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4 – 성학십도(聖學十圖) / 이황(李滉) (1501--1570) 


 <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퇴계 이황이 68세 때 서울생활을 마감하면서 16세의 어린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왕의 길을 말씀 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다. 여기서 퇴계는 수신이 정치의 근본이 됨과 동시에 수신의 방법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다음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성리학적 사유의 핵심과 도덕적 명분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a.생애


 정통 성리학의 완성자, 이름은 황, 퇴계는 호.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30대 초반의 모친은 별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매우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여자였다. 21세에 결혼하고 23세(중종 1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과거를 세 번 보아 모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다. 교훈이기도 했다. 율곡이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대기만성형이었다.

27세부터 과거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34세에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하위직으로 출발하여 49세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할 때까지 중앙에서 29종의 벼슬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일시 파면 당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독서와 사색에 열중한다.

 그의 호인 퇴계는 고 이은상 선생에 의하면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49세에 은퇴하여 7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왕명으로 4번이나 서울로 올라가 성균과 대사성(국립대 총장),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거쳐 학자문사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양관 대제학(왕의 정책결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홍문관과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예문관의 장)등의 벼슬을 억지로 한다.

 16세의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고 68세에 완전 은퇴하여 <주자서 절요>등 저술작업과 학문연구, 그리고 제자양성에 전력한다. 그는 특히<주자전서>에 감동하여 침식을 잊고 연구한 결과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기호발설>로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이며,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 것은 7정이라 했다. 그의 학풍은 후에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당쟁과 관련이 있고, 그의 학설은 일본유학계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영항을 미쳤다. 현실생활과 학문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최후까지 학자적 태도를 지켰다.

 퇴계는 타고난 학자로서 벼슬에 있을 때나 야에 있을 때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안질.현기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만년에 학문을 대성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달관한 탓인지 건강도 저절로 회복되고 수척하던 몸도 원숙하게 되어  마음과 더불어 보기좋게 살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를 신명, 즉 신처럼 존경하고 받들었다.


b.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흐름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유학사상으로 이. 기 의 개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교철학으로 대체로 태극론.이기론.심성론.성경론으로 구분된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했다. 주리론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목??의 ??)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기질의 성)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서를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어 이이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이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했으며 정치.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영남과 기호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c.이황의 사상


 이황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이기호발설과, 기대승과의  4단7정논쟁,  성경론 에 있어서는  경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1.이황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이와 기로 이루어진다. 이는 무형무질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기는 유형유질한 물질적인 형이하학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기는 상호의존적이나 이를 기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이 우위론적 이기론이 그의 본체론을 장식한다.


 2.이기호발설과 4단7정의 해석을 놓고 기대승과 벌인 4단7정논쟁이다. 4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은 인지단이요, 수오지심은 의지단이요, 사양지심은 예지단이요, 시비지심은 지지단이다 에서 인.의.예.지를 말하며, 7정은 <예기>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은 심성의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이와 상대적인 기로 임했으며 언제나 인간의 심리현상은 이발기수(이가 작용하여 기가 이에 따르기도 하고)와 기발이승(기가 작용하여 이가 그 위에 타기도 함)의 이기호발설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순선무악한 4단은 반드시 이에서 발해야 하며 가선가악한 7정은 기에서만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이익의 혼륜이 정이고 그 정은 기의 작용에 의하여만 발출한다고 보고 이발을 인정치 않았다. 또한 4단은 7정에 포함되어 있고 4단과 7정의 근원은 같다고 보아 4단7정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기는 분리할 수 없고 기를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3.그는 평생을  경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방만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집중, 통일된 상태로 지녀야 하고 모든 지거동작을 가볍게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삼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에도 경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에도 모름지기 경해야 한다. 이는 이루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산이 숙연해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는 선지후행이나 선행후지를 배격하고 지행병진론을 주장했다. 지와 행, 정과 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 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경 이라 했다.


d.<성학십도>의 내용


 1568년(선조1) 서울생활을 영원히 청산하면서 68세의 노대신은 16세의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였는데, 어린 왕과 늙은 신하의 대면은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한다.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도식으로 설명했다.

 <성학>이란 <성인을 배우는 학문> 또는 <성왕을 배우는 학문> 의 뜻으로, 쉽게 말하면 유학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성학십도> 의 서론에 해당하는 <진성학십도차>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임금이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자 온갖 책임이 모이는 것이며 뭇 욕심과 간사함이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져 방종케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용심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훌륭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올린 것이다.

 공자 이후 유학에서는 이상적 정치를 군왕의 덕치. 예치라고 생각한 만큼 이황이 그 덕치의 이상실현을 위해 임금에게 덕을 쌓는 심법을 가르치고자 지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정신을 언제나 <수기치인>과 <내성외왕> 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느 누구나 수양을 하되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되며,현실을 다루되 (외왕) 그에 앞서 누구나 성인의 조건(학식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에 이러한 정신을 더욱 투철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학십도>의 저술동기는 다만 군왕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뜻이 담긴 <진성학십도차>와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는데, 특히 그 도에는 저작과 앞선 학자들의 것이 섞여 있다. <진성학십도차>에서는 왕 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경의 내면활동을 중요시한다.

 10도 중 1.태극도 2.서명도 3.소학도 4.대학도 5.백록동규도의 5도는 천도에 입각하여 성학을 설명한 것이고 6.심통성정 7.인설 8.심학 9.경제차 10.숙홍야매차의 5도는 심성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다. 7개는 옛현인들이 작성한 것이고 3개(3.5.10)는 이황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 <십도>의 서술내용은 도표와 함께 앞부분에 경서와 주의 및 여려 성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본서는 이황의 편집과 저작의 중간형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일종의 편저형식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흑자는 도 자체만 가지고 말할 때 본서에는 이황의 독창성이 별로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까지의 성리학의 요지를 열 가지로 압축,체계화한 것인데,그 당시의 성리학을 자기류로 체계화한다는 자체가 그의 독창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특히 주희의 입장에서 성리학의 요지를 도설의 형식으로 총정리,체계화한 것이라는 데에 <성학십도>의 저술 의의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권만으로도 이황의 공헌과 그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나라에서 <성학십도>만큼 숭상받은 책도 드물 것이다.이황의 철학을 대표는 <성학십도>는 선조의 명에 의해 병풍에 씌어져 애중되었고,그 이후의 역대 임금들도 경연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논하는 일) 에서 자주 강의하게 했다. 임금들이 이러했으니 그

신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국에서는 청말의 양게초 같은 성학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고, 일본에서는 일찍이 1655년부터 이 책이 인쇄되어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숭상되었다.


e.퇴계사상의 영향


 어떤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두 사람을 선택하라면 이황과 정약용을 드는 사람이 많다. 이황은 생전에 두 명의 부인,형님,아들 등의 죽음을 맞는 불운을 겪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했고, 스스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깨닫고 사당을 지었다. 이와 같이 그가 평생에 역점을 두었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학문연구와 교육운동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히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심성을 구명하는 데 있어 이이와 입장을 달리했으나,구명된 인간심성을 실천으로 연결시켜 도덕적인 인간과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이와 함께 뚜렷한 공헌을 한다. 그는 저술에 매진하면서 때로는 편지로 가르치기도 하고 수양하는 방법을 일러 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깊이는 임금들의 귀감이 되었고 뒷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의 메이지 유신 때에도 지도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풍기군수로 재직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국가공인으로 만들엇고,성균관의 대사성자리에 있으면서 학문적 분위기를 성숙시켰느며,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일으켜 본격적인 제자양서에 주력한 결과 정승 10여명과 판서 30여 명을 배출했다. 그의 제자들은 뒷날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중앙의 관계를 주름잡았고 향리의 학문풍토를 조성한다.

 그러나 그가 성균관의 유생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고 영남학파를 당쟁에 휘말리게 했다는 비난과, 그가 너무나 큰 학자여서 학파의 흐름이 권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 개혁과 변화를 소홀히하는 보수성을 띠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미래지향성의 결여나 물질경시현상, 가족주의의 폐단 등은 유교사상의 전반적인 역기능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이황의 검소한 일생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인물로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국, 반찬으로는 콩자반,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련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 전부였다. 이황은 한 그릇을 다 먹었으나 권철은 체면치레로 몇술 뜨고 수저를 놓았다. 이튿날도 같은 식사가 나오자 목에 넘어가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예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했다.떠나면서 좋은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이에 이황은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드시지 못하면 관과 민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


[四端七情 ]

요약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위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오 惡)

욕망(욕 欲)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원래 사단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과 관련된 윤리적 범주에,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총칭하는 인성론의 범주에 각각 속하여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개념은 인간 심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격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각각 나타내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어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심성(心性)이 일치한다고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명제 아래, 우주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바탕으로 이기론(理氣論)을 발달시켰고 다시 이를 근거로 하여 인간 심성의 발생 과정과 그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중국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는, 성리학의 '이기 심성론'(理氣心性論)의 탐구에 있어 하나의 과제로 다루어지기는 했어도 태극론(太極論)과 같은 우주론에 비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단과 칠정의 발생 과정을 이기론적으로 해명하는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이것은 대규모 논쟁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서 처음 발생하였고 나중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에서 다시 논의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단이 이(理)에 속하는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理)가 과연 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문제였다. 16세기 말에 발생하였던 이 논쟁은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학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었을 정도로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단칠정 [四端七情] (두산백과)



B003 – [화담집] 서경덕(1489--1546)


평생을 학문과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한 <기철학> 의 완성자인 서경덕의 성리학설과 시문을 그의 제자들이 편집한 책이다.

 <화담집>은 18세기 청나라의 건륭제가 거국적이고 필생의 사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안에 한국인의 개인 저서로서는 유일하게 소개되었을 정도로 국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책으로, 우리는 이 책에서 중국 성리학의 단순한 수용이 아닌 한국 성리학의독자적인 이해과정과 치밀한 철학적 사유의 백미와 함게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안빈낙도하는 한 철학자의 삶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생애


  10년 동안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는 나에게 하룻밤에 무너졌지만 화담선생은 내가 가까이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분의 마음과 몸을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성인이시로다 고 감복한 것은 당대 최고의 명기였던 황진이었다. 황진이의 유혹을 사제간의 관계로 승화시킨 화담 서경덕은 누구인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게 송도삼절로 불린다. 유년기의 호담은 명석한 두뇌, 고감한 성격,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4세에 개성의 어느 선생님을 찾아가 글을 배웠는데, <상서>의 기삼백(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에 이르러 선생이 이 대목은 나도 배우지 못했고 세상사람 누구도 아는 이가 드물다고 하자 화담은 보름 동안 궁리 끝에 스스로 해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의 원리를 깨달았다. 이때 감격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는 먼저 격물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고, 그날부터 화담은 천지만물의 명칭을 하나하나 써서 서재 벽위에 붙여놓고 날마다 궁리격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화담의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어린 시절 어느 봄날에 나물을 캐기 위해 들에 나갔다가 새끼 종달새를 목격한 데서 비롯되었다. 종달새는 날이 지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점차로 공중 높이 나는 현상을 주시하고 그 이치를 궁리하기에 이른다. 어린 화담의 종달새 관찰은 결국 후일 그의 이른바  기철학 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재로 작용한다.

 후일 그가 밝힌 종달새의 비상은 새의 가벼운 깃털을 이용하여 상승하는 지기 에 힘입어 날아오른다고 풀이했다. 새의 무게는 원래 하강하려는 것이 자연적 성질이나, 하늘의 양기 와 땅의  음기 가 서로 교호작용을 하는 데에 힘입어 그 가운데의 새는 상승과 하강의 날기를 자유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문적 방법으로 화담은 약 3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번 저지른 과오를 두 번 범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21세가 되던 해에는 매일 서재에서 혼자 단정히 앉아 사색에 열중하던 나머지 밥맛도 몰랐고 잠도 잘 자지 못해, 이렇게 3년 동안 공부를 하는 동안 문지방도 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사색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으나 천성적으로 탐구심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명성이 조정으로 알려지자 31세 되던 중종 14년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력했다. 43세  때에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습훈련을 받던 중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 송악산의 화담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언젠가 화담은 제자 이지함(<토정비결>의 저자)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찾아가, 조정의 벼슬을 거절하고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살아가는 남명 조식을 만난다. 중앙에서 벼슬을 지내며 주리파와 주기파의 정통을 이은 이황과 이이에 비해 조식과 서경덕은 일종의 방계였다. 이황과 조식은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때로는 우정을, 때로는 냉전의 상태를 유지했으며, 이이와 서경덕은 같은 경기도 출신으로 한때 이이가 서경덕의 학설을 배우기도 했지만 서경덕의 이론을 일부 반박하기도 했다. 

 그후로도 몇번 조정에서 벼슬을 권고했으나 그가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했다. 그런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마침내 그의 학문과 철학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왔다. 56세에 병이 깊어지자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옛 성현들의 말은 선유들이 다 주석해 놓았으니 그 이상 내가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이 미처 설파하지 못한 것만 저서로 남기겠다. 지금 내 병이 이렇게 위독하니 나의 학설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원리기설> <이기설> <태극설> <귀신사생설> 등 4편의 논설을 지었다.


b.화담의 사상과 <화담집>


 현재 <화담선생문집>으로 전하는 <화담집>은 본집 2권과 부록 2권으로 꾸며져 있다. 화담 자신이 저술한 것은 본집 2권이며 부록 2권은 그의 연보.비명을 비롯한 여러 형식의 추모문으로 후인이 써모은 것이다. 본집 2권 중 권 1은 시문을 모은 것이고, 권2는 각종 싯구.잡저.명문을 모아 그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잡저에 있는 <원리기설>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설>의 논문 4편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쓴 자신의 철학적 서술이어서 <화담집>의 핵심을 이루는데, 이를 토대로 그이 사상을 정리해본다.



   1.우주관


 화담은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원기를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삼았다. 기는 우리말로 기운 이요, 물리학적 용어로 에너지다. 이런 의미에서 화담은 참다운 과학적 철학자였다. 그가 말하는 태허는 곧 우주다. 이 기 는 우주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이 기 와 태허가 별개의 두 물건이 아니다. 기가 곧 태허요 태허는 곧 기다. 기는 우주의 질량이므로 만일 기가 없어지면 우주는 곧 파멸된다. 알다시피 이와 기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원리를 규명하는 성리학의 중심개념으로 중국의 주자는 원리인 이와 그 작용인 기로 우주를 설명했는데, 화담은 정반대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형체가 없는 태허(우주생성의 이전상태)를 선천 이라 하니, 그것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쥐면 비어 있고 잡으면 없다. 이 태허에는 단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인데 후천에는 기 속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약동이 일어나며 동시에 개벽이 일어난다. 이 같은 동작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 그렇게 시키는가? 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을 이의 기라 한다.  주자학의 이선기후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기에 내재하는 법칙으로 보았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우주구조에 대해 우주구면의 반경은 우주의 전질량과 비례하기 때문에 질량이 0이 되면 반경도 따라서 0이 된다. 우주의 물질과 이것을 담아놓은 공간도 다 소실되고 또 커지기도 한다는 말과 같은 우주관이다. 화담은 말하기를  이것은 주염계와 장모거와 소강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한 자도 써내지 못한 경지 라고 크게 자부한 것이다.

 

   2.현상계


 우주본체에서 적연부동하고 있던 일기는 어떻게 현상계로 내려와서 만물을 움직여 생성하게 하는가? 화담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일기는 저 스스로를 포함한다. 이는 무엇이냐? 그것은 음기와 양기요 동과 정이다 라고 했다. 일기는 우주공간에서 적연부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플라톤의 이른바 순수형상인 이데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요, 발하려 하나 아직 발하지 않고 동하려 하나 아직 동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는 순수동작이다. 그러므로 화담은 <역전계사>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느끼어 마침내 통한다. 여기서 소극적인 음기와 적극적인 양기가 생기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 천하만물을 생성, 발전케 한다.


   3.이기설


 중국의 정주학파나 우리 나라의 퇴계학파는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결코 일물이 아니라 했다. 그러나 화담은 기밖에 이란 없다. 이란 것은 기의 주재다. 주재란 것은 밖에서 기를 주재한 것이 아니요, 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닭에 정당성을 가리키어 이것을 주재라 한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기는 본래 무시한 것이니 이도 본래 무시한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가 유한 것이다 고 했다. 화담은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화담이 장모거의 기와 주자의 이를 지양, 통일하여 일원적으로 본 것이다. 이야말로 그의 독창적이 면이 돋보인다.


   4.일기장존설-기불멸설


 화담은 또 우주공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있지만 그 기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했다. 기가 한곳으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 비유하면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로 환원하는 것과 같다. 화담은 또 말하기를 일편향촉의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 남은 기운은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 (물질불변설)고 했다. 이것은 마치 물리학에서 하나의 촛불이 연소작용을 할 때에 그것이 타서 없어지지만 거기서 나오는 모든 에너지, 즉 위치 에너지와 열 에너지와 광 에너지 등등의 총화는 촛불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같다고 하는 이론과 같다. 이런 것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므로 화담의  기장존설 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화담이 주장한 학설의 요지다.


c.화담사상의 영향 및 평가


 먼저 외국에서의 평가를 보자. 화담은 자기의 저술이 문체는 졸렬할지 모르나 천년 이래 성현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진리만을 후학에 전하기 위해 쓰며, 동시에 중국을 비롯한 먼 외국까지 전달되어 동방에 학자가 나타났음을 알리고자 쓴다고 자부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사고전서>안에 한국인의 개인저서로서는 유일하게 <화담집>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의 뜻은 과연 적중하여 2백 년이 넘은 후대에 중국에서 빛을 보고 실현된 것이다.

 퇴계는 일찍이 말하기를 화담은 다른 주석한 책을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연구하여 이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하나의 특이한 일이다라고 평한 바 있고, 퇴계의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과 화담의  이기일원론 을 통일하여  이기이원론적 주기론 (이와 기는 일이면서 이이요 이이면서 일이다)을 확립한 율곡은  화담의 이와 기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묘처에 이르러서는 일목요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책만 보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러므로 화담의 이기설은 옛 성현들이 다 전하지 못한 묘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백사 이항복은 일찍이 임금께 드리는 글에서 신이 듣기로 서경덕은 총명한 자질로 그의 학문은 황무지를 개척했고 격물치지의 이치를 사색하여 다 체득했습니다. 한 걸음에 도학을 성취한 사람으로서 당대 호걸의 선비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근세 유신들이 그를 이황과 서로 견줄만하다고 합니다 고 말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학문하는 자세다. 그는 어려서부터 권위적 학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반드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적 실증이나 납득할 수 있는 사색으로서 확인하고 넘어갔다. 선생이 어느 한 구절을 소홀히 넘기면, 만일 알지 못할 것이라면 선유가 왜 이곳에 써서 전하려 했을까? 하고 그 뜻을 알려고 애썼다.  독서란 사색하면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궁리하지 않는 독서란 소용없는 일이라고 분연히 다짐하곤 했다.

 그의 학설이 독창적이란 점에서 불교의 원효와, 그리고 그의 자연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실험자세(종달새의 비상현상에 대한 관찰과 사색 등)는 피사탑에서 물체의 낙하실험을 통해 기존의 물체 낙하운동법칙을 수정한 갈릴레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화담은 당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문하에선 일류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박순.허엽.박민헌 등은 명문 출신으로 벼슬을 지낸 부류들이고, 이지함(명문출신으로 잠시 벼슬을 지냄).강문우.정개청 등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임종시에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 생각이 어떠십니까? 하고 묻자 살고 죽는 이치는 이미 안 지 오래다. 생각이 편안하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신의 죽음을 영육이 함께 이제 태허의 기를 마치 고향에로의 복귀처럼 받아들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분명히 기의 세계에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화담은 한국유학에 있어서 기철학의 전통을 수립한 대표적인 자연주의 유학자이며 조선조의 청빈한 숨은 선비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鬼神死生論](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210)

분야 종교·철학/유학

유형 작품

시대 조선

성격 논설

창작연도/발표연도 1544년

작가 서경덕

집필자 한형조

 

 

[정의]

서경덕(徐敬德)이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혼의 문제를 자신의 독특한 기(氣)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한 논문.

[내용]

그의 만년 무렵인 56세 때의 글이다. 『화담집』에 수록되어 있다.

생사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정자(程子), 장횡거(張橫渠), 그리고 주자(朱子)의 상세한 논의가 있었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아 아쉽다고 운을 떼었다. 이는 후학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치도록 한 배려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대개는 일면만을 고집하거나 찌꺼기만을 붙들고 헤매는 형국이었다. 그는 그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비로소 천고의 의문을 깨트릴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죽음과 삶, 사람과 귀신의 차이는 결국 기의 모이고 흩어짐[氣之聚散]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혀 다른 이질적 세계로의 여행이나 급격한 충격이 아닌, 동일한 실재의 연속적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실재하는 유일한 근원 존재는 기(氣)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기는 정지된 실재가 아니라 부단히 자기 운동을 하는데 그 맥동의 파장이 수많은 생명을 낳고 또 거두어간다. 결국 생명은 기의 모임이고 죽음은 기의 흩어짐이다.

유의할 것은 죽음과 더불어 기는 흩어지되 결코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같은 미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는 법이 없거늘 하물며 인간의 정신지각(精神知覺)같은 크고 오랜 기임에랴.” 죽음이란 없다는 것, 여기가 이기(理氣)의 극히 오묘한 자리이다.

그가 이 통찰에 거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박이정(朴頤正)·허태휘(許太輝) 등 문도들에게 “내가 하는 논의가 비록 촌스런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천성(千聖)이 모두 전하지 못한 자리를 간파하고 있다. 중간에 유실하지 말고 후세에 전한다면 문명의 변방인 동방에도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참고문헌]

『화담집(花潭集)』



B002 – [삼국유사] 일연(1206~1289)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 문학. 종교. 지리. 사상. 미술 등의 유산을 담고 있는 한국 고대문화 유산의 보고다.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빠진 야사를 많이 채록하고 있고, 특히 단군신화와 14수의 향가의 수록은 값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전체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권은 고조선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3~5권까지는 한국불교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원의 지배하에서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는 한 선승이자 사상가인 일연의 고뇌와 역사의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a.생애

 

 <삼국요사>의 저자 일연은 역사가가 아니라 평생 선승의 길을 걸은 승려였다. 그러면 왜 선종 승려이면서 그는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했을까?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삼국유사>의 높은 사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선승으로서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일연의 속성은 김씨요, 이름은 견명, 경상도 경산 출신이다. 1214년 9세 때 광주의 무량사에서 선학을 닦다가 12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고승인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덕이 있었던 그는 온화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불가 서적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특히 사서를 즐겨 읽어 일찍이 움직이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관하는 예리하고도 정확한 역사의 흐름을 보는 눈을 가졌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되 보당암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했다.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46년에 선사,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 그뒤 경북 달성의 인홍사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펴고 77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지난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찍이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 다루지 않아 빠진 단군신화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가 이듬해 경북 군위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선종9산 중 신라말 도의가 연 종파)이 전불교계의 교권을 확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 집권기까지는 미미한 존재였던 가지산문이 원 지배기에 들어와서는 수선사를 대신할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특히 원 지배기로 고려사회가 개편될 때 일연이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책봉될정도로 불교계에서 비중이 컸으며,이때 부각된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1289년,그곳에서 84세,법랍 71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전국사찰은 몰론 온 백성들이 애석해했다고 한다. 현재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정리하고 향기를 비롯한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 5권을 지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b.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연이 생존한 시대는 최씨 무단정권의 전성기에서 몽고의 침입과 강화 천도, 몽고에 대한 굴복 등 국난의 시기였다.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여기저기로 전전하면서,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황룡사 9층탑의 처참한 모습에 울분을 머금고 경주.달성 등 경사도 지방은 물론,강화도.설악산.오대산 등 가는 곳마다 사라져가는 고문서와 설화 등을 모았으며,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관찰하고 고증한 것을 기록해 만년의 <삼국유사>집필에 매진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청장년시대를 전란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 반항이기도 했으리라. 따라서 <삼국유사>는 거대한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고려사회의 민족적 각성과 비원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잡록적 사서이다.

 일연은 평생 동안 100여 권의 편저를 남겼으나 현재는 <삼국유사> 와 <중평조둥오위> (최근 발국)만이 전해진다. 이 저서도 일연이 입적한 뒤 정덕본이 발견되어 일연의 저술임이 밝혀진 것이다. 정덕본 마지막 첫머리에 적힌 <가지산하 인각사운운>이 바로 저자의 이름을 밝히게

된 실마리다 되었다. 가지산이란 장흥 보림산의 주산이요, 신라말 선종계열의 도의가 선문을 열었고 그유파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일연 역시 그 문하였기 때문에 가지산하라 했던 것이고, 인각사란 그가 죽을 때까지 주석했던 군위에 있는 절이었다. 이 기록도 일연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가 적어둔 것이라 한다. 


c. <삼국유사> 의 내용


 <삼국유사> 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다.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를 보고 우리 나라 고유의 것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저술은 만년에 했다 해도 마음을 정해 자료를 모은 것은 평생 동안의 일이었으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생의 노력이 웅집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계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9편은 왕력. 기이. 홍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편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다. 

 <기이> 편은 고저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했는데,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이유를 밝힌 서(??)가 붙어

있다.

 <홍법> 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불교에 관한 기록이 많으며,이중 <홍법>편과 <의해>편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잘 다듬어진 것이다.

 <왕력>과 <기이>를 제외한 각 편은 내용 그대로 삼국의 불교사라 할 만큼 불교적인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단군설화를 비롯,고대의 신화.전설.민속.사회.고어록.성씨록.지명의 기원.사상.신앙 등을 금석및 고전적의 인용과 견문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유교적 합리주의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버린 고기록 중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고대우리 민족생활사의 보전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들은 당시의 전적을 고중하는 데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삼국 외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사군.낙랑.대방.말갈.발해.졸본부여.후백제.가락 등의 기록도 아울러 실었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의 기록을 원래대로 모아 놓았고 또한 향가 14수를 본문 중에 수록해놓았다. 이 향가는 <균여전>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된다. 향가 14수의 제목을 들어보면 <서동요> <혜성가> <풍요><원앙생가>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도솔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처용가> 등이며, 이밖에도 많은 향가의 제목과 그 향가에 관련된 유래가 서술되어 있다. 

 또한 <단군신화> <북부여건국신화> <김알지신화> <석탈해신화> <가락국건국신화> <비형랑설화> <조신설화> <만파식적전설> <달박박설화> <선덕여왕기지설화> <지증왕설화> <사금갑설화> <지귀설화> <문회설화> <죽엽군설화> <죽적설화> <연오랑 세오녀설화> <빈녀양모설화> <거타지 설화> <욱면설화> 등이 실려 잇어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총본산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본문 중 권1에 나오는 한편을 인용해 본다.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 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위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태우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데려갔다. 바위를 타고 나타난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필경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진 않자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매던 세오녀는 어느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위로 뛰어오르자 바위는 다시 그녀를 업고 바다를 건너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바위에 실려온 세오녀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왕이 된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이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기는 괴변이 일어났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 나라에 와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이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했다.  이에 연오랑은 <<내가 여기에 온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가는 비단을 새로 짜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면 좋으리다>> 하고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그 말대로 재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소중히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우리는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이 설화에서 당시 일본에 대한 신라인의 우월의식을 느낄 수있으며,비록 세오녀가 짜준 비단으로 광명을 되찾기는 했으나 일월정을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d. <삼국유사> 의 가치

 <삼국유사> 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보다 150년전에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 형식(본기.세가.열전.지.표의 인물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으로 씌어진 삼국시대의 정사인 반면,<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기술)에 가까운 설화중심의 야사로서,전자가 문화적 사대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후자는 상대적으로 주체적이고 실증적인 사관에 입각한 저서로 간주된다.

 또 전자가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현실성을 중시한 반면, 본서는 불교 중심의 비현실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며,저자의 저자가 정치권력자인 반면,본서의 저자는 순수한 승려였으며,삼국사기는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의 반도사관으로 축소 묘사하고 있으나,<삼국유사>는 단군부터 고려시대까지 발해사를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연이 주도한 <가지산문>의 등장과정이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 지배하의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음은 물론,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신앙결사의 단계에서 구축한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공백을 성리학이 메움으로써 고려말에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의식,몽고침입에 대한 자주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연과 동시대를 살면서 충렬왕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채 고통당하고 있는 고려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시로 고발한 수선사 출신 충지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이 시기의 일연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충지와 비교할 때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직접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일연이 걸은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삼국유사>에 대한 사학적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좁게는 한국역사학의 고전적 저작이고 넓게는 한국학 분야의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금자탑이다. 고조선을 수록하고 <가락국기>를 전했으며 14수의 향가를 기록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현대인의 과학적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예컨대 단군신하를 비롯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신이적 神異的 사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결함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서술태도가 오히려 <삼국유사>가 갖는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사회상이 그러하며 불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서술된 민중의 신앙과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이며 신이한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결과 본서는 가치 높은 민족지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 개인의 일생의 노력이 응집된 저서가 민족사의 맥을 잇는데 얼마나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삼국유사>가 우리 고대문화의 총체적이고 원형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금광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후대의 학자들이 여기서 고대문학의 금맥을 캐왔고 지금도 캐고 있다.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 등 문화 전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은 고려사회가 이민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시점에 중앙의 후원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으면서 불승으로서는 최고승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민족사의 격동기에 살아가면서 이민족의 재배가 가져온 민중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황은 일연으로 하여금 사상적 전환을 필요하게 했고, 그결과 그가 귀착한 세계는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의 표방과 민중의 삶을 역사서의 형태로 승화시킨 <삼국유사>의 찬술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상황이 빚어낸 역사가로서의 일연과 선승으로서의 일연의  합치점이었다.





구성[편집](위키백과)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 이서국,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권2 기이(紀異) 제2 :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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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1 –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 원효(607--686)

a.개괄

프랑스의 폴 드미에밀이 <대승불교철학의 가장 명쾌한 개론서>로 극찬한 <대승기신론>(인도의 마명)을 원효가 해설한 책으로 <금강삼매경론>과 더불어 원효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작이다. 불교의 원신자인 인도에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던 철학문제인 <공.유의 대립>을 극복,독특한 <화쟁사상>으로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사상의 방항을 제시한 원효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여래장사상>의 본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원효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일심사상>과 <대중불교>의 전개라는 그의 염원이 이 책에 잘나타나 있다.


 b.생애

 우리에게 김춘추의 딸인 과부 요석공주와의 로맨스, 그리고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다음날 깨달음을 얻어 도중에 돌아온 멋진 사나이로 알려진 원효, 원효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지 1백여 년 만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였다.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 설총의 아버지, 29세 때 출가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했고.34세 때 의상과 함께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고구려의 순찰대에 잡혀 실패하고 10년 뒤에 다시 떠나,도중 당항성의 어느 무덤에서 잠결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이튿날 <<모든 사물과 법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온다.

 그후 분황사에 있으면서 <통불교>(원효종.해동종)를 제창하여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했으며,장안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바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홀로 된 요석공주와 짝지어주니 설총을 낳았다는 공주와의 로맨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파계한 뒤 스스로를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칭하며 속인 행세를 했고,<화엄경>의 이치를 쉽게 풀어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전파했다.

 신라왕비의 종기의 치료를 위해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을 들여와 왕이 설법을 듣고자 대법회를 준비하도록 했느나 설법할 사람이 없어 모두 낭패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 당시 박식하기로 유명한 대안법사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다시 원효를 추천하고 물러났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효는 우선 이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쓰기로 하고,소를 타고 가면서 소의 두 뿔 사이에 책을 걸쳐놓고 먹을 갈아 <금강삼매경소>5권을 썼다. 그러나 현존하는 <금강삼매경론>은 이것이 아니다. 그를 시샘하는 자들이 그것을 훔쳐갔기 때문에 원효는 다시 <약소>3권을 집필하여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원효의 대작이라 일컫는 <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이것을 가지고 당시 신라불교의 대표사찰인 황룡사에서 왕과 고승대덕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 경전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설파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후 절에서 저술과 참선으로 만년을 보냈다. 그는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총100여부 240권 중 20부 22권만이 현존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즐겨 인용했고,<금강삼매경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그의 대저술이다.


c.원효의 불교사상


 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 그러기 위해선 겸손하라>>는 것이다. 원효는 인생의 비극이 싸움에 있으며 이 싸움을 피하기 위해 아집과 자만심을 버리고, 본래부터 <나>라는 존재가 따로 없으니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이 원효가 남긴 사상적 교훈이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1.화쟁사상 2.일심사상 (원융회통사상) 3.정토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화쟁사상>은 서로 간의 다툼을 화합하려는 것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불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론이 분분하여 혹은 나만 옳다 하고 남을 그르다고 하며,혹은 내 학설은 옳고 남의 학설은 틀리다 하는 단순한 이론만 횡행하고 있어 드디어 쟁론이 강과 바다를 이룬 상황>>이었다. 이 <강과 바다>를 이룬 쟁론을 화합한다는것이 원효가 시도한 과업이었다. 즉 서로 모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각 경전의 불교사상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의 원리로서 회통시키려 했다. 원효의 화쟁은 서거정의 <동문선>이 전하는 것처럼 <<여러 갈래의 각기 다른 쟁론을 화합하고 유와 무의 대립된 견해를 귀일시키는>>것이었다. 

   2.이러한 화쟁은 <일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원효사상은 달리 표현하면 <일심을 통한 화쟁사상> 혹은 <일심을 통한 원융회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불교의 모든 교설은 불타의 깨달음을 원천으로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경론과 교설은 이 <깨우침>의 영역이다. 즉 모든 경론이 한 마음의 펼침이며 그것들을 모으면 그대로 <일심>으로 귀일되는 것이다. 또 여러 갈래의 종파 또한 한마음의 펼침에 불과하며 요약하면 역시 일심일 뿐이다. 이처럼 원효의 논리는 개합과 종요의 회통원리인 것이다. 

   3. 정토사상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원칙 위에 어려운 볼교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외우면 누구나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단순한 신앙이었고 현세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갈 수 있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내세신앙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의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혜숙. 혜공. 대안 등이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들어가 서민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화 시킴으로서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했다.

 원효 역시 이들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등을 두루 돌아 다니며 무애가로써 가무하고 잡담하는 가운데 불법을 널리 알리어 실생활을 불교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무애가에는 본체(리)와 현상(사)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당시의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불교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의 포교로 신라하대에는 신라인들의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되었다 한다.


d.<대승기신론소>의 내용>


   1.<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은 2세기경 인도의 시인이자 고승인 마명대사가 대승불교의 근본 뜻을 이론과 실천의 두 측면에서 설명한 책으로 줄여서 <기신론>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찬이라는 주장이 있어 저자문제는 오늘날까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으나,설사 인도에서 찬술되었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크게 읽히지 않고 중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하며,이는 원효가 해설한 <기신론소>의 영향이 컸다.

 <기신론> 해석서 중 혜원. 원효. 법장의 주석서를 3대소로 지칭하고 있으나,혜원의 것은 가짜라는 설과 함께 질로나 양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 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분과와 어구해석에 있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원효의 <기신론소>야말로 최고의 <기신론>해설서라 할 수 있다. 

 원효 자신도 그러한 위치를 알고 있었던 듯,<<종전의 주석가들은 허심탄회하게 논지를 바로 찾지 못했으니 근간을 잊고 곁가지를 얻는 데 그쳤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기신론>에 대해 무려 7종의 연구서를 냈고,특히 그의 <기신론소>는 일찍부터 중국의

불교학계에서도 높이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는 <기신론>의 <재발견자> 요 <선양자> 할 수 있다.


   2.<대승기신론소>의 내용

 원효가 생존했던 당시의 불교계는 인도는 몰론 동아시아의 사상적 대립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종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1.공(무).유의문제 2.진 (출세간적 진리) 3.속 (세속적 진리)의 차별문제였다.

 그런데 원효는 많은 경론을 섭렵한 끝에 이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를 마명의 <기신론>에서 발견하여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사상을 화합시키고,진과 속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진속일여)라는 주장을 폈다.

 마명은 <기신론>의 첫머리를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불보(부처님),법보(부처님 말씀), 승보(불제자)의 삼보에 대한 찬양하는 권두시로 시작하고 있는데 원효는 이 권두시에 대한 해설로 <기신론>의 사상을 요약,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일심> 이란 관점에서 불교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삼보에 귀의한다라는 것은 외부의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마음속으로의 귀일을 의미하며,그렇게 되면 불법의 가르침도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되고 영원한 마음(진여)은 현실 속에서 오염(생감)되어 나타나는데, 참된 마음과 현실의 마음은 어떤한 관계에 있으며 현실의 마음은 어떠한 양상을 갖는가? 마명은 진여와 생멸의 마음을 포괄하여 대승(여래장)이라 칭했는데, 대승이란 곧 <중생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대승인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지만 진여와 생멸의 두 방향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인 것도 아닌 것을 <아라야식> 이라하는데, 이러한 아라야식에 의해 진여의 세계(각,깨달음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불각,타락의 세계)는 같은 것으로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불각은 피할 수 없으며 깨닫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 시각 단계이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본각(구경각)은 우리의 본래마음인 진여의 세계다. 불각 때문에 생기는 기본적인 세 가지 모습을 <삼세>라 하고 그로부터 파생되어 더욱 복잡해진 여섯 가지의 모습을<육추>라고 한다.

 그러나 불각의 과정이 인간세계의 전부는 아니며,각이라고 하거나 불각이라고 하거나 그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기신론>의 주장이다. 한마음(일심)에 의해 진여(본체론적인 중관학파)와 생멸(현상론적인 유식학파)이 <기신론>에 이르러 비로소 종합되는 것이다.

중관.유식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세속(속).출세간(진)의 차별까지도 <기신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극복된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자세. 그것이 결정짓는다. 무궁무진한 여래의 진여한 마음을 가진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그 존재의의나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신론> 의 사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얻은 그의 깨달음의 내용과 신기할 만큼 일치하고 있다. 이 <기신론>을 보고 원효는 얼마나 기뻤을까? 원효는 <기신론>이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진속일여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원효는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무슨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석어서 그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그고요해야 할 바다에 파랑이 일고 기복이 생기며 갖가지 평화롭지 못한 인간의 한계상황은 생겨난다.>>

 <기신론>은 이러한 마음, 곧 <일심>에 관한 설명이며 원효는 그것을 독특한 입장에서 해설하고 있다. 권두시의 이러한 내용은 <기신론>의 대의를 표명하고 있지만 원효의 독창적이고 해박한 해설에 의해 더욱 참신함을 갖는다. <기신론> 자체의 이러한 내용은 어느 불전과도 다른

독특한 것이다. 흔히 불전들이 어느 한 사상을 말하는 데 비해 <기신론>은 불교교리를 전체적으로 조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승의 삼보에 관한 문제나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열반이나 진여의 상태,또한 진여의 상태에서 타락해 있는 모습들에 대한 기술은 실로 불교 전체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e.원효사상의 의의 및 영향

 

 이상으로 원효의 생애,<대승기신론소>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종교사상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원효는 한국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으며 한국불교는 원효를 통해 비로소 총화불교,즉 화쟁의 불교에 이르렀다. 원효 이후 한국불교는 신라 말의 5교9산으로부터 고려의 5교양종,다시 조선시대의 선교양종이 되고 결국에는 선과 교가 합하여 일종으로 된 것은 원효의 화쟁에 의한 모든 종문의 회통사상의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원효의 진가를 재발견한 고려 의천의 교선일치 그 뒤를 이어 보조의 선교일화, 조선시대의 사명 등에서 원효가 이룩한 한국 불교의 전통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불교의 도덕적 논설에서도 <화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그 덕목을 1.현상문 2.입의문 3.차별문,그리고 끝으로 4.화쟁문이라 했다. 플라톤의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주덕> 기독교의 믿음(신).소망(망).사랑(애),중국의 유교에서는<인의예지신>을 각 각 덕목으로 강조했으나, 원효는 모든 차별의 덕목들을 일관하는 화쟁의 문을 따로 열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사상이 지닌 원융의 정신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다. 여러 종파들이 원효를 통해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각파의 의미가 다시금 살아나서 <교>와 <선>이 그 상극성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당시 사상계의 최고정점에 올라 왕과 대중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었으나, 스스로를 낮추어 대중 속에 들어가 호홉을 함께한 인물이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원효는 계속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특히 중국에서는 원효의 소를 <해동소>라 부르고 중국의 화엄철학을 대성한 법장의 사상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불교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하여 당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한 특출한 사상가였으며 실로 한국사상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다.



f.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

대승기신론소 / 해동소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元曉)의 주석서. 2권. ≪기신론≫의 본문에 따라 일일이 해석을 붙인 책이다.

유형

문헌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

불교전적류, 활자본, 금속활자본, 초주갑인자

편저자

원효(元曉)

제작시기

1457년

권수·책수

3권1책

간행·발행·발급자(처)

대구 남구

소장처

김병구

관리자

김병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713호

문화재 지정일

2011년 04월 29일

목차

정의개설서지적 사항내용의의와 평가

정의


조선 세종 연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교학 불서.


개설


보물 제1713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해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1457년에 금속활자(초주갑인자)로 간인한 책이다. 본래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법장의 「소」에 종밀이 주해를 가한 주석서로서 조선 세종 연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교학 불서이다.


서지적 사항


권상지이(卷上之二)·권하지일(卷下之一)·권하지이(卷下之二) 등 3권 1책으로 되어 있으나, 권상지일은 결본이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책으로 권수제 다음 행에는 ‘서대원사사문 법장 술(西大原寺沙門 法藏 述)’란 저자표시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주해자인 종밀(宗密)의 이름이 있다. 권말에는 세조가 죽은 아들을 위해 1457년에 지은 어제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구성은 크게 ① 종체(宗體)를 밝힌 부분, ② 제목에 대한 해설, ③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구분된다.


종체를 밝힌 부분에서는 『기신론』의 문장 하나하나가 어느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과, 『기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주장을 밝히고, 그 논이 불교 교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드러내는 글을 싣고 있다.


제목에 대한 해설에서는 ‘대승기신론’이라는 표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자세히 풀이하고 있다. 대승의 ‘대(大)’는 널리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진리를 두고 한 말이며, ‘승(乘)’은 싣고 나르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기 때문에 비유로 수레라 한 것이라 하였다. ‘기신(起信)’은 이 논에 의하여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며, 믿음이란 결정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즉, 이 논 가운데 참된 이치가 있고 닦으면 그렇게 되며, 닦아서 그렇게 되었을 때는 무궁무진한 훌륭한 소질이 다 갖추어진다고 믿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승이 무엇인가를 보다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대승은 곧 진리로서, 어떤 특수한 사람이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해당되지 않는 바가 없다고 보았다.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중생심(衆生心)의 유전(流轉)과 환멸(還滅)하는 갖가지 사항을 다룬 부분과 혁명적인 실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풀이하였다.


유전과 환멸에서는 전체 내용을 구분, 일심이문(一心二門), 이언진여(離言眞如), 의언진여(依言眞如), 아알라야식(識), 각(覺), 불각(不覺), 생멸(生滅)의 인연과 심(心), 의(意), 의식(意識), 물든 생각, 생멸의 양상, 훈습(薰習), 진여의 체상용(體相用), 그릇된 집착, 세 가지 발심(發心) 등 15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원효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특히, ‘이언진여’에서는 진여의 체(體)가 무엇이며 진여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이에 대한 의문을 문답식으로 풀이하였다.


‘의언진여’에서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진여의 진실성을 파악하게 하는 여실공(如實空)과 긍정적인 시각을 통해서 진여의 진실성을 파악하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설명하고 있다.


‘각’에서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과 본각을 회복해 가는 시각의 4단계, 본각과 시각과의 관계, 세속 속에서의 본각과 거울과 같은 본각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불각’에서는 근본불각과 지말불각(枝末不覺), 각과 불각의 같고 다른 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지말불각에서는 세 가지 미세한 전개과정인 삼세(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전개과정인 육추(六麤)로 나누어서 중생의 타락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물든 생각’에서는 아알라야식의 비밀스런 뜻과 물든 생각의 근본 발원지는 진여이고, 그 진여로부터 홀연히 생겨난 무명(無明)이 여러 가지 물든 생각을 전개시키며, 그 물든 생각을 크게 육염심(六染心)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훈습’에서는 훈습의 뜻과 그 종류, 염법훈습(染法薰習)과 정법훈습(淨法薰習)에 관해서 해설하였다. 특히, 정법훈습에서는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을 5단계로 나누었고, 주관적인 생각이 일으키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과 의훈습(意薰習)으로 분류하였으며,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을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과 용훈습(用薰習)의 두 가지 면으로 풀이하고,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의 몇 가지 남은 문제를 밝히고 있다.


‘진여의 체상용’에서는 진여의 체를 법신(法身)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상을 법신과 보신(保身), 용을 보신과 응신(應身)에 관련시켜서 밝혔다. 이 중 진여의 용에 대해서는 그 실천의 기본 원리로써 행(行)과 원(願)과 대방편(大方便)을 설정하고, 보신과 응신과의 관계, 법신과 색상(色相)과의 관계 등을 밝히고 있다.


‘그릇된 집착’에서는 먼저 모든 그릇된 고집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고, 초학자(初學者)가 빠지기 쉬운 고집을 여래의 법신이 허공과 같다는 고집, 여래의 법신이 공(空)하는 고집, 여래장(如來藏) 안에 마음과 육신이 별개의 근본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고집, 여래장 자체에 세속적인 번뇌와 고통 등이 있다는 고집, 중생에게는 시작이 있고 열반에는 끝이 있다고 보는 고집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며, 기성 수도인이 빠지기 쉬운 고집도 밝히고 있다.


‘세 가지 발심’에서는 신심을 성취시키고 결심을 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과 이해와 실천을 굳건히 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해행발심(解行發心), 법신을 증득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증발심(證發心)으로 나누어 풀이하였다.


마지막 단락인 ‘혁명적 실천’에서는 먼저 신심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완덕(完德)을 위한 실천법으로서 베풀어 줄 것[施], 윤리를 지킬 것[戒], 참고 용서할 것[忍], 부지런히 노력할 것[進],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그 깊이를 볼 것[止觀] 등을 제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중국 및 우리 나라의 ‘기신론’ 연구가들에게는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고, 중국에서 『기신론』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법장(法藏)도 원효의 주석과 해석을 대부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중국불교계에서는『해동소(海東疏)』라고 하여 이 책에 대한 특별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책의 고간본은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學)에 원록(元祿) 9년 간본이 소장되어 있고, 대정장경(大正藏經) 및 『원효전집』 등에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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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이 책의 집필 원칙

1. 고전으로서의 전문성과 비전공자를 위한 대중성의 조화

2. 각 책에 대하여 생애/시대적,사상적 배경/사상내용/본 저서의 주요 내용/영향 및 현대적 의의/ 라는 구성을 통하여 분석하고 필자의 일관된 시각을 주로 하여 관점을 유지

3. 가급적 한자 사용을 자제하여 쉽게 함


A03-독서의 필요성

-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참된 진리를 찾아 삶의 지혜를 기름

- 인류의 문화 유산에 대한 접근(정보와 사상의 체득)

-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성을 설정


A04-독서 어떻게 할 것인가

- 장, 단기 독서 계획을 세우자(거시적 측면)

- 구체적은 독서 기술은(미시적 측면) : 정독 / 조언을 구한다 / 이미 가치를 인정 받은 고전(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내용)을 우선한다. 

(1) 전체적인 모습을 먼저 그리고 세부로 들어감 – 서문, 머리말, 목차를 주의하여 읽자, 믿줄을 긋는 습관,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하자

(2) 책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독서방법을 달리함.

(3) 글의 양면성 (논리와 정서)을 함께 파악함.

(4) 객관적 사실과 저자의 주관적 판단을 구분함. – 사실과 허구를 분별하는 힘을 기르자.

(5) 독서후(과정도 포함)에는 반드시 핵심적인 내용을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자


A05-무엇을 읽을 것인가

- 고전이란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그 가치가 검증된 작품> 또는 <고유의 탁월한 성질 덕분에 문학사나 사상사에서 오랫동안 널리 공인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상급의 작품>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

- 고전 읽기의 중요성 

(1) 시공을 초월한 인류문화의 보편적 가치 구현

(2) 인간 경험의 다양한 폭과 깊이 반영

(3) 창조적 사유체계 형성에 도움

(4) 지적인 성장을 위한 자극

(5)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고 체계적인 경험을 줌.

(6) 튼튼하고 모든 지적 활동의 기초가 됨.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동서고전 200 요약 – jun. 2017.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의 내용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간추려 보고자 한다.

 

 

A01-서울대 선정 동서고전 200> 목록 및 분류

1.사상서 100

 고전명  저자  분류

 (1)대승기신론소  원효  한국사상(불교철학)

 (2)삼국유사  일연  한국사상(역사)

 (3)원돈성불론  지눌  한국사상(불교철학)

 (4)매월당집  김시습  한국사상(유교철학)

 (5)화담집  서경덕  한국사상(유교철학)

 (6)성학십도  이황  한국사상(유교철학)

 (7)성학집요  이이  한국사상(유교철학)

 (8)징비록  유성륭  한국사상(역사)

 (9)선가귀감  휴정  한국사상(불교철학)

 (10)성호사설  이익  한국사상(실학)

 (11)택리지  이중환  한국사상(인문지리)

 (12)일득록  정조  한국사상(정치,사회)

 (13)목민심서  정약용  한국사상(정치,사회)

 (14)북학의   박제가  한국사상(실학)

 (15)의산문답  홍대용  한국사상(과학,철학)

 (16)기학  최한기  한국사상(철학)

 (17)동경대전  최제우  한국사상(철학)

 (18)매천야록  황현  한국사상(역사)

 (19)한국통사  박은식  한국사상(역사)

 (20)조선상고사  신채호  한국사상(역사)

 (21)주역  중국사상(철학)

 (22)논어  공자  중국사상(유교철학)

 (23)맹자  맹자  중국사상(유교철학)

 (24)대학  중국사상(유교철학)

 (25)중용  자사  중국사상(유교철학)

 (26)도덕경  노자  중국사상(도교철학)

 (27)장자  장자  중국사상(도교철학)

 (28)순자  순자  중국사상(유교철학)

 (29)한비자  한비자  중국사상(법가사상)

 (30)바가바드기타  중국사상(힌두교철학)

 (31)중론  용수  중국사상(불교철학)

 (32)법구경  중국사상(불교철학)

 (33)육조단경  혜능  중국사상(불교철학)

 (34)사기열전  사마천  중국사상(중국역사)

 (35)근사록  주희  중국사상(유교철학)

 (36)전습록  왕수인  중국사상(유교철학)

 (37)명이대방록  황종희  중국사상(정치사상)

 (38)대동서  강유위  중국사상(정치사상)

 (39)삼민주의  손문  중국사상(정치사상)

 (40)실천론  모택동  중국사상(정치사상)

 (41)역사  헤로도토스  서양사상(그리스 역사)

 (42)국가  플라톤  서양사상(그리스 철학)

 (43)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사상(그리스 정치)

 (44)의무론  키케로  서양사상(로마 윤리)

 (45)게르마니아  타키투스  서양사상(게르만 역사)

 (46)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서양사상(기독교사상)

 (47)군주론  마키아벨리  서양사상(정치사상)

 (48)유토피아  모어  서양사상(정치,사회)

 (49)전쟁과 평화의 법  그로티우스  서양사상(법학)

 (50)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  갈릴레오  서양사상(천문학)

 (51)신논리학  베이컨  서양사상(철학)

 (52)방법서설  데카르트  서양사상(철학)

 (53)리바이어던  홉스  서양사상(정치)

 (54)프린키피아   뉴턴  서양사상(물리학)

 (55)정부론  로크  서양사상(정치학)

 (56)신학문의 원리  비코  서양사상(인문학)

 (57)법의 정신  몽테스키외  서양사상(정치,법학)

 (58)사회계약론  루소  서양사상(정치학)

 (59)범죄와 형  베카리아  서양사상(법학)

 (60)국부론  스미스  서양사상(경제학)

 (61)형이상학서설  칸트  서양사상(철학)

 (62)역사철학강의  헤겔  서양사상(철학)

 (63)미국의 민주주의  토크빌  서양사상(정치학)

 (64)실증철학강의  콩트  서양사상(사회학)

 (65)권리를 위한 투쟁  예링  서양사상(법학)

 (66)종의 기원  다윈  서양사상(생물학)

 (67)자유론    서양사상(정치학)

 (68)고대법  메인  서양사상(법학)

 (69)자본론  마르크스  서양사상(경제학)

 (70)차리투스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서양사상(철학)

 (71)자살  뒤르켕  서양사상(사회학)

 (72)꿈의 해석  프로이트  서양사상(정신분석학)

 (73)창조적 진화  베르그송  서양사상(철학)

 (74)슬픈 열대  레비--스트로스  서양사상(인류학)

 (75)생의 비극적 감정  우나무노  서양사상(철학)

 (76)일반언어학강의  소쉬르  서양사상(언어학)

 (77)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  서양사상(사회과학)

 (78)옥중수고  그람시  서양사상(사회과학)

 (79)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서양사상(사회과학)

 (80)중세사회  블로크  서양사상(역사)

 (81)아동지능의 근원  피아제  서양사상(심리학)

 (82)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슘페터  서양사상(사회과학)

 (83)예종에의 길  하이에크  서양사상(사회과학)

 (84)심리학과 종교    서양사상(심리학)

 (85)지각의 현상학  메를로--풍티  서양사상(현상학)

 (86)생명이란 무엇인가  슈뢰딩거  서양사상(물리학)

 (87)철학적 성찰  비트겐슈타인  서양사상(철학)

 (88)시각예술에서의 의미  파노프스키  서양사상(미술사학)

 (89)인간현상  샤르댕  서양사상(생물학)

 (90)순수법학  켈젠  서양사상(법학)

 (91)진리와 방법  가다머  서양사상(해석학)

 (92)영국노동계급의 형성  톰슨  서양사상(사회과학)

 (93)인식과 관심  하버마스  서양사상(철학)

 (94)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서양사상(양자역학)

 (95)지식의 고고학  푸코  서양사상(고고학)

 (96)과학혁명의 구조    서양사상(자연과학)

 (97)정의론  롤스  서양사상(철학)

 (98)성과 속  엘리아데  서양사상(철학)

 (99)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브로델  서양사상(역사)

 (100)책임의 원리  요나스  서양사상(생태윤리학)

 

 2.문학서 100

 고전명  저자  분류

 (1)수이전  한국문학(설화집)

 (2)계원필경  최치원  한국문학(시문집)

 (3)파한집  이인로  한국문학(시화잡록집)

 (4)역옹패설  이제현  한국문학(시화잡록집)

 (5)송강가사  정철  한국문학(국문시가집)

 (6)열하일기  박지원  한국문학(중국견문기)

 (7)다산시선  정약용  한국문학(시집)

 (8)구운몽  김만중  한국문학(고대소설)

 (9)홍길동전  허균  한국문학(고대영웅소설)

 (10)춘향전  (판소리계소설)

 (11)혈의 누  이인직  한국문학(신소설)

 (12)무정  이광수  한국문학(현대장편소설)

 (13)임꺽정전  홍명희  한국문학(대하역사소설)

 (14)삼대  염상섭  한국문학(가족사소설)

 (15)천변풍경  박태원  한국문학(세태소설)

 (16)고향  이기영  한국문학(농민소설)

 (17)무영탑  현진건  한국문학(장편역사소설)

 (18)상록수  심훈  한국문학(농촌계몽소설)

 (19)탁류  채만식  한국문학(세태소설)

 (20)인간문제  강경애  한국문학(사회소설)

 (21)감자 외  김동인  한국문학(자연주의 소설)

 (22)카인의 후에  황순원  한국문학(장편소설)

 (23)님의 침묵  한용운  한국문학(시집)

 (24)김소월전집  한국문학(시집)

 (25)정지용전집  한국문학(시집)

 (26)윤동주전집  한국문학(시집)

 (27)시경  중국문학(시가집)

 (28)산해경  중국문학(신화집)

 (29)도연명 시선  중국문학(시집)

 (30)이백 시선  중국문학(시집)

 (31)두보 시선  중국문학(시집)

 (32)삼국지연의  나관중  중국문학(장편소설)

 (33)수호전  시내암  중국문학(장희소설)

 (34)서유기  오승은  중국문학(장희소설)

 (35)홍루몽  조설근  중국문학(장희소설)

 (36)유림외사  오경재  중국문학(장희소설)

 (37)노잔유기  유악  중국문학(장희소설)

 (38)아큐정전  노신  중국문학(현대중편소설)

 (39)자야  모순  중국문학(현대장편소설)

 (40)상자  노사  중국문학(현대장편소설)

 (41)  파금  중국문학(현대장편소설)

 (42)원씨물어  무라사키 시키부  일본문학(장편소설)

 (43)도련님  나쓰매 소세키  일본문학(장편소설)

 (44)기탄잘리  타고르  인도문학(시집)

 (45)천일야화  아랍계 문학(구전모음)

 (46)변신  오비디우스  서양문학(설화시)

 (47)일리아드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서양문학(장편서사시)

 (48)오레스테스 3부작  아이스킬로스  서양문학(희곡)

 (49)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서양문학(희곡)

 (50)메데아 외  에우리피데스  서양문학(희곡)

 (51)리시스트라타 외  아리스토파네스  서양문학(희곡)

 (52)아에네이스  베르길리우스  서양문학(서사시)

 (53)신곡  단테  서양문학(장편시집)

 (54)데카메론  보카치오  서양문학(소설)

 (55)4대비극  셰익스피어  서양문학(영국희곡)

 (56)걸리버 여행기  스위프트  서양문학(영국산문)

 (57)오만과 편견  오스틴  서양문학(영국소설)

 (58)위대한 유산  디킨스  서양문학(영국소설)

 (59)폭풍의 언덕  브론테  서양문학(영국소설)

 (60)테스  하디  서양문학(영국소설)

 (61)젊은 예술가의 초상  조이스  서양문학(영국소설)

 (62)사랑하는 여인들  로렌스  서양문학(영국소설)

 (63)주홍글씨  호손  서양문학(미국소설)

 (64)여인의 초상  제임스  서양문학(미국소설)

 (65)허클베리 핀의 모험  트웨인  서양문학(미국소설)

 (66)무기여 잘 있거라  헤밍웨이  서양문학(미국소설)

 (67)음향과 분노  포크너  서양문학(미국소설)

 (68)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라블레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69)수상록  몽테뉴  서양문학(프랑스)

 (70)타르튀프 외  몰리에르  서양문학(프랑스 희극)

 (71)페드르 외  라신  서양문학(프랑스 비극)

 (72)고백록  루소  서양문학(프랑스)

 (73)캉디드 외 철학적 콩트  불테르  서양문학(프랑스)

 (74)잃어버린 환상  발자크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75)적과 흑  스탕달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76)보바르 부인  플로베르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77)악의 꽃  보들레르  서양문학(프랑스 시집)

 (78)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79)구토  샤르트르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80)페스트  카뮈  서양문학(프랑스 소설)

 (81)파우스트 1  괴테  서양문학(독일소설)

 (82)도적들  실러  서양문학(독일희곡)

 (83)하인리히 폰 오프더딩엔   노발리스  서양문학(독일희곡)

 (84)노래의 책  하이네  서양문학(독일시집)

 (85)녹색웃을 입은 하인리히  켈리  서양문학(독일소설)

 (86)마의 산  토마스 만  서양문학(독일소설)

 (87)말테의 수기  릴케  서양문학(독일소설)

 (88)수레바퀴 아래서  헤세  서양문학(독일소설)

 (89)  카프카  서양문학(독일소설)

 (90)서푼짜리 오페라  브레히트  서양문학(독일희곡)

 (91)양철북  그라스  서양문학(독일소설)

 (92)돈 키호테  세르반테스  서양문학(스페인 소설)

 (93)백년동안의 고독  마르케스  서양문학(콜럼비아 소설)

 (94)인형의 집,유령  입센  서양문학(노르웨이 희곡)

 (95)미스 줄리,아버지  스트린드베리  서양문학(노르웨이 희곡)

 (96)카라마조프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서양문학(러시아 소설)

 (97)안나 카레리나  톨스토이  서양문학(러시아 소설)

 (98)아버지와 아들  투르게네프  서양문학(러시아 소설)

 (99)어머니  고리키  서양문학(러시아 소설)

 (100)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체호프  서양문학(러시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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