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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8 – 계원필경 (桂苑筆耕)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책은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최치원의 개인문집으로, 저자가 당나라에 있을 때 쓴 시문들을 귀국하여 모은 책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합격까지 했으나, 이방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 속에 고국에 귀국한 후, 자신의 포부를 펴보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불가능함을 알고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친 불우한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이 잘 나타나 있다.


a. 성공과 좌절의 생애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인 최치원의 자는 고운이고 경주의 6두품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고운은 12살의 나이로 학문적 성취와 세속적 야망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그의 부친은 그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는 말로 자식을 전송했다. 당에 간 그는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친이 정해준 기간을 4년이나 앞당겼다.

 빈공과란 외국인을 위해 당나라에서 실시했던 과거시험이었는데, 유학생들은 이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인 당에서 관직을 얻을 수 있고 귀국해서도 일정수준의 관직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시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골 출신의 독무대에 눌려 있던 6두품 출신들에게는 이 시험이 매력적인 통로여서 신라에 유학 붐이 일고 있었다. 신라 출신의 합격자가 58명이나 되었다 하니 알 만하다.

  그러나 고운은 중요한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하고 주로 시작에 몰두하는 한편 주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당시의 실력자인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온다.

고변과 인연을 맺은 고운은 고변이 9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휩쓴 황소 토벌에 나섰을 때 그의 종사관으로 따라가 4년 동안 중요한 문서작성을 담당했다. 현재 <계원필경>에 전하는 글들이 대부분 이때에 이룩된 것이다.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도 이때 지은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 하고 있고, 땅 속의 귀신들까지도 몰래 너를 죽이자고 의논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황소는 놀라서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한다. 변방의 미미한 청년이 중원천지에서 마음껏 문재를 자랑하던 득의의 세월이었다.

 이처럼 고운은 세계제국의 중심지에서 문학적 명성을 날리는 등 후배 유학생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외국인으로서의 그의 출세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소외와 고독은 심각했다. 그러던 중 당나라도 기울어가고 고변도 퇴진하여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자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28세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에게 헌강왕은 도당 유학생에게 의례적으로 주었던 벼슬을 하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운은 당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28권의 시문집을 왕에게 바쳤으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이처럼 문장가로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정치적 혼란과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당에서 공부한 학문적 이상을 펴보기에는 신라사회가 너무 협소했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오면서 중앙의 권력쟁탈전과 더불어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전면적인 붕괴국면에 들어간다. 외직으로 전전하던 고운은 38세 때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려 사회적 모순과 국가체제 정비를 기원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율적인 개혁능력을 상실하여 그의 충정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의 개혁의지가 수용되지 않자, 당과 신라 모두에서 거부당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대자연을 유람하다가 결국 가야산의 해인사에 은둔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신라의 현실은 최치원을 어떤 구체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방관자의 위치로 밀어냈다. 다만 제자들을 양성하여 고려 건국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그가 시대를 위한 노력의 유일한 소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뛰어난 재능을 역사의 변화에 연결시킬 수 없었던 지식인의 고뇌를 본다.


b. 고운의 사상과 문화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 선사들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을 보면, 불교에도 상당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산천을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활을 쏘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보기를 즐겨하고 바람과 달을 노래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만년에는 도가풍의 면모를 보여 한국도교의 선구자로 추앙되기도 한다. 결국 고운은 그때까지 수입되어 상당히 성행한 유불도의 사상과 막연하게 전해오던 전통사상을 접목하여 풍류도라는 독특한 한국 전통사상을 확립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난랑비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은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있어서,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시킨다. 또 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유교의 가르침이며, 모든 일을 억지로 처리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고 일을 실행함은 도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행함은 불교의 가르침이다.>>

  고운이 지은 글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인 <사산비명>과 조선의 서거정이 지은 귀중한 한문학 고전인 <동문선> 등 여기저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학은 유교나 불교의 어느 쪽에 비해 보더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는 논조를 폈다.

  <사산비명>의 하나인 <진감화상비명>의 서에서 <<초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어 장구 사이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을 맛보았으나, 미쳐 성인의 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므로, 오직 진흙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성인의 도리가 문장수식보다 앞선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c. 한국 최초의 시문집

  <계원필경>은 고운이 당나라 고변의 휘하에 있을 때 쓴 글들을 귀국하여 28권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에 관한 글은 비교적 적고, 중국의 임금이나 고관대작들에게 보내는 글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서무에 아버지의 분부를 깊이 명심하고 당나라에 가서 피나는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한 사연관, 고변의 종사관으로 많은 문서를 맡아보던 성공담을 적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당서>의 문예열전에 최치원은 들어있지 않다.

겉으로 표방하는 포용성은 주변민족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고 사실은 배타적인 기풍이 강했던 당의 사회에서 그는 당시 세계제국의 내면적인 모순을 발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다. 그런 심정을 선명하게 드러낸 <진정상태위>를 음미해보자.


    <진정상태위>

 해내수련해외인: 당나라의 누가 나를 가엾이 여기리

 문진하처시통진: 묻노라, 어느 나루가 내가 건널 만한 나루인가

 본구식녹비구리: 애초에 먹을 것이나 구하고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지위영친불위신: 다만 부모를 빛내려고 했지 내 몸 위하지 않았다. 

 객로이수강상우: 나그네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원귀몽일변춘: 고향에 돌아가는 꿈에 봄이 아득히 멀구나

 제천신우인파고: 냇물 건너다 다행히 은혜로운 물결 듬뿍 만나서

 원탁범영십재??: 속된 갓끈의 십년 먼지를 다 씻어버렸으면

  고운은 자신이 외국에 있음을 절감하면서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먹고사는 것이나 구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했다는 변명으로 그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촉규회>라는 시에서는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도 참고 견디는>> 접시꽃에다 자기 처지를 비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에서 고운은 자신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하게 되고 주위의 민중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를 얻었다. 그런 심정을 담은 시중 대표적인 시는 <강남녀>가 있다.

 

   <강남녀>

 강남탕풍속: 강남땅은 풍속이 음탕하여

 양녀교차린: 딸자식을 요염하게 키운다네

 치성치침선: 천성이 요염해 바느질은 싫어하고

 장성조관현: 단장하고 거문고 타는 일뿐

 소학비아음: 우아한 곡조는 배우지 못했으니

 다피춘심견: 춘정에 많이도 이끌리네

 자위방화색: 아름답고 꽃다운 그 맵시

 장점염양년: 언제나 청춘일 것으로 여기네

 각소린사녀: 가난한 이웃집 여자들

 종조롱기저: 온종일 베틀 놀리는 걸 비웃네

 기저종노신: <아무리 땀흘려 비단을 짜도

 라의불도너: 비단옷 너에게 돌아가지 않을 걸>

이 작품은 강남의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 빈부의 사회적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비록 중국인의 생활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부녀자들의 생활상이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상류층 부녀자의 교만하고 방탕한 삶의 모습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하층 여성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빈부귀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부귀한 가문 출신의 부녀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난과 경멸의 시선을 보내면서 하층 여성의 삶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년에 세상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했을 때 지었다는 <추야우중>은 고운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다.

 

   <추야우중>

 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니

 거세소지음: 넓은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드물고

 창외삼경우: 창 밖은 삼경인데 비만 내리고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달리네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기만 하는 만년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시다. 당나라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래 마침내 가야산에 입산할 때까지 방황과 번민을 시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토로했다.

  다음의 글을 당시 중국 전역을 불안에 떨게 했던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황소를 준열히 꾸짖는 글로서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쳤던 명문이다.

  이로 인해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었다>>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격황소서>(제11권)

  <<광명 2년(818) 7월 8일에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치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고 이르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슬기로운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이는 이치를 거역하는 데서 패하나니, 백년 동안 목숨을 이을지라도 생사를 기약하기 어렵고, 만사는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느니라. 

  지금 우리 천자의 군대로 말하면 은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장차 수도를 수복하고 진실로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고자 한다.

  너는 본래 천민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승세하여 감히 사람의 도리를 어지럽혔다. 드디어 불순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도성을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그 죄 하늘에 미치고 반드시 패하게 되리라. ^5,5,5^햇살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오, 하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만 착함도 없으니,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벌써 너를 남몰래 죽이기로 의논했다.>>(이 부분에서 황소는 놀라서 떨어졌다)


d.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

  <계원필경>에는 305편의 문장과 총 6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시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중 문장은 <사륙변려체>로 일관했고, 시는 당시를 따랐다. 사륙변려체란 각 구의 글자수를 4자와 6자로 대구를 맞추고 운자를 맞추는 등 형식미에 치중하는 화려한 문체로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과거시험에 많이 사용되었다.

  시 중에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고변의 업적을 찬양한 것, 그리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주로 중국에 관련된 것들이고, 신라와 관련되는 시문은 권말에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자신의 내적 정서를 표현한 것은 드물다.

  그중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참산에서 봄을 맞으며> 등과 같은 작품은 고국에 귀국하기 직전에 쓴 것들로서, 고국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간결한 시 속에 섬세한 필치로 노래했다. 한시의 다양한 형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이토록 절묘하게 한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된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보면 <<고운 최치원은 전무후무한 공을 세웠으니 우리 나라 학자들은 모두 그를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대한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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賓貢科 (출처 : 나무위키)

1. 개요[편집]

과거 제도의 일종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다.

과거 제도의 소과를 보면, 수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공(上貢), 지방민들을 위한 향공(鄕貢), 그리고 외국인들 대상의 빈공(賓貢)으로 나뉘고, 이 3가지를 합쳐서 삼공(三貢)이라고 부른다. 왜 바칠 '공'자를 쓰느냐면, 고대 중국에서 지방의 제후가 지역 인재를 중앙의 천자에게 천거하는 행위를 '인재를 바친다'라고 해서 '공사貢士'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역에서 소과 합격자를 뽑아서 중앙에서 치르는 대과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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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情上太尉(진정상태위) - 최치원(崔致遠)


海內誰憐海外人(해내수련해외인) : 해내서 누가 해외 사람을 어여삐 여기오리

問津何處是通津(문진하처시통진) : 나루를 묻노니 어디가 통하는 나루이온지

本求食祿非求利(본구식록비구리) : 본디 녹을 구함일 뿐 이를 구함은 아니요

只爲榮親不爲身(지위영친불위신) : 다만 어버이 빛내려 할뿐 제 몸 위함 아니로세

客路離愁江上雨(객로이수강상우) : 객지의 이별하는 시름은 강 위에 비내릴 때

故園歸夢日邊春(고원귀몽일변춘) : 고원에 돌아가는 꿈은 저 햇가

濟川幸遇恩波廣(제천행우은파광) : 내 건너다 요행히 은혜 물결 만나서

願濯凡纓十載塵(원탁범영십재진) : 속된 갓끈 십년 먼지를 다 씻어버리자.


問津(문진) : 논어에, “장저 걸익(桀溺)이 짝지어 밭 갈거늘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뒷사람이 이 말을 끌어다가 남에게 迷惑을 지시해 달라고 청구하는 뜻으로 쓴다.日邊(일변) : 여기서는 천애(天涯)와 같다는 뜻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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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女(강남녀)/최치원


江南蕩風俗(강남탕풍속) 강남이라 풍속도 방탕해서

養女嬌且憐(양녀교차련) 딸을 기르기를 예쁘고 귀엽게만

性冶恥針線(성야치침선) 성질이 되바라져 바느질은 부끄럽고

粧成調管絃(장성조관현) 화장하고 악기나 조율하지만

所學非雅音(소학비아음) 배운바가 고상한 음악이 아니고

多被春心牽(다피춘심견) 춘정을 끌어내는 것 뿐이라네.

自謂芳華色(자위방화색) 스스로 말하기를 “꽃 같은 내 얼굴

長占艶陽年(장점염양년) 젊고 예쁜 날을 오래오래 누리겠다.“ 하며

却笑鄰家女(각소인가녀) 도리어 비웃네. 이웃집 처녀가

終朝弄機杼(종조농기저) 아침 내내 베틀 질하는 것을

機杼縱勞身(기저종로신) “베 짠다고 네 몸 수고해봐야

羅衣不到汝(라의부도여) 그 비단옷은 네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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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밤 내리는 빗속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 속에 괴롭게 시만 읊노라.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이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별로 없으니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문 밖에 내리는 한밤중의 빗소리 듣노라니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잔 앞에서 만리 밖 고향으로 달려가는 이 마음.


三更 – 밤 11시 ~ 오전 1시



Directed byÁlex de la Iglesia
Produced byCarolina Bang
Álex de la Iglesia
Mercedes Gamero
Mikel Lejarza
Kiko Martínez
Written byÁlex de la Iglesia
Jorge Guerricaechevarría
StarringMario Casas
Music byJoan Valent
CinematographyÁngel Amorós
Edited byDomingo González
Production
companies
A Pokeepsie Films
Nadie es Perfecto
Atresmedia Cine
Release date
  • 15 February 2017 (Berlin)
  • 24 March 2017 (Spain)
Running time
102 minutes
CountrySpain
LanguageSpanish


마드리드 시내의 어느 한적한 Bar에 우연히 모인 손님들 속에 한명의 치명적 전염병을 가진 사람이 죽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그 지역이 봉쇄 되면서 경찰에 의한 싹쓸이 작업이 시작된다. 

Bar의 여주인, 그리고 그 곳에서 15년째 열심히 일해 온 주방장

수염을 잔뜩 기른 광고회사 젊은이

주정뱅이 홈리스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만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

전직 경찰이지만 지금은 놀고 있는 중년 남자 1

뭔가 변태적 취미를 가진 중년 남자 2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빠에 있는 슬롯 머신에 동전을 넣는 취미를 가진 뚱뚱하고 나이든 아줌마

갑작스레 닥친 하나의 사건. 그 속에 이 사람들의 운명은 풍전등화격이 되는데 이 속에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타나고 살기 위한 몸부림 속에 사건은 소용돌이쳐 나가게 된다. 

고전연극의 3일치의 법칙이 비교적 잘 지켜져 나가는 가운데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배우들의 개성있는 연기속에 삶과 죽음의 귀로에 선 인간군상들의 처절하고 때론 우스꽝스런 행위와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들을 아주 잘 표현한 영화. 

그리고 간만에 보는 스페인 영화로서 헐리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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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7 – 안나 카레리나 (Anna Karenina) / 톨스토이(L.N. Tolstoi, 1828~191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상류사회의 정숙한 부인 안나의 불륜의 사랑을 중심으로, 1870년대의 러시아 귀족사회를 묘사한 가정소설이자 사회소설이다. 그는 여기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구원받을 수 없는 관능적인 사랑에, 레빈과 키치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이며 이기적인 데 비해, 후자는 형이상학적 사랑의 개념이며 자기 희생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한 풍속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a. 문학가에서 구도자로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톨스토이 가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로 어로 밝은 숲속의 공터 라는 뜻으로 톨스토이 문학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배후에 항상 광활한 러시아의 자연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나 친척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타고난 이원성, 즉 풍부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으로 인해 불안과 동요 속에 일생을 보내야 했다. 19세에 카잔 대학에서 대학은 학문의 장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퇴, 고향으로 돌아가 합리적인 농장관리와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방탕하게 지내다가 형의 권유로 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는 이 아름다운 카프카스의 자연에서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냈는데, 어린이의 심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묘사한 (유년시대)를 비롯하여 크림 전쟁을 소재로 한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그가 군에서 경험한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도성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후 두 차례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문명의 해악을 실감하고 루소의 자연에 바탕을 둔 농민교육에 힘을 쏟았다.

  1862년 34세의 노총각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18세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밝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결혼 후 새로운 창작열에 불타오른 톨스토이는 문학에 전념하여 양적 질적인 면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진 서사시적 대하소설(전쟁과 평화)(1865~1866, Russian Herald)를 발표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찬가인 이 작품은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완성하여 세계적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 등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 신학 과학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농부들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의 사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이 시기를 전환기라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숙명적인 영혼의 투쟁은 시작된다. 1882년(54세) 그의 (참회)에는 그의 정신적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종교로 전향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로 도덕가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즉, 평등, 노동존중, 생활의 간소화, 반문화, 반국가, 반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이 대두되었다. 그후부터 그의 문학활동은 주로 종교적 정신적 방향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소설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여 그의 이전의 작품들을 허위의 예술이라 폄하하고 오로지 선을 추구하는 작품만이 참다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50세를 전후로하여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사상가 종교가로서의 톨스토이로 전환한다.

 그는 교회의 일체의 권위화 형식을 부정했다. 그는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을 따르며 농민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크리스도교는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떤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는 이 세상의 종교들, 즉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을 연구하여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러시아의 정교회를 전세계의 종교로 만들려 했던 토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종교와 도덕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남겼고, 1885년(57세)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하여 그의 저작권은 그의 부인이 관리했다. 이 무렵 병역을 거부하여 탄압을 받고 있던 이교도들의 캐나다 이주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쓴 (부활)(1889)이 발표된다. (부활)은 그의 정신적 종교적 마지막 참회라는 의의를 가지나,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1901년(73세) 파문을 당하게 된다.  사유가 모든 악의 뿌리 라는 생각에 만년에 그는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했는데, 이는 가족에게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이상을 품고 러시아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뜻에 공감하지 못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아내와의 불화로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1910년 10월 28일 새벽, 13명의 자녀 중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준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b. 톨스토이의 사상과 주요작품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을 비판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앞세대 러시아 소설가들의 영향보다는 루소, 스탕달, 새커리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진리탐구에 지칠 줄 몰랐고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그러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의무감 때문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 교육 비폭력 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런 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했고, 이의 궁극적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의 주장인 경제 결정론이나 폭력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19세기 도덕사상가였다. 


    전쟁과 평화

  현대의 (오디세이아)라고 불리워지는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피에르와 안드레이, 그리고 로스토프 가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의 국민생활의 일대 파노라마가 선명하게 재현되고 있다.

  559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전형적인 귀족인 안드레이 공작은 전장에서 부상한 이래 삶의 공허감 속에서 죽는다. 이에 반해 피에르는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은 사는 데 있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진 발랄한 나타샤와 함께 새생활을 떠난다. 이는 당시의 톨스토이 자신이 체험한 신혼 당시의 밝은 낙천주의의 반영이다.

  안드레이 공작은 작가가 부여한 삶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마이너스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멸망한 데 반해, 피에르는 긍정적인 해답을 내려 행복한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을 묘사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의외로 밝은 청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활

  이 작품은 코니라는 법률가 친구로부터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년의 작품이다. 여죄수 마슬로바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플류도프 공작은 피고가 자신이 청년시절에 추행했던 카추샤란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고, 잘못된 재판으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그녀를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장래를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는 사랑하면서도 그와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네플류도프는 여관에서 성서를 펴놓고 복음서 속에서 갱생의 길을 찾아낸다. 원숙하고 예리한 심리묘사,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을 파헤친 이 작품을 두고 비평가들은 종교적 속죄와 영혼의 완성을 설교하는 예술적 성서라고 평가하기도한다.


c. 당대의 도덕과 애정을 형사화한 작품

  이 작품을 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 완벽한 것이며 현대 유럽문화 가운데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작품 이라 평했고, 로맹 롤랑은 악에게 파멸당하고 신의 섭리 속에 분쇄되는 이 영혼의 비극, 대단히 심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평했다.

  세계문학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인 안나는 젊고 아름다우며 근본적으로 선량하지만 파멸의 운명을 지닌 여성이다. 어린 나이에 숙모의 선의의 중매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와 결혼한 안나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도 가장 활기찬 교제로 만족한 나날을 보낸다.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20세나 연상인 남편을 존경하며 타고난 낙관적인 기질로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모스크바 여행에서 만난 브론스키에서 안나는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은 그녀의 주변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역으로 나온 카레닌의 귀가 불품 없고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편을 비판적으로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귀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남편은 자기 생활과 관계하는 온갖 사물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에 대한 브론스키의 정열은 강렬하고 하얀 광선이며, 그 빛에 조명되었던 예전의 세계는 이제 사멸된 혹성의 풍경처럼 보인다.

  안나는 남자답고 핸섬한 브론스키에서 점점 더 강렬한 애정을 느끼게 되어 이성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안나는 공작부인 베트시처럼 자신의 정사를 비밀에 부칠 수 없었다. 성실하고 정열적인 안나의 성격이 속임수나 비밀에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안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에게 내주는 일에 동의하면서까지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다음엔 중앙 아시아의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 이 공공연한 정사는 사교계 사람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부도덕으로 보인다. 결국 안나와 브론스키는 도시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정사 그 자체보다도 사교계의 관습에 대한 안나의 공공연한 도전이 위선에 찬 사교계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안나가 사교계의 노여움을 사서 냉대받고 모욕당하고 버림을 받는 데 반해 브론스키는 남자이기에 비난받는 일 없이 옛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귀족회의 등으로 외출을 자주하여 안나의 허전함은 더해진다. 정식부인이 아닌 그녀는 브론스키가 어느 집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에 걸려 끊임없이 질투의 불꽃을 태운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녀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독점적인 애정이 차차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 사소한 일로도 말다툼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광적인 포옹과 애무로 해결되지만 이튿날에는 역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한다. 질투와 정신적 불안에 몰려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었다고 단정해버린 안나는 절망한 나머지 달리는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안나를 잃음으로써 또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브론스키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어 때 마침 발발한 세르비아 전쟁에 의용군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떠난다.

  이것과 병행해서 언뜻 보기에는 연관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된다. 귀족지주인 레빈과 공작의 딸 키티와의 구애와 결혼 이야기다. 영지에 틀어박혀 농지관리에 전념하고 있던 레빈은 상경하여 키티에게 청혼하나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키티는 매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잃은 키티는 정신적 타격을 입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둘은 결혼하여 레빈의 영지에 정주하고 농업경영에 온 정열을 기울여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키티와의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레빈은 가끔 심각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떤 철학서적도 인생의 의의 같은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레빈은 주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눈을 돌려 소박한 농민들이 그런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동한다.


d.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문체와 서술기법에서 있어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다소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나,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비관적이며 주인공들은 내부갈등으로 인해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두 사랑 방식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전하려는 도덕적 메시지는 무엇인가는 이 소설을 다시 정독한 후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와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를 비교해본다면 명확해질 것이다. 레빈의 결혼은 형이상학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희생이 기초가 된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육체적 사랑이 그 기초가 되었으며 거기에는 파국이 깃들어 있다.

  언뜻 보기에 안나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 해서 사회로부터 벌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같은 도덕은 물론 비도덕적이며 비예술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사회의 상류부인이라면 누구나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정사를 즐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하고 불행한 안나는 이 거짓의 베일을 쓰지 않았다. 사회의 규율은 일시적인 것으로, 톨스토이의 관심은 영원한 도덕적 요청에 있었다.

  여기에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참된 교훈이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오로지 육체적 사랑만은 존재할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그러기에 창조보다는 오히려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놀라운 형상의 흐름 속에서 두 가지 사랑을 묘사하고 생생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브론스키와 안나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과 키티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 그것이다. 물론 후자의 사랑도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그것은 책임과 온화함과 진실과 가족의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에 의한 인간의 심판

  한편 성서에서 인용된 복수는 내게 맡겨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한마디로 안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라는 믿음이다. 언제나 도덕률은 불변이며 이것을 어긴 자는 반드시 멸망으로 끌려가는데, 신의 법도를 범한 자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신뿐이라는 사상,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자비의 법칙만이 있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안나를 통해 부패한 상류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한편 그녀의 자아발견 과정에 동정하면서도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의 흠집도 없이 전체의 구도나 세부의 디테일에 한 점의 티도 없는 작품 이라 평한 바 있다.



E16 –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nos de Soled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 2014)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로 불려지는 마르케스가 <마콘도>라는 가공적인 땅을 무대로,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부엔디아 집안의 비극적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외세의 식민지배로 혼미한 라틴 아메리카 민주의 역사를 신비스러운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구조 속에서 고질적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인들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


a. 독재정권, 미국과 맞서 싸운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났다. 엄청난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내습하는 이 마을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비롯한 그의 대부분 소설의 무대인 <마톤도>라는 가상 마을의 모델이 된다. 그는 8세까지 외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들려준 외가 마을 과 아라카타카 마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 얽힌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그의 소설의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괴이한 용모와 억센 고집으로 부모의 속을 무척 썩였다. 그러므로 가족들 중에 누구 하나 그에게 애정을 품거나 귀여워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또한 집에 정을 붙일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부터 그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군인이 되어 전선에 나가 싸우기도 했다. 이러한 파란 많은 삶의 편력은 타고난 문학적 재질이 풍부한 그에게 무진장한 소재로 작용했다. 그는 보고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기자가 되어 유럽에 잠시 체류했다가 그후 멕시코로 건너가 창작활동을 했고,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쿠바로 건너가서 국영 통신사의 뉴욕 특파원이 되는 등 인생편력을 계속했다.

  그가 문단에 뛰어들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47년(20세) <세번째의 만남>을 쓰면서부터였다. 곧이어 1954년(27세) 친구의 권유로 콜롬비아 전국 단편소설 대회에 <토요일 하루 뒤>라는 작품으로 국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55년 <낙엽>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콜롬비아 문단이 30년 만에 수확한 일대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낙엽>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콜롬비아 문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파리에 머물면서 창작에 전념하고 이듬해 콜롬비아로 귀국했다.

  1958년은 그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있는 해였다. 하나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와의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쿠바 혁명이었다. 이해 말에 일어난 쿠바 혁명에 고무받은 그는 좌파이념을 확고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인다. 한때 좌익이었던 수많은 문인들이 70년대 이후 우익으로 전향한 것과는 달리 그는 좌파이념과 카스트로정권에 대한 지지를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1961년(34세)에는 자신이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단편 <대령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를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는다. 다음해에 그는 파리 체류 때 써놓았던 <불행한 시간>을 발표하여 콜롬비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에소 문학상>을 받았다.

  그후 오랜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가진 그는 5년간 침묵 끝에 1967년(40세)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아르헨티나에서 출판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이 작품으로 1982년(55세)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부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거주한 그는 75년에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소설 <족장의 가을>을 발표하고는 멕시코로 거쳐를 옮긴다. 그는 76년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한 더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칠레 쿠데타의 빌미를 준 다국적 기업문제를 다루는 러셀 위원회,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투옥된 사람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아베아스 재단 창설 등에 참여하고, 중남미 각국의 정치범과 실종자들을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한다.

  1981년 4월 그는 <<상황이 바뀌어서 이제는 소설을 출판하는 것이 칠레 민중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요지의 해명과 함께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간하다. 노벨상 수상 이후 문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필력을 자랑했지만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선보인 내용과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1983년 이후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집필에 몰두하다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지난 92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폐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94년 초 <사랑과 또 다른 악마>를 내는 등 지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 2014년 사망함.


b. 마르케스의 작품세계

   마르케스의 작가적 삶에서 두드러진 점은 그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의 독재 정권들과 그를 지원하는 미국에 맞서 때로는 글로, 때로는 행동으로 싸웠다.


    소설의 정치화

  그는 항상 소설작품은 모름지기 정치적 이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설의 정치화를 강조했다. 그런데 작품의 정치화에 대한 그의 소견은 후에 많은 작가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작품의 정치화는 곧 카스트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의는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지역에서는 가장 시대적 감각에 예민한 작가들이 지성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올바르게 의식하자는 데 있었다.

  당시는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권총이 난사되고 밤에는 무서워 외출도 삼가야 하는 상황에서 잘못된 정치를 미화하는 정치관련 작품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과격한 국민성 때문에 무정부 상태의 콜롬비아 상황은 마르케스로 하여금 질서의 회복을 갈구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시도가 안타까울 정도로 부단하게 반복되고 있다.


    역사서술의 문제점 형상화

  그의 작품세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극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흔히 정복자들에 의해 기술된다고 한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술한다는 의미다. 이런 과정에서 피정복자들의 입장은 당연히 왜곡하고 은페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역사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 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침략이나 다를 바 없다.(침략과 연이은 학살이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작품이 이 작품이다.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려 3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다. 정부관리들은 역광장에서 기관총으로 무참하게 살해된 노동자들의 시체를 한밤중에 화물차에 실어다가 멀리 바닷물 속에 수장해버린다. 그러나 정부와 다국적 기업의 계략으로 이 엄청난 사건은 그 진상이 철저하게 은폐되고 호도된다. 파업을 직접 주도했던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사건 직후 마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그는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아예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고 있거나 설령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한낱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이 조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역사가 미셀 푸코를 비롯하여 미국의 역사가인 헤이든 화이트, 영국의 역사가 조너선 클락 등이 주장하는 포스트 모던 역사이론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사기술이란 소설과 같은 허구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c. 고독과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기문의 비극

   마콘도 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고독을 숙명으로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한 이 작품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누구든지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개는 기상천외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환상적인 것 같지만 실은 환상속에서의 사실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슬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생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집안 대대로 살던 고향을 버리고 사람들을 피해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 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살아간다.

  이들 사이에는 큰아들 호세 아르카디오가 있었는데, 그는 몸집이 크고 여색을 좋아한 인물이다. 그들이 마콘도에 도착하여 편안한 생활을 할 무렵 차남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태어난다. 그의 예리한 눈은 형과 반대로 날카로웠고 성격 또한 내성적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인 이 마을은 물질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고 변화한 도시로 발전했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런 환상적인 무대에서 고독을 운명처럼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의 역사는 시작된다. 아버지 부엔디아 이래로 이 집안의 6대의 역사가 그려지는데, 그 속에서 줄거리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좀처럼 구별할 수 없고 그 변화의 폭도 매우 넓기 때문이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만큼 마르케스는 환상과 현실을 격리시키고 있는 벽을 제거하는데 무척 고심했다. 마르케스는 조부모가 들려주는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환상이 독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인 경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옛날 할머니의 이야기 덕분인 것이다. 즉, 그는 환상적인 작품에 역사적인 현실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특유의 제 3현실을 창조햇다. 예를 들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나나 농장의 참사극은 실게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그는 3천명으로 과장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과장에 대해서 마르케스는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루어진 제3의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킨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신비하고도 마술적인 세계라 할수 있다.

  작가가 한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 사실과 환상을 융합하는 기법의 활용에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어린 시절 그의 조부모가 집안과 마을의 내력을 들려줄 때 사용했던 옛날 이야기 방식이었다.

  이처럼 합리주의 시각을 가진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합리하고 비이상적인 옛날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고급형식으로 격상 시킨 데에 그의 공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 여타 중남미의 작가들도 더욱 가세하여 서양에서 도입한 소설 장르에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유산을 가미하여 본고장으로 역수출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제 중남미적 소설은 한계상황에 직면한 서구소설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서구소설의 한계상황이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시작된 근대소설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 위기를 맞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소수의 전문 독자만이 읽고 즐길 수 있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소설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대중성은 있으나 문학성은 떨어지는 대중소설이 양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소설의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마술적 사실주의 라고 규정되고 있는 마르케스의 소설세계에 희망을 건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간단히 말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서술방식이다. 여기서는 실제 사건과 공상, 역사와 설화, 객관과 주관이 혼합된다. 소설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에게 친숙한 설화적 서술방식을 가미함으로써 대중성의 확보에도 성공한 그의 소설은

하나의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아무튼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아주 실감 있게 인식하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마르케스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그 분야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세계화시켰다면, 작가의 의식세계와 라틴 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사실성을 총정리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로써 그 대륙을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E15 – 양철북 (Die Blechtrommdl, The Tin Drum) / 그라스(Gunter Grass, 1927~201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난쟁이라는 <탈사회적 존재>의 눈을 통해 악의 세계를 밑바닥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나치의 토대가 된 소시민 계층의 부패한 모습과 정치적 무의식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 과거의 죄악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전후 서독사회의 몰역사적 기회주의적 태도에 저항한다.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과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서독사회를 형상화한 전후의 위대한 역사소설의 하나다.


a. 문학활동과 정치참여 병행

 20세기 후반기 독일 최대의 작가로 평가되는 귄터 그라스는 1927년 그의 문학적 원천인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치히 교외에서 작은 식료품 가계를 경영했다. 그래서 그라스는 어린 시절부터 소시민의 비참한 환경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라스의 사상과 작품에 있어서 <소시민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이러한 체험에 기인한다. <양철북>의 주인공 소년 오스칼은 양철북을 힘껏 두드리면서 거친 반항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도 소시민적인 절망성이 엿보인다.

 10세에 나치 소년단에 가입하게 되고 2차대전 중인 17세의 어린나이에 전차병으로 일선에 끌려갔다가 가벼운 부상을 당해 미군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18세에 겨우 풀려나왔다. 나치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저항적 도를 교육을 받은 젊은이에게 패전은 곧 새로운 각성의 시작이었다. 그라스가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저항적 태도를 취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쓰라린 체험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뒷날 <<그때부터 나는 겨우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한적이 있는데, 그는 이때부터 나치의 추악상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전후 독일인들이 경제발전에 매진함으로써 과거의 죄를 잊으려는 경향에 대해 강한 저항을 느꼈다. 그는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는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깊이 통찰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양철북>의 제3부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후 그라스는 농부로서, 광산의 광부로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갔다. 1946년(19세) 조각공부를 위해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석판화와 동판화를 공부했다. 그라스는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재즈 그룹 멤버로도 활약했다. 1956년(29세)에는 독일을 떠나 부인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그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1959년(32세) <양철북>이 발표되면서부터다. 그라스는 이 작품 하나로 전후 독일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1960년(3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1961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빌리 프란트를 도와 선거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때부터 10년간에 걸쳐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작가로서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정치활동을 확실하게 구분했다. 작가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선언이나 저항을 해서는 표현해서는 안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신적 우월감을 버리고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정치에서 다소 물러선 후 다시 집필을 시작하여 <넙치>(1977)를 발표함으로써 그의 문학적 역량을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고 비현실적이지만, 다루는 주제와 비판정신은 매우 냉혹하고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b.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역사 형상화

 이 작품은 전후 서독 문학의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나치 독일, 전쟁, 패전 등으로 단절되었던 위대한 독일 장편소설의 전통이 이 작품으로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오스칼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역사를 형상화한 <허구적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간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3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나치의 등장과정을, 제2부는 제2차대전과 나치의 몰락을, 제3부는 전후사회를 다룬다. 이중 제2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내용을 요약해 본다.

  30세의 오스칼 마첼라트는 서독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회상록을 쓰고 있다. 그는 1899년 외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할머니는 감자밭에서 4겹의 치마 밑에 어느 방화범을 숨겨주게 되는데, 그 방화범과 외할머니 사이에서 오스칼의 어머니가 태어난다.

  오스칼은 1924년 단치히 교외의 랑푸르 라베스베크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 마첼라트를 법률상의 아버지로만 인정할 뿐, 실제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이자 애인인 브론스키로 믿고 있다. 오스칼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성인의 지각을 갖추고 있다. 오스칼은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사나이가 요구하는 억지 장사꾼이 되지 않기 위해 세 살 때 성장을 멈춘다. 그는 소시민 사회의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소시민 사회 속에서 예정된 삶을 거부하려고 그는 영원한 세 살배기로 살아남기로 하고 결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지하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성장을 멈추게 한다.

 그의 키는 94cm에서 성장이 멈춘다. 나치가 붕괴하는 1945년까지 그는 성장하지 않은 채, 세 살배기의 시점에서 세상을 관찰한다. 세 살이 된 생일날, 그는 양철북 하나를 선물받는다. 그는 항상 이북을 치고 다니며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뜨릴 수 있는 특이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북을 빼앗으려는 자에 대해서는 목소리로 저항한다.

 어머니는 1937년 브로스키와 불륜관계가 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생선을 먹은 뒤 결국 황달로 죽는다. 어머니가 죽은 후 오스칼의 아버지 마첼라트는 자신의 가계에서 일할 마리아를 고용한다. 오스칼은 마리아를 애인으로 삼고자 한다. 아버지는 오스칼의 애인인 마리아와 재혼한다. 오스칼은 훗날 이 계모와 결혼하려고 하나 그녀가 응하지 않는다.

  오스칼은 음악광대 베브라와 함께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로 간다. 그곳에서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난쟁이들로 구성된 나치 위문단의 일원으로 전선 위문공연에 참여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치 당원이던 아버지 마첼라트가 나치의 휘장을 목에 삼킨 채 러시아 병사에 의해 살해된다. 그의 장례식에서 오스칼은 마첼라트의 무덤 속에 자신의 북과 북채를 묻어버리고 다시 성장하기로 결심한다. 즉, 독일의 패배와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계모와 함께 단치히를 떠나 화물열차를 타고 서독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으로 소설의 2부가 끝난다. 여기까지가 영화화되어 있다.

 서독에 온 오스칼은 뒤셀도르프 근교에서 화폐개혁과 암거래 시장을 경험한다. 오스칼은 직업을 찾는다. 처음에는 묘비석을 깎는 석공장에서 석수로, 나중에는 미술대학에서 모델로 일한다.

  그의 성장은 다시 121cm에서 중단된다. 그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고, 등에 혹이 난 난쟁이가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소리로 유리를 깨는 능력도 사라진다. 그후 그는 다시 북을 잡는다. 그는 북 연주자로서 그 분야의 스타가 된다. 그후 그는 애매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혐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정신이상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수상록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954년 30세의 생일날, 그는 2년간의 집필을 끝내는데, 이것으로 소설도 끝난다.

  유유히 흐르는 바이크셀 강 연안의 민요적 목가적인 세계를 비롯하여 나치의 대두, 독일의 몰락, 전후의 혼란 등이 양철북을 두르리면 의식의 세계에 힘차게 되살아난다. 소시민의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악의 집단에 의한 소시민의 몰락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난쟁이 오스칼의 인생회고는 독자들을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속으로 몰고갈 것이다.


c. 인간의 의식을 일깨운 난쟁이의 양철북

  20세기 독일의 역사, 특히 나치와 제3공화국을 상징적으로 다룬 역사소설인 <양철북>에 대해 그동안 수많은 연구결과가 나왔지만, 이 작품은 나치의 <비극적인 역사>와의 대결을 전제로 할 때만 궁극적 메시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로 대표되는 기존체제에 대한 부정과 반항으로 스스로 성장을 멈춘 오스칼은 키가 작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상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게 된다. 즉, 사물의 밑을 관찰하는 <앙각의 퍼스펙팁>를 갖는다. 오스칼의 이러한 시각은 사물을 아래로부터 폭로하고 변형시키며 전통적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기능을 갖고 있다. 오스칼은 이러한 독특한 시각을 이용하여 소시민 사회의 부패한 모습을 폭로하는 데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오스칼은 <아래에서> 소시민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것과 마찬가지로 연단의 <뒤에서> 나치즘의 서구성과 기만성을 꿰뚫어본다. 그라스는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연단을 뒤에서 본 일이 있는가? 일찍이 연단을 뒤에서 본 사람은 연단 위에서 거행되는 어떠한 마술에 의해서도 동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연단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 꾸며진 허상을 폭로한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주인공 오스칼은 그 개인이 아니라 보편이 집약된 존재이다. 그라스 자신의 체험과 의식은 물론 하나의 계층, 한 시대 전체의 체험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 모델이라는 점이다. 즉,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위에 역사적 사실들을 일치시켜 역사과정을 시간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스칼의 출생은 나치 세력의 강화를, 오스칼의 어머니의 죽음은 자유도시 단치히의

몰락을 유태인 마르쿠스의 죽음은 유태인 박해를 그리고 독일인 마첼라트의 죽음은 나치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d. 소시민의 정치적 무관심 질타

소시민 사회 속에서 예정된 소시민적 삶을 거부하고 영원한 세살배기로 남기로 결심한 오스칼을 <소시민 계층의 메가폰>으로 볼 때, 우리는 작품 전체를 통일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독일 소시민 계층은 악화일로에 있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절망하여 나치즘을 받아들인다. 오스칼이 소시민 사회의 예정된 행로를 거부하고 북에만 매달린다는 사실은 몰락하는 소시민계층이 협소한 소시민적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으로 상징되는 공격적인 나치즘에 매달린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오스칼이 지닌 <유리 파괴의 목소리>도 이런 맥락에서 올바로 조명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강요된 이유에서만 비명을 질러 유리를 깨던 그가 1932년 단치히의 스토크 탑에 올라가 <아무런 이유도 강요도 없이> 시립극장의 유리를 깨는 것은 나치의 집권이 임박했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목소리는 <기적의 병기>로 둔갑되어 전쟁무기로 이용된다. 이제 소시민 사회의 공격적 분위기는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설의 1, 2부에 나타나는 오스칼의 <북>과 <유리파괴의 목소리>는 그의 시대사적 기능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스칼은 공격적인 시대의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축소판으로서 나치 독일이 전쟁이라는 대영역에서 행한 것을 소시민적 환경의 소영역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 중단되었던 오스칼은 나치 몰락 후에 다시 성장하나 정상적인 키에는 이르지 못하고, 전후 독일사회에서는 등에 혹이 달린 불구자가 된다. 이러한 오스탈의 신체변화는 또 하나의 다른 시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1927년 오스칼의 성장중단은 독일 소시민 계층이 나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함을 의미하며, 나치가 멸망한 1945년 후 오스칼은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데 이는 나치 치하에서 어떠한 정치적 책임감이나 역사의식도 지니지 못하던 소시민 계층이 그 <세 살배기 수준>을 벗어나 이제 비로소 정상성을 향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 전쟁의 책임의식 일깨워

  침략과 야만의 시대가 지난 후 오스칼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삶에는 평온이 찾아온다. 그러나 전후에도 오스칼의 키는 121cm에 멈추고 거기다가 등에 혹까지 붙은 불구자가 된다. 이는 전후 서독사회가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고 함으로써 과거청산에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오스칼의 신체적 불구는 역사의 상처로 계속 남게 된다. 이는 심각한 동요를 겪은 독일사회의 반영으로 사회적 병이 개인의 병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의 병은 과거를 기피하려는 전후 서독사회의 병인 것이다.

  나치의 붕괴와 함께 오스칼의 공격적 자질이었던 <북>과 <유리파괴의 목소리>는 사라진다. 그는 전후의 새로운 사회에서 <성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오스칼은 위에서 언급한 반역사적 사회풍조에 반항하여 다시 북을 두드리는데, 이번에는 오스칼의 공격적인 자질의 상징이었던 북이 새로운 역할, 즉 독일인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독일의 소시민들이 나치즘을 받아들이고, 전후 과거를 기피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때 오스칼만이 주변세계와 개개의 사건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오스칼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나치의 토대가 된 소시민 게층의 부패한 모습과 정치적 무의식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죄악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전후 독일사회의 몰역사적 기회주의적 태도에 저항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양철북>은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을 형상화한 <소시민 계층의 만가>이며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사회에 대한 <비탄의 노래>라 할 수 있다.



Directed byDominique Abel
Fiona Gordon
Produced byDominique Abel
Fiona Gordon
Christie Molia
Charles Gillibert
Written byDominique Abel
Fiona Gordon
StarringDominique Abel
Fiona Gordon
Emmanuelle Riva
Pierre Richard
CinematographyClaire Childéric
Jean-Christophe Leforestier
Edited bySandrine Deegen
Production
company
Courage mon amour
Moteur S'il Vous Plaît Production
CG Cinéma
Distributed byPotemkine Films (France)
Release date
  • 2 September 2016(Telluride)
  • 8 March 2017 (France)
  • 15 March 2017 (Belgium)
Running time
83 minutes
CountryFrance
Belgium
LanguageFrench
English


'퐁네프의 연인들'과 비교해 말해 본다면, 모두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그리고 세느 강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 이고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우선 퐁네프에서는 젊은이들의 갈등과 방황이 주로 된 비극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면, 여기 Lost in Paris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를 통하여 희극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본다.

(과연 누가 이 영화를 '퐁네프의 연인들'과 비교 할지는 모르겠다 ^^;;;)

어릴 때 헤어진 숙모에게서 온 편지 한통을 받고 자신이 나고 자란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회사도 그만두고(?) 파리를 찾은 Fiona.

자유의 여신상의 small version이 서 있는 세느강둑에 살고 있던 노숙자 Dom

그토록 자신이 살아 보고 싶어 했던 Paris에 와서 30년(?)을 살았지만 이제 노령으로 인해 양로원으로 보내지게 될 처지에 빠진 Martha.

이 세 노인이 벌이는 작은 해프닝으로 영화는 채워지게 되는데, 나름 유치하기 보다는 노령, 고독, 사랑 그리고 노령과 함께 찾아 오는 빈곤등에 대해 작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결국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도 생각케 하는 나름 괜찮은 영화였다.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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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4 –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며 그가 다니던 신학교를 뛰쳐나온 천부적 시인 헤르만 헤세는 정신적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와 글을 썼다. 이 작품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수채화처럼 펼친 자전적 소설로, 소년 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그의 고향 슈바벤을 배경으로 절실하게 묘사했으며,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희생되는 학생들의 창조적 개성을 폭로했다.


a. 동양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

 <데미안>의 작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는 동양인의 심성에 더 어울리는 작가다. 그의 부친은 선교사였고, 모친은 동양학자의 딸로서 인도에서 출생한 경건한 여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동서양의 정신을 꾸준히 탐색하여 훗날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노자 공자역선 등을 섭취하여 소위 <세계신앙>이라는 자신의 <도>에 도달했다.

 라틴 어 학교를 마친 헤세는 14세에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관비생으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인 시인의 기질로 판에 박힌 듯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했다가, 결국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시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느껴 신학교를 도망쳐나오긴 했으나 시인이 되는 길은 요원했으며 혼미와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등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몇년간 신음했다. 그는 한동안 기계공이나 서점의 점원 노릇을 하며 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런 중에도 서점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괴테나 실러의 문학작품을 탐독할 수 있었던 것은 퍽 다행이었다. 가장 파란이 많았던 이 시절의 자전적 기록이 <수레바퀴 아래서>다.

 1904년(27세)에 애절하고 체념에 찬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써서 문단의 호평을 받자 본격적인 작가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해에 그는 9년 연상인 피아니스트 마리아와 결혼했고, 1906년 발표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즈음 그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고, 1911년(34세)에는 인도를 여행하여 동양에 관한 관심이 깊어졌다. 1차대전 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항상 자기를 <고독자>로 자칭한 헤세는 1919년(42세)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남단 아름다운 호수 몬타뇨라에 정착하여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은 채 혼자 사색과 창작에 몰두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심리학자 융이나 그의 제자들과도 교유했는데 이 영향이 <데미안>에 나타난다.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아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으로, 당시 곤경에 빠진 독일국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여 1919년에 마리아와 이혼하고 1931년(54세)에 재혼했다.

 1차대전중에는 순수한 휴머니즘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반전논문을 발표하여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후기 문학활동은 인간본성의 이중성 탐구에 집중되었다. 1930년(53세)에 발표된 <지와 사랑>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 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1946년(69세)에 20세기 문명 비판서인 미래소설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동년에 <한 비극적인 시대에 인간성의 깃발을 높이 내세운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62년 85세를 일기로 뇌출혈로 운명했다.


b. 내면의 길 추구한 작품세계

 이제는 역사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애국과 정의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살육이 저질러지는 모습을 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을 깊은 고뇌에 사로잡혔다. 헤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유럽의 불행을 지나친 물질주의 추구로 인한 인간의 자기상실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역설했다. 전쟁이 끝나자 헤세는 이 세계와 인간 모두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반성해야 하며,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을 비롯하여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등은 인간의 구도적인 모습을 담았고, <유리알 유희> 등은 일종의 문명비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대 독일의 양심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작품에는 줄곧 인간존재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2원성의 대결, 서유럽 문화의 몰락과 동양적인 신비에의 동경, 영혼의 자유와 인간성의 고귀함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통일과 조화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연에 사랑과 지극히 서정적이며 전원적인 시풍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여 <내면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구도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삶의 내실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도정이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헤세는 내면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뜨겁게 침잠하며 지혜의 핵심을 예감한 사람이었고, 자기 영혼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후기에는 동양사상에 심취했는데, 이는 가정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으나 인간의 삶을 자신의 내면의 성찰로 본 그의 인생의 목표 때문이리라.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불안하고 혼란한 청춘기의 고뇌와 방황을 그린 작가 자신의 젊은 날의 초상화다. <<자신은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온 삶을 살고자 한 것뿐인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렸웠던 것일까>>라는 주인공의 절규는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독일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영혼을 상실한 구시대가 무너지면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이 소설의 테마는 작가 자신과 유럽 문명이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기록이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 전몰학도의 배낭 속에서 흔히 발견되었던 책이 이 소설이었다고 한다.


   <싯다르타>

 <데미안>에서 이런 진통을 겪은 헤세가 찾은 세계가 바로 자아의 발견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근본문제를 다룬 것이 이 작품이다. 가정적으로 인도와 인연이 있었던 작가는 동양사상과 불교사상에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석가모니라는 한 인간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고난에 찬 역정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유리알 유희>

 <유리알 유희>란 모든 문화의 내용으로서 행해지는 유희이다. 일종의 정신문화사적 미래소설로 20세기 전쟁의 와중에서 정신적 권위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교양인들에 의해 종교적인 이상향이 건설되고 여기서 인류문화가 총집대성되어 영재교육을 실시한다. 얼핏 이 작품은 시공을 초월한 가공의 이야기 같지만, 20세기 문화에 대한 비판과 헤세가 도달한 최고의 지성이 담겨 있다.


c.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

 이 작품은 학교와 사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다 결국에는 서서히 죽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학교제도의 불합리성을 질타하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에서 나타난 당시의 경직화된 학교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에 하나의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경, 남부독일의 작은 동네 중개업자인 요제프에게는 재능있는 아들 한스가 있다. 이런 시골에 재능있는 아들이 태어나면 으레 그 장래는 정해져 있다. 매년 시행되는 주의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든가, 아니면 국비로 교사가 되는 길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년다운 놀이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오로지 공부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 한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숨돌릴 틈도 없이 공부에만 쫓기고 있었다. 이 머리 좋은 소년을 엘리트 코스로 보내는 것이 그의 부모는 물론, 목사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관문인 주 시험에 그는 2등으로 합격한다. 드디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로 여름방학 첫날 그는 낚시대를 메고 강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낮잠도 잘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스는 소년시절로 돌아가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이틀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따기 위해 방학 동안에도 밤늦게까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하여야만 했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신학교 생활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시인 기질이 있는 주인공 한스는 권위를 싫어하는 천재적인 소년 헤르만 하이르너와 친밀한 우정을 나눈다. 하이르너는 비정스러운 교육의 수레바퀴에 힘껏 반항했지만 한스는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하이르너를 배반하고 만다. 얼마 뒤 하이르너는 신학교의 속박에 대한 반항심에서 탈출해버리고 만다.

 친구의 탈출을 본 한스의 영혼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된다. 주의력은 흩어져 산만해지고 신경쇠약의 증세를 일으켜 거의 폐인이 된다. <갸름한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멋적은 미소의 그늘 속에 메말라가는 한 영혼이 고뇌하고 무서움에 떨며 절망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신학교 선생님들조차 무관심하다. 결국 의사와 교장의 편지를 간직하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두뇌는 집에 갔어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빈둥빈둥 지낸다.

 과실주를 담그는 가을 날, 그는 처음으로 엠마라는 연상의 여인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고 몇 차례 짜릿한 키스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엠마는 갑자기 한스의 곁을 떠난다. 엠마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아닌 장난기 어린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한스는 부친의 권고에 따라 기계공이 되기 위해, 대장간 견습공이 된다. 지금까지의 괴로움도 희망도 버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채 일터에 나갔다. 그는 노동의 기쁨과 괴로움을 그제서야 터득했다.

 어느 일요일 날 한스는 학교동창이며 이제는 어였한 기계공이 된 아우구스트와 함께 들놀이를 갔다. 한스는 처음으로 맛보는 맥주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그 놀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스는 죽음의 그림자에 이끌려 나골트 강에 몸을 던진다. 장례식 날 옆집 구둣방 주인은 선생들을 가리키며 <<저기 가는 놈들도 한스를 이런 지경으로 만드는 데 조력한 거야>>라고 말한다.


d. 비인간적인 교육제도에 경종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학창시절의 경험을 집요하게 되새기면서 편협한 학교제도야말로 재능 있는 젊은이를 좌절케 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위축시킴으로써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되며, 자아의 붕괴를 가져오는 그런 명령과 규범, 의무와 학습내용에 질식해버리고 만다.

 학생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나 교사들에 의해 강요된 교육이라면 결국 바퀴 밑에 깔린 것처럼 그들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테마인 이 소설은 출간 즉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가정과 학교에 팽배해온 현대의 교육관과 교육제도에 경종을 울려주었다. 대학입시만을 강요하고 학생들의 창조적 능력개발을 소홀히 하는 현대의 비인간적 교육행태 때문에 이 작품은 여전히 교육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 걸어갔던 삶의 과정의 반영이다. 그 과정이란 어린이의 순수함과 평화로움에서 성년의 방황과 절망에 이르는 길고 긴 도정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헤세만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인생 길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차츰 좌절을 경험하게 되며, 이 세계의 윤리와 가치에 회의를 지닌 채 미망의 길로 빠져든다.

 헤세의 경건하고도 매우 비판적인 정신은 소위 20세기의 잡문문화시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 우주와 자아가 합일되는 것을 느끼며, 밝고 어두운 세계 등 부조리한 인생의 수많은 대립을 모두 긍정하는 전일적 인생론을 설교한 헤세는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많은 구원의 책을 선사하여 큰 기쁨과 위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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