서학 즉 천주교, 비결신행(秘訣信行) 등 각종 종교사상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이들 다양한 사상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각자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후기의 사사상들논할 때에는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사상들의 특성을 주목하고 각 사상론이었던 실학는 상호관계를 밝혀나가야 한다.
우리가 실학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성리학조선 ‘사학(邪學)’ 과 그것의 상호 관계를 밝혀야 실학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실학을 연구할 때 실학자의 이론이 당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졌으며, 어떻게 인식 평가되고 있었는가를 좀더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실학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들이 제시한 현실 개혁안의 철학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그 개혁안의 역사적 의미와 기능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 [實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